초심을 지킨 회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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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부
작품등록일 :
2019.09.0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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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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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준비

DUMMY

형동생이 되어도 비요른에게 갑자기 예의가 생기지는 않았다. 따박따박 반말하는 말투가 공손해지지도 않았고. 하긴, 그저 ‘복수도 도와주고 목숨도 구해준 형’일 뿐인데 뭘··· 공손할 만한 거 같은데?


“내가 화신을? 왜?”

“루비오코네가 복수하러 올 거야. 그런데 화신이 되면 다른 신이 들어올 수 없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나 지금 화신이야? 그래서 그놈이 못 들어오는··· 응? 뭐라고?”


갑자기 인상을 찌푸린 비요른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래? ···응. 아하. 그래서 지금은 괜찮은 거구나.”


혼잣말이 아니라 비요른 안의 잡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아직 잡신은 비요른 안에 있었다. 비요른의 영혼을 짓누르던 루비오코네와 달리, 잡신은 내가 시킨 대로 가만히 있기 때문에 비요른이 멀쩡한 것이었다.


“그놈한테 복수하려면··· 그래. 좋아.”


비요른은 지금 잡신에게 들었을 것이다.

신은 신만 죽일 수 있다. 그리고 화신은 신의 의지이며 대행자다.

화신은 신을 죽일 수 있다.


“너의 화신이 되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비요른의 머리에 푸른 불꽃이 확 일어났다. 비요른의 영혼이 잡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짧으면 몇 분, 길게는 며칠 동안 신열을··· 불꽃이 순식간에 꺼져 버리더니, 비요른의 머리에서 손톱보다 더 작아진 잡신이 빠져나왔다. 엥, 벌써?


“아이고, 이제 난 좀 쉬러 간다.”


그리고 훅 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어이가 없어서 비요른에게 물었다.


“벌써 끝났어?”

“응. 간단한데?”

“잡신이니까 빠를 줄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벌써 끝이라고?”

“다 비밀이래. 그래서 그런가.”

“비밀이라고? 쟤 이름이 뭔데?”

“그것도 비밀이래.”


엥? 화신한테 이름을 숨기는 신이 있어?


“진짜?”

“진짜.”

“너 화신 된 건 맞고?”


비요른은 대답 대신 왼손을 들어올렸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밋밋한 반지가 중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다. 신물이다. 신의 화신임을 증거하는 성스러운 아이템.

그럼 진짜로 자기 화신한테 아무것도 안 알려주는 신이 있단 말야?


“뭘 시키거나, 꼭 하라는 것도?”

“없어. 피곤하니까 나중에 다시 보재.”


신이 화신만 만들어 놓고 그냥 가 버렸다. 많은 생을 살다 살다 이런 신은 처음 본다. 어처구니가 없네.

장군보살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다른 신의 화신이 머무르는 것인데도 보살은 딱히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다. 금붙이의 위력은 역시 대단해.

비요른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 해주고 잠에 들었다.



*



다음날 아침, 비요른과 짐을 챙겨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어제와 다른 분위기로 분주했다. 꼬맹이가 달려와서 전단지를 불쑥 내밀었다. 꼬맹이는 포교쟁이가 아니었다.

전단지에는 속보가 실려 있었다.


[서부대륙 마물에게 침공 받다. 주요 도시의 피해는 전무.]


네크로스케가 습격한 마을은 대륙 서부의 촌구석이었고, 여기는 동남쪽 반도 끝에 위치한 도시였다. 이세계에 다시 떨어진 지 오늘로 일주일째, 이제야 서부대륙의 마물 침공 소식이 동부대륙까지도 전해졌던 것이다.

거리는 마물 침공 소식으로 떠들썩했지만, 걱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서부 사람들 불쌍해서 어떡해요.”

“걱정 말아요, 무사히 잘 막아냈답니다. 마물 따위는 인간이 쌓은 성벽을 넘지 못합니까요.”

“그래도 혹시 여기까지 오면 어쩌죠.”

“걱정 말아요, 레이디. 당신만은 제가 지킵니다.”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멀고 먼 서부 지역의 일로 치부할 뿐, 자신들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형 말대로네. 아무도 걱정을 안 해.”

“한참 먼 곳이니까. 누가 마물이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하겠어.”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평화의 시대였다. 500년 전에 대전쟁이 끝난 이후로, 제국은 한 번도 진정한 위협을 받지 않았다. 13년 전 대마녀가 수도를 침공했지만 수도 시민과 제국 행정부만의 문제였을 뿐, 대다수 일반 제국민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가끔 변방에서 사건이 터지긴 했지만 지역에서 자체 해결 가능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니 제국민들은 위험에 처한다는 실감 자체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여긴 신의 도시잖아.”


신이 자신의 성전을 위협하는 존재를 가만 두고 볼 리 없다. 성전이 무더기로 몰려있는 곳이 툴라다. 누구든 이 도시를 잘못 건드리면 떼로 몰려오는 화신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드래곤이라도 도마뱀찜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비요른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형 말대로 신의 도시잖아. 그런데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고?”

“그래.”

“그리고 기회라고?”

“물론이지.”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제대로 말해주면 안 돼?”

“안 돼.”


간밤에 비요른에게 말해준 계획은 다음과 같다.


곧 툴라에 큰 사건이 벌어진다. 사람이 많이 죽고 다치는 위험한 사건이다. 하지만 우리한텐 기회다. 그때까지 우리는 조용히 기다리면서 준비한다.


세부적인 얘기는 하나도 안 해 줬다. 왜냐하면 비요른이 알게 되면 나중에 잡신이 돌아와서 알게 될 수도 있거든.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신에게 들켜서 좋을 게 없었다.


“쳇, 그게 뭐야.”

“그냥 형만 믿고 따라와. 형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있냐?”

“거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시끄럼마.”


비요른과 티격태격하며 도시를 올라 중급 신전이 다수 모인 지역에 도착했다. 한 건물에 들어가서 주인을 찾았다.


“방 보러 왔습니다.”


아차, 너무 한국식인가? 하지만 찰떡같이 알아들은 가게 주인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신전 보러 오셨구만? 반갑소.”

“이 주변에 쓸만한 데가 있을까요.”

“글쎄요, 어디 봅시다···.”


가게 주인은 장부책을 손에 들고 벽에 걸린 큰 지도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렇다. 여긴 땅과 건물을 중개하는 곳, 공인중개사 사무소다.

신이 신도들에게 땅과 돈을 내려 주지는 않는다. 결국 신들의 도시에서도 신전 지을 땅을 빌리거나 사야 하는 것은 우리 세상과 똑같은 것이다.

적당히 크고 목 좋은 자리의 빈 신전을 한 달간 빌리기로 했다.


“대금은 이걸로 해도 될까요.”


어제 장군보살에게 주고 남은 금붙이의 반을 내밀었다. 한눈에 봐도 출처를 몰라볼 리 없는 물건이었다.


“아이구, 그럼요.”


공인중개사는 허허 웃으면서 금붙이를 챙겼다. 돈 앞에 신심이고 불경이고 없는 것이다.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나와 제본집으로 들어갔다.

다양한 경전이 진열되어 있었다. 적당한 것을 골라서 제본집 주인과 세부 내용을 정했다.


“여신이고, 까마귀가 사도예요. 핵심 교리는, 끝에 달한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나 오직 나만이 영원하리라.”

“이름이 뭐라구요?”

“필리아노덴. 샘플은 최소 10종 이상 섞어 주세요. 말투는 좀 위엄 있으면서도 박애가 물씬 묻어나게. 아시죠?”

“그럼요, 장사 하루이틀 합니까.”

“표지는 금박으로 깔아주세요. 딱 봐도 성스러워 보이도록.”

“그럼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남은 금붙이를 내밀자 주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볼일을 마치고 점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요른이 물었다.


“계획이라는 게 종교를 만드는 거야?”

“알 거 없다.”


인상이 구겨진 비요른은 ‘거 되게 비싸게 구네’ 어쩌구 저쩌구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팔꿈치로 팔을 툭 밀면서 장난을 걸었다.


“야, 잘 해라?”

“아, 뭘 잘해. 뭘 하는지 말이라도 해 주든가.”

“그때 돼 보면 알아.”

“이씨···.”


형동생 하고나서 없던 예의가 생기지는 않았어도, 비요른의 성격은 하루 사이에 크게 변했다. 무뚝뚝하고 사교성 없는 애늙은이는 어디 가고, 제 나이에 어울리는 소년이 된 것이다. 실은 나도 깜짝 놀랐다, 이런 모습의 비요른은 처음이었거든. 아마도 이게 비요른의 원래 모습이겠지, 복수에 미치기 전의 비요른 말이다.

투덜대는 모습을 웃으면서 들여다보고 있으니 비요른이 뚱하게 반응했다.


“왜 웃어?”

“그냥.”

“이상한 형이네.”

“지는?”

“내가 뭐, 어? 또 웃는다. 이씨, 왜 웃냐니까?”

“하하하···.”


이거 되게 기분 좋네. 하하하···.



*



툴라에 닥칠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내가 이 세계로 회귀하는 이유인 멸망과 직접 연관된 것이다. 이제 와서 사건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내가 회귀하기도 한참 전부터 13명의 신들이 계획한 일이니까. 수레바퀴를 멈추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그래서 난 실리적으로 가기로 했다. 막지 못한다면, 최대한 이용해 먹기로. 이번 기회에 파워업도 확실히 하고, 무엇보다 나중에 벌어질 거대한 무대의 내 자리를 미리 준비해 둘 것이다.


닷새가 지나 경전이 준비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로서 필요한 세 가지가 모두 준비 됐다. 신전, 경전, 화신.

그리고 이틀 뒤, 드디어 사건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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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국의 비밀 서고 19.10.11 80 6 13쪽
28 협박과 설득 19.10.10 94 6 11쪽
27 동방의 꽃 +1 19.10.09 90 5 12쪽
26 미로정원 +2 19.10.08 100 6 12쪽
25 마법사 길드 +1 19.10.07 94 5 14쪽
24 우리의 목적 19.10.02 102 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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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다른 현실 +1 19.09.27 90 5 12쪽
20 해변의 결전 +1 19.09.26 97 5 14쪽
19 경고 (2) +1 19.09.25 94 6 10쪽
18 경고 (1) +1 19.09.24 104 6 15쪽
17 진화령 (3) +1 19.09.23 121 7 14쪽
16 진화령 (2) +1 19.09.21 135 6 9쪽
15 진화령 (1) +1 19.09.20 156 6 10쪽
14 싱카리움 (2) +1 19.09.19 135 6 12쪽
13 싱카리움 (1) +1 19.09.18 144 5 14쪽
12 화신 각성 (2) +1 19.09.17 138 6 10쪽
11 화신 각성 (1) +1 19.09.16 148 6 12쪽
» 사전 준비 +1 19.09.12 159 6 9쪽
9 루비오코네의 운 나쁜 하루 +1 19.09.11 172 7 11쪽
8 신벌 +1 19.09.10 187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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