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식 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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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9.11.1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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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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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DUMMY

(60편)


마침내 금역 둘레에 쳐져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푸른 빛이 감도는 반투명의 견고한 막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열을 정비한 에릭의 공격대가 성좌로 진입했다. 몇 개의 얕은 구릉을 지나자 곧 멀찌감치 성채가 보였다. 남끝별의 성좌를 둘러싼 성채였다. 그리고 성채의 외성 곳곳에 세워진 여덟 개의 성탑에 피워진 여덟 개의 녹색 불꽃이 눈에 들어왔다.

“허, 정말...”

분명 기뻐해도 모자랄 결과건만 에릭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탄식부터 나왔다.

“정말 그들이 탈환을 한 걸까요? 혹시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천마군의 계략같은 것은 아니겠지요?”

부공격대장이 조심스레 음모론을 펼쳤지만,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NPC들은 그런 계략을 쓸 줄 모른다. 저 녹색 불길은 정말로 탈환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했다. 성 슈드의 대표 색은 녹색으로 녹색 불길은 성 슈드를 의미했다.

에릭은 가볍게 머리를 거머쥐며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과 공격대는 수많은 적군들 앞에서 결국 꽁무니를 빼버렸다. 그것도 소수의 아군을 적진 한가운데 남겨두고 자신들만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 소수의 아군이 결국 성좌를 탈환했다.

에릭은 아마도 그 천마라는 자가 괴마의 시선을 끄는 가운데, 나머지 일행들이 어떻게든 불을 지폈을 거라고 추측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나자, 에릭의 눈빛이 살아났다.

그렇다면 비록 탈환은 성공했겠지만, 아직도 전투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얼른 진입해서 확실하게 마무리짓는 역할이라도 해야 했다. 아직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공격대는 속도를 높여 대회전이 치러진 공터를 지나 외성 입구를 통과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성으로 진입했다.

“자, 힘껏 달려라.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아군들이 기다리고 있다. 얼른!”

에릭의 독촉에 공격대는 쾌도난마의 기세로 달려나갔다.

넓찍한 복도를 이리저리 통과 한 끝에 널찍한 반구형의 홀에 도착했다. 저멀리 한가운데에 연꽃모양의 성화대가 보이고, 그 위에 찬란하게 피워진 성슈드의 성화가 보였다.

그리고 홀 곳곳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아군들이 보였고, 저기 봉화대 아래에 흑의를 입고 등을 돌리고 선 괴한, 괴마가 보였다.

‘그래, 아직 우리가 할 일이 남았구나!!’

패잔병처럼 쓰러진 아군들이 왜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은 채 곳곳에 널부러져있는지 잠깐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중요한 건 명예의 회복이었다.

“멈춰라!! 천마군들아!”

에릭의 고성이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뭐? 천마군이 아직 남았어?”

방금 들어온 퍼스트 클래스를 쳐다보고 있던 슬기는 에릭의 고성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모조리 일망타진한줄 알고, 천마 옆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에릭의 공격대가 질풍같은 기세로 홀의 한가운데를 가로 질러 슬기들을 향해 날 듯이 달려왔다. 그 기세가 자못 대단한 것이 아무래도 봉화대 근처에 천마군이 숨어있었나보다라고 슬기는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있던 에릭이 대뜸 천마를 공격했다.

“죽어라, 괴마!!”

“아니, 이 노친네가 망령이 들었나!!”

그 모습에 슬기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쳤지만, 이미 에릭의 검날은 정확하게 천마의 등짝을 뚫고.. 아니, 그건 그냥 노망난 노인네의 바람이었고, 도리어 에릭의 검이 뚝하고 부러졌다.

등을 돌리고 서있던 천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슬쩍 망토를 쳐다보았다. 만겁돌파의 망토가 검이 부서질 정도의 강력한 공격에 살짝 구멍이 나버렸다.

거의 비슷한 옷차림에 당연히 괴마일 거라고 생각했던 에릭은 드러난 천마의 얼굴에 매우 당황했다.

“아, 아니..”

하필이면 아군들이 모조리 널부러져 있는 한 가운데, 왜 괴마같은 옷차림을 하고 끝판 보스같은 자세로 서 있었냐고, 왜 어그로를 끌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에릭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천마의 가공할 기세에 간신히 침을 한번 꿀꺽 삼킬 뿐이었다.

에릭의 한 걸음 뒤에 있던 퍼스트 클래스의 일 열이 일제히 방어자세를 취했다. 순식간에 진형이 완성되며 공격대의 진형이 전해주는 사기 상승 버프의 영향이 에릭에게도 전달되었다. 그제야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보게. 미안하네. 하필이면 옷차림이 너무 비슷해서 천마의 제자인줄 알았네.”

그러자 천마가 입을 열었다.

“본좌가 천마다.”

“아, 그렇지. 자네 이름도 천마라고 했었지, 참. 자네 말고 천마라는 악당이 따로 있네. 나는 그자를 말한 걸세. 하하하”

에릭은 샘솟듯이 솟아나는 식은땀을 연신 훔치며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고자 했다. 눈 앞의 천마라는 사내는 진짜 천마인지 가짜 천마인지는 둘째치고, 공격했던 그의 검이 피부 한 겹도 뚫지 못하고서 도로 부러질 정도로 무지막지한 자였다. 이런 자라면, 어쩌면 괴마를 물리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모를 일이 아니라...

‘아, 이자가 괴마를 죽였구나.’

에릭은 진실을 깨달았다. 이 자는 일개 플레이어면서, 단신으로 레이드 보스를 잡을 정도로 무식하게 강한 사내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강한 사람이 플레이어일 수가 있을까?

에릭은 갑자기 부쩍 의심이 들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일관되게 그는 자신을 천마라고 했었다.

‘어...쩌면?’

슬기의 만류로 천마가 들었던 손을 내리는데도 에릭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릭은 이내 생각을 돌렸다. 그가 진짜 확장팩의 끝판 대장, 천마군의 우두머리 천마가 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진정 천마라면, 무엇보다 이곳에 있는 게 말이 안되었다. 공식 설정상 천마는 천마성에 아직 봉인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천마의 제자들이 일곱 개의 성좌를 점령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봉인을 풀기 위해 나온 제자를 제 손으로 죽이는 천마라니.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대체 이자는 정체가 무엇일까?

그때 그에게 다가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아라곤과 니긴마, 드래곤과 도깨비의 대장들이었다.

“이장님, 오셨습니까?”

아라곤의 인사에 정신을 차린 에릭은 곧장 그들에게 물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아, 그게 저희도 잘..”

“천마군 새끼들은 미쳐 돌았는지 지들끼리 물고 뜯다가 다 뒤져버렸소.”

아라곤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니긴마는 아까 봤던 상황에 대해 나불거렸다.

니긴마의 말을 들으며 에릭은 강력하기 이를데 없는 현혹술 탓에 같은 편끼리 싸워야 했던 참혹했던 괴마와의 일전을 떠올렸다.

“허, 괴마가 왜 자신의 군대에게 주술을 걸었단 말인가?”

에릭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문득 등 뒤에서 천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다 탄 꽈배기. 도대체 네 놈들은 개념을 다 말아 처먹었는지, 사과도 말아 처먹었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은 에릭은 얼른 천마를 향해 돌아서서는 늦게나마 사과했다.

“아, 아니오. 미안하게 되었소.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공격한 점 깊이 사과하는 바이오.”

그러자 옆에 있던 슬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 죽여놓고도 그냥 미안하다는 말로 퉁 칠 기센데? 이봐요. 노인장. 사과에 성의를 보여야죠, 혓바닥만 보일 게 아니라~!”

에릭은 순간 욱했지만, 마음을 다스리며 아이템들을 꺼냈다. 캠프에서 주려고 했던 고가의 소비 아이템들이었다.

아이템을 꺼내자, 그것들은 천마의 손짓에 따라 저절로 떠오르더니 공간을 가로 질러 슬기에게 날아갔다. 그 모습에 에릭은 또 한번 놀랐다. 그가 보기에 천마는 이해 불가한 존재였다.

‘이 자는 마법사인가, 초능력자인가? 도무지 그 끝을 알 수가 없구나!’

“자, 그럼 방금 공격은 사과했고, 이제 한가지 더 남았죠?”

슬기가 두 번째 사과를 요구했다.

아까 전투 중에 그가 했던 행동, 밀려드는 천마군들 속에 그들만을 남겨두고 떠난 것에 대한 사과 요구임을 깨달은 에릭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당시의 상황은 본인이 판단하기에 도무지 타개할 방도가 보이지 않아, 부득이하게 결정한 것이오. 공격대를 이끄는 자로써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양해바라오.”

“그래서 잘했다는 겁니까?!”

사과인지 변명인지 확실치 않은 소리에 광개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어서 천마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빈정댔다.

“시커먼 꽈배기놈이 주둥이로 말을 하는 건지, 방귀를 끼는 건지 구분이 잘 안되는군.”

“똥구녕에서 나오는 소리가 말은 아닌거 같고, 방귀 아니면 똥이지 싶은데.”

천마의 빈정거림에 슬기는 한술 더 떠 에릭의 주둥이를 똥구멍으로 만들어버렸다.

에릭은 시온을 시작한 이후로 이딴 욕설과 망언을 들은 것이 맹세코 처음이었다. 너무 치욕스럽고,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지만 이를 악물며 간신히 참아냈다. 어쨌거나 잘못을 했든 말든 간에 상대가 너무 강했다.

“이놈아, 똥 말고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제대로된 사과라면 말이야.”

언제 이놈 저놈 소리를 들어봤겠는가? 천마의 말에 에릭은 끓어오르는 열불을 애써 가라앉히며 부공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부공장이 새로운 고가의 소비 아이템들을 가지고 왔다.

새 아이템들마저 슬기의 인벤토리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천마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래, 앞으로도 종종 똥을 싸도록 하거라.”

천마가 돌아섰고, 옆에 있던 슬기가 에릭의 어깨를 두어차례 두들겼다.

“노인장, 오늘이 노인장네 환갑잔칫날인 줄 아세요. 우리 아저씨는 기분 좋은 날에도 4박 5일동안 무덤지키는 무서운 사람이라고요.”

에릭은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돌이킬수 없는 욕설을 내뱉을 거 같아서 입을 닫고 있어야만 했다.


결국 사이가 틀어질대로 틀어진 더 원 공격대와 천마 일행은 더 이상 교류하지 않고, 따로 지내기로 했다. 세 대의 공격대는 수비를 위해 남끝별의 성채에 거주하기로 했고, 천마 일행은 인근에 설치되어있던 캠프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곧장 참전하는 조건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가지가 남았다.

“우리 거래 기억하시죠? 우리는 내일 저녁까지만 있을 거예요. 그 다음에는...아놔, 이런!”

에릭에게 말을 하던 슬기는 그제야 이 거래의 오류를 발견했다. 어쨌거나 제1 공격대가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는 떠날 수 없는 것이었다.

에릭도 나름의 할 말이 있었다.

“우리와 그쪽의 거래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가 괴마를 잡는 것에 대한 거래였소. 하지만 결국 우리가 아닌 그쪽이 괴마를 잡았으니 거래는 무효인 셈이오.”

‘아니 이 무슨 똥싸는 소리를 하고 있어!!’

슬기는 욕설을 내뱉으려 했지만, 저 멀리 서 있는 천마를 한번 보고서 마음을 다스렸다.

‘어짜피 군사 영감을 볼때까지는 기다려야 해.’

그렇지만, 슬기는 만만히 보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보세요. 분명히 하세요. 우리의 거래는 괴마를 잡을 기회를 주는 거였어요. 그 기회를 못 잡은 걸 가지고, 우리 탓을 하면 안되죠. 그럼 우리는 괴마를 죽이면 안되니까, 당신네가 못잡은 괴마한테 목을 쭉 빼놓고 죽여주세요, 그러고 있었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본디 그들의 계약은 ‘더 원이 괴마를 맡는다’ 였다. 이를 각자가 다르게 해석하여, 에릭은 ‘더 원이 괴마를 잡는다’라고 해석했고, 슬기는 ‘더 원에게 괴마를 잡을 기회를 준다’라고 해석한 것이었다.

아무튼 에릭은 세계 1위의 레이드 길드인 ‘더 원’의 행사에 이렇게 바락바락 대들며 따지고 드는 사람을 처음 보는 터라 상당히 기분도 상하고, 난처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대로 마음대로 할 수 도 없었다. 무심한 듯한 자세로 저 편에 멀찌감치 서 있는 저 사내, 천마라는 자는 당장 보기에는 이쪽에 관심이 없는 척하고 있겠지만, 아마 이 추녀에게 조금의 위협이라도 가했다간 순식간에 달려들 것이 뻔했다.

어쩌면 그렇게 하라고, 저렇게 떨어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런 의도일 것이다.

에릭은 다시 한번 눈앞의 추녀를 쳐다보았다.

‘씨발, 더럽게 못생긴게, 말도 더럽게 하니까 더 더럽게 못 생겨보이는군.’

에릭은 문득 못생긴 얼굴도 논쟁에 유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법이다. 그리고 논쟁은 피하는 자가 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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