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국으로 가는 길
고태건과 장동호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고태건과 장동호는 자주 만나 중립국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주고 받으며 제주도 독립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장동호는 말하자면 고태건에게 탐모라 독립을 실현할 수 있게 한 숨은 공신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고태건이 탐모라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얼마 후 찾아와 전혀 뜻밖의 선언을 했다.
"선배님, 저 해외로 이민을 가려 합니다."
"무슨 소린가? 이민이라니? 자네 제 정신인가?"
고태건은 장동호가 통일부에서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내뱉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네, 진심입니다. 이 나라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제가 품었던 저의 조국은 이제 죽었습니다."
고태건은 장동호가 꾸준히 연구해 온 중립화 통일론을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던 그의 진지한 눈빛을 떠올렸다.
"한반도가 중립화를 고려하고 시도한 역사는 한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그 첫 시작은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입니다.
1885년 당시 독일 부영사였던 허만 부들러 Hermann Budler가 중국의 내정간섭을 배제하고, 일본의 강제병합을 저지하며, 조선내 외국군의 전쟁방지와 철군 등을 목적으로 조선 정부에게 영세중립 정책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고종은 그 제안을 적극 받아들여 이후 주변 열강들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을 계속 요청하기 시작합니다.
1891년에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에 영세중립을 요청했는데 중국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1900년에는 다시 일본에게 조선을 대신해서 열강들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을 제의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만 역시 거절당합니다.
고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같은 해 동경주재 알프레드 버크 Alfred E. Buck 미국 공사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워싱턴 주재 공사에게 요청하라는 답변으로 거부합니다.
1901년에는 다시 동경주재 알렉산더 이스볼스키 Alexander P. Isvolski 러시아 공사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을 위해 일본과 협의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거절당하게 됩니다.
고종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1903년에 일본 정부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을 다시 요청합니다. 물론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고종은 1904년 1월, 일방적으로 조선이 영세중립국임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나서 각국 정부에 통보해 외국 군대를 즉각 철수시킬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조선에서 발발하면서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은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고태건은 기울어져가는 국운 속에서 고종 황제가 국권을 지키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들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외세에 의존해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던 고종 황제의 답답한 선택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한반도가 아닌 제주도여서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고태건은 장동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내 제주도 독립계획에 대한 가능성을 속으로 짚어 보았다.
"한반도에서 영세중립국 방안이 두 번째로 검토된 것은 1950년 10월 극동담당 법률부 보좌관 대리였던 스노우Snow가 기획보좌관 에머슨Emmerson에게 보낸 ‘한국의 항구적 중립화’라는 제목의 편지에 나옵니다."
"미국이 한반도 중립화를 먼저 검토했다는 건가? 의외군.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였나?"
고태건은 바로 장동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군사비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UN을 통해 한반도 통일을 주도하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한반도에 써야 할 군사비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죠.
만약 중국과 북한이 공산화가 안 되었다면 한반도를 대하는 미국의 입장은 정말 달라졌을 것입니다.”
"중국이 공산화가 안 되었다면 미국이 중국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결과였겠군."
고태건은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지방정부의 살림을 사는 사람답게 돈이 작용하는 흐름을 빨리 읽어 내며 말했다.
"맞습니다. 마침 중국이 공산화가 되는 바람에 미국은 한국에 투자할 여력이 생긴 것이죠.
문제는 공산화된 중국과 한반도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니 유엔과 미국이 한반도 통일을 주도한다고 해서 그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의 중립화론이 나온 것이군."
"정확히 보셨습니다. 미국이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생각한 것은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전쟁 발발 이전 한반도에서도 공산주의 게릴라를 경험했던 미국에게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 속에서 나온 방안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측 내에서도 한반도의 중립화가 장기적으로 볼 때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갖고 의견이 갈리고 있기는 했지만, 단기적으로는 유효하다는 결론이 지배적이었죠.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쟁 상황이 전환되었기 때문인 건가?"
"그렇습니다."
고태건은 한반도 중립화에 관한 지난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 속으로 중립국이 가져야 할 조건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장동호는 고태건이 속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며,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사례도 이야기해 주었다.
"약소국이 중립화를 도모하려는 이유는 적국이 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열강들에게 적대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용병으로 국력을 일으킨 스위스는 그만큼 자체의 군사적인 힘을 갖고 있어서 중립화를 선언하고 유지하는 데 성공을 했습니다.
반면 벨기에는 무력이 있었지만 지리적인 위치가 도움을 주지 못했죠. 벨기에는 콩고를 병합하면서 중립국화를 취소했습니다. 더욱이 룩셈부르크는 벨기에와 함께 독일의 공격으로 중립화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후에는 한반도 중립화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없었나?"
고태건은 유럽 중립국에 관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아닙니다. 한 번 더 있었습니다.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는 통일된 한국에게 공격 능력을 제외한 무장만 허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중립화가 한국 문제를 군사적인 수단 외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능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53년 7월에 제출된 문서 NSC (National Security Council: 국가안전보장 회의) 보고서 157을 보면, ‘미국과 군사적으로 동맹관계를 맺는 통일된 한국을 만드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통일이 되고 중립화된 상태에서 대한민국을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군과 기지를 제거하고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지 않는다’는 점도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게 검토되던 중립화 방안이 더 전개되지 못했던 이유는 NSC에 포함한 결론 부분을 중국과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게 무언가?"
고태건은 조바심이 나 성급히 물었다.
"중립화 방안의 목표가 대한민국에 통일된 한국의 영토적, 정치적 통합을 보장하며, 대한민국의 유엔가입과 내부 안보를 유지하고, 주요 열강의 공격 직후에 한국이 영토를 지키기에 ‘충분한 한국군의 능력 하에서 가능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토를 지킬 수 있는 방어력에 제한한다고 하지만 한국이 충분한 군사능력을 보유하는 것을 당연히 북한과 중국이 반가워할 리가 없었겠군."
고태건은 당시 북한과 중국의 입장을 재빨리 읽으며 말했다.
"네, 그래서 이후 한반도 중립화 방안은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주장이 계속되면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방안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 신인 G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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