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엘리트의 자존심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시안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다시 달려드는 시안을 가볍게 제압한 하쉬는 그리니언의 말을 전했다. 그리니언의 말이라는 이야기에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시안은 충격을 받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니언 대장님은 마족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쉬는 그런 시안을 보며 이대로 오해하게 두면 어떨까 잠시 생각했지만, 자신에게 귀찮은 일을 떠맡기는 것은 좋아하는 주제에 정작 자신이 당하면 용서가 없는 작은 용병을 떠올리며 시안의 망상을 저지했다.
"뭔가 계속 조금씩 아쉬운 녀석이군. 내통하고 있는 건 그 양반이 아니라 나다. 마족을 배신한 마족인거지."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도 일어나는 법이야. 분란의 싹은 잘라버리는 것이 상책이지."
그리니언의 당부 때문에 조금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주던 하쉬는 또다시 레이피어를 들고 살기를 풍기는 시안을 보고 서서히 투기를 끌어올렸다.
"할 수 있다면 해보든가. 그리니언 씨가 너무 구박하지 말라곤 했지만, 막상 힘조절 잘못해서 죽여버렸다고하면 생각보다 약했던 모양이네 하고 넘어갈 위인이니까."
시안은 하쉬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투기에 소름이 끼쳤지만 이내 예의 그 섬뜩한 표정으로 또 다시 하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하쉬는 조금 전보다 과격하게 시안을 땅에 패대기 쳤고, 정신을 잃었던 시안이 정신을 차릴 때마다 몇 번이고 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었다.
어느새 달이 뜨고, 꺠우고 쓰러뜨리고를 반복하던 하쉬가 배고픔을 느껴 그냥 죽여버릴까라고 진지하게 고민할 때 쯤 시안은 바닥에 쓰러진 채 말했다.
"과연! 이제야 대장님의 뜻을 알겠어!"
하쉬는 시안의 목소리에 드디어 포기했나 싶었지만, 이어진 시안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을 죽일 때까지 옆에서 감시하는 역할로 붙여주신 거군. 너 정도의 실력이면 최소 백작급의 마족일테지. 어쩔 수 없군. 당분간은 너를 감시하도록 하겠다."
'자신감이고 자존감이고 다 무너질만도 한데, 아직도 저럴 수 있는 건 어떤 의미론 대단하구만. 아예 얼굴을 박살을 내서 고개도 못 들게 해버리고 싶지만, 그건 좀 곤란하겠군.'
시안이 멀쩡하게 떠드는 것은 의뢰인을 만나러 가는데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하쉬가 나름대로 신경을 써줬기 때문이었지만, 그칠 줄 모르는 시안의 말에 하쉬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가게로 들어가려했다.
"좋을 대로 해. 그럼 내일 저녁에 내 가게로 와라. 되도록이면 나도 정상영업을 하고 싶으니까. 그 때 의뢰인을 만나러 가지. "
"그래서 그 의뢰인이 누군데?"
하쉬는 별다른 저항없이 의뢰인에 대해 묻는 시안을 보고 뭔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주의사항을 같이 전달했다.
"라스베트라는 여관의 주인장이다. 그리니언 씨가 자주 묵는 곳이니 무례하게 굴지 않는 편이 네놈 신상에 이로울 거야."
"내게 명령하지 마라! 그리고 조사는 오전부터 시작한다. 네놈 사정 따위 알바아니니까."
행여나 사고라도 칠까봐 나름대로 배려를 담은 말에도 건방진 태도를 유지하는 시안 때문에 결국 하쉬의 인내심이 한계를 맞이했다.
"...뭐 그리니언 씨한테는 생각보다 더 약했다고 이야기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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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리니언 씨가 소개해주기로 하신 분...이시라고요?"
카키는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 특수경찰대 경위 시안이다. 그리니언 대장님꼐서 부탁하셔서 특별히 찾아 온 것이니 세세하게 말하도록."
그러나 자신감이 넘치는 시안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카키는 여전히 의심과 동시에 조금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우선 치료부터 하시는 편이..?"
시안은 입술이 터지고 눈두덩이에 멍이 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임무를 하다보면 작은 부상정도는 일상이니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것보다 한시가 급하니 어서 의뢰 내용에 대해 말하도록."
시안은 저녁에 라스베트로 갈 것이라는 하쉬보다 먼저 의뢰를 받아 해결하고 잽싸게 그리니언과 합류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카키는 뭔가 초조해보이는 시안이 못미더웠지만, 그리니언이 자신의 의뢰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의뢰를 받을 사람이 하자가 있다고 하셨으니 이 사람이 맞겠지.'
카키가 잠시 주변을 살피고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실례합니다. 그리니언 씨 소개로 왔는데....요."
여관 문을 열고 들어온 하쉬는 자신을 보며 경악하는 시안을 보고 바로 목덜미를 낚아챘다.
"이거 놔라 마족! 제국 소속 특경의 공무를 방해하다니! 역시나 네놈은 마왕군의 첩ㅈ...!"
시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카키는 시안과 함께 여관 밖으로 날아가버린 현관문에 대한 수리비는 그리니언에게 청구해야할지, 아니면 의뢰비로 생각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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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정리되자 카키는 박살이 나버린 여관 문을 한 쪽에 기대 놓고 시안을 던져버린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그리니언 씨가 소개해주신 분이신가요?"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하쉬라고 합니다. 문은..."
카키는 다짜고짜 사람을 던진 것 치곤 굉장히 예의바른 하쉬의 모습이 의외였지만, 조금 전 날아가듯 던져진 시안보다는 상대하기가 더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의뢰비도 제대로 못 챙겨드리는데 도와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리니언 씨에게 빚을 좀 졌거든요. 원래라면 저녁쯤에 찾아오려고 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혹이 하나 달려있는 상황이라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정답이었군요."
"그런데 저 분은..?"
카키가 문위에 누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시안을 슬쩍 바라보자 하쉬는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뢰 이야기는 저녁 때 다시 하는 편이 좋으실까요?"
"아뇨. 오신 김에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일단 들어오시죠."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카키는 어쩌면 시안의 얼굴을 저렇게 만든 것이 눈앞에 있는 하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하쉬를 소개해준 사람이 그리니언이라는 것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자가 있다는 건 폭력적이라는 걸까? 그리니언 씨에 비하면 덜한 편이지만...아무튼 말조심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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