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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티오(As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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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고양이
작품등록일 :
2019.10.04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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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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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5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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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7화 - 시작되는 것, 끝나는 것 #3

DUMMY

빼곡하게 밀집되어 있는 상가 건물들에서 각기 다른 음악들이 경쟁하듯 흘러나왔다.


잔잔한 클래식이나 애절한 사랑 노래, 최신 유행하는 락부터 대중가요까지, 귀를 즐겁게 하는 그 소리들을 앞세워 그것들은 쉼 없이 호객행위를 하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작은 눈길조차 흘리지 않고, 오로지 처음 정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그 확고한 발걸음에 가게의 주인들은 제법 야속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지만, 언제까지고 자신에게만 매달릴 수 없는지 금새 다른 행인을 향해 관심을 돌렸다.


매일같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겪는 반복적인 과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객 행위를 해오지만, 솔직히 귀찮아 미칠 지경이다.

점심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1시간. 왕복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빼면 고작해야 30분 정도 밖에 여유가 없었으므로 잠깐 동안의 한 눈도 팔 수 없다.


그래도 오늘은 꽤나 빠르게 포기한 편이다. 슬슬 주인들도 기억을 하는 것일까? '쳐다보지도 않는 녀석' 이라고 말이다. 뭐, 그렇게 인지하고 있으면 더는 귀찮은 일에 엮이지 않을 테니 오히려 고맙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조금 더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출발한지 5분여 남짓.

이제 슬슬 보일 목적지를 생각하니 다리는 가벼웠고, 움직임이 커질수록 칠흑색의 머리카락은 춤을 췄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한번씩 쳐다보는 것 같아 의아하긴 해도, 자신의 발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얼마 안되는 점심시간을 쪼개서 가는 만큼, 1분이라도 무의미하게 허비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인지 아직 5월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오후의 햇살이 제법 따갑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집중되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몇 분 더 걸었을까.

시끄러웠던 거리와 달리 도착한 곳은 약간 한산한 분위기의 가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한산하다고는 했으나, 조금 전 지나온 곳보다 나을 뿐이지 조용한 것은 아니기에 어느 정도의 유동인구는 존재했었고, 그들을 잡기 위한 호객행위는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계속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에도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그리고선 건물의 입구로 보이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긴 후 곧바로 3층으로 향했다. 한두 번 와본 곳이 아니므로, 목적지가 몇 층에 있는지 찾는 어리석은 행동 따윈 하지 않았다.

온갖 방해를 이겨내고 왔는데 겨우 이런 거로 시간을 허비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그렇게 수십의 계단을 걸어올라 도착한 곳은 작은 카페였다.

실내엔 고작해야 서너 명뿐, 그다지 많은 사람은 없었다. 꽤 괜찮은 인원 수였으며, 언제나 앉는 자신의 자리도 비어있어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매번 그랬던 것처럼 커피 한잔을 주문하자 종업원 또한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털썩]


몸이 빨려 들어 갈 것만 같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니 왜 이제 온 것이냐고 응석이라도 부리듯 포근하게 전신을 감싸준다.

조금 전까지 끝없이 괴롭히던 따가운 햇살도 유리창에 막혀, 지금은 적당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완벽했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의 휴식이.


"휴우~이제야 살겠네."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지금까지 자신을 속박했던 재킷을 벗어 옆에다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 전까지 좀더 이 포근함을 만끽했다. 향긋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쉬는 것도 좋지만, 지금 같은 여유도 꽤 괜찮았으니 말이다.


허나, 시간이라는 것은 야속하지 않던가?

힘들거나 싫을 때는 그렇게 더디더니, 이렇게 편안할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종업원이 커피를 내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5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는 뜨거운 김을 내뿜는 그것이 새하얀 잔에 담겨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즉, 아주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벌써 5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 것이다.


"하아~ 이대로 땡땡이라도 쳐버릴까?"


허탈함과 아쉬움.

그 마음을 가득 가득 담아 궁시렁 댄 후,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텁텁하면서 시큼한, 그러면서 끝에는 향긋한 내음만 남기고 입 안에서 사라진다. 어차피 똑같은 커피일 테지만...기분 탓인지, 확실히 사무실에 마시는 것과는 달랐다.


그야, 이것을 마시자 뭔가 정신이 회복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니 틀림 없을 것이다.

괜한 기분 탓이 아니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은 후 다시금 몸을 파묻었다. 처음보다 더한 안락함이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아 정말 그래 버릴까?'


위험할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내뱉은 말은 솔직히 반은 진담, 반은 농담이었다. 책임감 있는 평소 모습과는 달리 이상하게 이곳에선 약간의 일탈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꿈꾸지 않는가?

업무에 지쳐 비실대고 있을 때, '에라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며 뛰쳐나가는....물론, 그저 지친 몸을 회복시키는 중에 떠오른 잠깐의 망상일 뿐이다.

그랬다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테고, 막상 상황이 닥치면 그렇게 하라 해도 못한다.


상상은 상상으로만 치부하면 그만이었으므로, 금새 생각을 지우고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도 가지지 않은 채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또 그런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가게 종업원들. 모두가 각자의 역할에 맞춰 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 전까지 자신도 저렇게 급히 갈 길을 재촉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니, 괜시리 종업원들에게 미안해져 살짝 쓴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할 만큼 이곳에 오는 시간은 중요했다. 말 그대로 오후를 위한 충전시간. 누가 뭐라 해도 자신에게 점심 시간이란 것은 그것만이 유일한 의미를 가진다.

오전 내내 반복되는 일과 중간중간 터져나오는 엔트록스의 짜증, 거기에 얼마 전부터 추가된 넴까지.


매일 같이 찾아오는 그 스트레스들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식사보다 이 커피 한 잔을 택할 것이다.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이곳은 최적의 장소였고.


우연히 리벨라와 데이트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그 날 이후 매일 올 정도로 이곳의 분위기가 좋았다. 적당히 자리잡고 있는 몇 명의 손님들, 부드러운 클래식, 요즘 유행하는 방식이 아닌 소파형 의자 등. 편하게 해주는 모든 조건들이 갖춰져 있었다.

만일 이곳이 카페가 아니었더라도 분명 찾아왔을 것이다. 물론, 술 같은 것은 먹진 않겠지만.


"그나저나....."


소파에 몸을 기대고선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중 오전의 일이 스쳐, 회복되고 있던 컨디션이 살짝 하락하는 것을 느꼈다.

이 시간에 꼭 그 생각을 해야 할까 싶었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다. 당장 급한 것은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망할 엔트록스. 분명 이유 따윈 없는 게 분명해. 젠장! 그걸 하루 만에 어떻게 하란 거야."


아직, 반도 처리하지 못한 일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기에다 타인에겐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정작 본인은 편하게 식사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니르한센과 함께 여직원에 대한 저질스러운 농담이나 나누며 웃고 있겠지. 그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이미 두 사람에 대해선 부서 내에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기피 대상 1,2위를 다투고 있을 정도니 안 봐도 뻔했다.

뭐, 대부분 엔트록스가 먼저 말을 꺼내면 적당히 니르 녀석이 호응해주는 정도겠지만. 그래도 직접 당하는 여성들의 입장에선 두 사람 다 똑같은 족속으로 여겨질 테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라고 사회 생활에 대해 그렇게 잔소리 하더니, 본인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다니...참 그 녀석도..'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마냥 좋다고 웃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대단하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덕분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넴조차 녀석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할 정도니..


그런 이유로 자신은 매번 엔트록스에게 지적 받으면서도 절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어울리는 것을 피해 왔다. 괜한 오해를 만드는 것도 싫었고,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좋았으니 당연했다.


천천히 눈을 감으며 복잡한 생각은 아주 잠깐만이라도 밀어 놓자며, 스스로를 설득시켜 본다.

고생해서 온 이상 충분히 쉬고 가야 하니까.


[아하하, 혼자서 그렇게 폼 잡는 거 엄~청 궁상이에요 선배.]


"윽."


오후 일에 대한 걱정마저 잠시 밀어내고, 차오르는 커피 향에 취해 눈을 감자마자 넴의 환청이 들려왔다. 그렇게 찾아온 또 하나의 스트레스. 긴장을 풀려다 보니 의외의 복병이 치고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입사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적응력으로 부서 내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그녀. 성적도, 그리고 업무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 그런 점에서는 자신도 인정할 만큼 장래가 유망한 녀석이었다. 그 엔트로스조차도 터치를 안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하아~"


시간이 흘러도 이 녀석은 변함이 없었다.

기본적인 매뉴얼과 전체적인 분위기, 업무 방법까지 모두 익혔으면서 왜인지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일반적으로 신입이 들어오면 6개월 정도를 교육 담당 직원이 데리고 다니며 일을 가르치지만, 그것은 보통의 경우고 넴처럼 흡수력이 빠른 경우는 일정 시점에서 본인만의 업무를 할당해 바로 실전에 투입시킨다.


'바로 몇 년 전에 레니의 경우가 그랬으니까.'


그런 이유로 하루 종일 옆에서 시끄럽게 있느니, 차라리 녀석도 그렇게 하는 편이 낫다고 엔트록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건의했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으니 당연히 그렇게 하라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후배 사랑이 부족한 이기적인 선배' 라는 잔소리뿐. 결국 그걸 계기로 온 종일 된통 깨지기만 했었다.


"젠장, 넴 때문에 신경 쓰여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내 입장에선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잖아. 녀석 탓에 업무가 늦어지면 결국 욕먹는 사람은 나인데..그 자식 그것도 분명히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게다가, 한 소리 듣고 자리에 돌아가니 뭔가 이긴듯한 표정을 지으며 실실 웃고 있었던 그 녀석.. 그 땐 정말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 때 넴의 교육 담당을 강하게 거부해야 했어."


이제는 소용없는 후회를 하며, 식어가는 커피를 입에 대고선 그녀가 처음 출근한 날을 떠올렸다.


커다랗고 볼품없는 안경을 쓴 가지런한 금빛 단발의 말괄량이.

그것이 넴에게서 받은 첫인상이었다.

범상치 않은 그 인상에 마음 한 편으로 '누군지 모르지만 고생 꽤나 하겠다' 라고 애도를 표했지만, 설마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될 줄이야.


5년 동안 온갖 역정을 다 받으면서도 품에 넣고 참아왔던 비장의 봉투를 오늘 꺼내야 하나 하고 각오를 다졌지만, '자네가 맡게' 라는 그 짧은 한 마디에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해버린 스스로가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도 미웠다.


키득거리며 웃고 있던 니르 녀석의 옆구리를 '퍽' 하고 한대 쳐봐도 뒤집어진 속이 돌아올리 있겠는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넴을 데리고 자리로 돌아왔지만...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말에 스트레스가 또 하나 늘어났음을 직감했었다.


'반가워요 선배! 앞으로 잘 부탁 드릴게요. 저는 옆에서 보고만 있으면 되나요? 아니면 무언가를 도와드릴까요? 아! 아직 첫날이라 이것저것 익숙해지기까진 시간이 걸릴 테지만, 그래도 시키시면 잘할 자신 있답니다. 아니, 이게 아니지. 있어요! 우선 이 자리가 제 자리인가요? 그럼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이것도 치워야 하고, 그리고 식사는 보통 어떻게 하세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사...'


질문에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쉼 없이 떠들어 대는 넴 때문에 유일한 도피처였던 자신의 자리마저 싫어지려 했었으니까.


"너무...말이 많아 그 녀석은.."


그녀와의 첫 대화가 떠오르자, 조금 전 엔트록스 때문에 받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두통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급히 커피를 들이켜 안정을 취해보지만, 머릿속엔 이미 그 녀석이 들어와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시 몇 번이고 커피를 마셔도 녀석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강해 사라지지 않자, 결국 포기하고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소파에 몸을 기대버렸다.

차라리 그 때 보냈어야 했다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무슨 말이냐면, 일전에 니르 녀석이 넴에게 빠져서 교육 담당을 본인으로 바꿔달라고 징징댔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쓸데없는 죄책감만 아니었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넴 때문에 머리 아파하는 것만큼은 사라져 있을 텐데. 스스로의 미련했던 결정에 또 한번 좌절했다.


하지만, 그 땐 어쩔 수 없었다. 친한 친구긴 해도 그가 진심으로 넴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추근대려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넴 정도면 그 녀석이 그러는게 이상하진 않지."


니르한센의 성향을 떠올림과 동시에 넴의 외관도 함께 떠올렸다.


커다랗고 이상한 무늬의 안경이 얼굴을 가려서 그렇지, 여성에 꽤 둔한 편인 자신이 보기에도 그녀는 예뻐 보였다. 가는 몸에 비해 넘칠듯한 볼륨까지 갖춘 것도 모자라 귀여움까지 있으니, 니르한센이 징징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어차피 머릿속에 리벨라 밖에 없는 자신에겐 넴의 외관 같은 건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녀석에겐 그녀가 여신과도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약간 미안한 마음이 있긴 있으나, 그 때는 그까짓 담당이 뭐라고 괜히 보호자 역할을 해버렸었다. 왠지 니르 녀석에게 넴을 붙이기가 꺼려졌었고, 또 소문도 좋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처음에는 나름 재미있었다. 가르쳐주면 가르쳐준 대로 금방 흡수하는 스펀지 같은 녀석이라 편한 점도 있었고, 선배라고 부르며 온종일 붙어있는 모습이 귀여운 여동생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 때 그 모습에 속아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매일 같은 그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녀석은 어느 순간부터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화장실 갈 때 빼고는 하루 종일 따라 다니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쓸데없는 말만 주저리 주저리.

결국, 참다 못해 귀찮아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면 자신에 대해 빠짐없이 보고 배워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업무와 상관없는 질문까지 해댈 정도였다.

혈액형부터 좋아하는 거나, 싫어하는 것 등등. 심지어 리벨라의 이야기도 물어 왔었다.


이런 상황을 들은 니르한센은 혹시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는 황당한 말을 했지만, 아무리 둔해도 그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단지 심심해서라는걸.

워낙 빠르게 배우다 보니 더 이상 배울건 없고, 하루 종일 옆에서만 보고 있자니 심심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대화 상대를 찾는 것이었다.


처음엔 딱딱한 업무 중에 나누는 작은 대화라면 적당히 기분전환도 된다고 생각했기에, 재미있게 응했지만...도저히 감당이 안될 정도로 녀석은 정말 말이 많았다.

또, 그런 모습은 유독 자신에게만 보였기에, 니르한센 말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 받기 딱 좋았다. 그렇다고 갑자기 태도를 바꿔 말 걸지 말라고 하면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싶기도 했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리벨라에게도 이 고민에 대해 말했었지만, 오히려 '그 정도로 여자를 홀릴 줄은 알아야 나 같은 여자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남자다' 라며 뿌듯해 하기만 할 뿐, 마땅한 대안을 제시해 주지는 않았다.


'대체 왜 거기에서 뿌듯해 하는 건지. 보통 그런 경우에는 잔뜩 화를 내고 기분 나빠해야 정상이 아닌가?'


알 수 없는 여성의 심리에 다시 한 번 혀를 차며, 이제는 바닥을 보이는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 놓고선 생각을 갈무리했다.


결론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이 좋은 선후배의 표본 같은 걸로 과하게 포장되어 부러움을 한 몸에 받지만, 그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다.

당사자인 자신은 평소보다 배로 힘들뿐더러, 그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안돼...더는 그 녀석 생각으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깊은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왜 이곳에서까지 고생을 사서하고 있는지. 스스로의 미련함을 한번 더 책망하고선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 시간이 끝나기까진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회사까지는 10분 정도 거리므로, 남은 20분만큼은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쉬자고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는 넴의 잔상이 귀찮게 말을 거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모른 척 무시했다. 신기하게도 그러고 나니 다시금 마음이 편해지면서 처음 지었던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좋은 기분이야~'


세상의 빛이 차단되자 촉각이 예민해진 것인지 몸을 감싸는 푹신함이 더욱 잘 느껴졌다.

마치, 그대로 소파 속으로 파고드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깊게...더욱 깊게.

끝을 모를 정도로 깊게.


헌데 조금 이상하다.

아무리 쿠션감이 좋더라도 파고드는 것이 한계가 있을 텐데, 좀처럼 이 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해도 아직 잠든 것도 아니었기에 그 정도 구분은 가능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속도...이건 파고드는 정도가 아니다.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랬다. 이건 분명히..


그렇게 의문을 품고 있던 순간.


언제까지고 빠져들 것만 같던 몸에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이질적인 부유감이 휘감았다. 허공에 붕 뜬 것만 같은 기분.

갑작스러운 변화에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신을 감싸고 있던 부유감이 단번에 사라졌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느낌에 어안이 벙벙해져 곧장 주변을 살폈다.

혹여, 자신이 착각이라도 했나 싶어서 말이다.

허나, 그건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인 듯, 그 행동으로 인해 멈춰있었던 장면이 시작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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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장 11화 - 시작되는 것, 끝나는 것 #7 19.10.05 22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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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장 9화 - 시작되는 것, 끝나는 것 #5 19.10.05 22 0 21쪽
9 1장 8화 - 시작되는 것, 끝나는 것 #4 19.10.05 22 0 33쪽
» 1장 7화 - 시작되는 것, 끝나는 것 #3 19.10.05 23 0 19쪽
7 1장 6화 - 시작되는 것, 끝나는 것 #2 19.10.05 31 0 26쪽
6 1장 5화 - 시작되는 것, 끝나는 것 #1 19.10.05 31 0 17쪽
5 1장 4화 - 꿈 19.10.05 26 0 16쪽
4 1장 3화 - 아르먼 19.10.05 34 0 15쪽
3 1장 2화 - 다가오는 어둠 #2 19.10.05 33 0 15쪽
2 1장 1화 - 다가오는 어둠 #1 19.10.04 4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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