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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사
작품등록일 :
2019.09.0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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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3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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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3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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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어려운 자리

DUMMY

노트북에 차갑고 무기질적인 메시지가 나타났다.


-귀하의 협조와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해결사는 기지개를 켰다.

맞은편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듯, 조금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녀석의 보호자라 주장하는 노인은 장담했다. 자신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녀석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해결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애도 아니고 머리가 굵을 대로 굵은 녀석이 남의 말을, 별거 없어 보이는 노인의 말을 그렇게 따른다고?


하지만 노인의 말대로였다.

무슨 생각인지 녀석은 해결사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의 준비가 무색하게도, 맥빠지는 반응이었다.


“알았어. 음··· 노후자금이 필요했으니까.”


다음 세대 안에 사장될 개념을 이유로 들었을 때는 조금 황당한 기분도 들었지만.


“아르마 온라인···? 이라고 했나. 제대로 시작하려면 돈 좀 들겠지? 최적화 사양이라거나.”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 전용으로 지원해주니까.”


이 부분에 이르러선,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단순히 게임업계의 독과점 수준을 넘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쓰고 있는 히트작을 여태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한 반응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보다 저런 성격이었나? 벌써 10년이나 지나서 가물가물하지만, 좀 더 까불거렸던 것 같기도 한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기초상식 같은 건 회사에서 교육할 것이다. 성격교정도 필요하다면 회사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


어쨌든 녀석은 별이 되기로 했다.

한국 팀의 스타 프리스트가 되기로 한 것이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보면 녀석이 아무것도 몰랐기에 쉽게 제안을 받아준 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실패 횟수만 봐도, 그 난이도가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알 수 있다.


이번까지 치면 11번째의 도전.

해결사는 10명의 실패자 중 한 명이, 여론의 폭격 속에서 투덜거리던 걸 떠올렸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내가 욕을 듣고 있어야 하냐··· 좀 개 같은 기분인걸?


하지만···

뭐, 더 이상의 실패는 없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 녀석이 상처받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인간이 맞나 싶었던 그 견고한 멘탈이, 어른이 되면서 물러지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므로 아까부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이 마뜩잖은 피로감의 원천은 종류가 약간 다르다.


“얘기 끝났어.”


[어··· 어떻게 됐습니까?]


이어폰으로 조금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휴가라도 받아야겠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라 믿었어!]


“무기한 휴가를 말이야.”


[...네? 잠적하시겠단 말입니까? 아니, 실패할 수도 있죠······ 누군지 저한테만 귀띔해주세요. 제가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이 정도 성과면 무기한 포상휴가를 줘야 마땅하지.”


[아, 역시! 전 무조건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무기한은 빼주세요. 적당히 2주일만 쉽시다. 콜?]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로부터 말이지.”


[엥? 아니, 잠깐만··· 근데, 그 사람이 그렇게나 기대치가 높았던 겁니까?]


“이제 한국도 제대로 경쟁할만한 라이벌이 될 테니까.”


[작작해 이 인간아...]


“자세한 건 지금 메일로 보낸다. 진짜로 쉴 거야. 여기서 더 귀찮게 하면 진짜 재미없다.”


메일 전송을 확인한 해결사는 노트북을 끄고 이어폰을 가방에 넣었다.

두루뭉술했던 이야기는 회사에서 알아서 구체화할 것이다. 이제 당분간 자신이 필요할 일은 없었다.


노상 카페를 나서는 해결사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갑자기 속이 답답했다.

‘검성’을 발탁한 게 그였기 때문에, 누구도 해결사가 이렇게 나서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결사는 사람들의 관심이나 찬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다른 인간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이 자리에 나왔다.

굳이 말하자면, 모두를 속이는 행위다.


GS들도, 어제 만난 노인들도, ‘그 녀석’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GS들은 자신이 뭘 해도 그러려니 넘어갈 것이다.

어제 만난 노인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


녀석은······


...어쨌든 윈윈이리라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인기는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인기는 돈으로 이어진다.

이런 세상이라도 돈은 많을수록 좋은 법.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


내가 혹시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건 아닌가?


*


자동화 시대의 과도기를 넘어서는 지금, 인간의 노동력은 지구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 중 하나로 취급받고 있었다.


인간의 관리 감독이 없어도, 기계 문명은 인류가 필요한 모든 생필품을 만들고도 남을 생산력을 갖추고 있다. 설령 현생인류가 지금의 10배로 늘어나더라도 결핍은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인간노동자가 없어졌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기술발전이 사람의 인식보다 더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사회적 변화는 빠르게 찾아오는데 그에 적응할 만한 기간이 짧았다.


아무리 놀고먹는 게 좋다 한들,


그래도 사람은 일하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결코 낮지 않았다.


최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국가들이 그만한 비율의 집단을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신세대의 적응에 곤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인공적인 일자리 생태계가 조성되었다.

게임업계의 사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상승기류를 타고, 사회잠식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아르마 온라인’은 가상현실게임으로써, 지구 면적보다 더 큰 세계관을 갖추고 있다.


이전 시대였다면, 10만 명의 개발자가 달라붙어도 이런 규모의, 이런 디테일을 갖춘 세계의 구축은 힘들었을 것을. 지금은 약 200명 정도의 총괄관리자들이 대략적인 계획만 제시해도 세계관의 안정과 확장엔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르마 온라인’을 제공하는 언더월드 코퍼레이션의 직원 수는 1만 명을 넘는다.


이 많은 직원이 대체 뭘 하느냐?


그들의 업무와 그나마 유사한 개념은 연예기획사, 스포츠 매니지먼트, 그리고 국가대표팀 운영을 적당히 뒤섞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각국 지사에서, 국가를 대표할만한 플레이어들을 뽑아 관리하고 경쟁을 붙인다.

국가 대표의 기준은 지사의 재량에 달려있다.


한 때는 PVE 실력이, PVP 실력이 뛰어난 사람,

이 주목받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근래엔 세계적으로 빼어난 가창 실력을 갖춘 가수, 마성의 매력을 갖춘 영화배우들, 화면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심장을 부여잡을 재주를 갖춘 자들···


압도적인 스타성으로 중무장한 각계의 유명인들이 발탁되는 추세다.


그런 점에서 따지면···


“우리 지사는 욕을 무더기로 처먹어도 할 말이 없지.”


언더월드 코퍼레이션 한국지사 회의실.

지사장 김서훈은 원형 탁자에 모인 이들을 보며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요 반년 간의 스타 프리스트 발탁자들은, 유명인은커녕 대외적으로 게임 실력을 인정받지도 못한 이들이었다.

시대를 역행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젠 그냥 자국 스타 플레이어들이 마음에 안 드니까 대놓고 멕이는 거 아니냔 비아냥까지 나올 지경.


물론 한국지사도 할 말은 많았다.

맨 처음에 사제의 좌우명을 정한 똥싸개는 잠적한 지 오래.

좌우명 변경 신청은 그냥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언더월드 운영 이사회에서 과반을 획득해야 신청이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한국지사에서 신청서를 넣을 때마다, 10명으로 이뤄진 운영 이사회에선 유예 기간을 꽉 채운 다음에 5:5 부결을 내놓는다.


한 명만 더 설득하면 되지 않느냐고?

표결 때마다 찬반인원이 조금씩 바뀐다. 지금까지 표결은 6번 있었고 반대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지사로썬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디테일에 누가 관심을 가질까?

무능력한 한국지사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뭐라 말하든 구질구질한 변명 이상이 되지 못할 테니, 관계자들의 속만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1년 전쯤.


한국의 스타 프리스트 자리는 독이 든 성배로 여겨졌다.


정착할 수만 있다면 영광을 독차지할 수 있단 점에서.

높은 확률로 실패할 거란 점에서.


이젠 모두가 말한다.


그 자리는 그냥 독이 든 독배라고.


성공의 과실이 얼마나 달콤하던, 애초에 실패가 확정되어 있다면, 성공을 논할 의미가 없다.

스타리스트가 언제쯤 빌까 간을 보던 유명인들의 연락도 뚝 끊긴 지 오래.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푸념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 해결사가 유망주 데려왔다잖아요.”


“그래! 신준 씨는 믿을 만 하지!”


“검성도 발굴한 그 안목이라면···”


오래간만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아도, 지사장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유망주도 실패한다면?”


순간 사위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으나, 오랜 시간 이어지지는 않았다.


“...네? 그럴 리가요.”


“걱정하시는 바도 이해하지만··· 해결사는 이번 스타 프리스트가 자신의 선택임을 광고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검성 때처럼요.”


“신준 씨가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그랬겠어요?”


오직 낙관적인 반응들뿐이다.


그것이 너무나 한심해서, 지사장은 순간 평소의 마음가짐도 잊고 고함을 치고 싶었다.

사실 그가 지휘봉을 잡은지는 아직 2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직원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는데, 이젠 그 이유를 조금 제대로 알 것도 같았다.


이 분위기는, 지금까지 실패를 반복한 나머지 힘든 걸 생각하고 싶지 않은 바람의 발현들일 것이었다.


직시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다.

목 바로 아래까지 가스가 차오른 느낌?


여기서 한 번 더 실패를 거듭한다면 이 집단은 어떻게 될까?

이번 실패는 여느 때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해결사는, 평소에도 다 때려치우고 싶단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다. 그걸 농담, 내지는 캐릭터메이킹으로 보는 의견이 대다수지만, 지사장은 그와 개인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 염세적인 눈빛이란.


정말로 귀찮은 일이라며 다 때려치우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그래. 해결사의 보장마저 있다.

그런데도 이번 영입이 수포로 되돌아간다면, 이 실패는 해결사의 실각마저 노릴 수 있을 터였다.


따라서, 적들의 공세는 지금보다 더욱 격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번 일은 해결사의 은퇴 명분 쌓기일 수도 있다.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그의 손목이 잘게 떨렸다.


지사장 김서훈은 주위에 잠시 실례를 구한 뒤, 회의실 밖에서 손목시계로 전송된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가 본 것은 일종의 기밀작전 계획서였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선 자그마치 17개나 되는 항목에 동의할 필요가 있었다. 개중 두 개 항목을 본 지사장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결심을 굳혀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온 김서훈은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그나마 가장 차분한 얼굴을 한 이를 부르고 떠났다.


“이유진 씨, 회의 끝나고 인계받으러 와.”


“...아? 알겠습니다.”


호출당한 직원은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은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듯하다.


2개월이면 슬슬 바뀔 때가 되었지.


“하기야 지사장님도 이제 은퇴할 연배가 되긴 하셨지...”


“오··· 유진 씨 승진하는 거에요?”


“승진으로 지사장 딴 건 최초 맞죠?”


“정해진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리에요. 다들.”


그 말이 무색케도, 그녀는 지사장이 되었다.



(3)


“아하···”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새로이 한국지사를 맡게 된 이유진은 전 지사장의 행동을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전 지사장이 받았던 메시지를 본 그녀는 계약 내용의 유통기한을 보고 두 눈을 빛냈다.


[영원히 폐기되지 않음.]


이런 문구가 적혀있는 계약서는 처음 본다.


말인즉슨, 한 번 동의하면 죽을 때까지 발을 뺄 수 없다는 뜻이다.

영원히 비밀을 지켜야 하니 커리어로도 써먹을 수 없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 남자에겐 썩 매력적이지 않은 조건이리라.


하지만 전 지사장의 마음을 완전히 떠나게 한 항목은 이게 아닐 것이다.

이유진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나름대로 유추해봤다.


15. 개인 기억 수집 및 이용 동의

16. 개인 기억 편집권한 양도 동의


기본적으로 인간은 타인의 기억을 열람할 수도, 편집할 수도 없다. 자아분열의 위험성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인공지능으로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 어디에도 사적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걱정이 많은··· 아주 많은 일부 사람들은 달리 생각하기도 한다.


인공지능에 의해 추출된 기억을, 다른 사람이 보고 악의적으로 이용할지도 모른다...든지.

인공지능의 제어권을 강탈하는 마스터키가 있어서, 이 마스터키의 보유자들은 A.I.의 트리플박스 원칙을 무시할 수 있게 한다든지···


전 지사장 김서훈처럼 잔걱정이 많은 사람은 이런저런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유진은 잔걱정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김서훈과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다만 김서훈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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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몽둥이 휘두르는 사제 19.09.28 14 0 15쪽
24 수색 난항 19.09.27 14 0 15쪽
23 물밑에서 일어나는 일 19.09.26 14 0 13쪽
22 그림자 비약 19.09.25 14 0 12쪽
21 그림자 노인 19.09.24 20 0 13쪽
20 전담 마크 19.09.23 28 0 14쪽
19 어쩌다 보니 망함 19.09.21 22 0 14쪽
18 기계사제 전직 19.09.20 24 0 13쪽
17 전직 과정 19.09.19 24 0 13쪽
16 예비 19.09.18 20 0 19쪽
15 이 녀석이? 19.09.17 20 0 17쪽
14 톱니바퀴의 신 19.09.16 20 0 12쪽
13 달 토끼 사냥(?) 19.09.16 26 0 12쪽
12 가헤란 토끼밭 19.09.13 105 1 12쪽
11 그래. 남친은 없어. 19.09.12 27 1 13쪽
10 학대의 정의 19.09.11 26 1 12쪽
9 변화? 19.09.10 35 1 13쪽
8 취미는 그네타기 19.09.09 28 1 13쪽
7 튜토리얼 필드 19.09.07 27 2 13쪽
6 설득 19.09.06 35 2 12쪽
5 뭔가 이상한 회의 19.09.05 46 2 16쪽
4 아바타 제작 조건 19.09.04 46 3 12쪽
» 어려운 자리 19.09.03 63 3 13쪽
2 특별한 인간 19.09.02 115 3 12쪽
1 프롤로그 - 이런 세상 19.09.02 204 5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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