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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괴
작품등록일 :
2019.10.0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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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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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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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5화

DUMMY

3월의 봄날, 서울의 한 대학병원 앞.


‘하아...’


조그만 체구의 소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린 외모와는 달리 많은 것이 담겨 있는 한숨. 목적지를 모른다는 건 언제나 참 힘든 법이었다.


‘정말 사람들이 참 많구나...’


여기를 봐도 검은 머리의 사람, 저기를 봐도 검은 머리의 사람. 어떻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온통 인간들뿐이라 작은 소녀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어머? 쟤 좀 봐...!”

“어디? 와... 진짜 존예다. 인형이네 인형.”

“에이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예쁘긴 하네.”

“야 저 정도면 최소 아이돌이지.”

“하긴... 아무튼 예쁘네.”


웅성웅성 주변의 말들과 관심도 소녀에게는 낯설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무슨 말들이 이렇게 많아... 아우 시끄러.’


소녀는 인상을 팍 썼다가 할머니가 보지 못하게 표정관리를 했다.

아니,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아직 몸 상태도 영 좋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한 방 먹여줘야 할 사람이랄까?


“수하야, 정말 괜찮겠니? 밖에 아직 추운데...”

“네. 할머니. 괜찮아요.”

“그, 그렇지만...”

“헤헤, 저 이제 건강하니까, 걱정 마시라고요.”


소녀는 웃으며 자신의 보호자를 달랬다.


“수하야...”

“자 할머니, 우리 어서 집에 가요.”

“그, 그래. 할머니랑 손잡고 가자.”


조손이 손을 잡고 조심조심 걷는 장면은 여기 병원 앞에서는 비교적 흔한 장면이었지만, 소녀는 보기 드물게 인형 같이 예뻤기에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정수하.


올해 18살의 수하는 삼년 전 교통사고로 일가족을 모두 잃고, 본인도 3년 이란 시간을 식물인간상태로 있었다.

사실 병원에서는 이미 오래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환자였다.

그리고 본인마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만 그 외할머니만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손녀를 위해 자신의 집을 팔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된 일을 찾아다녔을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불쌍한 소녀 수하의 이야기.


그리고 한 달 전, 식물인간이었던 소녀는 새로운 눈을 떴다.


“선, 선, 선생님! 수, 수, 수하가 눈을 떴어요!”

“김 쌤, 그게 뭔 소리에요. 꿈이라도... 억!”


병원이 발칵 뒤집혔다.

현세에서 기적과 가장 가까운 곳.

온갖 일이 일어나는 병원에서도 반년 이상 누워있던 식물인간이 일어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어린 소녀는 꼬박 3년을 누워 있었으니 더더욱 놀랄 일이었다.


“네? 정, 정말입니까?!”


식당에서 일을 하던 외할머니 공옥련이 부리나케 달려와 손녀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고, 내 새끼... 수하야... 수하야!”

“할, 할머니?”

“그래. 할머니야... 수하야... 이제 빨리 일어나자. 건강해야지. 응? 수하야...”


3년 전 수하네 가족의 교통사고는 뉴스에도 보도될 만큼 매우 큰 대형사고였고, 수하는 담당 의사들마저도 모두 포기한 환자. 일단 깨어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병원을 발칵 뒤집은 기적이 한 번 더 생겼다.


“어... 이제 퇴원을 준비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아... 축하드립니다.”


수하는 한 달도 되지 않아 불가사의한 회복력으로 퇴원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3년간 식물인간으로 지내다가 3주 만에 퇴원이라고?


소설에나 나올 법한 불가능한 일을 담당의와 간호사들은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기적보다 한 단계 상위호환의 특별한 힘이 작용한 것이었다.


바로 시스템.


엠렉스에서 제작하고 코코아 게임즈에서 운영 및 서비스 중인 판타지 삼국지 게임에서 비롯된 특별한 시스템의 힘이 지금 그녀에게 작용 중이었다.


- 꿈 많은 소녀 정수하 ★ -


이름: [정수하(덕조 양수)]

등급: [1급 (0.0%)]

종족: [하프트롤] [여성]

속성: [水(火)]

직업: [동반자]

능력: [통솔:10] [무력:10] [마력:10] [매력:15]

특기: [동반]

기술: [도발]


유저였던 한수호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시스템 상태창을 이번에는 양수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수호처럼 약간의 캐릭터 개편이 있었고.

비록 보물 뽑기도 사용할 수는 없는데다가, 상대적인 상위 차원의 세상으로 넘어온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지만 일단 그랬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수하에게 남은 시간이 딱 10년이라는 것.


게다가 건강도 하필 수하의 속성이 양수와는 상극이라서 더욱 줄어들어버렸다.

수극화水剋火.

음양오행의 방식을 채택한 판타지 삼국지에서 물은 불을 끄는 것이 기본 상성관계였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원래 정수하의 생명력이 바닥이었다는 점이 그나마 상극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판타지 삼국지 세상의 창조자가 양수에게 제시한 후보는 총 5명이었다.


일단 수호보다 어린 나이의 여성.

대한민국에 거주.

스스로 간절히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후보군.


한수호는 하위차원으로 넘어가는지라 존재 자체가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 반대로는 그럴 수 없었다. 때문에 양수는 원래 지구인의 빈 몸을 차지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한 계약이 이루어져야 했기에 죽음을 앞둔 이들로만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 18살의 정수하가 있었다.


부모님을 잃고 꿈도 잃고 자신 때문에 더 이상 홀로 남은 외할머니가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소녀는 간절히 죽음을 바랐고, 그 결과 ‘존재’와 계약을 맺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양수가 정수하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5명의 후보군 중에서는 가장 예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양수도 정수하를 택하고서야 기억을 받아들이며 딱한 사정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이기에, 미모로 택한 것이 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도 참 딱하네... 그래.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 일단 빨리 오빠부터 찾고...’


아무튼 그런 사정이 있었다.


“우리 강아지, 손이 참 따스하네? 호호호.”


정수하의 외할머니 공옥련은 세상 누구보다 밝게 웃었다. 고생으로 거칠어진 피부와 굵게 패인 주름도 고운 미소를 가릴 수는 없었다.


“아... 헤헤헤, 그러게요.”

“여자는 손이 따스해야 좋대. 우리 수하는 좋은 사람 만나야 해. 알았지?”


수하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아직 만나진 못했지만.

양수, 아니, 이제는 정수하는 이미 오래전에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오라버니는 전부 비밀인거야... 칫. 메일은 왜 안 읽고. 멍청이! 하여튼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돼!’


다만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을 뿐.

부산에 살고 있단 건 알았다.

수호가 어느 날 밤 그렇게 고백을 했으니까.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세상인 지구, 대한민국, 부산이란 곳에서 살던 멍청한 한 사람일 뿐이었다고. 그리고 이 세상의 비극을 어쩌면 자신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미안해. 수리야... 미안해... 오빠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수호는 자신이 깨어있는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중얼거렸었다.


그래서 수하는 수호가 부산에 산다는 것은 알았다.

다만 딱 거기까지였다.

판타지 삼국지 게임의 원작자이자 동명의 웹소설 판타지 삼국지 저자는 현재 메일주소 이외에는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한수호라는 사실을 알고도 직접 연락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개된 메일은 현재 수호가 아예 확인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후에 아직 찾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을 사용해서 찾으면 안 될까?

다만 그것도 현재 수하의 사정으로는 곤란했다. 일단 그럴 돈도 없었고, 다른 누군가를 믿고 일을 맡길 수도 없었다.

남은 방법은 직접 찾으러 가는 것뿐.

그러나 현재 불행히도 수하의 집은 부산과는 아주 먼 고양시에 위치한 반 지하 월세방이었다.


‘하아... 진짜 가세가 확 기울었구나.’


머뭇거리는 할머니에게 원래 집과 교통사고 보상금과 보험금은 어쨌냐는 말은 굳이 묻지 않아도 되었다.

수하는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으니까.

친가에 삼촌이라 불리던 작자가 중간에서 그 돈을 모조리 들고튀었고, 그 후로는 아예 수하를 모른 척 내버렸다고 했다.


그 후로 외할머니 공옥련이 하루에 몇 개의 일을 했는지는 간호사들과 간병인의 대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할머니... 이제는 제가 보답할게요. 수하를 대신해서... 아니, 나는 이제 수하이기도 하니까.’


영혼을 완전히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합쳐진 것.

물론 그 주主는 양수였지만, 그래도 할머니에 대한 모든 기억과 애정이 지금의 수하에게도 있었다. 부친 양표처럼 이쪽 조모도 가족인 것이 당연했다.


‘자... 일단은 할머니부터.’


조그만 반지하의 방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할머니에게 수하는 대수롭지 않게 씩 웃어보이고는 하얗고 얇은 팔을 걷어 붙였다.


“아유! 할머니! 이 정도면 완전 궁궐이지!”

“수하야, 할머니가 할게!”

“아이 괜찮아. 할머니! 거기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언니들도 이렇게 운동해줘야 한다고 했어! 헤헤.”


혼란의 중 대륙과 비교하면 정말로 궁궐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고생으로 거칠어진 할머니의 손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을 다시 잃을까 꼭 쥐면서도 혹시라도 아플까 꽉 쥐지 못한 손. 누군가가 생각나는 손이었다.


‘할머니! 걱정 마... 오빠만 찾으면 돼... 괜찮을 거야...’


한때 수호가 잡아주었던 것처럼 따스한 손을 위해서 양수이자 정수하인 소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수호를 찾기로 다짐했다.


‘힝... 낙양에서 장안보다는 먼 거리인가?’


현실의 중국 대륙보다는 작은 판타지 삼국지 세상의 중 대륙에서의 거리가 그러했다.

그 대신 지형은 더 험난했고.

아무튼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만, 그나마 다행히 지구에는 인터넷이란 수단이 있으므로 양수는 열심히 수호를 찾는 시도를 할 수는 있었다.


[한수호] [검색]


양수는 판타지 삼국지에서도 영특한 이였기에 지구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도리어 25년을 지구에 살았던 한수호보다도 더 빠르게 18살의 소녀 정수하가 되었다.


“끄응... 그러면 검정고시 준비부터 해야겠네.”


소녀에게는 수호의 게임 제작과 달리 반드시 해결해야 할 나름의 임무들이 주어져 있었다.



* * *



한편 3월의 둘째 주 금요일.


서울보다는 한참이나 따스한 부산에서 수호는 동기들의 성화에 못 이겨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알았다. 간다 가. 그럼 마트부터 가?”

“뉍.”

“한 기사님, 부탁드립니다.”


수호는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하아... 야 너희들은 지금 나이가 몇이라고 생각하냐?”


수호는 스스로를 35살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지구에서는 25살임을 잊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눈으로 보더라도 자신의 친구들은 참 철이 없어 보였다. 중 대륙의 용사들과 비교하자면 철부지 오브 철부지라고 해야 할까?


“왜? 이상하냐? 요즘 새내기들은 이렇게 입고 다니던데? 야, 나 괜찮지 않아?”


조수석에 앉은 백진현이 뒤에 앉은 다른 친구들을 향해 물었다.


“응. 아니야.”

“안 괜찮은데? 부끄러우니까 가서는 모른 척 하자.”

“우리 마트 가서 장보는 것보다 쟤 옷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응. 불쾌감 조성으로 신고.”


수호와 백진현을 제외한 넷이서 한 마디씩을 했다.


“에휴, 패알못들. 너희들이 패션을 아냐?”


어차피 백진현도 남자 동기들 간에 좋은 말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남자동기들끼리 시끌벅적하게 차는 출발했다. 수호도 차라리 조용한 것보다는 이렇게 정신 사나운 것이 그리움을 잊기에는 좋았기에 군소리 없이 차를 몰아 마트에 도착했다.


“우리 모은 돈 얼마지?”

“너 벌써 청년 치매냐? 아니면 능지가 처참한 거냐? 100만원이잖아.”


수호를 제외하고 동기 다섯이서 모은 돈은 각 20만원씩 100만원. 어차피 과에서 모은 돈도 있을 테고 학생회에서 장을 본 것도 있을 테니 적은 돈은 아니겠지만.


“아니, 이 자식이. 그게 아니라 애들 몇 명인지 물어보려고 한 거였어. 말실수도 있지.”

“야아~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문제다. 빽, 몇 명이래?”

“음... 보자. 아영이가 보내준 톡에 의하면...”


개인 사정으로 빠진 넷을 제외하면 신입생이 36명에 학생회 6명에 선배로 참석한 사람들이 12명.


“교수님이랑 조교 누나는?”

“오늘 무슨 학회 일정이 있다고 내일 들리실 거라던데?”

“아 그래? 그러면 우리 빼고 54명인가?”

“그래. 그렇네. 그럼 우리 빼도 두당 2만 원도 안 되겠네... 흐미.”

“뭐 어차피 회랑 간식 위주로만 사면되지. 어차피 술 같은 건 충분히 있을 거 아냐.”

“그렇겠지.”

“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뭐 살 건지나 확실히 해.”

“야 야 우리 술도 좀 있어 보이는 걸로 사갈까? 와인 같은 거 새내기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어때?”

“그렇겠지? 애기들이 어디서 그런 걸 마셔봤겠어. 그렇지? 그렇지?”


수호는 마트까지 와서 다시 회의를 하는 동기들을 한심스럽게 쳐다보고는 진현에게 말을 했다.


“야... 진현아.”

“그럼 와인으로... 어? 왜?”

“헛짓들 그만하고 회장이나 총무 보는 애한테 뭐 필요한지나 물어봐. 우리 잠깐 장 보러 왔는데 혹시 필요한 거나 모자란 거 있으면 사 간다고.”

“어...”

“그리고 와인은 무슨 와인이야. 술 못 마시는 애들 있을 테니까 음료수나 넉넉히 사가. 아침에는 무조건 라면 먹고 속 버릴 테니까 해장거리도 챙겨가고.”


그리고 수호는 말로만 하지 않았다.

동기들이 이럴 줄 알고 돈도 뽑아둔 상태였다. 장을 보러온 마트가 회원제 마트였기에 특정신용카드 회사가 아니면 현금으로 계산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옛다. 그리고 이거 장보는데 보태라.”

“아니, 됐어 인마. 너는 오늘 운전하는 걸로...”

“그냥 받아.”

“아니 됐다니까. 아 왜 이래~.”


입으로는 사양하면서 백진현은 일단 수호가 건넨 봉투를 열었다.


“어?”

“왜? 얼마... 억.”

“야, 너 무슨 돈을 갑자기...”


그렇다고 갑자기 몇 백만 원 씩 꺼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수호가 집어놓은 돈은 딱 백만 원.

차를 사고도 통장에 2억 원 가까이 가지고 있는 수호였다. 그렇다고 과소비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아르바이트나 용돈을 모아서 돈을 마련한 친구들에 비하면 여유로운 입장인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이 정도도 사용하지 못할까. 다만 너무 많은 돈을 내는 건 도리어 귀찮을 일이기에 이 정도만 꺼낸 것이었다. 대충 친구들에게는 방학 동안에 형 일을 돕고 받은 돈이라고 둘러두었다.


“그리고.”

“응?”

“그거 내가 그만큼 냈다고 하지 말고, 너희들이 40씩 냈다고 해.”

“어? 왜?”

“귀찮아. 너희 선배 대접 받고 싶다면서.”

“아니, 그건 그렇지만...”

“됐어. 그렇게 해.”


여러 번 봉투가 왔다 갔다 하다가 수호의 친구들이 먼저 두 손을 들었다. 어차피 딱 금액에 맞춰서 장을 볼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것들을 사고 난 후에 잔금은 전부 수호에게 넘겨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어, 아영이한테 연락 왔다. 잠시만.”


학생회에서 총무 일을 하는 2학년 후배 이아영과 통화를 한 후에 눈치 없는 스물다섯 살들은 해맑게 신이 나서 마트를 누볐다.


“야 이것도.”

“이거 좋다. 이거 사자.”

“이게 더 맛있다니까.”

“야 이거는 왜 이리 싸냐? 와인이 원래 이렇게 싼 거야? 이거 한 병씩 마셔도 되겠는데?”

“연어는 몇 개 사?”


사실 수호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철없는 남자 동기들의 쇼핑에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야... 연어회는 안 되겠다.”

“왜?”

“그렇게 많이 신선하지도 않고. 딱 봐도 냉동했던 거잖아.”

“어? 안 신선해?”

“아니, 먹는다고 문제 생기는 정도는 아닌데... 안 돼. 아무튼 안 돼. 차라리 저기 가서 과일이랑 치즈랑 베이커리류로 골라. 이왕 사는 거 양 많은 거 고르지 말고. 깔끔하게 소포장 되어 있는 걸로.”

“어?”

“먹을 때 예쁘고 깔끔한 걸로 사라고.”


가성비에 맛만 아는 남자 동기들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아... 아니다. 그냥 너희들은 따라오기나 해.”


물론 판타지 삼국지 세상과 지구는 달랐지만, 대개 여자들의 취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론적으로 먹을거리의 기본은 맛이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분위기와 비주얼.


보통 남자가 여자에 비해 시각적인 자극에 약하다는 말들도 있지만, 그와는 달리 좀 더 미를 추구하는 것이 여자가 아닐까?

잘 생긴 남자를 마다하는 여자와 예쁜 음식을 마다하는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던 수호였다. 마신이 강림한 판타지 삼국지 세상은 음식을 구하는 것도 힘들 정도의 세상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왕 구한 음식은 예쁘게 먹었던 동료들이었다.


“어... 야. 그거는 너무 비싼데...”


수호가 집을 때마다 가격표를 보고 쫄린 동기들이 한 마디씩 쭈뼛거렸다.


“시끄럽고 따라오기나 해.”


보통 남자들이란 누를수록 반발하는 법이지만 수호에게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10년 간 생사를 넘나들며 몸에 배인 것도 있는데다가, 시스템 상의 매력은 실제로 일종의 유형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돈을 많이 낸 것도 있고, 기동력의 핵심인데다가, 오늘 수호는 자신들의 요청에 의해 억지로 끌려왔던 것까지 더해져 이런저런 복합적인 이유로 수호의 동기들은 일단 수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자몽? 팩 포장 해뒀네. 괜찮네. 이거 세 박스.”


“그거 내려놔라. 과일이라고 다 똑같은 과일인줄 아나. 씨 있는 과일을 그런데서 잘도 먹겠다. 물 많이 떨어지는 과일도 안 돼. 그냥 개별 포장되어 있는 거나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사야지. 너희들은 연애할 때 배운 게... 아, 아니다.”


“이거 타르트는 내일 아침에 하나씩 먹어도 되겠다. 요즘 애들 커피 좋아할 거 아냐. 커피랑 하나씩 먹으면 되겠네.”


“믹스 커피는 내려놓으라고.”


“이거 뭐냐? 쓸 데 없는 과자는 다시 빼고. 밖에 푸드코트에서 피자랑 베이크 위주로 사가. 너희는 과자 안주에 술 먹고 싶든?”


“코카랑 펩시로 왜 싸우는데? 둘 다 안 살 거니까 저거나 가져와. 탄산은 어차피 애들이 많이 사갔을 테잖아. 거기 애들이 탄산 모자다라고 했어? 아니지? 그냥 여기 사과주스랑 오렌지 주스 넣고. 아... 저기 아이스크림도 하나 담자.”


“아니, 퍼먹는 거 말고. 그거 바로 되어있는 거 있잖아. 낱개 포장 된 거. 어 그거.”


수호의 동기들은 수호가 시키는 대로 물건을 담기만 했다.


“이, 이제 그만 사도 될 것 같은데?”


자그마치 대형 카트 세 개 분량의 쇼핑이었다.

금액은 157만 2,940원.

그것도 수호가 여유롭게 사라며 카트에 툭툭 담았기에 나온 금액이었다.


“야 여기 남은 돈은 다시 받아라.”


그리고 계산이 끝나고 백진현이 남은 돈을 모두 수호에게 건넸다.

돌아온 돈은 43만 원 정도.

만약 수호가 카트에 휙휙 담지 않았으면, 어쩌면 100만 원 정도 선에서 끝이 났을 지도 몰랐다.


‘에고... 얘들도 그냥 여자만 밝혔지. 애들은 참 착해... 큭.’


물론 여기에 없는 동기들 중에는 얄미운 애도 이상한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어쩌다보니 남은 동기들은 모두 착한 친구들이었다.


판타지 삼국지 세상에서 만난 동료들도 그랬다.


물론 노선이 다르고 마음이 맞지 않은 이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마신강림 저지라는 대의 앞에서 기꺼이 수호의 모험에 동참해주었었다.


‘우리도 마신 물리치고 나면... 같이 야유회라도 떠나기로 했었는데...’


그리고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이별을 맞이하였던 수호였다.


수호가 중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의 숫자는 수천에 달했다. 다만 그 중에서 판타지 삼국지의 유닛에 해당하는 천인天人은 50명 남짓 정도. 왜냐하면 판타지 삼국지 게임에 원래 등록된 유닛의 숫자는 총 272명에 불과했고, 그중에서 몇몇은 192년에 아직 탄생하지 못했으며 그보다 많은 이들이 좀비와 마물들과 싸우다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투에 도움이 안 되는 이들이나 어린 이들을 배제하고, 결국 수호와 마신과의 최후의 전투에 나선 이들은 고작 서른 명도 되지 못했었다.


‘마초’

‘손책’

‘제갈량’

‘사마의’

‘유비’

‘관우’

‘장비’

‘조운’

‘황충’

‘여포’

‘초선’

‘화타’

‘조조’

‘원소’

‘하후돈’

‘하후연’

‘주유’

‘노숙’

‘태사자’

‘감녕’

‘황개’

‘축융’

···

···

···


수호는 하나 하나 속으로 그리운 이름들을 불러보았다. 누군가 보면 우울증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수호로서는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생사도 알지 못하는 동료들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양수리... 오빠는 후배들 만나러 간다. 너는 뭐하냐...’


추억은 사람을 강하게도 나약하게도 만드는 법. 다만 공통점으로 사람을 과거로 묶어놓는 힘이 있었다. 친구들이 운반하기 편하게 박스로 담아 정리하는 동안 수호는 또 한 번 떠오른 과거의 추억들에 힘없이 멍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야 차 문 열어봐. 뭐해!”

“어? 어... 알았어. 미안.”

“아니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님? 요즘 한 번씩 이러더라. 설마 봄 타냐?”


급기야 운전을 맡기면 안 되지 않겠냐는 친구들의 농담 섞인 우려도 있었지만, 그래도 운전대는 지킬 수가 있었다.


“시끄러워. 안전운전 할 테니까 너희는 후배들 만나서 진상 짓이나 하지 마.”


그렇게 수호는 행정학과의 MT 장소인 기장에 있는 한 펜션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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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57화 +2 19.11.24 37 1 18쪽
56 56화 19.11.23 41 1 23쪽
55 55화 19.11.22 36 1 22쪽
54 54화 +4 19.11.20 44 1 21쪽
53 53화 19.11.19 39 1 19쪽
52 52화 19.11.18 42 1 21쪽
51 51화 19.11.16 42 1 22쪽
50 50화 19.11.15 47 1 21쪽
49 49화 +2 19.11.14 51 1 18쪽
48 48화 19.11.13 49 1 24쪽
47 47화 19.11.12 50 1 26쪽
46 46화 19.11.11 52 1 22쪽
45 45화 19.11.09 55 1 22쪽
44 44화 19.11.08 56 1 21쪽
43 43화 19.11.07 57 1 22쪽
42 42화 +2 19.11.06 60 1 21쪽
41 41화 +4 19.11.05 64 1 22쪽
40 40화 19.11.04 57 2 24쪽
39 39화 19.11.02 58 2 24쪽
38 38화 19.11.01 62 1 23쪽
37 37화 19.10.31 57 1 24쪽
36 36화 +2 19.10.30 61 1 22쪽
35 35화 19.10.29 64 1 22쪽
34 34화 19.10.28 61 0 23쪽
33 33화 19.10.26 72 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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