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G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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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BrainLight
작품등록일 :
2019.09.20 09:55
최근연재일 :
2019.12.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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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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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저를 찾는 사람

DUMMY

"아유, 우리 한 목사님 오셨어요?"


까페 여주인이 가게로 들어오는 한규영을 알아보며 반갑게 맞았다.


"성 장로님, 잘 지내셨죠? 혹시 저 찾는 사람 없었나요?"

"오늘은 아직 없었습니다. 오늘도 상담이 있으신가봐요?"


사장이 궁금한 얼굴로 한규영에게 물었다.


"오늘은 아닙니다. 그럼 혹시라도 저를 찾는 사람이 있거든 제가 늘 앉는 자리로 안내 좀 해주세요."

"여부가 있겠어요. 염려 마세요, 목사님. 교인 상담을 하실 때 항상 저희 가게를 이용해 주시는데, 오늘만 있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잖아요. 아무 염려 마시고 자리에 가 계세요. 오늘은 뭘로 드릴까요?"

"손님이 오면 그때 같이 주문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목사님."


잠시 후 까페 여사장이 한규영이 앉아 있는 자리에 산딸기 열매가 그려져 있고 금테가 둘러진 속이 깊은 영국식 찻잔에 따뜻한 옥수수 수염차를 담아서 가져왔다.


"목사님, 이거 제가 직접 우린 거예요. 한 번 드셔보세요."

"감사합니다."


역시 '안전'하게 아는 장소로 정하기를 잘했어.


한규영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온기를 느끼며, 고민한 끝에 결정한 약속 장소에 흡족해 했다.


창 너머 바깥 거리는 일기예보대로 시커멓게 몰려든 구름때문에 대낮인데도 벌써 한밤중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거리에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휘휘 감기며 공중으로 날리더니, 컴컴해진 하늘에서 날카롭게 꺾인 긴 번개가 번쩍 하며 순식간에 하늘을 두쪽으로 갈랐다.


우르릉 쾅

우르릉 쾅 쾅

후둑 후둑 후두둑


이윽고 굵은 비가 쏟아져내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뜨이게 빨라졌다. 일부는 서둘러 비를 그을 수 있는 곳으로 저마다 튀듯이 뛰어가고, 또다른 일부는 이미 챙겨온 우산을 펴들며 종종걸음으로 움직였다.


건너편 횡단보도 끝에 푸른 신호를 기다리는 각양 각색의 우산들이 빗물을 우산 끝으로 떨구며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그중에서 무늬 없는 검정 우산이 한규영의 눈에 뜨였다.


허리까지 오는 찰랑거리는 갈색 긴 머리에 벨트를 느슨하게 묶은 붉은 레인 코트를 입고 있는 우산 주인은 반원형으로 구부러진 검은 우산 손잡이를 꼭 쥐고 초점 없는 눈으로 한규영이 있는 건물방향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영은 마치 21년 전 그 여인이 되돌아와 그곳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목사님 어느 분이 목사님을 찾으시는데요."


낮에 사무를 봐주는 자원봉사 여대생이 한규영이 있는 사무실에 들어와 말했다.


"이 비오는 날 누구?"

"한국에서 목사님과 가까이 지내던 분이라고 하셨어요."


한규영은 왠지 모르게 드는 미묘한 예감에 가슴이 뛰면서 불안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며 말했다.


"그래요? 사무실로 안내해주세요."

"네, 목사님."


"목사님, 손님이세요."


잠시 후 한규영 사무실로 자원봉사자가 손님을 안내해 들어왔다. 한규영은 자원봉사자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서는 빗물이 묻은 붉은 레인 코트에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을 보고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 이런, 내 예감이 맞았다니!

앞으로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아니 결코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수 천 번을 다짐했었건만.


하지만 한규영은 꿈처럼 바로 눈 앞에 나타난 서주희를 보고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그리움이 주체할 수 없는 설레임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왜... 왜 나를 찾아온 거지?


"규영씨, 오랜만이야."


서주희가 먼저 말했다.


"나가봐도 좋아요."


한규영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는 자원봉사자에게 말했다.


"네, 목사님."


자원봉사자는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긴장감을 눈치채고 한규영을 슬쩍 쳐다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네..."


한규영은 서주희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서주희가 앉을 자리를 만들려고 공연히 분주하게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그동안 LA에 쭉 있었어?"


한규영이 자리에 돌아와 앉으며 시선을 창가에 둔 채 물었다. 서주희는 그가 가져다 놓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차분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답했다.


"응, 나 며칠 전에 규영씨를 보았어."

"어디서?"


한규영이 놀라며 물었다.


"게티Getty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트램 안에서."


그런데 왜 아는 체하지 않았던 거지?

하긴, 막상 내가 먼저 알아보았어도 모르는 척했을 테지만...


"그랬구나."


한규영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한규영은 서주희와 사귀면서 그림을 보는 것이 취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강북에 있는 미술관에서 새로운 전시가 열리면 서주희는 꼬박꼬박 일정을 챙겨서 한규영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었다.


두 사람은 특히 태극기를 만든 박영효의 고택을 개조한 관훈동 경인미술관과 문화재 대수장가大收藏家 간송 전형필이 세운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전시를 유난히 좋아했었다.


경인미술관은 조선조 철종의 숙의 범씨 소생 영혜옹주의 부마이기도 했던 박영효가 소유한 1800년대 사대부의 전형적인 가옥을 개조한 미술관이었는데, 6개의 독채 전시관과 정원들마다 야외 조각과 설치 작품들로 볼거리가 가득한 곳이었다.

한규영은 전시도 전시이지만 도심 한복판에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간에 머무르며 느껴지는 고즈넉한 정취가 좋아서 그곳에 가는 것을 즐겼었다.


반면 간송미술관은 일제강점기에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희귀한 우리 문화재들을 수집하고 보존하여 전시하는 미술관이었다.

한규영은 간송미술관의 역사와 소장품들을 접하고 나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만민이 누릴 수 있는 보물창고라고 부르며, '부유함 자체는 결코 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지난 운동권 시절의 시각을 수정했다. 그래서 서주희와 헤어지고도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면 가끔 혼자서 간송미술관을 찾아가곤 했다.



"아직도 그림 보러 다니나봐."

"아니, 그곳에 근무하는 교인과 약속이 있어서."


한규영은 서주희에게 그녀를 추억하는 인상을 조금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뚝 잘라 말했다.


"LA에서도 규영씨는 많이 유명한 것 같더라."

"글쎄... 그런데 나를 찾아온 용건이 뭐지?"


한규영은 불안한 만남을 빨리 끝내고 싶어 찾아온 용건을 급하게 물었다.


"그냥... 규영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싶어서."


그날 트램에서 본 규영씨의 그 공허한 눈빛이 나를 이곳에 오게 만든 거야.


두 사람이 잠시 대화를 멈춘 사이, 바깥에는 교회 건물 주변을 지나가는 차량들 소리가 빗물에 젖어 요란하게 들렸다. 차들의 흐름이 끊기자 방안에는 유리창을 두들기는 빗소리만 남았다.


이제 와서 궁금하다고?


한규영은 서주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 괜찮으면 잠깐 나랑 드라이브 할래?"

"차를 가져온 거야?"

"응."

"그래, 그럼."


한규영은 서주희에게 더이상 아무런 감정도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직업을 그녀에게 상기시키려고나 하려는 듯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규영이 교회 사람들에게 잠시 사목을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동안, 서주희는 먼저 내려가 건물 1층 입구에서 기다렸다.


"먼저 차에 가 있지 그랬어?"

"비가 오잖아."


비가 오는 것을 보면서도 한규영은 우산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


"먼저 가 있어. 금방 우산 가져올 게."

"아니..."


서주희는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한규영에게 들고 있던 검은 우산을 펴서 주었다. 한규영은 어색한 표정으로 서주희가 준 우산을 받아들고 같이 주차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저 차야."


서주희는 흰색 렉서스를 가리켰다. 한규영은 서주희가 차문을 닫을 때까지 우산을 받쳐주고 나서 차에 탔다.


"규영씨, 옷이 다 젖었잖아!"


서주희는 옆자리에 앉은 한규영의 옷을 보고 말했다.


"괜찮아."


서주희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려다가 멈칫하고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닦아. 감기 들어. 어디로 갈까?"

"가고 싶은 대로."


한규영이 서주희의 손수건으로 빗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얇은 손수건은 금세 젖었다. 초록색, 짙은 갈색, 붉은 색이 엇갈리며 강하게 표현된 손수건은 한눈에 화백 김환기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규영은 젖은 손수건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콘솔 박스에 놓았다.


"시간 괜찮아?"

"응, 괜찮아."


서주희는 한규영의 말을 듣고 곧바로 프리웨이를 벗어나 주택가로 들어섰다.




- 신인 G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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