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 듣는 기계사제

웹소설 > 자유연재 > 게임, 현대판타지

지구사
작품등록일 :
2019.09.02 21:35
최근연재일 :
2019.09.30 21:18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034
추천수 :
25
글자수 :
154,972

작성
19.09.11 21:37
조회
26
추천
1
글자
12쪽

학대의 정의

DUMMY

좌우명이란 스타 플레이어의 정체성이다. 동시에 어떤 조건에서는 약점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대중 앞에 좌우명을 드러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드러내지 않는 게 보통이다.

요한의 경우는, 정말로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운이 나쁜 걸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다섯 번째인지, 여섯 번째인지 모를 요한이 떨어지고 나서 플레이어들은 한국팀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쌍둥이 남매의 기행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 둘이 유튜브에 온갖 종류의 동영상을 쏟아내는 와중에 한국 팀의 이미지는 급속도로 소모됐다.


그들의 행동양식은 이제 사사로운 위키에서마저 찾을 수 있었다. 그 열화와 같은 관심 속에서 묘하게도 한국 팀의 캐릭터 이름들은 잊혔다.


마법사, 노스트는 해결사로.

검사, 제너럴척은 검성으로.

전사, 판다당은 장갑전차로.

탐험가, 대가리숙여는 도돌이로.

도적, 대가리들어는 도순이로.


지금의 한국 팀은 캐릭터 이름들보단, 쌍둥이들이 이미지로 재구축한 호칭의 지명도가 더 높았다.


무엇을 숨기랴? 유튜브에서 그들 쌍둥이의 계정은 무시무시한 인기를 자랑했다. 과분하게도.


그 인기의 비결을 하나로 좁힐 순 없지만, 시청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장점은 명백하다.


기형적인 정직성.


“다른 건 몰라도 트롤링 할 때 만큼은 절대 거짓말하는 법이 없다지.”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전통과 일관을 경외하는 자칭 귀족들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일 초의 고민도 없이 그 평론가적 면모를 발휘했을 것이다. ‘이렇게 천박한 공간에서 숨을 쉴 수 있다니, 이래서 근본 없는 졸부는···’


북유럽식 다기에 담긴 용정차를 마시는 여인은, 시대의 떨거지들이 뭐라 앵앵거리든 무시해 줄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여인조차도 지금의 상황은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아직도 11대가 밖으로 안 나오는 건데!!”


일주일 전 쌍둥이는 유튜브에 짧은 영상 하나를 올렸다.

오늘도 한국 팀은 GS들에게 기만당한다··· 는 제목으로 올라온 영상엔 ‘막 게임을 시작한 11대 스타 프리스트가 그네를 타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요지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네? 무슨 그네? 설마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묻혀버린 쉼터의 그네? 전담 GS들이 옆에 착 달라붙어서 사냥 동선마저 관리 감독한다고 알려진 스타 플레이어가 지금 극소수의 관심 종자들이나 트로피로 눈독 들이는 낡은 그네를 타고 있다 이 말인가?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오히려 설득력을 갖추는 기묘한 이야기였다. 허구한 날 무능하다며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는 GS들이라곤 해도 어느 분야의 엘리트들이다. 설마 애도 안 믿을 소릴 거짓말이랍시고 하겠는가?


그것도 저 트롤 남매한테?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서호 용정을 들이켰음에도, 여인의 속은 편해지지 않았다.


여인은 GS들에게 능력을 보여줘서 자신의 말을 무시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수십 명이나 되는 용병을 국내의 모든 스타트필드에 보내서 감시하게끔 했다.


그런데 아직 튜토리얼 필드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어쩌면 정말로 기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로군요.”


빈 찻잔에 다시 찻물을 따르며 연미복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사정이 어찌 됐건 그자들은 나중에 쓰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인은 밉살스러운 소릴 하는 집사를 흘겨봤다.


“언제까지고 숨어 있을 순 없겠지. 그 못된 꾀나 부리는 녀석들··· 일주일 안에 작살내 줄 거야.”



*


2일 전.


“이런 데서 보고··· 세상 참 좁네. 지사장님.”


이신준 혹은 노스트··· 그보다는 해결사라는 호칭으로 더 유명한 남자가 말했다.


잠수가 하도 습관이 되어서, 자리에 없어도 그러려니 하게 되는 작자이기도 했다.

이유진은 이 타이밍이 정말로 우연이라고 생각할 만큼 머리가 꽃밭에 가 있진 않았다.


그녀는 막 진별우의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혼자 살기에는 넓은 집.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별우는 갑자기 제 보호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증언했다.


꺼림칙한 퀴즈를 잔뜩 받고 심란한 기분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결사가 아는 척을 해온다?


이유진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진별우 씨의 보호자들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뭔가 아는 거라도 있나요?”


해결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작자들이 보호자? 잘 모르겠는데.”


“그렇군요···. 혹시 저한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있긴 했는데···. 당신 며칠 만에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네.”


“...내가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죠? 당신이 절 얼마나 안다고.”


“...허 참.”


해결사는 굳은 표정으로 떠나갔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걸까?

고민해봐야 사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다.


*


누군가 이유진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유진 씨.”


“네?”


“혹시 유진 씨 의견은 어떤가 싶어서요.”


“맞아요. 지사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음······”


이유진은 여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입사 당시의 꿈을 떠올렸다.


내가 높으신 분이 되면 회의를 반으로 줄여야지.

하지만 그녀의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회사는 수평적인 조직이었고, 개개인의 발언권은 그리 차이가 없었다. 물론 지사장인 지금은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한데···.


“요한 님의 재량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요?”


“끙.”


“안 돼요! 무조건 숨겨야 한다니까요. 그 아바타가 사람들한테 얼마나 관심을 끌지···!”


“지사장님이 기껏 애써서 만드신 건데 숨기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영원히 숨기잔 것도 아니잖아요. 앞으로 딱 50 일만! 총괄관리자님이 좌우명 문제를 해결해주실 때까지만요! 그 50일 못 버텨서 11대 요한이 낙마하는 일이라도 생기는 꼴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못 봐요!”


“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얼굴을 꽁꽁 싸매면 오히려 더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시답잖은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회의의 가치를 절하할 생각은 없어도, 어떤 회의들은 정말 할 필요가 있나 싶을 때가 있다.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것과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것.


한국지사가 처음 들어섰을 때와 비교하면 이런 불필요한 회의의 비중이 확실히 늘었는데 여기엔 서글픈 뒷사정이 있다.


1년 전, 한국 팀의 챕터 진행 상황이 6에서 막힌 이후로 직원들이 할 일은 점차 사라졌다. 성장도 정체되고, 말도 듣지 않고, 또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의 대부분이 회사 쪽에 있다 보니 직원들의 자존감도 바닥에 떨어졌다.


그 와중에 쌍둥이가 트롤짓을 시작했고, 그들의 유튜브로 성공할수록, 그에 비해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는 직원들의 자존감은 맨틀을 뚫고 처박혔다.

그래서 일하는 기분이라도 내고 싶어서 회의가 늘어난 것이다.

필요치 않은 회의라도 일단 하고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왜 할 일이 잔뜩 늘어난 지금에 어째서 이 습관이 다시 발동했냐 하면···


[요한]

레벨 : 1

직업 : 없음

칭호 : 없음

종교 : 없음

좌우명 : 착하게 살자

능력치 : 힘(46)/민첩(46)/체력(46)/정신(46)/마력(1)


이것 때문이었다.


요한이 그네 위에서 1800만 번 왕복해야 얻을 수 있는 스텟을 9일 남짓 만에 다 얻어버렸다.

어째서 이런 신통방통한 일이 일어난 지는 명확했다.

요한의 스타리워드, ‘통달’이 작동한 결과였다.


[통달]

어떤 조건 만족 시, 스킬 숙련도 상승 폭 대폭 증가

어떤 조건 만족 시, 액션 진행도 대폭 증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어떤 조건을 만족해서 액션 진행도가 대폭 증가한 것이다.


직원들은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9000시간이 필요한 일을 180시간만에?


이만한 스타리워드는 세계를 통틀어서도 몇 손에 꼽을만한 효과일 것이다.

물론 마냥 기뻐하기에는 이르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초심자의 행운이 있었다는 구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즉, 이번에는 초심자의 행운 때문에 통달이 적용된 것이고, 어떤 조건을 만족하게 하기는 매우 어렵지 않을까?

괜히 요한 님에게 너무 부담 주지 말자.


그 지적도 일리가 있지만, 어쨌건 요한의 기대치가 전보다 훨씬 높아진 것도 사실. 그 사실에 부담감을 느낀 사람들이 모였다.


이유진의 눈이 짜게 식은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이들이 아무리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탁상공론을 하기 전부터, 이유진은 요한의 정체를 교란하기 위한 몇 가지 장치를 마련해두었다.

완전히 안전해졌다고 장담할 순 없어도, 시간 벌이에는 꽤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후로도 누구 목소리가 좋나 대결하던 이들은, 이 회의가 길어질수록 오히려 요한에게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회의자들의 총의에 따라 이유진은, 오래간만에 쉬고 있을 진별우에게 연락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진별우는 우물쭈물하다 답했다.


[숨겼다가 들켜도 문제가 안 생기면 숨기고 싶은데요.]


“숨겼다가 들키면 문제가 좀 생기지 않겠느냐고 하시네요.”


[야이···]


“아! 확실히 누가 후드라도 넘겨버리면...”


“그게 문제네. 왜 여태 생각 못 했지? 남이 손 못 대는 로브 같은 거 어디 없나?”


“아예 완전히 터치 못 하는 건... 그나마 제일 낮은 게 200레벨 제한인 PK 시리즈입니다.”


“그럼 별수 없네.”


“으··· 어쩔 수 없네요.”


회의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이유진은 아직 연결이 끊기지 않은 걸 보고 씩 웃었다.


“그렇게 됐어요.”


[......]


“삐졌어요? 사실 숨겨도 되는데.”


[됐습니다.]


“스타트 필드엔 언제 갈래요? 지금부터 3일 더 쉬어도 된답니다.”


마음만 같아선 9일 정도 쉬게 하고 싶었지만, 쌍둥이 남매의 최후통첩이 문제였다.

쌍둥이 남매는 3일이 지나고도 아무 소식이 없으면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경고했다.


유튜브를 통해서.

그런데 얼마나 쉬고 싶으냐는 물음에 대한 진별우의 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지금 해도 되는데요.]


아니다. 그 답은 충분히 예상 안에 있었다.


이틀 전에 진별우를 만났을 때부터, 이유진은 지금까지 자신은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바타가 아무리 사람같이 움직여봐야 결국 현실의 표정을 완전히 담아내기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니터링룸에서 요한이 그네를 타는 모습을 봤을 땐 항상 개인적인 상상력으로 보정이 들어가 있었다.

하루 20시간. 1분 1초의 휴식도 없는 반복운동을 해야 하는 사람의 표정은 이럴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표정이지만, 무언가를 꾹 눌러 참고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진별우를 보고 나서 깨달았다.

현실의 진별우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만약 그 표정이 꾸며낸 것이라면, 그는 포커로도 대성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진별우의 발생 원인을 주위의 환경, 학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떨까?


해결사가 보기엔 도저히 보호자 같아 보이지 않았던, 그러나 진별우가 증언한 보호자. 진별우가 단순반복작업을 하루에 20시간씩이나 했던 건 그들의 의향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하루에 20시간.


중학생 수준의 정신연령, 이 아니더라도 사람에겐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다.


그런데 사실 VR 기기 속 에선 하루에 20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을 있어도 육체가 마모되지 않는다. 비록 노화를 막아주는 능력까진 없지만, 자연 친화적인 장소에서 트레이너들이 달라붙어 관리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다.


더없이 편한 몸. 아무렇지도 않은 정신.


학대라고 할 수 있을까?


이유진에겐 어려운 질문처럼 느껴졌다.


“8시간만 기다려요. 나도 준비한 게 있어서.”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말 잘 듣는 기계사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뭐하세요? 19.09.30 17 0 12쪽
25 몽둥이 휘두르는 사제 19.09.28 14 0 15쪽
24 수색 난항 19.09.27 14 0 15쪽
23 물밑에서 일어나는 일 19.09.26 14 0 13쪽
22 그림자 비약 19.09.25 14 0 12쪽
21 그림자 노인 19.09.24 20 0 13쪽
20 전담 마크 19.09.23 28 0 14쪽
19 어쩌다 보니 망함 19.09.21 22 0 14쪽
18 기계사제 전직 19.09.20 24 0 13쪽
17 전직 과정 19.09.19 24 0 13쪽
16 예비 19.09.18 20 0 19쪽
15 이 녀석이? 19.09.17 20 0 17쪽
14 톱니바퀴의 신 19.09.16 20 0 12쪽
13 달 토끼 사냥(?) 19.09.16 26 0 12쪽
12 가헤란 토끼밭 19.09.13 105 1 12쪽
11 그래. 남친은 없어. 19.09.12 27 1 13쪽
» 학대의 정의 19.09.11 27 1 12쪽
9 변화? 19.09.10 35 1 13쪽
8 취미는 그네타기 19.09.09 28 1 13쪽
7 튜토리얼 필드 19.09.07 27 2 13쪽
6 설득 19.09.06 35 2 12쪽
5 뭔가 이상한 회의 19.09.05 46 2 16쪽
4 아바타 제작 조건 19.09.04 46 3 12쪽
3 어려운 자리 19.09.03 63 3 13쪽
2 특별한 인간 19.09.02 115 3 12쪽
1 프롤로그 - 이런 세상 19.09.02 204 5 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