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공의 정석,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아사.
아사~.
화아사~.”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는 걸걸한데 묘하게 말투가 귀엽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흐릿한 눈앞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뭐야.
아직 눈을 안 뜬 건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지만, 여전히 눈앞이 안 보인다.
“···세상에.
이제 눈도 안 보이게 된 건가?”
공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사의 얼굴을 이제는 볼 수 없는 건가.
그 천사 같던 얼굴도?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하지?
시각 장애인들이 사용하는 글자가 뭐더라.
점자였나.
그걸 배워야 하는 건가.
“푸하하하하하!
너 잠꼬대 하냐?”
캄캄하던 눈앞에 하얀 물체가 불쑥 나타났다.
아.
귀엽다.
“···연신이?”
“아직 잠이 덜 깼어?
하긴 11시간을 연달아 자면 그럴 만도 하지.”
11시간···.
···.
“11시간?”
“응, 11시간.”
“여기 있을 때도 시간이 흐르는 거였어?”
“여기에서의 시간은 흐르지.”
“···세상에.
난 지금 11시간을 낭비한 거야?”
연신이가 날개로 나를 토닥였다.
뭐야.
얘 왜 이래.
진짜 심각한 거 아냐, 이거?
“여기서 11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냐니?”
“내가 살던 세계의 시간은 뭐 11년이 지나있다거나···.”
“풉.
뭐래.
바보냐?
소설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
이 새대가리가.
지금 나는 심각한데, 비웃어?!
“내가 오늘 너 백숙 끓인다.”
“무, 무섭게 왜 그래.
흠흠.
네 질문에 결론부터 말해주면 아무 일도 안 생겨.
내가 전에 말했었지?
여기는 현실과 소설의 중간 세계라고.
좀 더 설명하자면 내 개인 공간이야.”
개인 공간?
이런 아무것도 없는 곳이?
“시간에서 벗어나 잠시 쉬고 싶을 때 들어오는 곳이랄까.
게임으로 치면 일시 정지 같은 곳이야.
그러니까 여기에서 몇 시간을 있던 현실의 시간은 흐르지 않아.”
아.
혹시 지금이 좋은 타이밍 아닌가?
그동안의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그, 그럼 소설이랑 현실의 시간은 어떻게 다르게 지나가는데?”
질렀다.
질러버렸다.
그동안 두려워서 피해왔던 질문을 해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잠에 잠겨 반쯤 멍해진 정신이 아니면 지를 수 없는 질문이다.
분명 지금이 호기였을 것이다.
“소설이랑 현실?”
“응. 나 지금 소설에서는 꽤 시간이 지났잖아.”
5명.
공략에 각각 한 달이 걸렸다고 가정해도 최소 다섯 달이 지났다.
설마 현실과 시간 흐름이 같진 않겠지만···.
“책이란 건 말이야.
첫 장으로 되돌아가면 다시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잖아?
그게 몇 번이더라도 마찬가지야.
설령 엔딩을 봤다고 하더라도 다시 첫 장을 펴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지.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시간을 얼마나 쓰던 별 상관은 없어.
어차피 처음으로 돌리면 되는걸, 뭐.”
그런가.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장치라면야···.
“그러니까 막 안달 내진 않아도 돼.”
···.
무서운 놈.
가끔 저놈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연신이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
음,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아닌가.
“다음 공략은 누구로 할 건데?”
“글쎄···.”
내가 책으로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생각했던 남주인공 중에 아직 하나가 남긴 했다.
재무대신.
문제는 은화가 어떻게 재무대신을 만났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예전에 카이델의 집무실에 억지로 끌려갔었을 때 본 사람 중에 있을 거 같은데.
그 외에 마음에 걸리는 인물이라면 역시 그 상인과 데바인.
그리고 이웃 나라의 왕.
이 셋이겠지.
“하.”
이 빌어먹을 소설은 대체 남주인공 후보가 몇인 거야.
보통 많아야 셋이나 다섯 아냐?
벌써 아홉 명이나 나왔는데.
제일 무서운 건 그거다.
남주인공 후보가 한 열댓 명 되는데 내가 마지막에 가서야 남주인공을 찾게 되는 것.
그건 달리 말하면 내가 죽는 모습을 열댓 번은 봐야 한다는 소리다.
···.
솔직히 타격이 없다고 할 순 없다.
나도 일단은 인간이다.
남들보다 오히려 정신력은 약한 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걸 계속 봐서야···.
“포기할래?”
“포기?”
솔깃하다.
솔직히 솔깃하다.
하지만···.
“응.
약간의 대가를 받고 집으로 돌려보내 줄게.”
“뭔데?”
“내가 사용한 만큼의 힘을 돌려주면 돼.
네 수명으로.”
···.
이 새대가리가.
“참고로 그게 몇 년 정돈데?”
“별로 안 돼.
지금까지 다섯 번 회귀시켜줬으니까 한 10년 정도?”
···.
날강도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됐거든?
난 이래 봬도 오래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
나는 이사보다 하루라도 오래 살아야 한다.
장애가 있는 이사가 혼자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후견인을 두면 돈만 가지고 나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딨겠어.
이사가 수명을 다 누릴 수 있게 하려면 내가 이사보다 한 살이라도 더 살아야 한다.
“회귀를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리스크는 커질 텐데 괜찮겠어?”
“어차피 지금도 리스크는 충분히 커.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는 판에 무슨.”
“그럼 나중에 소원으로 불로불사 같은 걸 빌 거야?”
“미쳤냐?”
그런 끔찍한 소릴.
죽음이 있기에 나는 그 지옥을 버틸 수 있었다.
다만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살고 있었을 뿐.
남들이 삶을 향해 간다면 나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 내게서 죽음을 빼앗다니.
“난 그냥 이사보다 하루라도 오래 살면 그걸로 족해.”
“이사?”
“내 동생.”
“헤에.
동생도 있어?”
“응.
엄청 귀여워.”
연신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걸 보아 내 모습을 토대로 이사의 모습을 떠올리려 하는 것 같다.
“멍청아.
나랑 안 닮았어.
귀엽다고 했잖아.”
“엥, 그래?
난 너도 충분히 귀여운 거 같은데.”
이 새대가리가 미쳤나.
그 기분을 숨기지 않고 눈에 담아 연신이를 노려 보았다.
연신이가 신난 듯 킬킬거렸다.
“멍청아.
너도 200년 넘게 살아봐.
어지간한 인간은 다 귀엽게 보여.”
아.
그런 건가.
“놀랬잖아, 멍청아.”
“놀란 니가 멍청이지.”
“···휴.”
아무튼, 이야기를 되돌려 보자.
내가 남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은 셋.
그중에 가장 접근성이 좋은 건···.
“역시 그 상인이려나.”
상인의 정체는 대충 짐작이 간다.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의 사람이라면 카이델의 광기를 뚫고 내게 고백해줄 진 남주인공일지도 모른다.
내 공략의 최대 걸림돌인 카이델과 가장 대적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하지만···.”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의 인물이 아니라면 곤란하다.
심지어 내게 보인 호의도 애매하고.
차선책이 필요하다.
차선책으로는 역시 이웃 나라의 국왕일까.
나이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카이델과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인 데다 내게 명백하게 호의를 보였다.
“그렇다면 인물 성격은···.”
뭘로 해볼까.
비밀스러운 캐릭터에게는 의외로 캔디같은 캐릭터가 잘 맞는 경우도 있다.
그 속에는 아픔을, 슬픔을 감추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웃는다.
그 모습을 보며 비밀스러운 캐릭터는 점점 마음을 연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비밀이 밝혀진다···.
그런 전개가 가능하긴 한데···.
그 왕한테도 써먹을 수 있을까?
딱 봤을 때 느낌은 연상의 아저씨 캐릭터.
자상한 캐릭터겠지.
응석받이 캐릭터랑 잘 맞겠지만···.
키다리 아저씨 느낌으로 캔디 같은 아이랑 잘 맞을지도.
“결정했어.
가자.”
“이제 괜찮아?”
“응.”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람이니까.
아무리 괴물 같아도, 아무리 정상이 아니라도 사람이긴 하니까.
그런 자신을 탓하는 건 그만두자.
흔들리더라도 목적을 향해서 가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
“데바인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무도회 전날이 되었다.
그 전까지의 카이델이나 테베와의 일은 언제나 그렇듯 그렇게 지나갔다.
캐릭터 성격을 바꿔도 초반부는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무도회 전날이라는 건 즉 그 상인이 오는 날이라는 뜻이니까.
“네, 아샤님.”
“오늘 드레스는 혼자 고르게 해주시겠어요?”
상인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만들려면 내가 대화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드레스 고르기나 악세사리 고르기를 모두 데바인에게 맡겼었다.
그러니 나와의 연결고리는 없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상인과 친분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아샤님.”
“사실 저 드레스 같은 거 입어보는 게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입고 싶은 드레스로 골라보고 싶어요.
안될까요?”
데바인이 있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데바인이 있으면 여러모로 제약이 생긴다.
상인과의 대화를 방해한다거나 다음 약속을 잡는 걸 방해한다거나.
물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안 되면 어쩔 수 없구요.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나는 명백하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음.
상반되는 두 개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알겠습니다.
저는 문 바로 옆에 있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불러주세요.
옷 시중을 들어줄 시녀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으음.
요즘 이름을 말 안 했더니 까먹었다.
이나, 였던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데바인님!”
활짝 웃어 보이자 데바인이 마주 웃어주었다.
매번 어딘지 벽이 있는 느낌이었는데.
솔직한 성격의 캐릭터에게는 솔직하게 대하는구나.
혹시라도 데바인을 공략할 일이 있다면 지금 캐릭터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리고 아샤님.
매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냥 데바인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님이라고 부르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저보다 훨씬 어른이신걸요.
게다가 폐하의 손님, 으로 와있기는 해도 제가 폐하인 건 아닌걸요.
많이 불편하세요?
으음.
데바인님, 불편하시면 절 그냥 아샤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저도 데바인님을 경칭 생략하고 부를게요!”
아.
이 캐릭터 힘들다.
표정이 풍부해야 한다.
시무룩했다가 주눅이 들었다가 활짝 웃었다가.
표정이 쉴 새 없이 변해야 한다.
귀찮다.
“폐하께서 폐하를 모시듯 아샤님을 모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건···.”
“···그렇군요.”
칫.
실팬가.
나중에 공략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반응을 시험해 본 건데.
의외로 카이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가 보다.
내 부탁은 어지간하면 들어주길래 혹시나 했는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테로아 경이 오셨나 봅니다.”
데바인은 내게 예를 갖추고 문으로 향했다.
데바인이 문을 열자 거기에는 예상대로 상인, 테로아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데바인님.
요청하신 드레스와 장신구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 드레스와 장신구를 보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확실히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보다.
처음에는 뭐 저런 화려한 걸 가져왔나 했는데 이제 담담하다.
하긴.
솔라 공략 때 입은 옷에 비하면 저 정도는 화려한 축에도 못 들지.
“안녕하세요, 상인님!”
웩.
내가 봐도 참 연극 같다.
그런 속내를 감추며 나는 생글생글 웃었다.
“와아, 옷이 너무 예뻐요!”
꺼내지도 않았는데 칭찬부터 한다.
음.
뭐, 드레스를 처음 본 반응이란 보통 이런 거 아닐까.
조금 과장이 심한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저는 테로아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테로아.
흠.
세 글자도 이제 좀 귀찮다.
그냥 테리라고 부르도록 하자.
“테로아님!
오늘은 저 때문에 일부러 귀찮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테리는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예를 갖춘 뒤 드레스를 전시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 픽은 정해져 있다.
저번에 입었던 푸른색 드레스.
그래도 나는 열심히 보는 척했다.
“와, 하나같이 너무 예뻐요.”
“마음에 드십니까?”
항상 비아냥거리는 듯한,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던 테리였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 반응에 테리도 엷은 웃음을 흘렸다.
···.
이랬는데 쟤가 나보다 연하면 어쩌지.
진짜 죽고 싶을 것 같다.
나는 애써 생각을 지우며 드레스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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