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로맨스의 정석, 어른스러운 캐릭터와 말괄량이의 조합은 최강
지긋지긋한 숲.
벌써 이게 몇 번째지?
다섯 번째.
하긴 이 정도로 벌써 질려서야 앞날이 캄캄한 거겠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따라 흐르는 이슬이 거슬린다.
나는 연신이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카이델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어차피 방향은 알고 있다.
그것보다는 누구를 공략할지 생각하는 것이 더 먼저다.
그래야 카이델과 어떻게 마주칠지를 고민해볼 수 있을 테니까.
연신이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따라붙었다.
“이번엔 어쩌려고?”
“글쎄···.”
지난번에는 거의 방에 처박혀 있다 보니 공략 상대를 특정 짓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짐작이 가는 상대라면···.
“그 정원사, 공략 가능한 상대야?”
연신이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연신이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정원사라고 하면 보통은 힐링계열이다.
다소 제멋대로인 아가씨와 정원사의 러브스토리.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주류라고 보기 힘들긴 한데···.”
생각이 말로 흘러나갔다.
이런.
혼잣말하는 버릇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나.
“뭐가?”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그보다 조심해.
이제 곧 카이델이랑 만나는 지점이니까.”
지금 당장은 짐작 가는 상대가 정원사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정 아니면 지난번처럼 중간에 우회하면 된다.
보통 때라면 정원사라는 직업의 남주인공을 진 남주인공으로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이유가 있다.
그때 그 정원사는 묘하게 카이델과 친해 보였다.
성안의 누구도 그러지 않았는데 그 정원사만이 카이델을 마치 친구처럼 대했다.
그렇다는 건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도 모른다.
갈래는 두 가지.
하나는 어릴 때부터 카이델의 근처에 있어서 같이 자란 소꿉친구일 경우.
다만 카이델은 의외로 상하관계에 엄격한 편이다.
예전에 카이델의 집착 때문에 집무실에 박혀있을 때 봤었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더 많은 노신하를 대할 때도 위압적인 태도였다.
물론 나름대로 정중하긴 했지만.
그런 카이델이 어렸을 때 봤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거기서 다른 가능성이 더 힘을 얻는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몰락 귀족의 자제이거나 혹은 사정이 있어 일탈한 귀족 자제일 경우.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몰락 귀족이라고 하면 보통은 왕의 화를 사서 몰락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인물을 카이델이 옆에 두고 있을 리 없다.
아.
이제 곧 그 지점이다.
나는 연신이가 나에게 꽉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내 태도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일단은···.
시야를 가리던 나무가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카이델과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나는 도망쳤다.
*********
음.
역시 시작은 이거지.
지난번의 카이델은 편했다.
나를 납치하듯 데려왔다.
그 마음의 짐을 지게 해주는 것이 움직이기 편하다.
나는 카이델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바둥거렸다.
“놔, 놔 주세요! 이거 놔!”
하지만 지난번과는 다르다.
이번의 나는 일단 말괄량이를 연출해보기로 했다.
내게서 가장 먼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정원사와 말괄량이는 일종의 세트 같은 거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카이델의 어깨를 톡톡 쳤다.
물론 이런 경우 말괄량이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정원사가 끼어들 여지가 생기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 손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러니까 카이델도 손에 그렇게 힘을 주지 않는다.
어차피 내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뭐 하는 거예요, 대체! 이거 놓으란 말이야!”
습.
이럴 때 존댓말을 하는 건 좀 어색한가?
말괄량이 캐릭터면 반말을 해야 하나?
으음.
근데 그러다가 플러그 세우면 곤란하잖아.
응.
그냥 존대로 가자.
“이거 놓으라고요!”
거의 기계처럼 이거 놓으라며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고 있자니 손이 아프다.
이놈은 밥 먹고 운동만 했나.
드럽게 단단하다.
그래도 이제 마차가 보인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이런 무뢰한! 내려놓으란 말이에요!”
으아아.
작위적이다.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나오면 책 덮는다.
하.
나는 이를 으득 갈며 주먹을 내리쳤다.
“윽.”
아.
실수.
진짜로 힘을 담아서 쳐버렸다.
카이델은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윽.
터져.
터진다!
“폐하! 어디에···?”
테베다.
순간 손이 멈췄다.
마지막의 수척해졌던 테베의 모습이 겹쳐진다.
···.
아니,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리를 바둥거렸다.
“이거 좀 놔줘요! 왜 날 데려가는 거예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에요!”
테베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카이델에게만 시선을 두었다.
“···마차를 비워라.”
카이델의 명령에 테베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마차 안에 실려 있던 짐이 빠졌다.
“···.”
카이델은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나는 마차 안에 내려지기 무섭게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들어가도록.”
“···!”
나는 반항의 말을 찾았지만, 카이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어버렸다.
소설 속 캐릭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눈이 내뿜는 살기를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아.
너무 역에 몰입했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카이델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차 문을 닫았다.
···?
응?
나랑 같이 타는 거 아니고?
멍하니 앉아있었더니 그대로 마차가 출발했다.
어?
진짜로 같이 안 타?
“시끄러워서 귀찮다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런가?”
“아니면 니가 이거저거 물어보면서 귀찮게 할 것 같아서 그러거나.”
“으음···.”
뭐, 편하긴 하지만.
어디 보자···.
“이쯤에서 탈출 한 번 해줘야 말괄량이라고 부를 만하겠지?”
“탈출?
여기서?
미쳤어?
떨어지면 죽을지도 몰라!”
“소설 속 캐릭터들 보면 떨어져도 보통은 멀쩡하던데?”
“그건 소설이니까 그렇지!”
“여긴 소설 안이잖아.
그럼 소설의 법칙에 영향받는 거 아냐?
원래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의 걱정을 사야 할 때 빼고는 다치지 않는 법이거든.”
“멍청아.
그런 거라면 니가 처음의 자리에 가만히 있었을 때 배드 엔딩이 떴겠냐?!”
아.
하긴 그런가?
소설의 법칙대로면 남주인공이 나를 찾으러 오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아사했었다.
으음.
···.
그래도 설마 이 정도 속도에서 떨어진 들 죽기야 하겠어?
기껏해야 뼈 부러지는 정도겠지, 응.
“무서우면 넌 남아있어.
저기 천장 쪽에 숨을 장소 보이던데 거기 숨어있어.”
연신이가 나를 말리려 했다.
더 이상의 잔소리는 귀찮다.
만약 카이델과 그 정원사가 진짜 친구 사이라면
나의 말괄량이의 정도를 카이델이 알려줄 좋은 사건이 될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말에서 일부러 떨어져도 봤는데, 뭐.
이 정도면 그때의 속도의 절반도 안 된다.
나는 마차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당황하는 기사들을 둘러본 뒤 뛰어내렸다.
으으으윽.
만화는 과장이 아니었다.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프다.
무지 아프다.
떨어질 바닥을 선택해서 떨어졌어야 했는데!
아무리 아픔에 익숙한 나라지만 이건 너무 아프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내 몸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탁, 타타탁, 탁.
얇은 잠옷이 엉망으로 튿어졌다.
팔도 다리도 쓸린 데다가 모래가 들어가 피가 흐른다.
으아.
감염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아픔을 애써 감추고 씩 웃었다.
황당해하는 카이델을 보며.
그리고 그대로 뛰었다.
“잡아라!”
카이델이 외친다.
기사들이 나를 따라 숲으로 들어왔다.
나는 말이 달리기 힘들 것 같은 길을 골라 들어갔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잡혔다.
나는 내 손목을 잡은 사람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왜인지 테베가 있었다.
“···실례.”
테베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놓았다.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함께 돌아가 주십시오.”
“···저를 왜 데려가는 건가요?”
“그 숲은 위험합니다.
그리고···.”
테베는 설명을 멈췄다.
설명할 말을 찾는 듯했다.
그 모습은 사무적이고 차가웠다.
그렇다.
나는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나에게 웃어주던 테베는 여기 없다.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자세한 것은 폐하께 들어주십시오.”
“폐하?
그 남자는 왕이에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이 나라의 왕이신 카이드레아 샬롯 디 팔렌 폐하이십니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설명해주실 겁니다.”
나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테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감이 좋은 테베는 재빨리 내 옷 소매를 잡아끌었다.
“레이디의 몸에 함부로 닿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것은 레이디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얌전히 테베의 손에 이끌려 마차로 돌아왔다.
뒤늦게 발이 아파 왔다.
아, 맞다.
나 맨발이지.
바닥에 구르면서 장렬하게 긁히고 쓸린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파서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양호하지.
나는 테베의 손에 이끌려 마차 위에 올랐다.
“수고했네, 로이스터 경.”
테베는 예를 갖춘 후 물러났다.
카이델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괜찮은가?”
“괜찮아 보입니까?”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군.”
카이델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왜 당신이 여기 타는 거죠?”
“그대가 다시 뛰어내리면 곤란하지 않겠나.”
뭐, 그렇겠지.
나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차의 문이 닫힌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그대에게 내 무례를 사과하도록 하지.
그대를 납치하거나 강제로 어떻게 해보려는 것은 아니네.
오해하지 말아 주게.”
“이게 오해로 보이십니까?
저는 당연한 논리의 귀결로 보이는데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는 제 입장이 되면 그런 말 못 하실걸요?”
음.
이건 말괄량이라기보다 좀 삐딱선이지 않나?
···.
모르겠다.
약간 삐뚤어진 여주인공이랑 이를 힐링해주는 남주인공 조합도 나쁘진 않지, 뭐.
“그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자 이야기한 것은 아니네.
그저 설명하려는 것뿐일세.”
“설명?
납치에 대한 설명인가요?”
카이델이 피곤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음.
미안.
카이델은 아마 틀림없이 이런 타입이 서투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접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카이델의 성격상으로도 잘 안 맞을 것이다.
뭐, 그래도 어쩌겠어.
원래 공략 캐릭터를 정한 뒤 그 성향으로 나가면
다른 성향의 캐릭터들은 호감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나로서는 더 좋을지도.
카이델이
왜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됐지?
나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었던가?
따위의 고민을 해주면 내게 집착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내려가니까.
“일단, 그 숲이 무슨 숲인지는 알고 있나?”
“모르죠?”
“그 숲은 금기의 숲이라고 불리는 곳일세.”
“왜요?”
“···우리의 신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네.”
흐음.
나는 전혀 납득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카이델은 내 반응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로 마음먹은 듯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거기에는 소위 말하는 저주받은 마녀가 봉인되어있다고 전해지네.
그리고 그 마녀의 머리카락 색은 검은색이라고 하지.”
“근데요?
검은 머리가 나 하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카이델이 끄응, 소리를 내었다.
저런 카이델은 처음 본다.
“검은 머리카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해지네.
그대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가?”
“한국인데요.”
“···ㅎ···, ···?”
카이델은 따라 말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발음하기 어려운 건가.
한국.
음.
“한국 몰라요?”
“모른다.”
“하, 아무리 작은 나라라지만 너무 하네.
어쨌든 당신도 지금 한국말을 하잖아요.”
“···?
이건 팔레시안어다.
그대가 말하는 ㅎ···, 의 나라의 말이 아니다.”
나는 깜짝 놀란 얼굴을 지어 보였다.
아아.
이 캐릭터 나랑 진짜 안 맞아···.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