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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즈몬
작품등록일 :
2019.10.09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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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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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잔인한 세상

DUMMY

“자네는 이계에서 소환된 용사가 아닌가.”

“... !!”


들켜버렸다.

아니. 애초에 들켜 있었다고 해야 하나?

어떤 전조도 없이 내 정체가 까발려지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사실상 정답이라고 시인하는 꼴이었다. 깨달았을 땐 이미 할센베르크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미텔란트는 일곱 명의 마존(魔尊)이 다스리는 마법의 국가일세. 나 역시 마법사지. 자네의 생체마력은 이 세계 인간들과 근본적으로 달라.”

“... 그, 그렇군요.”

“레이라가 그 정도 경지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게. 흐하하.”


제길. 그렇다 한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긴 일러. 어차피 저 양반이 내게 살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눈치도 채지 못한 시점에서 죽었어야 했다.

지금 이렇게 대화가 통하고 있는 것 자체가 협상 가능성이 아직 있다는 소리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예. 안 그래도 그 레이라 문제 때문에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씨바 철판 깔고 부탁해 보자. 이젠 이거 말고 뾰족한 방법도 없다.


“흐음. 좋네. 말해보게.”


눈가를 좁힌 할센베르크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 같다.

나는 최대한 간절한 표정으로 할센베르크를 보며 말했다.


“사실 처음에 살아남으려고 여기 고용됐다고 이빨을 좀 깠습니다.”

“오호.”

“그래서 말을 좀 맞춰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오늘부터 변경백님 특명으로 고용된 용병이라는 설정으로요. 안 그러면 저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한 변경백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뭐지. 화났나. 안절부절하며 그랜절이라도 박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하하하하! 재밌군. 자네 정말 재밌는 친구야!”


변경백은 별안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아 있던 언데드 부인이 그 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거린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재밌고 웃기냐.

당사자는 지금 심각하다 이 말이야.

자그마치 21번 죽었다 살아났다고. 당신이 그 하인 관리 똑바로 안 해서!


부글부글 끓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센베르크는 곧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는 내가 고용한 걸로 해두지.”

“오오. 감사합니다 변경백님!”

“대신.”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대신. 대신이 나왔다. 뭔가 조건을 걸겠다는 소리겠지.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할센베르크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는 여전히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


“하는 일은 좀 바꿔줘야겠네.”

“... 예? 그게 무슨.”

“용사씩이나 돼서 하수도 정리나 하면 체면이 안서지.”

“그... 말씀은.”


오랜만에 뇌내 호구센서가 미친 듯이 발광했다.

이거 뭔가 좋지 않아. 지금 변경백 표정이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작업할 병사 끌고 가려는 행보관의 표정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자네가 나와 함께 북방의 마족들을 막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청천벽력.

나는 내가 잘못들었나 싶어 연신 탄성을 흘리다가, 나를 직시하는 할센베르크의 표정을 보고는 곧 깨달았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사자성어는 누가 만든 걸까.

뒤이어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패널이 떠올랐다.


[퀘스트 분기점 도달!]

[당신의 선택에 따라 퀘스트 - ‘폐성 탈출’의 향방이 달라질 것이다.]

[선택1. 할센베르크 변경백을 도와 북방의 마족을 척결한다.]

[선택2. 계속 레이라를 도와 하수도의 고블린들을 척결한다.]


선택의 순간이 닥쳤다.


“어떡할 텐가. 자네가 선택하게.”


변경백이 넌지시 재촉했다. 나는 그제야 퍼뜩 고민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이죽거리는 할센베르크를 한 번 쳐다보고, 레이라를 한 번 떠올렸다.

이 선택은 중요하다.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손익을 계산했다.


결정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



나는 홀린 듯이 방으로 돌아왔다.

끼이익, 덜컹. 문소리에 침대맡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레이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풀린 눈이 나에게 향했다.


“아... 오셨군요. 어떻게, 이야기는 잘 마치셨나요.”

“뭐, 일단은.”

“다행이네요... 후아암.”


레이라가 눈을 비비며 늘어지는 하품을 했다.


“그럼, 저는 졸려서 이만. 내일봐요 후배님.”


기지개를 켜며 레이라가 몸을 일으켰다. 비척비척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에게 나는 지나가듯 내뱉었다.


“나 내일부터 변경백님 따라서 고대마족 잡으러 간다.”

“... 예?”


방을 나가려던 레이라가 우뚝 멈췄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눈이 전에 없이 부풀어 있었다.

나는 내가 내렸던 결정을 레이라에게 담담히 통보했다.


“오늘 사냥하면서 짬 좀 쌓였을 테니 바로 마족 잡으러 가자던데. 그래서 알겠다 그랬어.”

“아니 무슨... 마족 사냥을 주인님이 그렇게 쉽게 결정할 리가....”


레이라는 혼란스러운 듯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한참을 횡설수설하다 이내 핫, 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싸늘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후배님. 제게 뭔가 숨기는 게 있지 않나요?”

“... 아니. 아무것도 없는데.”


레이라의 기세가 워낙 서슬퍼래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변명을 하긴 했지만, 레이라의 목소리에는 이미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제가 이 성에서 얼마나 일했다고 생각하세요. 주인님의 그 결정은 이상해요. 당신이 뭔가 숨기고 있지 않는 이상, 주인님이 마족 사냥에 당신을 데려갈 리가 없어요.”


날카롭군.

하지만 이정도 추궁은 나도 예상했다. 나는 곧장 어깨를 튕기며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본인이 그러더라고. 자기도 이제 늙었고, 이 땅의 언데드 저주를 중화시키는 것만 해도 버겁다고. 마침 후임 사냥꾼이 필요했다고 그랬어.”

“... 그건.”

“다 들었어. 네가 말했던 100인의 결사대도 이미 전멸한지 오래라며? 사실상 지금까지 살아서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건 할센베르크 변경백 혼자뿐이라면서. 어쩐지 사람이 너무 없다 싶었어.”

“.......”

“뭐, 말하자면 후임이 필요했던 건 너뿐만이 아니었다 이거지.”


참고로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다.

변경백은 실제로 내게 저런 식으로 말했다. 내가 제안을 수락하자마자 그는 이 성에 얽힌 많은 사실들을 이야기해줬다.


‘나도 왕년엔 칠마존(七魔尊)에 버금가는 마법사라는 소리를 들었네만... 이제는 늙었네. 홀로 이 많은 저주를 어깨에 이고 다니는 것도 버겁다 이 말일세.’


그 중 하나로. 변경백이 밤마다 시체가 즐비한 알현실에 가는 이유는 단순히 청승을 떨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체를 모아놓은 것도 호러분위기 연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뛰어난 기사이자 마법사이기도 한 변경백은 이 땅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언데드를 억누르고 있다. 낮에는 괜찮지만 밤이 되면 저주가 강해져서 시체가 거리를 배회한다. 그래서 시신을 한 데 모으고 자신의 마법으로 제압하는 것이라고 했다.


썩어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부인을 마주보며.

그 손을 붙들고, 저주를 중화시키고 있었다.


“...... 칫.”


레이라는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히 뭔가 더 있다고 확신하는 눈빛. 하지만 내 변명이 일리가 있다 보니 반박을 못하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다.

나는 변경백의 제안을 수락했을 때, 그가 탄식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레이라에겐 자네 정체를 비밀로 하게. 그녀는 자네의 정체를 알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살의를 품을 걸세.'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게. 그 아이 입장에선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야. 용사들을 증오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는 걸세.’


대체 왜 그렇게까지 용사들을 싫어하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묻자, 변경백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침중한 목소리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윈. 그 이름을 대 보시게. 내킨다면 내막을 이야기해줄지도 모르지.’


그윈이라고 했지. 그러고 보면 레이라의 이명(異名) 중에 '그윈의 연인'이라는 게 있었지 아마.

나는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레이라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변경백님이 그러시던데. 네가 외부인에게 경계심이 강한 건 ‘그윈’이라는 사람 때문이라고.”

“...!”


레이라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 그걸... 말했나요? 주인님께서?”

“이름 외에 자세히는 몰라. 듣고 싶으면 너한테 들으라던데.”

“.......”

“뭐, 말하기 싫으면 하지마. 대신 가겠다는 거 방해나 안 하면 돼.”


나는 그렇게 통보해 버리고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레이라를 주시했다.


주사위는 던졌다.

그녀가 자진해서 내막을 밝혀준다면 더 안전한 계획을 짜서 탈출할 때 용이하겠지만. 이대로 할센베르크를 돕다가 기회 봐서 빠져나가도 상관이 없다.

일단 레이라는 하녀의 신분이기에 변경백에게 대들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그의 사냥동료로 나선 이상 레이라는 이제 나를 해코지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변경백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거다.

난 더 이상 저 여자한테 모가지 썰리고 싶지 않아.


"......."

"......."


얼마나 대치하고 있었을까.

한참을 가만히 땅만 쳐다보고 있던 레이라가 결국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며 내쪽을 흘깃 돌아봤다.


“... 따라오세요.”


나는 잠시 멀뚱히 쳐다보다가, 레이라의 채근하는 눈빛이 쏟아지자 그제야 퍼뜩 일어섰다. 그리고 레이라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보여드리죠. 이 잔인한 세상이 제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치직. 그녀는 손가락을 튕겨 핸드랜턴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는 성의 외곽으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등장했다. 그녀는 망설임없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어둠에 나는 잠시 발을 멈췄다.

랜턴 빛이 어둠속에서 흔들거리며 나를 채근했다. 가만히 서있는 나를 레이라가 돌아본다.


“내려오세요. 이제 와서 겁이라도 먹었나요?”


일부러 자존심을 긁는 양 히죽 웃는 레이라. 나는 순간 발끈해서 퍼뜩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우리는 점점 아래로,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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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6. 또 다른 선임 (1) 19.11.13 83 3 12쪽
26 25. 처형자 그윈 +1 19.11.11 84 3 13쪽
» 24. 잔인한 세상 +1 19.11.11 88 4 11쪽
24 23. 폐성의 주인 (2) +3 19.11.10 94 3 12쪽
23 22. 폐성의 주인 (1) +1 19.11.09 90 3 13쪽
22 21. 하수도의 주인 (3) +1 19.11.08 85 3 12쪽
21 20. 하수도의 주인 (2) 19.11.06 89 4 14쪽
20 19. 하수도의 주인 (1) 19.11.04 92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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