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가족?*장난감.
아직 안 보여. 허나. 5미터 앞은 빛일지도 몰라.
‘으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은은한 초록빛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내려앉은 모양새조차도 은근히 멋쩍어 보이던 리오, 아직 바닥에 누운 포즈 위로 얇은 이불자락이 스르르 내려왔고, 그 순간에도 리오는 온통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지 중얼댔다.
“내가 꿈을 꾼 건 맞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그러고 보니 눈이 켕~한 것이 새벽녘에 깨어나서 온통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러다 다시 주섬주섬 옅은 청색 계통의 이불을 챙겨 들고 가서는 베이지 빛깔의 침대 위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덜컹.
그러면서 베개의 폭신함에 부비적대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아··· 역시 풀타임으로 자는 게 최고야. 지금은 클로. 쥬다. 그 녀석들도 없고, 아함’
*
현재 시각: 오후 2시 37분.
-Oh My God! 제과점-
그 간판을 읽고 있던 한 노인, 비쩍 마른 체구에 짙은 갈색 중절모를 머리에 걸치고, 단풍잎 모양이 모던하게 그려진 윗도리를 입고서 그 제과점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노인의 눈썰미는 매우 세심하고 양손엔 신문을 고이 집어 든 상태로 눈을 위아래로 힐끔거리며 ‘난 지금 신문을 읽는 중이오!’라고 말하는 듯싶었다.
그 노인의 조심스런 발걸음은 이내 제과점 안으로 들어서 있었고, 그 노인의 시선은 단란한 가족으로 보이는 부류를 은근히 숨어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 언제 여자를 만든 거지? 창현이 자슥. 내가 놀러간 틈을 타 저런!! 게다가 저 애는 뭐야? 적게 봐도 5살? 아니 6살일 거야. 흐음··· 그래도 좀 더 자료가 필요해.’
이때, 세준&창현&혜경은 이런저런 이야기꽃 피우기에 열중이었다.
“창현씨이~ 여기 자주 오는 거예요? 역시 창현씨가 자주 다니는 곳답게 여기 과자들~ 너무~ 맛있는 거 있죠? 그렇지? 준아?”
우물우물.
어느새 볼이 과자가 들어가서 통통해진 세준은 온통 과자와 빵들로 둘러싸인 그곳의 그윽하고 고소한 향기에 넋이 나가 있는 듯, 계속계속 주섬주섬 하나둘씩 과자 맛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혜경을 바라보면서, 혜경의 옷자락을 잡으면서,
“엄마! 엄마! 이거 사자. 저것도! 아! 이것도 좋겠어! 와아··· 나, 너-무 좋아!”
하며 히죽히죽 웃어대고 있었다.
그 광경에 ‘여기 데려오길 잘했어~’란 감격에 빠진 창현은 준이와 함께 맛있는 과자를 집게로 들어서 종이봉투에 하나둘씩 넣고 있었다.
그러며 창현은 혜경과 준이의 얼굴을 보며 밝게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짝짝짝.
창현은 손뼉을 쳐 보일 정도로 즐거워하는 준이의 눈동자를, 준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아. 역시 나랑 취향이랑 닮았구나! 나도 이거 엄청 좋아했거든.”
“아··· 그래요? 아저씨도 꽤 하는 데요? 하하하. 아~고소해. 바삭바삭. 우와 우와···”
그들 근처까지 접근한 노인, 이름, 민창로, 즉 창현의 아버지이다.
그 노인은 들키지 않은 것이 용한 듯, 이젠 신문 사이사이로 제과점의 과자를 집어서 맛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내 검정과 흰색의 조화가 돋보이는 레이스와 리본을 의상에 적당히 투자한 메이드 복장과 유사한 여점원이 등장하고 말았다! 이러면 일이 꼬일 우려가···,
“저기··· 이거 사시게요? 어머나! 안목이 뛰어나시네요. 이것은 이번에 저희가 직접 어르신 분들을 위해 만든 웰빙 쿠키입니다. 어때요? 한 봉지에 5천 원입니다.”
그러자 신문을 얼굴 위로 바짝 올리고서 그 여점원 근처로 다가가서 조용히 말하는 노인.
“워이··· 워이! 일단 저리 가 있게! 내 알아서 할 테니.”
그러나 점원, 불굴의 의지를 가진 듯 오늘 팔고야 말겠다는 듯이 다정다감하게 외쳐댄다.
“아~ 그럼 이건 어떠세요? 헬로(=hello) 노인정에서 아주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특히! 노인정 세련되고 우아하신 홀로된 마나님들께서 즐겨 드시는 녹차잎 가루와 뽕잎 가루를 쓴 과자거든요? 어떠세요? 이 정도면 안 사실 수 없겠죠?”
그러자, 노인 무슨 말에 조금 화가 났던 걸까···! 인상이 짙고 어둡고 음산하게 변해가더니 그 점원 쪽으로 시선을 향하고서 애써 가린 얼굴을 신문을 확 접어 제치고 드러냈다.
여전히 아들을 의식하는지 조용히 말하는 편이지만 낮게 깔린 음성이 꽤 무시무시했다.
“이봐! 쿠키든 과자든··· 내가 알아서 한다잖나. 그리고! 일단 말하겠는데··· 그런 식으로 노인정이나 마나님들 어쩌구 하는 걸로 날 꼬실 생각 말게! 떽!”
“아. 죄송합니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여점원, 일단 기는 팍 죽었지만, 궁금했다.
이 노인 분은 ‘대체 얼마나 많은 베테랑의 판매원들을 물리친 것일까?’라는 것과 대체 이 노인 분에게 ‘적합한 미끼는 뭘까?’하는 고민도 생겨났다.
“궁금한가?”
그런데 점원의 그 눈빛 하나 보는 것만으로도 노인은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한 듯, 여점원이 이내 고개를 꾸벅 끄덕이자, 뭔가 묘한 게 있을 듯한 뉘앙스를 풍겨대며 그 노인은 자기 입으로 술술 그 자기 자신을 낚을 미끼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호라! 궁금했겠지. 그럼 내 말하지. 50대를 장악하는 비법은···! 바로 리서치(=research)!”
“에에?”
아직도 어리둥절 점원,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노인 분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막 자신의 대단한 업적을 누군가에게 몰래 발설한다는 심각한 분위기로 노인이 말했다.
“조사 말일세! 실질적인 조사 결과물! 직접 몸으로 뛰란 말일세! 이래도 모르겠나?”
그래도 왠지 알 듯 말 듯 했지만, 여점원은 스스로 머릿속으로 뭔가를 알아차린 듯 흐뭇해했다. 그래서 갑작스런 군대 복창을 하고 있었다.
여점원, 알고 보니 여군 출신이었나!?
“아, 아닙니다. 며, 명심할게요! 가, 감사합니다!”
“암! 그렇지. 실질적인 데이터야말로 최상의 서비스 아니겠어! 흠, 근데 안됐어. 이쪽 방면으로 직업이 생겨버렸거든. 중매쟁이들 말이야. 잘 찍은 이미지 사진에서부터 상대방의 호감도 파악까지 등등···!”
한껏 자신의 논리를 이리저리 끼워 맞춰 나가고 있던 도중, 뭔가 잊은 것이 생각났다.
곧 주변을 휘익 돌아보며 창현의 모습을 발견하려 했으나 그곳엔 이미 존재가 사라진 후였다!
‘이 아들 자슥. 어딜 내뺀 건지···!’
라고 하며 눈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만든 진정한 본인은 민창로인 듯, 스스로 혼자 길을 샌 모양이 분명했다.
*
환한 조명 아래, 장난감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자동차 조립 세트를 손으로 들어 이것저것 살펴보던 옅은 회색 정장 차림의 창현이 자신의 바로 왼편에서 자그마한 오토바이 모형을 만지작대던 세준을 바라보며,
“그게 마음에 들어? 잠깐 볼까?”
“여기···”
하며 그 파란색 계열의 오토바이 모형을 창현에게 건넸다.
“이거 디자인이 정말 근사한걸! 잘 골랐어. 그래. 자동차는 어때?”
이런저런 장난감을 품평하는 말이 이어지고, 세준은 그저 듣기만 하다가 간혹 ‘좋아요’ ··· ‘아니 이건 별론데’란 식으로 말해댔다.
이때, 세준 엄마인 혜경은 그쪽 분야엔 그다지 관심이 안 갔던지, 창현과 세준이 있는 공간에서 한 블록 떨어진 인형 세트를 쭈욱 바라보고 있었다.
‘앗! 저, 저거다!’
그러다 어느새 뭔가를 발견하고는 얼굴에 생기를 띄우더니, 은실이 수놓아져 있는 파랑과 검은빛이 조화로운 한복을 차려입은 작지만 정말로 ‘인간’ 같은 예쁜 인형 쪽으로 달려갔고, ‘이거 너무 예쁘다.’면서 그 근처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흐뭇한 얼굴로 그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는 아기자기한 인형들에 흠뻑 취해있었던 혜경이었다.
*
그 주변은 온통 ‘가족’들 천지였다.
그 무리에 세준도 끼어 있던 것이었다.
세준의 귓가로 여러 가족의 웃는 얼굴과 서로를 다정스레 부르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 난 그쪽 게 더 좋아.”
“엄마 나 이거 갖고 싶어. 아빠는 어떤 게 좋아?”
그런 말 ‘투성’이라서 그럴까?
그 상황이 무척이나 어색해진 세준은 자신은 그들과 닮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답답한 가슴과 더불어 문득 창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저씨는 엄마를 좋아해? 그럼, 이 아저씨··· 우리 아빠 해주는 건가?’
그러는 사이 창현의 눈과 정면으로 잠시 마주쳤다.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봐서 그런지 마음속에 담겨있던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올 뻔했다.
“아···, 아니에요. 헤헤.”
‘아빠라고 말할 뻔했어···, 아아! 내가 무슨 말을···! 난 엄마 하나로도 괜찮다구!’
라고 막 생각하던 무렵, 창현은 다소 당황하고 부끄러움에 살짝 붉게 물들여진 준이의 얼굴을 보며 걱정해 댔다. 진짜 아빠처럼.
“준아, 어디 아파? 얼굴이 좀 안 좋다··· 아까 먹은 게 잘못된 거 아니야? 괜히 내가 ‘파’를 먹으라고 했나 보다. 흐음. 괜찮아?”
“예에. 아무렇지 않아요. 괜찮아요.”
그러며 손사래를 쳐댔다.
준이는 가슴도 주먹으로 두들겨 대면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창현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천천히 떨구고는 생각했다.
‘그래도 이 아저씨···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가짜라구. 왜 잘해 주는 거야!’
“싫어······.”
라고 작게 중얼거리던 세준은 어느 순간 이곳에 자신 혼자만 덩그러니 있는 것과 같은 쓸쓸함을 느꼈다.
마치 이곳에 잘못 오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라도 한 것처럼, 주위에 진짜 가족들에게 ‘나는 오늘 거짓 행세를 하고 있다.’며 맘속으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진짜 아빠와 같이 오질 못했다.’라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상하게도 창피한 느낌에 엄마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 우리 그냥 가. 나, 집에 가고 싶어.”
“아··· 잠깐만.”
“가자고! 집에!”
“조금만 더 보고 가자. 딱 10분만···!”
“으음. 그럼 10분이야.”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