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나는 하툼.)
아직 안 보여. 허나. 5미터 앞은 빛일지도 몰라.
"길고 긴 영원을 벗어나··· 너를 잃어버리고 나를 잃어버리길. 태양과 달의 잊혀진 약속. 하늘과 바다의 끝없는 매듭. 자아, 여기 나의 바람을 이어줄 너를 깨운다."
조금은 부드럽고도 강한 음성으로 은은한 초록빛 머리칼의 20세 청년 아쿠리오가 푸른빛을 내기 시작하는 구슬을 한 손에 쥐고서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는 동시에, 구슬이 떨어지지 않게 자신의 손을 살며시 펼치면서 간절히 외쳤다.
"지금 너의 이름을 부른다. 깨어나라! ···하툼!"
번쩍!
광범위한 지역을 뒤덮는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거기에 있던 수백 수천의 붉은 눈을 한 거대한 회색빛 괴물들의 몸은 순식간에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는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
어둠의 그림자와 같이 짙고도 깊은 땅속.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변 풍경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정없이 바뀌어 간다. 그러다 어느새 다소 눌려진 동글납작한 모양의 구슬 같은 작은 물체에서 찬란히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듯했다. 아직 땅속 깊이 머물러 있어서일까? 그래서 그것이 땅속의 두더지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달랐다.
그 푸른빛은···,
그것은 태양광선과는 달라 보이는 아주 신비한 무엇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의 음성과도 같이 따스했고 때론 깃털이 대지에 닿을 때의 그 소리 없는 발걸음과 같이 경이롭기만 했다.
다소 납작해진 구슬, 그 안에서 바다를 보았고, 하늘을 보았다. 거기다 밝고 환한 빛의 물방울들이 그 안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문득 갈 길을 잃어버린 한 소녀의 눈망울처럼 그렇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 안엔 오직 심장만이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심장의 고동과도 닮아서, 조금씩 물결이 출렁이며 두근대는 것만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그렇게 3년에 걸쳐 그것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땅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차츰 대지 위로 그것은 떠오르는 듯 했다.
그때, 휘이~ 하고 바람이 불어왔을까?
어느 순간 그 납작한 작은 구슬 안에서 그 구슬보다 훨씬 큰 몸집의 한 소년이 튕겨 나왔고 이내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가 하늘을 향해 온몸을 펼쳤다.
[후-아, 후-아]
주변의 차가워진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 얼굴은 이내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아··· 뭐지? 여긴 어디야!? 리오? 아무도 없어?]
그 소년은 적어도 14살(중1)쯤은 되어 보였고, 희한하게도 온몸이 유령이라도 되는 양 반투명 행세였다. 그 외모는 언뜻 보기에도 부스스해 보이는 갈색 머리칼에 다소 통통한 얼굴 거기다 장난스런 주근깨도 양 볼에 나있었다.
게다가 눈이 나쁜 것인지 커다랗기만 한 둥근 테 안경과 탁한 계통의 색상이 마구 표현되어 있는 허름한 옷차림이 몹시 촌스러움을 자유분방하게 나타내는 듯 했다.
뚜벅. 뚜벅.
그 소년은 싸늘한 겨울 날씨엔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런데 왔다 갔다 하는 그 거리가 그 납작해진 구슬을 중심으로 각각 좌우 5미터씩을 넘지 못했다. 무언가에 속박 당해 있는 듯 말이다.
그러던 와중 하늘에선 하얗고 하얀 눈이 부슬부슬 내려왔다. 그 눈송이를 바라보려고 그 소년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하얀 눈송이들은 소년의 얼굴을 통과하고 온몸을 통과하고는 대지로 스며들거나 쌓여갔다.
[휴으. 심심하다.]
털썩.
그러다 눈송이를 두 손으로 받아내려고 이리저리 애를 쓰다가 제 발에 걸려 땅바닥에 넘어졌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서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손을 휘저으며 인사를 해댔다.
[안녕?]
그런데, 그 소년이 있는 그 길을 지나가는 어른과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그 소년을 보지 않았다. 그 소년을 무시하는 듯 그냥 그 소년을 통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충격이었을까?
아니면 원래 알고 있는데 괜히 씁쓸했던 것일까?
소년의 인상이 다소 슬퍼 보였다.
[그랬지. 난 그냥 ‘하툼'이니까. 그냥 돌덩어리라서 내게 아무도 말을 걸 수 없었지. 맞아. 하-아. 잊고 있었어. 난 이제야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거. 훗, 아아- 심심해. 아. 그걸 하면 되겠다.]
하얀 눈은 이미 그치고 또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드디어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 소년은 한 손을 주먹 쥐고는 입에 갖다 대며 '흠흠'하며 헛기침을 해댔다. 그러다가 시작하려는 모양인지···
[리오. 이제 네게 이것을 주마. 우선 이 구슬을 손에 쥐거라.]
하며 노인의 음성을 조금 비슷하게 내며 이내 살짝 몸을 틀어서 두 명의 사람인 양 연기했다. 그 다음은 한 소년의 음성을 따라하는 듯 하며 눈빛은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뭔가를 들여다보는 듯한 몸짓으로.
[이건··· 뭐라고 하나요?]
또다시 몸을 틀어 노인의 음성을 내며 말했다. 기다란 수염이라도 있는지 턱 아래로 가상의 수염을 만지작대며 진중 하게.
[그건 ‘하툼'이란다. 네게 평안을 가져다줄 물건이지.]
그러고 나서 이건 아니다~ 싶었던지 자신의 부스스한 머릴 더 부스스하게 만들 작정으로 소년은 두 손으로 머릴 헝클어트렸다.
[그래, 이번엔 더 재밌는 걸로! 다시, 다시!]
그렇게 한 숨을 깊게 내쉬며 소년은,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했지만 아직은 쑥스러운 눈길로 뭔가를 바라보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도 앞에 자신 이외에 누군가 있는 모양인 듯. 1인 2역이었다.
[나, 나중에 멋진 모렌이 되어서, 유명한 모렌이 되어서 말야.]
여기서 ‘모렌’은 얌자쿨 세계에서 몽령귀(붉은 눈 회색괴물)를 해치우는 마법사 및 검사와 같은 자격을 지칭한다.
[!]
그리고 잠시 침묵. 앞서한 1인 그대로 계속.
[···난 너를 좋아해.]
그 후 오랜 침묵. 살짝 붉게 물든 얼굴로 연기해 나가는 소년, 그러다 이내 분노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어진 몇 마디. 그건 다소 여성스러운 말투였다.
[난 정말이지··· 저속한 존재들이··· 싫어-! 싫어!]
그리고 나머지 1인, 한참 후 멍한 얼굴로, 그리고 조금씩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 없다가, 조그맣게 연이어 점점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그렇게 처절한 절망을 맞이한 듯 세상에다 비웃음을 날렸다.
[흐흐. 하하하. 하핫. 내 주제에. 하하.]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흘리다가··· 벌떡! 고개를 치켜든 소년, 갑자기 무슨 소리라도 들은 걸까? 얼른 자신의 따라 하기식 연기를 마치면서 다시 처음의 납작한 구슬의 모습으로 어느새 돌아왔다.
‘아빠 따윈··· 내게 없어.’
[이게 무슨 소리지?]
‘없어! 없어! 사라져!’
5살에서 6살쯤 되어 보이는 한 아이는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뭔가에 화가 나있는 것도 같았다. 어느새 납작한 구슬이 있는 곳 그 근처 빛바랜 잔디 위로 그 아이는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여기서 처음으로 내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우와! 뭐야. 나? 나를 알아챈 거야? 너··· 넌 누구지? 대체 누구야?]
푸른 하늘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듯하더니, 그 아이는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리는 것처럼 그건 ‘두···둥!’ 하고 거대한 ‘북’ 소리인지 ‘징’ 소리인지 모를 그것은 웅장하게 아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내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일어서서 몇 걸음 움직여 댔다.
그때 그 강렬한 소리의 울림이 이어진 그곳에 있던 납작한 구슬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싸서 집어 들었다. 그것에 대한 아이의 첫 느낌은 ‘하늘 같고 바다 같다’는 것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걸 집어 들자마자 아이는 어느샌가 평온해 보였고, 아주 조금이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듯 했다.
[너···구나. 네가 날 찾아주었어. 고마워. 세준아.]
둘은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하툼은 이 아이의 이름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휘잉.
바람이 세준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사이 어느새 구슬 밖으로 갈색머리칼의 유령과도 같이 온몸 전체가 반투명한 소년이 세준의 곁에 섰다. 그러더니 함박웃음을 짓고는 세준의 주위를 빙그르르 즐겁게 돌았다.
살랑살랑.
세준이 아직 그 하툼이란 소년(중1 정도)보다는 작은 탓에 하툼의 손이 세준의 머리칼을 만지려는 듯 손을 움직여 대는 건 쉬운 일이었다. 허나 결국 잡히는 건 한줌 공허한 공기였다. 그러나 하툼의 눈은 더 이상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이 아이가 보든지 말든지 그런 건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그 아이 주변에서 두 팔을 양옆으로 쭈욱 뻗어서 마치 종이비행기처럼 마치 날개를 활짝 편 제비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서는 방긋방긋 웃으며 뛰어놀았다.
그때, 잠시 그 아이는 뭔가라도 느낀 것일까? 어느새 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빈 허공···.
그곳에 다소 통통한 얼굴의 갈색 머리칼의 한 소년 하툼이 우뚝 서 있었다.
[야!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응?]
그 말에 대한 대답이 들릴 리 없었지만, 그 순간 하툼은 왠지 모를 행복에 젖을 수 있었다. 낯선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찾아준 그 아이를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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