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만 믿는다는 건 다 뻥?
아직 안 보여. 허나. 5미터 앞은 빛일지도 몰라.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닌데···.”
준이가 극구 부인하고 나서자, 엄마는 아들의 당황하는 모습이 ‘오랜만의 볼거리’였던지 무척이나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준이는 이러다간 또 당한다-고 생각했던지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준이 엄마는 준이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신이 나서 말을 혼자서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 유랑이가 그렇게 좋든? 지연이보다 좋아? 이거··· 아들의 첫사랑을 내가 먼저 알아버리다니, 아아 이렇게나 좋을 때가···!”
그러면서 준이 엄마는 그제야 준이가 사라져 버린 걸 알았다. 그리고는 준이의 방을 뚫어져라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준이 너···, 오호호호~ 유랑이한테 잘해라. 자고로 여자한테 잘해야···, 없던 떡(?)도 생기지. 오호호호~”
준이가 방으로 들어간 것을 이미 알아챈 준이 엄마는 얄밉게도 준이 방 바로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준이는 귀를 양손으로 싸매고 엄마가 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적게 들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허나 이미 다 들려버렸고 듣고 말았다.
“싫다구. 그만해. 엄마.”
*
저녁, 엄마와 준이의 사이는 여전히 냉랭했다. 준이가 일방적으로 엄마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를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준이는 엄마가 말하고 있는 것을 안 들으려고 애쓰고 또 애쓰고 그러면서 식사를 마쳤다.
준이가 안 들으려던 말은 대강 이러했다.
“준이야, 엄마가 저녁엔 네가 좋아하는 고등어구이에다가 콩나물국 끓였단다. 왜? 아직도 삐쳐 있어? 그럼 엄만 너~무 슬퍼져, 아. 기운 빠져라~, 흐음 유랑이가 정말 예쁘든? 내가 아동복 가게를 해서 정말 다행이야.
유랑이 얼굴이 화악 살더니 말이야! 준이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너 계속 이러면 재미없을 건데? 이 엄마가 밥 안 줄지도 몰라!? 뭐야! 이래도 소용없단 말이니? 어이. 준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끄떡하지 않고 준이는 밥을 입에다 꾸역꾸역 쑤셔 넣고 있었다. 식사 중에 들리는 소리라곤 엄마의 잡다한 말들, 거기에 준이가 꼭꼭 씹어 넘기는 음식물 소리,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 젓가락이랑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그게 다였다.
*
준이는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는, 억지로 잠에 들었다. 자면서 이불 바깥으로 준이의 두 팔과 두 다리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몸부림을 쳤다.
처음엔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준이의 꿈속-
저 푸른 하늘 아래에서 준이는 어떤 여자애와 손을 마주 잡고는 파릇파릇한 초원을 달려가고 있었다.
“유랑아! 하하하!”
준이가 그 여자애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곤 너무 좋아 크게 웃고 있었다. 그러자 손을 잡고 있던 그 여자애는 미소를 짓다가 준이처럼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초원 위를 달리는 두 꼬마를 축복해 주듯이 시원한 바람이 파고들어 와, 그들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는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두 꼬마의 머리칼이 이리저리 휘날리며 그들은 즐거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가오는 먹구름과 요란스럽게 울리는 천둥소리가 그들이 서로 잡고 있던 손을 놓게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밤의 고양이들···.
‘야옹~야옹~ 야-옹!!!’
노르스름한 주황빛에 흰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들은 준이와 유랑을 더욱 요란스레 울부짖으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고양이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이상하게 반복되어 준이의 귀에 머물렀다.
계속 준이의 귀에는 ‘야옹. 야옹. 야옹!!’고양이 소리만이 울렸다.
“시끄러워. 진짜.”
*
누구나 공평하게 ‘꿈’을 꾼다.
꼬마든 어른이든, 하지만 꿈에 민감한 것은 다름 아닌 꼬마들이다.
꿈은 자연스러운 것, 꼬마들은 모든 걸 순수하게 바라본다.
길가에 흩어진 꽃을 바라보더라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아이들의 힘이 강렬히 살아있는 창조의 나라. 상상 속의 세계, 그 깊음을 알 수 없으리만치 빛과 어둠이 쌓여있는 곳,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이라 불리는 그곳을 우리는 '꿈'이라 부른다.
어느 것이 진실인가? 이미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곳. 어느 순간에 분명히 존재했다고 생각되는 곳. 현실의 또 다른 휴식처이자 여행지, 나의 다른 시각이 살아있는 곳.
영원히 그곳에서 있을 순 없지만, 다른 나를 찾고 그런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찾으려고 발버둥치는 그곳이 꿈이라고.
하지만 그런 건 현실만을 믿고 따르는 자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니, 그들이 만날 길은 희박에 가깝다.
어른이 되어 가면 꿈꾸는 것을 차차 잃어버리게 된다. 그냥 귀찮아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꿈이란 것은 특별한 날(태몽, 죽음, 행운 등등)에만 잠시 보이는 것만으로 기억되어 간다.
어른이 되었을 때 맞이한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고 벗어나기 힘든 족쇄와 같이 일상을 똑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쁘다. 휴식을 위한 수면뿐···.
때때로 사람들은 꿈속으로 나아간다.
자신만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
*
-유랑이 감기에 들어 앓아누운 그 첫날부터~ 4일 간의 긴 여정-
어제 유랑과의 첫 만남을 황당하게 가진 준이는 유랑 생각을 했다.
‘어제 온다고 약속해 놓고!, 왜 안 오는 거지?'
유랑이 한창 감기가 들어 있는 줄도 모르는 준이는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우연히 엄마가 전화를 하는 것을 듣고는 준이는 남모를 고민에 휩싸였다.
‘엄마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인을 만들어 놨다니, 엄마가 나만 믿는다는 건 다 뻥이었을까!? 아빠는 어쩌고···’
준이는 사실 이런 문제에 그렇게 머리 아프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준이의 아빠라···.
그건 아직까지도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였다.
준이 아빠는 준이가 세 살 때 돌아가셨으니, 준이의 기억엔 거의 없었다. 준이 엄마가 말하는 것을 들은 바로는 준이 아빠가 무지 따뜻하고 온순한 성격의 젠틀맨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아빠’란 준이가 이번 엄마의 문제로 진짜 오랜만에 불러보는 ‘낯선 대상’이었다.
준이 엄마랑 그 아저씨랑 만난 지는 1년 정도 된다고 한다. 정말 감쪽같이 준이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 아저씨는 아직 미혼이었다. 준이가 생각하기에 그 아저씨가 혹시나 무지막지하게 무섭거나 해서 ‘과연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쪽의 ‘두려움’이 먼저 생각되었다.
자신의 엄마가 그 아저씨로 인해 예전에 아빠가 그랬듯이, 죽어서 헤어져 버리면 ‘엄마는 어떡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기 엄마가 매우 슬퍼질까 봐 미리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준이는 엄마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일을 벌이기로 했다. 아저씨가 엄마를 속상하게 하면 뭐든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준이는 그 아저씨의 행동을 두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관찰했다.
그 아저씨는 휴가 때마다 오려고 했다는데, 엄마랑 다시 얘기해서 '오늘' 오기로 했다고 한다.
‘치잇! 왜 오늘이지?’
준이는 그 아저씰 계속 관찰했다. 준이는 집 근처 ‘나무’위에서 자신의 장난감인 새총을 가지고서, 아저씨가 지나가는 길목(준이네 자그마한 정원)을 보면서 기회를 노렸다.
거기에 준이 엄마가 좋아하는 꽃 화분이 여러 개가 보였다. 마침 아저씨가 그곳에 있었고 준이는 아저씨 근처의 꽃 화분을 향해서 작은 돌덩이를 정확히 새총으로 날렸다.
쨍그랑- 와장창- 부시르럭!
웬일인지 엄마는 눈치채지 못했다. 가까이 있었건만···.
‘앗! 엄마 노래 듣고 있었잖아!’
작전 실패···, 근데 이상한 건 아저씨의 태연해 보이는 저 태도였다.
‘저 아저씨 이상하다? 왜 화를 안 내는 거지?’
하며 준이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아깐 내가 너무 힘이 약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 후 준이는 ‘씨익’ 웃고는 그 작은 손에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돌 두 개를 손에 ‘꽈악’ 움켜쥐고는 새총을 만지작거렸다.
그다음엔 깨진 꽃 화분의 흔적을 치우고 있던 아저씨의 근처를 바라보며 다른 꽃 화분을 노렸다. 그렇게 준이는 꽃 화분을 향해 연달아 ‘쒸웅’ ‘쒸잉’돌을 날렸다. 모두 좋았다. 그때까진···,
갑자기 나무 위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고양이’가 있었으니, 하필이면 준이가 간신히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는 쪽으로 쌩하니 지나갔다. 그래서 준이는 쓰린 아픔을 맛보고 말았다.
왜냐면 준이가 작은 돌멩이를 날리고 나서, 그 결과도 들려와야 했었던 ‘쨍그랑’ 화분이 깨어지는 소리도 듣지 못한 체, 그만! 준이의 키보다 ‘약 세 배’나 더 큰 나무의 가지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거다.
그 고양이! 날쌔고 온통 시커먼 고양이 녀석이 완전히 준이의 일들을 망쳐놓았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준이. 그래도 아픔을 참으며 목소리를 조그맣게 죽였다.
“아야··· 아얏!, 내 다리-이.”
준이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곧장 이쪽으로 오고 있는 아저씨···, 준이는 몸을 일으켜 세워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했다.
‘저, 저 아저씨한테 잡히면 안 돼!’
그 아저씨는 어느새 준이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이미 준이의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어디 보자. 움직이면 더 아프단다.”
“시-싫어요. 저리가요. 예에? 아얏···.”
준이는 아저씨를 당연히 '적'으로 여겼기에 억지로 다리를 움직여 일어나려고 하다가 완전히 아프다는 것이 들통나고 말았다. 난처했다. 아저씨는 다소 진지한 얼굴로 준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넌 왜 날 싫어하는 거니? 난 준이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뿐인데···, 안 될까?”
그러자 준이는 저 아저씨를 엄마에게서 어떻게든 떼어놓으려고, 둘이 헤어지면 엄마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소리쳤다.
“우리 엄마는 아저씨- 싫다고 했어···!”
그런데 어린아이의 너무나 당돌한 거짓말에 아저씨는 꽤 쓸쓸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다가 준이를 차분히 바라보며 말했다.
“넌 많이 다쳤어. 자아 치료해야지?”
“······.”
그때 준이는 뭐라고 할 말을 잃었다. 아저씨의 그 얼굴은 정말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준이의 마음에 아저씨의 슬픔이 번져갔다. 그 슬픈 얼굴이 준이의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왜···?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러다가 준이는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난 엄마를 지켜야? 하는 데, 엄마! 엄마? 어디 있어?’
자기 발목을 조심스레 쳐다보다가 준이의 얼굴로 시선을 돌린 아저씨가 준이 눈에 들어왔다. 준이는 순간 불안해졌다.
‘큰일 났다. 이 아저씨랑 어떻게··· 같이 있어!?’
아저씨랑 같이 보내야 하는 시간, 준이 엄만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고,
‘우앗··· 아이고 내 다리···! 아얏.’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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