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진지 남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삐친 거 아냐?”
연신이는 별로 관심 없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내 말보다는 오히려 앞에 있는 과자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망할 놈.
좀 제대로 상담해주면 어디가 덧나는 걸까.
뭐, 아쉬운 건 나니까 어쩔 수 없다.
으음.
연신이의 의견대로라면 테베는 속된 말로 삐쳐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삐친 걸까?
안겨 있는 동안에는 은근 분위기가 좋았다.
테베는 그 눈동자에 고여있던 눈물이 모조리 흘러 떨어질 때까지 나를 안고 있었다.
뭔가 아련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마침내 정신을 차린 테베는 나를 바르게 앉혔다.
나는 얌전히 테베의 품에 안긴 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카이델에게 향하는 동안에도 별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테베는 이미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삐칠 이유가 어딨는데?”
“모르지, 나야.
뭐 네가 말을 탈 줄 안다고 해놓고 사고 친 거 때문에?
그 기사남, 카이델한테 절절매잖아.”
“넌 그러고도 연애소설의 신이라고 이름 댈 수 있냐?”
나는 한심하다는 듯 연신이를 바라보았다.
연신이가 울컥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조그만 몸에 털이 공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진짜 공처럼 여기저기 통통 튀어다니기 시작했다.
···.
그래 봤자 내 한주먹보다 작은 게···.
“생각을 해봐.
나는 테베가 좋아하는 여자지?”
“그렇지.”
“그럼 날 구했어.
그래서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고 치자.”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왜 삐쳐?”
“나야 모르지.”
···.
이 새대가리가.
삶아서 백숙으로 만들어버릴까.
나는 차가운 눈으로 연신이를 노려보았다.
연신이는 낄낄 비웃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거구나.
이 새대가리···.
날 가지고 놀았겠다···?
“너, 이유를 아는 거지?
빨리 말 안 하냐?”
“모르는뒈.
나야 뭐 연애소설의 신이라고 이름 대면 안 될 정도의 심각한 연애고자 아니냐?
낄낄낄.”
···.
어후.
오늘 진짜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이 새대가리를 때려주고 싶다.
저런 식으로 나오는 연신이가 내게 정보를 줄 리 없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자.
생각해보자.
기사남의 속성은 뭐지?
근면, 성실, 충직···.
테베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 같은 단어들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며 생각한 대로 행동하려 한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
···.
설마···?
“야.”
“왜?”
“그거냐?”
“그거가 뭔뒈?
모르겠는뒈?”
···.
저 말투는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야···.
죽여버리고 싶다.
“혹시 자기가 감정에 휩쓸렸던 것 때문에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야?”
“윽.”
연신이가 흠칫 놀랐다.
연기인가 진짜인가.
그걸 가늠하기 위해 연신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신이는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안절부절못했다.
그렇다는 건···.
진짜일 가능성이 크겠네.
나는 그렇게 단정하고 연신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연신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느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테베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내게 자연스럽게 접해 올 가능성은?
내가 테베를 그리 오래 알진 않았지만 거의 0%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수를 내야만 한다.
무슨 수라···.
어떻게 해야 할까.
뭘 해야 테베가 다시 내게 마음을 열까.
이번에 마음을 열면 틀림없이 이전보다 마음이 더 깊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작은 사건 몇 번으로 충분히,
아니 큰 사건 하나로도 충분히 고백을 받아낼 수 있다.
이미 자잘한 접촉으로 호감도는 충분히 쌓았을 터다.
그렇다면···.
“흠···.”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테베의 감정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
지금의 테베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카이델에게의 충성.
그리고 나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마음은 충성만으로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최소한 로맨스 판타지의 남주인공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테베는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테베가 나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
나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 뒷일을.
그걸 깨부수는 방법은 내가 생각하는 한도 내에서는 두 가지.
뒷일조차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을 벌이거나,
혹은 내가 그 뒷일을 감당할 각오가 되었음을 알리거나.
여기서 내 캐릭터 설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이세계에 갑자기 떨어져서 불안하고 두려움 가득한 가녀린 여자, 느낌이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테베에게 들이대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캐릭터 붕괴.
오히려 호감도가 내려가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뭐 솔직히 생각해보면 어지간해서는 테베의 호감도가 떨어질 리 없다.
내 속성의 힘은 작가가 주인공을 위해 준비한 소위 말하는 먼치킨의 힘.
그러니 내가 뭔 짓을 해도 호감도는 오를 것이다만···.
그런 식으로 받아낸 고백에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미 두 번의 경험을 했다.
억지로 받아낸 고백의 비참한 말로를.
그것은 진 남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뜬 엔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아마도 내가 한 선택으로 인해 정해졌을 것이다.
처음 숲에서의 엔딩을 생각해보면.
요컨대 그거다.
설령 진 남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더이상 비참한 배드엔딩은 보고 싶지 않다.
뭐, 솔직히 말하면 게임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이상 테베를 위한 것은 아니다.
이건 전적으로 그저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마음이 편하기 위한.
이 얼마나 이기적인 여자인가.
내 속의 내가 비웃는다.
한편 다른 쪽의 내가 반문한다.
그래서?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법이야.
몰랐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연신이의 말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연신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나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가야 할 길은 정리 되었다.
나는 두 가지의 길 모두 선택하지 않겠다.
*********
“로이스터 경.”
언제나의 식사시간.
그러나 테베는 오늘도 침묵했다.
음식을 가져왔을 때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음식을 내려놓을 때도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식사를 시작한 지금도 그저 묵묵히 그릇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물끄러미 테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테베는 그런 내 시선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보통 기사란 기척만으로도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곤 한다.
테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심지어 이 소설 속에서 원작은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 판타지 소설에서 왕의 호위기사였던 테베가,
나를 보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게다가 자신은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 얼굴에 조금이나마 드러난다.
불안과 초조함이.
표정은 얼음 같지만, 그 눈동자가 흐릿한 감정을 품고 있기에.
테베는 저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어쩌면 혐오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테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걸.
“네, 아샤님.”
“나 좀 볼래요?”
테베가 마지못해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시선은 미묘하게 나를 빗겨 나가 있다.
뭐, 일단 시야에는 내 얼굴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엷게 웃었다.
“제가 로이스터 경에게 뭔가 잘못을 했나요?”
테베가 움찔, 몸을 굳혔다.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나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 뿐.
그렇기에 지금 내 말은 아마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니요, 아샤님.”
테베는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에는 흐릿한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슬픈 듯 웃어 보였다.
“제가 뭔가 잘못했다면 알려 주세요.”
“무슨 말씀을···.”
“···제가 뭔가를 잘못한 게 아니라면 갑자기 왜 저에게 그토록 차가우신가요?”
나는 파르르 손을 떨었다.
수전증은 아니다.
다만 몸의 떨림을 통해 내 마음을 보여주려는 것뿐이지.
테베의 손이 내 손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아닙니다, 아샤님.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날, 제가 낙마한 날 때문인가요?”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테베는 고개를 젓지 못했다.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던 거겠지.
“저 때문에 귀찮으셨던 거죠?
죄송해요···.”
“그런 건 아닙니다, 아샤님.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진 모르지만 절대 아샤님께 뭔가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슬픈 생각.
아니다.
졸린 생각을 하자.
대학교 때 제일 지루했던 권 교수님의 강의.
그야말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졸려질 정도의 강의였다.
아.
하품 난다.
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로 테베의 녹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본다.
테베는 마치 명치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토록 제게 차갑게 대하십니까?”
“저, 저는 그럴 생각은···.”
테베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손에 들고 있던 포크마저 놓쳤다.
딸그랑 소리가 나고 나서야 테베는 자신의 손에서 포크가 떨어진 것을 깨달은 듯했다.
테베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그 틈에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려 눈물을 떨궜다.
“저는··· 제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폐하와 로이스터 경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저를 마녀라고 의심해도 폐하와 로이스터 경만큼은 아니라고 믿어주십니다.
제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은 폐하와 로이스터 경뿐인데···.
그런데···.”
목소리가 떨린다.
하품을 낸 눈물이라도 눈물은 눈물.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테베를 올려다보았다.
“···읏.”
테베가 몸을 뒤로 젖혔다.
불의의 기습이라도 받은 것처럼.
후후.
일본 소설에서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의 이 각도에 환장한댔는데,
어느 정도는 통용하는 말인 듯했다.
나는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서 눈물지었다.
“아샤님···.”
테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말을 재촉할 타이밍이 아니다.
섣부른 재촉과 유도는 오히려 입을 닫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나는 기다렸다.
솔직히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기다렸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내 기분상으로는 줄줄 흐르는 것 같지만 아마 테베에게는 나름 예뻐 보이지 않을까?
···.
아니, 뭐, 일단 속성의 힘이 있으니까.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테베가 입을 열었다.
“제 태도가 아샤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합니다.”
테베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라앉았다고 표현했지만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좋다.
그 마음을 흐리게 하던 것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샤님.
그 날의 일 때문에 제가 다소 이상하게 행동했던 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것은 아샤님께서 낙마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테베의 눈동자가 나를 비껴갔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가 한심했기 때문입니다.”
···.
엥?
감정을 드러냈던 것 때문이 아니야?
···.
나는 연신이를 보았다.
연신이가 낄낄거리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이 빌어먹을 새대가리가.
또 나를 속였겠다···.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나중에 꼭 저걸 백숙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다짐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그걸 티 낼 수조차 없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테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 날, 로이스터 경이 아니었다면 저는 분명···.”
“그 날, 제가 조금만 더 주의했더라면
아샤님께서는 그런 무서운 경험을 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넋을 놓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저는 그런 저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아샤님을 위해 성심성의껏 모시고자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타났던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아샤님.”
넋을 빼고 있었다?
테베가?
그때의 테베는 분명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넋을 빼고 있는 느낌은 없었는데···?
···.
설마?
“로이스터 경, 넋을 놓고 있었다는 말씀은 대체···?”
테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반응에 확신이 왔다.
틀림없다.
테베가 넋을 놓고 있었다는 그 말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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