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과 완두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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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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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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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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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1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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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쪽

1. 속 좁은 왕

DUMMY

그것은 바로 앞에서 칼부림이 난다고 해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 한가운데로 이백 남짓의 기사들은 서로서로 등을 맞댄 채 어둠을 향해 칼을 내밀고 있었다.


“씨스자들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그 어둠 속에서 일리어스는 옆 사람을 향해 말했다.

“사방에서 들어 올겁니다.”

적은 이쪽을 향하고 있다.

“어쩌죠?”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와 달리 침착하게 아헬 빈피드는 대꾸했다. 목소리는 침착하지만 그 역시 언제 덮쳐들어올지 모를 적들을 경계해 눈은 날카롭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 있다 그냥 당할 수도 있습니다.”

씨스자들은 자체만으로도 강력하지만 그들이 위험한 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차라리 저희가 먼저 움직이는 게....”

긴장으로 일리어스의 목소리는 점점 다급하게 들렸다.

“조용히 해, 일리어스.”

아헬은 대꾸했다.

“전하께서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럼 우린 기다리는 거야.”

냉담한 음성에 일리어스는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왕의 오른팔인 그가 지금 이 부대의 지휘관이었으니 쓸데없는 소린 삼가해야 했다.


입을 다무는 일리어스를 내버려 둔 채 아헬은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이 뻥 뚫린 사방에서 완전히 노출된 채 있는 그들은 아닌 게 아니라 그냥 죽으려고 기다리는 것과 다름 없다. 이대로 씨스자들이 먼저 자신들을 발견한다면 왕이 지원군을 데리고 도착 하기 전에 쓰러질 것이다. 그 정도로 씨스자들은 일부만으로도 막강하다.


씨스자. 국경 근처에서 출몰하는 정체 불명의 침입자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장정 서넛이 맞서야 겨우 한 명을 상대할 수 있다. 간신히 쓰러뜨려도 쓰러질 때 비명 소리 한 번 안 지른다. 그래서 씨스자(침묵하는 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시체를 확인했을 때 투구 밑에 인간의 얼굴이 있는 건 확인했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확실히 인간 이상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어디서 나타난 건지 왜 나타났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했다.


씨스자들은 여러 곳에서 나타났으나 그 중 특히 자신의 나라인 신생국 베느트에서 유독 자주 출몰했고 그 덕분에 즉위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자신들의 왕은 그 권위를 위협받고 있었다.


‘카벤, 제발.’

왕의 최측근이자 친구인 기사 아헬은 씨스자들이 아직 가까이 오지 않았길 바라며 자신들의 왕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긴장된 시간을 보내길 한참, 저기 멀리서 어슴푸레 밝아오던 새벽 하늘이 갑자기 다시 시꺼멓게 변하는 느낌에 다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거기에 검은 날개를 활짝 편 것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옆에서 작게 환호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헬 역시 이제 되었다는 듯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온 검은 용 한 마리가 활강하듯 아래로 내려왔고 그 위에 타고 있던 남자가 바닥으로 내려섰다.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검은 용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남자는 자신을 향해 있는 이백 개의 시선들을 향해 걸어갔다.


“전하.”

앞으로 다가온 그를 향해 일리어스가 울먹였다. 왕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늦어서 미안.”



왕이 용의 부대를 이끌고 나타났으니 병력은 확보되었다. 그렇다면 기다릴 것 없이 씨스자들을 찾아 나선다. 다들 그걸 알고 있었는지 왕이 지시하기도 전에 그들은 바닥으로 내려서 있는 용들에게 하나 둘씩 다가갔다.


“미끼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버티다니..”

기사들이 용에 올라타는 걸 보며 카벤은 말했다.

“나라에 대한 충정이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못하겠는 걸.”

죽을 힘을 다해 달려온 건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 아헬들이 어쩌고 있을지 사실 그는 좀 걱정했다. 만약 자신을 못 믿고 이들이 먼저 씨스자들을 치려 했다면 그가 발견한 건 이백 구의 시체들이었을 것이다.


“내 충정심은 너한테 있는 것 뿐이야.”

믿고 기다려준 친구를 향한 안도감에서 나온 농담에 짧은 한숨을 섞어 아헬은 대꾸했다.

“너를 믿지 않았으면 아무리 나라도 이런 위험을 감수하진 않아.”


여기서 담소나 나눌 때는 아니었기에 이제 출발한 일리어스들을 따라 가기 위해 아헬은 말했다.

“가시죠 전하.”

“그래.”

친구를 향해 미소지은 채 대꾸하며 카벤 역시 타고 온 용에 올랐다.


그리고 그날 새벽이 아침으로 변하기 전에 그들은 있던 곳에서 마을 하나 정도 차이를 두고 스며들듯 접근하고 있던 씨스자들과 그들이 있던 숲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아침이 되어 남은 기사들이 전장을 정리하는 동안 카벤은 완전히 불타 버린 숲 전체를 보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있던 곳은 새벽의 전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곳은 지금까지 씨스자들이 나타났던 곳 중 수도와 가장 가깝다. 최근들어 씨스자들은 베느트의 중심부로 향하는 모양새를 띤다.


“여기까지 들어온다면 이제 수도가 침략당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될 것 같은데.”

옆으로 다가오며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헬이 말했다.

“내 생각에도 그래.”

카벤은 대꾸했다.


“아레를 좀 개방해 둬.”

잠시 생각하다가 그가 말했다.

정말 베느트의 중심인 수도까지 침략해 들어올 생각이라면 그 길목이 되는 한 곳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순순히 그쪽으로 들어올까?”

“모를 일이지만.”

카벤은 턱을 문질렀다.

“우리 쪽이 운이 좋을 수도 있겠지.”

“알았어.”

대꾸하던 아헬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이내 다시 입을 뗐다.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네 입지를 강화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망설이는 기색에 카벤은 새삼스럽단 얼굴을 했다.

“뭔데 너답지 않게 머뭇거려?”

“네드고렌에 대해 알고 있어?”

“네드고렌?”

네드고렌은 베느트와 좀 떨어진 내륙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나라로 신생국 베느트와 달리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기본적인 걸 아닐테고. 우리와는 지금 특별한 상관이 없을텐데?”

“그 나라에 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

“그 정도야 알지.”

“용이 태어나진 않지만 대신 인접국들과 강력한 혈연 관계로 그만큼의 힘을 보유하고 있어.”

아헬은 말을 이었다.

“첫째 공주는 드빌레트 왕과 둘째 왕자는 페이누트의 여왕과, 셋째 왕자는 아오렌의 여왕과 결혼했다더군.”

쟁쟁한 나라들의 이름을 줄줄이 말하는 소리에 카벤은 의아해졌다.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야?”

아헬은 말을 이었다.

“네드고렌 왕에게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딸이 하나 있고. 즉, 네드고렌의 공주가 아직 남아 있다는 거야.”

그 말에 왕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헬은 말을 이었다.

“공주를 손에 넣으면 우린 그 모든 국가와 혈맹이 될 수 있어.”

말하는 바를 카벤은 알아들었다.

“지금 나보고 네드고렌 공주에게 청혼하라는 거야?”

“많은 나라들이 그렇게 세력을 넓히니까.”

고개를 숙여 보이는 아헬을 내버려 둔 채 왕은 잠시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그러하라?”

카벤은 잠깐 생각하다 한숨처럼 말했다.

“그런 걸 이용하겠다는 것도 별로지만 우리나라가 그 정도까지 힘이 없다는 것도 슬프구만.”

“송구합니다 전하.”

격식을 갖추며 허리를 굽히는 친구를 보다가 카벤은 곧 말했다.

“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란 건 사실이지.”

아헬은 자신의 입지를 다져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런 친구의 노력에 무조건 거절하기 보다 자신도 어느 정도 성의는 보여야 했다.

“네드고렌에게 혼인서를 넣어 봐. 연락이 온다면 마침 가는 길이니 가보자고.”


그 대답에 다행이라는 듯 아헬이 끄덕이는 걸 보다가 카벤은 다시 숲이 있었던 자리로 눈을 돌렸다.

아헬의 말대로 자신이 조금 더 강력한 왕이었다면 여기 오는데 걸린 시간이 이렇게 길지 않았을 것이고 아헬 역시 지금의 얘기를 꺼내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에 약간의 답답함을 느끼며 그는 기사들이 자리를 정리하는 곳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네드고렌은 용이 태어나지 않는 땅이며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은 척박한 땅이 대부분이다. 그런 곳이 나름의 입지를 가지고 있는 건 혈맹덕분이며 그런 혈맹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네드고렌의 유일한 장점인 왕실 핏줄들이 가지고 있는 수려한 외모 덕분이었다. 그중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막내 공주가 특히 그랬다.



“이느.”

아침부터 성의 부엌은 시끄럽다.

“이느.”

“예에~.”

어디선가 길게 목소리가 날아오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 왔다. 계단 아래서 금발 머리가 조금씩 보이더니 곧 이느가 헐떡거리며 뛰어 올라 왔다. 성의 부엌은 이 층에 있다.

“부르셨어요?”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며 이느는 거세게 뛰고 있는 심장 근처에 주먹을 댔다.

“어디 있었어?”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먹어봐.”

대답은 필요치 않았는지 듣지도 않고 피에트리타는 커다란 솥단지 안에 있는 무언가를 국자로 떠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직 호흡도 다듬지 못한 이느에게 그녀가 내민 국자가 입으로 들어왔다. 사레걸려서 콜록대다가 곧 이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맛있어요.”

진짜 맛있다.

“이게 뭐에요?”

“감자랑 양파.”

“그게 다예요? 먹던 맛이 아닌데요?”

“새로 구한 향신료를 좀 썼지.”

새침히 피에트리타는 대꾸했다.


네드고렌의 공주 피에트리타는 요리 솜씨가 아주 좋았다. 할 일 없는 궁에서 그녀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기도 했고 게다가 경쟁심 또한 강해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내로라하는 요리사들을 들볶아 자신의 요리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 많은 구혼자님들이 공주님 음식 솜씨가 이렇다는 거 알면 감탄할 텐데.”

우물우물 고기를 씹으며 이느는 혼자말을 했다.

“이걸 모르다니 안타까워요.”

“이런 거 안 내세워도 내 매력은 차고 넘쳐.”

늘어붙지 않게 하기 위해 냄비 안을 국자로 저으며 냉랭히 피에트리타가 대꾸했다.

“하긴.. 목소리가 고와서 노래도 잘하시고.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요.”

입안에 다시 고기 한 점을 넣으며 이느가 우물거렸다.

“그 성질만 안 들키면 결혼해서 정말 사랑 받으며 사실..”

“뭐?”

“아, 아니에요.”

서둘러 얼버무리는 그녀를 째려보다가 무뚝뚝하게 피에트리타는 말했다.

“오라버니는? 페이누트에서 연락 왔어?”

“아직이요.”

“그래?”

네명의 형제 중 유일하게 그녀와 친한 둘째 오라버니는 페이누트의 여왕과 결혼해 타국에 떨어져 있다. 최근의 여러 일과 겹쳐 피에트리타는 오라버니를 보기 위해 페이누트로 가겠다는 연락을 전한 뒤였는데 답장이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답장 오면 바로 방으로 가져가겠습니다.”

그녀가 기다리는 걸 알고 있는 이느가 서둘러 말했다.

“방에 두지 말고 바로 나한테 가져와.”

“어디 계실 줄 알고요.”

성이 크기도 했지만 의외로 피에트리타는 여기저기를 잘 돌아다녀 찾기 어려울 때도 있다.

입을 좀 내밀며 작게 우물거리는 그녀를 못마땅한 듯 피에트리타가 쳐다봤다.

“시키는대로 좀 해. 말대답 좀 그만 하고.”

“네.”

길게 대답해 봤자 좋을 게 없는 이느가 냉큼 그 말에 대꾸했다.



“이느.”

공주가 부엌에 있는 동안 그녀가 시킨대로 페이누트에서 혹시 서신이 오지 않았나 다시 한 번 성문지기들에게 갔다 들어오다가 이느는 중간 정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다른 시녀들 무리와 마주쳤다.

“또 공주님 심부름?”

왕의 후궁들의 시녀 무리인 그녀들은 서열이 높았고 그래서인지 늘 기세가 등등했다.

“너도 참 고달프겠다."

“뭐가?”

“공주 비위 맞춰 주려면 힘들잖아.”

“그렇지도 않아.”

이 무리들과는 굳이 오래 말을 섞고 싶진 않았지만 그녀가 모시는 피에트리타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다.

“경우에 어긋나는 말은 안하시는...”

“편들 거 없어. 어차피 공주는 곧 여길 떠날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결혼하면 말이야.”

여자들이 키득거렸다.

“왕께서 공주님은 아주 비싸게 팔거라는 말이 도는데 뭐.”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녀가 달래듯 말했다.

“우리가 입에 올릴 소린 아니잖아.”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받아치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시녀들이 살짝 입을 가렸다.

“어지간하다니까.”

이 성에서 공주를 좋게 보는 자들은 거의 없는데 그런데도 꼬박꼬박 그녀 편을 드는 이느를 이상하게 보는데도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너 공주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이느.”

그러는데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느가 돌아보니 조금전만해도 부엌에 있던 피에트리타가 정원 중간 샛길로 나오고 있었다.

창백해져서 몸을 숙이는 시녀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피에트리타는 말했다.

“서쪽 탑 청소해야겠어. 준비해.”

이느가 움찔했다.

“또요?”

피에트리타는 한 번 꽂히면 성 구석구석이 광이 날 때까지 청소를 해댔다. 그런데 그게 결벽증 비슷해서 성안 모든 사람들은 말하자면 검은 돌이 하얘질 정도까지 사방을 닦아야 했다.

“청소한지 삼 일도 안됐는데요?”

“그 얘긴 새들한테 해.”

서쪽 탑은 새들로 유독 금방 지저분해졌다.


“준비시킬게요.”

시녀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동안 이느는 대답했다.

“꾸물대지 말고 빨리 해.”

무자비하게 피에트리타는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이느는 확인했다.


“저기, 공주님. 근데 혹시 조금 전에.. 들으셨어요?”

“뭘?”

목소리가 차가웠다.

“내가 비싸게 팔릴 거란 소리?”

“죄, 죄송해요.”

안색이 변해서 이느가 머리를 조아렸다.

“뭘 새삼.”

의외로 그녀는 그 정도 말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고작 후궁 수발드는 계집애들 지껄이는 소리 상관없어. 하지만 한 번만 더 내 귀에 들릴 정도로 말했다가는 발밑에 엎드려 그 손바닥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빌게 해줄거야.”

“네...”

이내 냉랭하게 덧붙이는 소리에 기가 죽어서 작게 이느가 대답했다.


“난 아버님을 뵈러 갔다 올거야.”

부엌에서 요리를 마치고 나와 서족 탑으로 가려던 그녀에게 왕의 방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 동안 청소도구랑 가지고 가 있어.”

“네.”

이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느가 일꾼들 몇 명이랑 피에트리타가 아끼는 청소도구들을 챙겨 서쪽 탑으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동안 피에트리타는 아버지이자 네드고렌의 왕이 주로 기거하는 성의 중앙 탑으로 가 가장 화려한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문이 안의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방은 크기만 해도 탑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넓고 천장이 끝없이 높다. 그녀가 걸어가는 방의 중앙을 제외하고 양쪽에는 푹신하고 사람 크기만큼 큰 쿠션들이 수없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거기엔 화려한 옷을 입었거나 벗은 여자들이 방안을 감싸고 있는 향유만큼 어지럽고 아찔한 자태로 앉거나 누워 있었다.


주위에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는 방 끝에 있는 서너개의 계단 앞까지 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계단의 상단에 놓여 있는 가장 두껍고 화려한 쿠션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녀가 자리에 서자 몸을 옆으로 틀었다.

“피에트리타.”

“찾으셨습니까 아버님.”

침착하면서도 예를 갖추어 그녀는 말했다.

“그래.”

왕이 자세를 바꾸자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

“한동안 못 본 것 같아 찾았다.”

아버지인 네드고렌의 왕을 만나는 건 오늘로 몇 달 만이다.

“그 동안 별 일 없고?”

묻는 목소리가 나른하다. 딱히 애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음색.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답하는 피에트리타의 음색 역시 이느와 말할 때와는 다르게 건조하고 경직되 있다. 왕이 무자비하고 잔혹하다는 걸 잘 아는 그녀다.

“그렇구나.”

피에트리타의 얼굴을 시선으로 한 번 훑으며 별 거 없다는 듯 왕은 응수했다. 자신의 상품에 흠집이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눈빛이다.

“곧 네 혼처를 정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혈육인 만큼 왕은 어느 때보다도 신중했다. 그 덕에 그녀는 아직 여기 있었으나 슬슬 그것도 끝날 때가 되었다.


“말해봐라. 혹시 가지고 싶은 게 있는지.”

문득 왕이 말했다.

혼처를 정하기 전 왕은 포상이라도 하듯 큰 선물을 하나씩 하곤 했는데 이 얘기가 나왔다는 건 이제 정말 결론이 날 때가 되었단 뜻이란 걸 절감하며 피에트리타는 치마단을 꾹 움켜 잡았다.

“비싼 장신구나 옷. 아니면 어여쁜 아이들이나...”

방 저쪽을 가리키듯 손짓을 하며 왕은 말했다.

“원하는 건 뭐든 갖게 해주마.”

“아니오.”

낮게 피에트리타는 대답했다.

“전 원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말했다.

“대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페이누트에 다녀올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둘째한테?”

“오래 오라버니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약 선물로 주실 생각이라면 가능한 길게 다녀오고 싶습니다.”

이것은 정말 그녀가 원하는 한 가지였다.

“흠..”

왕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 되었다.

“그러렴.”

그리고 말했다.

“가서 몇 달 쉬다 오너라.”

어차피 혼처를 결정하는데 시간은 걸린다. 그녀가 거기 있는 동안 혼처를 정하고 돌아오면 바로 결혼식을 올리면 된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마지막 선물은 확실히 해주겠단 투에 피에트리타는 대답했다. 그리고 밝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는 눈을 내리 떴다.


피에트리타는 방을 나왔다. 문 앞에 서서 그녀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 손을 댔다. 장신구를 잘 안하는 그녀가 꼽고 있는 작은 유리 머리핀은 페이누트로 가기 전 오라버니가 주고 간 선물이었다. 그녀는 머리핀을 움켜 잡았다. 이것이 아마 그녀가 누리게 되는 마지막 자유가 되리라.


“피에트리타 님.”

이느가 다가왔다.

“왜 여깄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피에트리타는 냉랭히 물었다.

“서쪽 탑으로 가랬잖아.”

“기다렸는데 오지 않으셔서..”


대답하며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듯 성큼 걸음을 옮기는 피에트리타의 뒤를 이느는 서둘러 따라갔다. 사실 피에트리타가 여기로 왕을 만나러 갔다 돌아올 때는 늘 안색이 좋지 않았기에 한참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서 이느는 쫓아왔다.


“얘기는 잘 하셨어요?”

중앙탑을 빠져 나와 서쪽 탑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가며 이느는 물었다.

“응.”

피에트리타는 대답했다.

“며칠 안에 페이누트로 갈 거야.”

“아직 페이누트에서 연락 없었는데요?”

“괜찮아. 아버님이 허락하셨으니까.”

“정말요?”

왜 허락했는지 이유는 말하지 않고 피에트리타는 서쪽 탑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접어 들었다.

서쪽 탑은 성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했지만 가는 길이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워 피에트리타가 자주 찾았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어쨌든 공주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며 다행이라는 듯 이느는 말했다. 그리고 서둘러 덧붙였다.


“저기 그리고 또 공주님께 혼담을 청한 나라가 왔어요.”

“그런 얘기 못들었는데?”

어느 나라가 제일 값이 나갈지 모르니 아버님은 찾아오는 모든 혼담을 환대하며 맞았고 최소한의 예의로 보이고 싶었는지 그 자리에는 그녀도 항상 동행했다. 방금 방에서 그런 얘기는 없었다.

“아.. 지금 막 도착했대요. 이제 전하께 고하려고 기다린다고.”

“어느 나라야?”

“베느트래요.”


“베느트? 그런 나라도 있어?”

“대륙이 분열되면서 생긴 신생국 중 하나에요. 신생국 중에서는 그래도 꽤 유명한...”

“신생국?”

기도 안찬다는 얼굴로 피에트리타가 코웃음 쳤다.

“대륙 남쪽이 분열되면서 여러 나라가 생겼다더니 이젠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에서까지.”

찡그리며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내 꼴이 점점 우스워지네.”

목소리가 사뭇 커서 이느는 좀 당황했다.

막 도착한 베느트 일행은 서쪽 탑 근처 화원에 있다. 구혼자인 베느트 왕에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말했는데도 일행이 같이 있겠다고 한 곳은 여기서 멀지 않다. 혹시나 소리가 들릴까 노심초사하며 이느가 눈치를 살폈다.


“공주님. 목소리를 좀...”

“돌려보내. 아버님도 어차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실 거다.”

이제 생긴 작은 신생국을 왕이 마음에 들어할 리가 없다. 걸어가며 냉담히 피에트리타는 말했다.

“몸이 안 좋다고 하던지. 어디 나갔다고 하던지.”

“공주님.”

이느가 울상을 했다. 다 듣겠다 진짜. 그러나 그녀의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피에트리타는 그대로 탑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피에트리타가 울상인 이느와 서쪽 탑으로 들어가는 동안 서쪽 탑 근처에서는 스무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키가 훌쩍 큰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표정은 담담했으나 척 보기에도 준수한 청년인 베느트 왕은 도착을 알리러간 자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스물 여섯의 그는 여러 가지 나라일로 머리가 복잡한 젊은 왕이다. 왕이 된지 불과 1년도 안된 사이 수도에서는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노리는 왕족들이 득실거렸으며 동시에 씨스자들의 침략으로 인해 안팎으로 그는 힘에 부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 위해 그는 아헬의 말대로 지금 네드고렌에 혼인을 청하러 와 있다. 골치 아픈 일은 하나라도 줄여야 한다. 여기 서 있는 목적은 그것 하나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착을 알리러 간 병사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카벤은 화원을 잠시 눈으로 살폈다.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건 가만히 앉아 있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다리면서 성의 분위기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병사나 기사를 제외하고는 화려해 보이는 여자들 뿐이다. 네드고렌 왕이 화려한 걸 좋아한다고 하더니 여자들의 분위기만 봐도 알만하다.


그러다 어딜 나갔다 오는지 시녀 한 명과 떠들며 화원으로 들어서는 여자를 봤다. 등을 지고 있어 이쪽을 제대로 본 것 같진 않지만, 그리고 대화를 보아하니 제대로 볼 생각도 없는 것 같았지만, 이느의 걱정대로 그는 여자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 없이 들을 수 있었다.


“저렇다는데.”

여자가 눈치를 살피는 시녀와 사라지자 카벤은 으쓱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 뿐 아니라 기다리고 있던 그의 기사들 역시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공주의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겠어.”

“하지만 전하..!”

울컥 일리어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런 너무 무례한 태도입니다. 감히 전하께...”

다른 이들의 표정도 적잖이 굳어져 있었다.

“됐어 일리어스.”

분개하는 신하들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제대로 된 연락도 없이 온 건 우리 쪽이다. 저쪽이 뜻을 확실히 전했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 할 거 없어.”

카벤은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그가 몸을 돌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오자마자 다시 떠날 준비를 하는 기사들을 보다가 카벤은 고개를 돌려 여자가 사라진 쪽을 잠깐 응시했다.


청혼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는 반감은 없다. 애초에 결혼에 뜻이 없었던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접견까지 거절한 것은 도를 넘은 무례였고 왕에 대한 모욕이었다. 왕을 모욕하는 것은 나라를 모욕한 것과 같았고 일국의 왕답게 그는 나라에 대한 모욕은 잊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떠나 그는 개인적으로 당한 모욕을 국가적 모욕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속이 좁은 남자이기도 했다.


말에 올라 고삐를 옆으로 잡아 당기며 그는 뒤돌아 우뚝 솟아 있는 네드고렌의 왕성을 한 번 올려다 봤다. 오늘 일은 다시 떠올릴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베느트로 돌아가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열흘 뒤, 피에트리타와 이느. 그리고 호위병들이 딸린 마차가 페이누트로 출발했다.

네드고렌에서 페이누트까지는 대략 스무날 정도가 걸린다. 네드고렌을 가로지르는 동안 마을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국경을 빠져 나와 주인 없는 땅이자 중립지인 고트의 작은 마을에서 다시 이틀 밤을 보내자 마차는 이제 페이누트로 가는 중간쯤까지 와 있었다.


“지겨워.”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피에트리타가 짜증섞인 소리를 냈다.

“많이 왔는데요 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이느가 그녀를 달랬다. 애초에 빨리 출발하고 싶어 하던 피에트리타는 며칠 비가 계속 오는 통에 출발이 지연된 때부터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뭐에 쫓기듯 그녀는 서둘렀다.


“넌 잘도 참는구나 이느.”

출발해서부터 지금까지 지치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며 피에트리타는 중얼거렸다. 마을에서 쉴 때도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기 일쑤였고 뭐 하나 보더라도 이느는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재밌어요.”

이느가 헤헤 웃었다.

“성에서 나오는 것도 오랜만이고.”

웃는 얼굴을 힐끔 보다가 이내 시큰둥한 기색으로 피에트리타는 마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탄한 길을 마차는 한참 조용히 갔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진 피에트리타를 굳이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이느 역시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창밖을 보고 있던 피에트리타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저긴 어디야?”

그녀의 질문에 이느가 밖을 내다보았다. 장미나무 덩쿨이 온통 둘러 싸인 사이로 호수가 보인다. 이느가 반색했다.

“베느트 령 휴양지 아레입니다.”

“베느트?”

유난히 좋아라 하는 기색을 보며 피에트리타가 심드렁히 물었다.

“그런 나라도 있어?”

“아휴, 공주님도. 왜 저번에 혼인을 청하러 오기도 했잖아요.”

“그랬나?”

기억에 없다. 몸을 반쯤 창밖으로 내밀며 피에트리타는 마차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응시했다.

“예쁘네.”

“그렇죠?”

시큰둥한 음성에 분위기 파악 못하고 이느는 좋아라 떠들었다.

“요즘 엄청 뜨는 휴양지에요. 베느트 령이지만 타국인도 들어갈 수 있게 되 있고.”

“타국인을 마구잡이로 자기 나라에 들인다고?”

여전히 경치에 정신이 팔린 채 멍하니 피에트리타는 말했다.

“베느트 왕도 정신이 나갔구나.”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검문소가 있죠.”

자세히도 알아 봤는지 이느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신분 확인도 하고 곳곳에 베느트 경비대도 있대요. 뭐 그렇더라도 타국인도 와서 쉴 수 있는 휴양지라니... 확실히 특이하긴 하지만요.”

피에트리타는 장미 울타리가 이어진 길을 쳐다봤다. 호수에서 제법 떨어진 길인데 이런데까지 장미로 그림을 그린 듯 꽃들이 이어졌다. 장미 울타리는 높고 견고해 보인다.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다.


“아~~ 가보고 싶어라. 진짜 요즘 말 많이 돌아요. 지난 달에 제 친구도 갔다 왔는데, 세상 천국이 따로 없대요. 그런 곳은 어디서도 못 가봤다고.. 며칠동안 입에 침이 마르게 말하고 다녔다니까요.”


“그래?”

이느의 말에는 별로 관심없이 무심한 듯 대꾸하며 피에트리타는 여전히 마차 밖의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문득, 그녀가 말했다.

“가보자.”

충동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딜요?”

“방금 전까지 네가 입이 닳도록 말했던 곳.”

이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길요? 지금요?”

“어차피 쉬어야 할 때 됐잖아.”

피에트리타는 무심히 말했다.

“이 길을 두 번 지날 것 같진 않으니까. 저기 가볼 기회는 지금 뿐일 거 아냐?”

“아...”

무슨 말인지 이느는 알아 들었다. 페이누트에서 돌아오면 왕이 본격적으로 그녀의 혼담을 진행시킬 거란 소문을 출발하기 전 이느도 들었다. 그녀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 그럴까요 그럼.”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에 애써 웃으며 이느는 말했다.

“말도 준비시키고 호위병들도 좀 쉬라고 하겠습니다.”

“응.”

무심히 대꾸하며 피에트리타는 계속 창밖을 응시했다.


그렇게 해서 말을 돌려 마차는 베느트의 휴양지인 아레로 들어섰다.





장미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서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잠깐 움직인 뒤 마차는 아레의 검문소에 다다랐다. 이느의 말대로 타지인을 들이는 게 익숙한지 검문소 병사들은 능숙하게 마차를 검문하고 일행의 신원을 확인했다.


“네드고렌의 귀족입니다.”

병사들이 마차를 검문하는 동안 마부 옆에 앉아 조금 전 피에트리타가 시킨 대로 이느는 작게 말했다.


“마차에 왕가의 문장이 버젓이 그려 있는데요?”

“이런 촌구석에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겠어?”

냉랭히 피에트리타는 대꾸했다.

“무사 통과일테니까 걱정 말아.”


그리고 그 말대로 다행히 병사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하긴 아레를 구경하러 온 사람이라면 그들에게는 왕족이나 귀족이나 높으신 신분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리소에서 출입을 확인하느라 잠깐 시간을 지체하고는 마차는 곧 베느트의 휴양지 아레로 들어 섰다. 그리고 아레로 들어와서도 피에트리타의 말대로 왕조의 상징인 세 개의 검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와...”

들어서자 마자 다시 펼쳐 있는 장미 길을 보고 감탄하는 이느를 맞은 편에 앉은 피에트리타는 심드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감탄은. 장미는 궁에도 있어.”

“하지만 색이 너무 예뻐요.”

아까 호수쪽에서 보던 것과 또 다르다. 다양한 색의 장미들이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게다가 피에트리타가 시골 촌구석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예상외로 아레는 굉장히 넓었다.


마을 중앙 광장은 탁 트인 채 넓었고 그 가운데는 엄청나게 커다란 분수가 있었다. 그 곳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어 분수를 기준으로 사거리에는 가게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가게보다 훨씬 더 많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볼 게 풍성하다고 느끼며 이느가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마차는 광장 한 가운데 분수 옆에 멈춰섰다.

말이 자리에 서자 피에트리타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분수를 쳐다보았다. 분수 가운데 조각상이 있다. 피에트리타는 거대한 용의 석상을 올려다 보았다.


“베느트는 용이 태어나는 땅이에요.”

호위병들이 말을 교환하고 교대로 식사를 하고 오는 동안 여기서 기다리기로한 이느는 피에트리타가 용의 석상을 쳐다보는 걸 알고 말했다.


“그래?”

“네. 그래서 신생국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라라고요. 지난 번에 얘기해 두려고 했는데 공주님 듣지도 않으시고..”

길게 잔소리하는 이느를 내버려 둔 채 피에트리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상당히 북적거린다. 지나가는 행인이 많다.

“별 것도 없네.”

그러나 여느 시장 풍경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이 정도 가지고 요란은.”

“에이~ 공주님도 와보고 싶다고 하셨으면서.”

“그러니까 와 봤자 별 거 없다는 거야.”

“아직 조금 밖에 못봤잖아요. 설마 여기가 다는 아니겠죠.”

그녀가 친구에게 들은 바로도 구석구석 볼 게 다양하다고 했으니 광장 중앙이 아레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느의 설명에도 흥미를 잃은 듯 피에트리타는 짧게 하품했다. 계속 마차를 타고 움직인데다 좀 돌아다녔더니 그새 피곤해진다.

“이느.”

그녀는 말했다.

“난 잘테니까 기사들이 와서 돌아갈 때까지 깨우지 마.”

지금 옆에 있는 기사와 호위병들이 교대로 식사를 하고 돌아오면 다시 출발할 것이다.

“그 동안 구경하고 싶음 넌 마음대로 하고.”

“더 안보시게요?”

되묻는 이느를 내버려 둔 채 피에트리타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돌부리에 걸렸는지 마차가 덜컹거리는 느낌에 피에트리타는 살짝 눈을 떴다. 아레를 빠져 나와 마차는 산길을 가고 있다. 자는 걸 방해하지 않으려 했는지 이느는 옆에 없고 마차 안에 그녀 혼자뿐이다.

마부석 옆에 앉아 이느는 아마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피에트리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피에트리타는 다시 잠에서 깼다. 마차는 멈춰 있고 주변은 조용하다. 눈을 비비며 그녀는 창을 가리고 있는 커텐을 옆으로 밀어내 밖을 보았다.


“이느.”


고개를 내미니 마차 앞쪽에 기사와 호위병들이 몰려 있다.


“아...”

그 옆에 같이 있다가 부르는 소리에 이느가 달려왔다.

“죄송해요. 깨셨어요?”

“무슨 일이야?”

“마차에 문제가 생겨서요.”


한참 길을 가다 느낌이 이상해 마부는 말을 멈추었다. 살펴보니 마차의 바퀴 연결부가 헐거워져 있었다.

“손보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이상하게도 바퀴 6개가 다 그랬다.

“그래. 알았어.”


별 거 아닌 일에 관심이 사라지며 피에트리타는 다시 누웠다. 그녀가 자리에 눕는 걸 보고 이느는 다시 마차 앞쪽으로 갔다.


이느가 가버리자 피에트리타는 눈을 떴다. 낮잠을 길게 잤는지 잠이 다시 들지 않았다. 시간이 걸린다니 마차 안에 가만 있는 것도 지루해 그녀는 마차 밖으로 나갔다. 앞을 보니 기사들이 호위병을 향해 뭐라고 지시하는 게 보였다.


자신은 안중에 없었는지 분주한 기색에 피에트리타는 잠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산길 한가운데. 지나가는 사람은 없고 울창한 나무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게 보인다. 잠깐 그쪽을 보다가 피에트리타는 앞으로 걸어갔다.


나무 사이로 들어와 그녀는 나무껍질에 손을 댔다. 고목의 거칠거칠하고 오래된 기운이 손을 타고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하다. 산속 공기는 깨끗하고 마차와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닌데 주위는 고요하다.


아무도 자신을 보는 눈이 없는 건 처음이다. 잠깐 산책하듯 그녀는 나무 사이를 걸었다.


간간히 새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음악소리보다 듣기 좋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아레로 들어갔던 것보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며 원래 있던 곳으로 천천히 그녀는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마차가 보이지 않아 그녀는 멈칫했다. 앞으로 나가 길 저쪽을 보았지만 그녀가 타고 왔던 마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자신이 자고 있다고 생각해 조용히 출발한 모양인데..

“이느. 이 바보.”


찡그리며 그녀는 발끝으로 바닥을 몇 번 톡톡 쳤다. 마차가 비어 있다는 건 곧 알아 챌 것이다. 그럼 이느가 혼비백산하여 자신을 찾으러 달려 올 것이다. 그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는 순간 하늘 위를 날고 있는 거대한 생물체를 보고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용이다.

머리 위를 다 덮을만한 커다란 날개와 긴 꼬리.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용은 사람을 의식하지는 않는 듯 느리게 하늘을 날아 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용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반복적으로 올려다 보며 피에트리타는 용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는지 확인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그녀는 나무 사이를 뛰듯이 걸어갔다. 용과 마주치다니. 가까이서 보고 싶다. 크기가 얼마나 될까. 마을 광장에 있던 분수상 만큼? 그보다 클까?


그렇게 계속해서 용을 따라가다가 문득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몰랐는데 여긴 지금 길이 아니다. 돌아보니 나무만 울창할 뿐 어느 방향에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굳어졌다. 길을 잃었다. 당황스러운 기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주변으로 살짝 어둠이 내려앉았다. 설상가상으로 해가 지는 시간이다. 어두운 산길을 헤매는 건 생각만으로도 위험하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당황해 그녀는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산속의 어둠은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짙게 내려앉는다. 해가 산을 넘어가 빛이 사라지자 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는 깜깜해졌다. 이런 산속에서 짐승과 마주치는 게 위험할지 사람과 마주치는 게 위험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있길 바라며 그녀는 처음 있었던 장소를 찾기 위해 계속 걸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지 아니면 아까 있던 곳과 가까운 건지 알수도 없이 아까의 울창하고 상쾌했던 나무들은 이제 낯설고 기괴한 느낌의 존재가 되어 사방에 펼쳐 있을 뿐이었다.


발 아래 진흙을 잘 못 밟았는지 한참을 걷다가 발이 미끄러지며 그녀는 앞으로 넘어졌다. 그 와중에 튀어나온 나무 뿌리에 얼굴을 부딪쳤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 진짜..!”

짜증이 나서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산속에서 공허할 뿐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계속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겨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헤매고 나서 완전히 지친 그녀가 나무 사이를 통해 앞으로 나가는데 어둠 저쪽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다. 오두막 한 채가 눈앞에 놓여 있는 걸 깨닫고 그녀는 그쪽을 향해 뛰었다.


집 앞까지 와 숨을 고르며 나무로 된 문을 두드리려다 그녀는 잠깐 손을 멈췄다. 오두막 한 채가 산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아까는 누구라도 만나길 바랬지만 혹시 이곳이 산적 소굴이기라도 하면..

정신없이 헤맨 와중에도 망설이는데 문이 먼저 벌컥 열렸다. 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불빛에 갑자기 앞이 밝아져 찡그리며 피에트리타는 손으로 앞을 가렸다.


불빛을 등지고 걸어 나온 누군가가 그녀를 보고 자리에 섰다.

“뭐야?”

저음의 침착한 음성이 들렸다.


불빛이 눈에 익자 그녀는 남자를 알아 볼 수 있었다.

키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자였다. 다쳤는지 붕대 감은 한 팔을 걸대로 목에 건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산적?”

그녀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어딜 봐서 산적이야?”

그 말인 즉 여기가 산적소굴은 아니란 뜻에 그나마 안심하며 그녀는 말했다.

“너같은 자가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할 신분이다.”

“뭐?”

밑도끝도 없이 기세등등하게 외치는 소리에 남자가 멈칫했다.


“물을 다오. 오래 걸었더니..”

그러나 개의치 않고 그녀는 칼칼한 목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나서 마을까지 나를 데려다준다면 후사하겠다.”


미동없이 남자는 그녀를 응시했다.

“부탁하는 처지에 그렇게 말하니 왠지 기분이 나쁜데.”

그리고 말했다.

“산적이 아니라면 후사는 필요 없으니 조용히 꺼져.”

“뭐가 어째? 이런 무례한 놈이...”

“무례한 건 지금 남의 집 앞에 있는 그쪽이지.”

이 밤중에 집 앞에 낯선 이가 서 있는 게 달갑지 않은 건 이쪽이다.

“오밤중에.”

“그야 사정이 있어서...”

“거기까진 내가 알 거 없고.”

냉담히 대꾸하는 소리에 피에트리타는 그를 노려봤다. 그리고 말했다.

“난 네드고렌의 공주다. 그게 무슨 뜻인줄 알아? 날 극진히 대하면 네가 평생 꿈도 못꿀만한 보상이 있을 거란 소리야.”


남자의 시선이 힐끔 그녀를 향했다. 이제 그의 태도가 변할 걸 예상하며 피에트리타는 그 시선을 마주댔다.

“하다하다 이제 미친 여자까지...”

그러나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피에트리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가 어째?”

낮부터 굶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데다 미친 여자 취급은 그녀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다.

“피곤해 죽겠는데...”

중얼거리며 남자는 몇 발 앞으로 나왔다. 그 기색에 반사적으로 그녀는 두어발 뒤로 물러났다.

“마을은 저쪽.”

어둠 한 쪽 산길을 남자가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 가서 극진히 대접할 사람을 찾아보든가.”

“기다려.”

다시 몸을 돌리려는 그를 뒤에서 피에트리타가 우악스럽게 잡아 당겼다. 그 기세에 멈칫하며 남자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을 딛는데 바닥에서 뭔가가 빠삭하고 깨지는 소리를 냈다.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에 피에트리타는 멈칫하며 머리에 손을 댔다. 머리핀이 없는 걸 알고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응?”

뭔가 밟았나 싶어 남자 역시 발아래를 보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여자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뭐야?!”

“날 미친 여자 취급한 것도 모자라 내 걸 밟아?”

남자의 목을 잡고 머리를 잡아 뜯으며 피에트리타가 고함쳤다.

“이게 어떤 건 줄 알아?! 물어내. 물어내 당장!”

“무슨 짓이야?! 이거 안 놔?!”

켁켁 거리며 그녀를 떨어뜨리려고 그가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사과 해. 당장 사과 하라고..!”

“아 좀...!”

그러나 떨어지지 않고 더욱 더 덤벼드는 그녀를 한 손으로 잡아 그는 겨우 피에트리타를 밀쳐냈다. 바닥으로 쿵하고 떨어지며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런 미친..!”

벌겋게 손자국이 난 자신의 목 언저리를 주무르며 그는 화를 냈다.

“너 공주건 뭐건 당장 꺼지지 않으면 가만 안 둬!”


쾅소리와 함께 문이 세게 닫혔다. 바닥에 주저 앉아 있던 피에트리타는 멍하니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일어나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려 그녀는 부서진 머리핀을 찾았다. 산산조각 난 머리핀을 손에 쥐는 찰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비는 곧 소나기가 되어 산속을 적시기 시작했다. 깊은 밤 산속의 빗소리는 청명하고 상쾌하게 들리지만 지금은 좋지만은 않다.


머리핀을 손에 쥔 채 처마 밑으로 가 거기 쪼그리고 앉아 피에트리타는 겨우 비를 피했다. 비는 그칠 생각을 안한다. 그녀는 남자가 아까 가리킨 쪽을 쳐다봤다. 깜깜한 어둠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방향에 마을이 있다고 해도 혼자서 찾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혼자 갔다 또 길을 헤매면.. 인가를 또 찾는단 보장이 없다.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그녀는 손을 내려다 봤다. 다 부서진 머리핀에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으며 그녀는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어디까지 내려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느가 아까 그 장소로 온다고 해도 여기 와 있는 자신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

그렇게 생각하는데 쾅! 소리에 그녀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덧문을 열고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거기 있을 거야?”

냉담히 그가 말했다.

“안 가냐고.”

“안 갈 건데.”

머리핀을 부순 그를 노려보며 피에트리타는 사납게 대답했다.

“신경 꺼. 얼어 죽든 말든.”

“우리 집 앞인데 어떻게 신경 꺼? 시체라도 나오면. 누구 경칠 일 있어?”

“흥. 내가 여기서 죽으면 그거 하난 다행이네.”

피에트리타는 그를 다시 노려봤다.

“내 머리핀.”


뜻 모를 소리와 함께 꿈쩍 않을 기색에 속이 답답해져 남자가 얼굴을 손으로 쓸어 내렸다.

“헛간.”

그가 손을 뻗어 집 뒤를 가리켰다.

“날 밝을 때까지 만이야. 해 뜨자마자 나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남자가 덧문을 다시 쾅 닫았다. 닫힌 덧문 쪽을 보다가 피에트리타는 어기적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덧문 옆으로 돌아 집 뒤로 가니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헛간이 하나 보였다. 머리 위로 두두둑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그녀는 헛간 앞으로 뛰어가 문에 걸린 사각 나무 빗장을 옆으로 밀어 냈다.


비는 밤새 내렸다. 헛간도 춥긴 마찬가지였지만 비바람이 막아지니 바깥보다는 낫다. 피에트리타는 헛간 한가운데 쌓여 있는 짚더미 쪽으로 걸어갔다. 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오늘 밤만 지나길 기다리자.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지푸라기 사이에 더욱 몸을 묻었다.





쾅! 하고 문이 부딪치는 소리에 피에트리타는 움찔하며 눈을 떴다. 부스스한 얼굴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못 잘 줄 알았는데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온통 쑤시는 몸을 일으켜 앉으니 남자가 헛간 문을 연 채 그 옆에 서 있었다.

“나와.”

퉁명스런 음성에 피에트리타는 눈을 좀 비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 붙어 있는 지푸라기를 서너번 털어내며 그녀는 남자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네드고렌 사람이라고 했지?”

그가 물었다.

“난...”

뭔가 또 얘길 하려다가 꾹 참으며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

대꾸하는 소리에 한숨을 섞으며 남자는 다시 말했다.

“일행 있어?”

피에트리타가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쯤이면 눈치 채고 이느가 달려 오고 있을 것이다.

“어디서 헤어졌어?”

“페이누트로 가는 산중턱.”

“그 사람들은 이 근처 알아?”

“오다가 아레에 들린 적 있어.”

“그럼 그쪽으로 찾으러 올 수도 있겠군.”


헛간 밖으로 나와 그는 뒤쪽으로 나 있는 길을 가리켰다.

“길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마을에 도착할 거야.”

“마을?”

“아레와 연결된 마을이야. 거기서부터는 붉은 돌이 깔린 길로 가면 특별한 검문 없이 아레로 들어갈 수 있어.”

피에트리타는 그가 가리킨 샛길을 쳐다봤다. 아침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날이 흐려서 길이 어두워 보인다. 게다가 산길이라 으스스하다.

“빨리 나가 이제.”

개의치 않고 무자비하게 남자가 다시 말했다.


완전히 해가 뜬 것은 아니지만 밤보다야 훨씬 덜한 으스스함을 뚫고 피에트리타는 남자가 가리킨 길을 따라 걸었다. 다행히 길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걷기를 한참, 마지막 나무를 통과해 앞으로 나오자 인가가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을은 생각보다 넓었다. 이른 아침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행인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훨씬 더 안심이 되었다. 마을 끝에 이르러 남자가 가르쳐준 대로 바닥에 붉은 돌이 깔린 길을 발견하고 그녀는 또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정오가 거의 다 됐을 때쯤, 그녀의 눈에 어제 본 분수대가 보였다. 눈에 익은 분수대에 조금 더 안도감을 느끼며 그녀는 걸어가 분수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이느가 찾으러 오길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오후를 지나 저녁이 다 되도록 작은 소란 하나 없었다. 피에트리타는 길에 지나다니는 마차만 보면 목을 길게 빼고 기웃거렸지만 왕가의 문장이 찍힌 마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분수 아래 주저 앉아 있던 피에트리타는 배가 고파서 허리에 손을 댔다. 보석으로 치장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팔아서 요기라도 할텐데 그녀는 왕이 명하는 연회에 참가하지 않는 이상 장신구라고는 머리핀 외엔 하지 않았다. 그 점이 후회되기는 처음이다.

이느. 대체 어디까지 간거야? 제발 눈치껏 여기로 와.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 봤다. 이제 곧 또 날이 저문다. 여기서 또 하루를 보내야 하나.


밀려드는 걱정을 털어내듯 눈에 힘을 주며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맞은편 가게문이 열렸다. 팔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그를 보다가 얼굴이 익숙하다는 생각과 함께 곧 그를 알아보고는 피에트리타는 멈칫했다. 가만보니 가게는 상점이 아니라 진료소였다.


남자도 자신을 알아 보았는지 머뭇거렸다. 모른 척하고 싶은 기색이 얼굴에 역력히 지나갔다.


어쨌든 아레에 왔으니 피에트리타 역시 굳이 그에게 말을 걸 마음은 없었다. 남자가 옆을 지나가자 그녀는 눈을 돌렸다. 그러는 찰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 피에트리타는 배를 문질렀다. 꼬박 하루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배고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드는데 남자가 가지 않고 앞에 있는 게 보였다.


왜 쳐다보냐는 뜻으로 피에트리타가 그를 향해 눈을 굴리자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곧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남자가 광장 아래쪽을 가리켰다.

“저쪽.”

피에트리타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하는 얼굴에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검문소에서 근처에서 피에트리타는 기다리고 있었다.

“네드고렌에서 누구 찾아 온 사람 없습니까 혹시?”

검문소 안에 대고 남자가 물었다.

“없는데?”

대답이 피에트리타의 귀에도 들려왔다.

“혹시 누가 찾으면 알려주십시오. 페이누트 쪽에서라도요.”

“페이누트? 그 쪽에선 당분간 왕래 못할 걸?”

“왜요?”

“산사태가 났어 어제 밤에. 그쪽으로 통하는 길이 끊겼다더군.”

피에트리타가 움찔하며 검문소로 불쑥 머리를 디밀었다.

“산사태?”

갑작스럽게 디밀어진 머리에 검문소 병사가 옆으로 좀 비켰다. 뭐야 이 여자.

“계속 비가 오는 통에 지반이 약한 곳 바위가 무너진 모양이야. 다친 사람도 좀 있는 것 같고.”

병사는 말을 이었다.

“복구 작업 바로 시작한다고 하던데, 모르지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피에트리타는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자신이 없어진 걸 알았어도 여기 못 올 상황에 처한 게 분명하다.


“이렇다는데.”

검문소 병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남자는 피에트리타를 쳐다봤다.


피에트리타는 생각했다. 네드고렌에서는 자신이 페이누트로 간 줄 알고 있으니 돌아오지 않아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페이누트에서는 오라는 연락이 없었으니 그녀가 가지 않아도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아무도 자신이 여기 있는 걸 모른다. 돈 한 푼 없이, 그녀는 지금 타국에 혼자 떨어져 있다. 거기다 며칠이나 여기 있어야 할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느도 걱정이지만 자신도 지금 큰일이다.

“난 그럼 이만.”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여기까지 했으면 할 도리는 다 했다는 듯 남자가 몸을 돌리려고 하자 피에트리타가 뒤에서 그를 잡았다. 남자가 돌아봤다.

“잠깐만.”

다급하게 피에트리타는 말했다.

“나를 도와줘.”

혼자서, 지낼 방법이 막막하다.

“나중에 일행이 오면 그쪽이 생각도 못할 정도로 보상해 줄게. 정말이야.”

“마을에서 숙소 잡아.”

들은 척도 않고 대꾸하며 남자가 몸을 돌리려하자 피에트리타는 서둘러 다시 말했다.

“돈 없어.”

“외상해. 일행 오면 갚는다고 하고.”

“나 이 마을 사람도 아닌데 뭘 믿고 그래 주겠어?”

“왕족이라며?”

“그 말 했다 댁한테도 미친 사람 취급당했는데 또 하라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 그 정도 자각은 그녀도 있다. 이느가 자신을 찾을 때까지 적당히 조용히 있을 곳이 필요했다. 그녀의 손에서 빠져 나가려는 그의 옷깃을 피에트리타가 다시 움켜 잡았다.


“그냥 집에 연락하면 되잖아? 그 정도 돈은 차라리 내가 빌려줄 테니까.”

이 이상 그녀와 얽히고 싶지 않은 그가 항복이라는 듯 말했다.

“그건.. 안돼.”

나직히 피에트리타는 대답했다.

산사태가 났다 해도 기사와 호위병들이 같이 있었으니 적어도 이느쯤은 보호해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혼자 돌아간다면, 만에 하나 이느가 자신을 확인못하고 여기 두고 간 게 드러난다면 네드고렌에 돌아가 봤자 그녀는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쪽 팔도 다치고. 한 손으로 움직이긴 힘들 거 아냐?”

어지간히 세게 잡는 통에 손을 뿌리치기 어려워 남자가 찌푸리는 동안 그녀는 다시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도움이 될거야. 대가로 헛간만 좀 빌려주면 돼.”

“도움은 무슨. 가만 보니 폐나 안 끼치면 다행인 것 같은데.”

“나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도움을 구할 데라고는 당장 이 사람밖에 없다.

“당분간만이야. 응?”

어제와 사뭇 다른 태도로 이제 애원하듯 말하는 그녀를 힐끔 보다가 찡그리며 그는 말했다.

“좀 놔봐.”

무뚝뚝한 기색에 잠시 그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피에트리타는 손을 놓았다. 그대로 도망칠까 걱정됐지만 다행히 남자는 그냥 있었다.


처분만 기다리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여자를 보며 그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산속 오두막으로 통하는 길은 여러 갈래다. 새벽에 남자가 알려준 길이 아닌 지름길을 피에트리타는 걸어 갔다. 아침에 걸었던 길보다 훨씬 험했지만 뒤떨어졌다간 그냥 두고 간다고 할 것 같아서 꾹 참고 부지런히 걷다보니 밤이 되기 전 아침의 그 오두막에 다시 도착할 수 있었다.


“헛간.”

붕대를 감지 않은 손으로 보지도 않고 남자는 집 뒤를 가리켰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 몸을 돌리며 피에트리타는 어제 하루 신세졌던 헛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헛간 안으로 걸어 들어와 가운데 놓인 짚더미 사이에 피에트리타는 대충 몸을 묻고 앉았다. 그렇게 자리잡고 앉아 맥을 놓은 채 그녀는 잠시 있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겪은 일에 정신이 멍할 지경이다.


지쳐서 고개를 들 힘도 없이 피에트리타는 치마를 내려다 봤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제부터 산길을 휩쓸고 다녔더니 옷은 하루새 걸레가 되어 있다.


피에트리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일단 그녀를 싫어했고 그리고 한 팔을 못 쓰는 상황이다. 그 점이 그녀를 좀 안심시켰기에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내일이라도 이느가 나타나길 바라며 잠깐이라도 쉬기 위해 피에트리타는 눈을 살짝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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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과 완두콩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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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게드 19.09.22 71 0 34쪽
» 1. 속 좁은 왕 19.09.21 115 0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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