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인생에 별안간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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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EORANG
작품등록일 :
2019.09.20 16:48
최근연재일 :
2019.10.1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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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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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산소 같은 여자 아니면 들소 같은 여자

DUMMY

#9. 산소 같은 여자 아니면 들소 같은 여자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그때였다.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끌어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바닥으로 꼭 막고 있던 귀를 손쉽게 뚫고 들어온 목소리는 따뜻했다. 여린 무르팍 속 어둠에서 빛의 방향으로 시선이 이어졌다.


음성의 끝에는 웬 소녀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턱 바로 옆까지 닿는 짧은 단발머리를 쫄랑거리고 있었다. 하얀색 반팔 위에 교복 와이셔츠를 대충 걸쳐 입고 있었다.


그리고 또 아주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그 웃음이었던 것 같다. 별것 아니었지만 여태 그녀를 지울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태어나 그리도 예쁘게 웃는 사람을 본 적 없었다. 반짝반짝, 울렁이던 속을 다 까먹을 정도였다. 땅으로 비치는 햇빛을 한 톨도 빠짐없이 다 흡수라도 하는 것 같았다. 딱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리곤 소란하게 제 주머니를 뒤적였다. 쏙 꺼낸 손수건을 손에 꼭 쥐여주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어휴. 여기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감기 걸려. 자.”


걱정인 듯 아닌 듯 잔소리인 듯 아닌 듯 헷갈렸다. 말꼬리를 늘이며 말하는 목소리에 독특한 쾌활함이 젖어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자연스럽게 꼬마 아이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더랬다. 교복 치마가 축축해지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유는 알 수 없는 무심한 행동의 연속이었다.


“울었어요?”


한참 극심한 감정의 변동 탓이었을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만 수십 초가 걸렸다. 어린아이의 느린 반응 속도에도 그녀는 끈질기게 말을 걸어왔다. 왜였을까?


“보면 몰라요?”


그리고 난 좀 싸가지가 없었다.


당시 12살 소년의 삶에는 그랬다. 한참 강렬한 호르몬의 습격에 따라 사춘기가 도래했었으니까.


날것 그대로의 생경한 감정과 생각을 안은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말을 거는 낯선 여자에게 살갑게 굴 처세 따위는 몰랐던 것 같다. 고려하지 않았다 하는 게 조금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울었는데, 오늘. 찌찌뽕이네?”


그저 울고 있는 아이를 놀리고 싶었던 것인지, 안타까워 위로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사람 행동의 의중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다지도 난데없는 타이밍이었다. 사랑은 참 뜬금없다. 또 난데없고, 눈치도 없는 편이었다.


일생 중 가장 순수한 성격의 성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번쩍 떠버렸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였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모습만은 반짝거렸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울었어요?”


울었다는 그녀의 말에 궁금증이 몰려왔다. 그래서 물었다. 눈물 자국이 메말라 붙은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선. 부끄럼도 모르고. 누가 보아도 앙앙대는 것은 나였는데 말이다.


“음. 힘들어서. 하나같이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비슷하네, 나랑.”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힘들어 울었다는 말이 파도치는 마음을, 덜덜 떨리는 두려움을 함부로 다독여주었다.


“울지 마요. 아파하지도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어쩔 수 없는 일들이니까, 괜찮아요.”


상긋거리며 눈을 맞춰오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우연이었다. 우연히 그때의 상황에 들어맞았던 대사였다. 그것은 아무래도 그녀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유난스럽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다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까지 이어졌다. 자그마치 몇 년인지 대단했다. 엄청난 순애보가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이름도 성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단 몇 십분 만에 반했다. 만남이라고는 그 축축한 놀이터에서 몇 번······. 그러고는 몇 년이나 사랑에 빠졌던 것이니 말이다.


인생 첫 순정이었다.


여전히 웃음으로 가득 찬 입가 옆, 폭 팬 보조개가 너무 생생하다. 그래서 딱 그날 이후 보조개가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 되었다. 웃음에 보조개가 담긴 사람을 보면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처음처럼 심장이 저렸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가장 지옥 같던 날들을 가장 아름답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였다. 집 곳곳에 있는 오래된 책장 속에는 항상 책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종이 위로 슬슬 먼지가 쌓일 만큼 다들 책장 속 책들에 무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한때 엄마가 사랑하던 것들이라는 점만큼은 틀림없었다.


봄날의 산책을 거둔 건 비가 아닌 너였다.


평소처럼 드나들던 부엌 한쪽 구석에 놓인 시집의 제목이었다. 슬쩍 스친 찰나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무심코 시집을 집어 들었다. 책장 속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것을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펼쳤다.


열대야


뜨겁구나, 아이야.

네가 잠 못 이루는 것은

고개를 숨기고도 열을 내는 태양 때문이니,

아니면 자꾸 고개가 꺾이는 네 열망 때문이니.

오늘 밤도 몸을 묶는 찐득함에 길겠구나.


무작위로 펼친 페이지 안을 채우고 있던 시다. 그것이 하필이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를 텄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낯설지 않은 이름으로 지어진 짧은 시가 콕 심장에 박혔다.


그저 타고난 본능이었다. 이렇게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것, 그로 인해 중독되어 버리는 것까지도.


그때 이후로 정말 닥치는 대로 시집을 찾아 읽었다. 18살 때나 지금이나 시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으니 손에 닿는 대로 또 눈에 보이는 대로 읽었던 것 같다.


집에 쌓인 수백 권의 책을 순식간에 읽어냈다. 근처 도서관과 서점 등을 전전하며 말 그대로 시에 미쳐 살았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만큼의 열정은 잃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시는 여전히 가장 사랑하는 문학 장르 중 하나이다.


아마 평생을 거쳐 사랑하며 살아갈 부분이기도 하다. 시간이 날 때면 서점에 들러 시집을 사 모으는 것이 제법 오랜 취미로 자리 잡았다.


이런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맥락 없이 아몬드 맛 빼빼로를 사랑하게 되었고, 매운맛을 내는 마파두부도, 눈을 사로잡는 붉은 옷도, 버스 창가 자리에서 듣는 시끄러운 음악도, 비가 퍼붓는 날 우산을 버리고 땅과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것도, 우아한 몸짓으로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도 삶의 영역에 불쑥 비집고 들어왔다.


이 모든 건 한때 눈에 담기는 전부였다가 지금은 강한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야기가 구구절절 늘어졌지만 결국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스물네 살이 된 지금의 서바둑은 새로운 것에 혹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여랑 작가님이다.


우연히 그의 SNS 페이지를 발견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공개된 작업물의 사진을 보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처음에는 작가님이 올린 사진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정도로 그쳤던 마음이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사진이 쌓였다. 그렇게 시간도 함께 쌓였고 궁금해졌다. 점차 그가 하는 규방공예는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더 나아가 실제로 그를 만나고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즘이었다.


따로 공개한 개인적인 정보는 일절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SNS 상으로 연락을 해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오프라인에서 운영하는 작업실이라든지, 가게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실제 현실에서 하여랑 작가님을 만날 구멍은 꼭 막혀 있었으니까. 고 구멍을 어떻게든 뚫어보려 안달하던 하루였다.


새로 올린 게시물을 기대하며 SNS를 습관처럼 들렀다. 때마침 올라온 공지에 쾌재를 불렀다.


[8월 1일부터 4일까지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도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8월 1일 아침이 되었다. 잠을 자지 못해 무거운 몸과 다르게 마음은 떠다니는 비눗방울만큼이나 가벼웠다. 사실 너무 좋아서 8월 1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뭐랄까. 해리포터를 보지 않은 뇌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과 엇비슷한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다.


너무나도 열망하던 무언가를 가지지 못했을 때가 더 행복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때때로 그것을 가지게 된 후보다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행복은 결국 가질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


흠.


거울 앞에 앉아 뇌가 돌아가는 대로 생각을 이어갔다. 너무 신나서 그런지 화수분처럼 별별 생각이 다 튀어나왔다.


새벽 5시였다.


이미 완벽히 외출할 준비를 끝마친 지금 시각이었다. 창밖은 깜깜했다. 아직 해는 고개를 내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전시 시작은 11시였으니 아직도 6시간이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부릅뜬 눈으로 보낸 새벽 덕에 피로가 겹겹이 쌓여있기는 했지만 잠을 잘 수는 없었다. 혹여나 늦잠을 잘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가족들은 모두 자고 있을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니 방 밖에 나가서 뭘 하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방 안에서 할 일도 딱히 없었다. 게임을 하기도 그렇고, 잠은 못 자고, 책 읽기에는 너무 졸리고, 핸드폰은 원래 잘 안 하고, 운동을 할 수도 없고 말이야.


“심심해.”


그래서 바깥공기를 쐬어 잠이나 깨우기로 결심했다. 곧 꿈나라로 들랑 말랑하는 가물거리는 정신 상태였으니.


살금살금.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집을 나섰다. 제일 아끼는 신발까지 꼭 챙겨 신고 말이다.


좋다.


상쾌한 새벽 공기는 언제나 기분을 맑게 한다. 이른 시간 눈에 떠서 뿌연 연기가 잔재한 정신을 맑게 걷히게 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가분가분해진 머리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예전부터 모두가 잠든 시각에 잠에서 깨는 것을 좋아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을 홀로 움직이는 것이 좋다.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새벽 거리는 다른 시간대와 비교했을 때 유난히 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템포가 다른 시간대랑은 다른 박자를 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랬다.


밤을 새운 것이지만 부지런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흐음. 흥이 오르니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확실히 코를 뚫는 새벽 공기 속은 잠을 깨우기 적합한 환경이었다. 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그리 텁텁하지 않다. 덕분에 더더욱 상쾌함을 느끼기 완벽한 조건이었다.


“진짜 아무도 없네.”


조용한 동네를 차분히 둘러보며 몸이 가는 데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는데 길을 나서는 개미 한 마리도 없나 보다. 아무리 새벽이라도 유난스레 조용하네?


짹짹- 짹짹- 그저 새벽부터 눈을 뜬 부지런한 새가 우는소리만이 저 멀리 어딘가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뭐 하지.”


괜스레 혼잣말을 내뱉게 된다. 아무 소리가 없는 영화 속 사운드를 채울 유일한 배우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것은 자의식 과잉인가...? 갈림길에서 묘한 촉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방향에 들소처럼 달려오는 여자가 있다.


무섭잖아, 아니 너무 가깝잖아. 어?


“아악! 아이고야.”

“아야. 뭐야.”


갑작스러운 충격에 순간 앞이 번쩍했다. 이런 한적함에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었다. 아니, 이게 뭐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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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0. 무례의 이유 19.10.18 17 0 10쪽
29 #29. 우리 술 한잔해요. 19.10.14 16 0 13쪽
28 #28. 너를 후회한다 19.10.09 16 0 11쪽
27 #27. 학생은 선생님이 지켜야지 19.10.08 16 0 10쪽
26 #26. 그냥 나를 좋아해 줘 19.10.07 13 0 11쪽
25 #25. 그렇다고 울 수는 없잖아 19.10.05 17 0 11쪽
24 #24. 첫 번째의 이유 19.10.03 14 0 11쪽
23 #23. 간결한 질문과 명확한 대답 19.10.02 15 0 10쪽
22 #22. 시절의 향기와 손수건 19.10.01 15 0 13쪽
21 #21. 그런 제법 탐나는 오점 19.09.30 12 0 11쪽
20 #20. 예상치 못한 초대 19.09.27 19 0 12쪽
19 #19. 묘한 불쾌함과 너의 상관관계 19.09.26 17 0 12쪽
18 #18. 그러니까 철없는 두 번째 구원 19.09.25 21 0 12쪽
17 #17. 길을 잃었다 19.09.24 31 0 11쪽
16 #16. 감춰진 갈등의 원인 19.09.24 22 0 12쪽
15 #15. 똥쟁이 덕후와 이상한 여자 19.09.24 2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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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 사나운데 좀 멋진 여자 19.09.23 23 0 12쪽
12 #12. 진짜 바보는 자기가 바본 줄 모른다 19.09.23 23 0 12쪽
11 #11. 착한 어른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19.09.23 21 0 13쪽
10 #10. 나비와 흰 우유와 청심환 19.09.22 22 0 12쪽
» #9. 산소 같은 여자 아니면 들소 같은 여자 19.09.22 23 0 12쪽
8 #8. 두근두근 다시 설렐 수 있는 하루 19.09.22 20 0 11쪽
7 #7. 어쩌면 지나갈, 어쩌면 그리울 19.09.22 21 0 13쪽
6 #6. 좋아해요, 아이스크림 19.09.21 26 0 12쪽
5 #5. 약간의 강박증, 약간의 트라우마 19.09.21 32 0 12쪽
4 #4.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19.09.21 31 0 13쪽
3 #3. 제법 구린 아르바이트와 술 중독 19.09.21 42 0 12쪽
2 #2. 나비의 하루 19.09.20 57 0 12쪽
1 #1. 열대야 19.09.20 12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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