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식 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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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9.11.1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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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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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DUMMY

천하무식 천마 77화




천마에게 확인서나 교수의 목을 가져올 수 없다는 걸 설명(천마가 납득하기까지 생각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하다 보니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까닭에 장병태는 다이브에서 나오자마자 신속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 둥 마는 둥하며 집을 뛰쳐나왔다.

집을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무더운 한여름의 열기에 그는 잠시 멈칫 했지만, 그래도 버스 정류장까지 열심히 달려야 했다.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수강신청 홈페이지가 열리는 것은 오전 10시. 그 전에 학과 조교 사무실을 들러야만 했다. 1학기 첫 수강신청 때와 같은 실수를 다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혼자 집에서 폰으로 신청했다가 한 학기 내도록 혼자 다녔었지.’

그때 동기들은 모두 조교 사무실에 모여 함께 수강신청을 했다고 했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수강신청을 하다니! 동기들과 수업 동선이 자꾸 어긋나고 보니 결국 자연스레 한 학기 내도록 병태는 쓸쓸히 혼자 밥을 먹어야 했다.

‘가뜩이나 초중고 12년 동안을 아웃사이더로 살아왔는데, 대학교 생활마저 이렇게 지내야 한다고?!’

이런 슬픈 악순환은 이번 수강신청을 시점으로 반드시 끊어야 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학과 동기들과 함께 수강 신청을 하고야 말리라고 다짐하며 병태는 조교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장병태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꼭 필요할 때면, 서둘러야 할 때면 오히려 모든 상황들은 그를 더욱 더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평소보다 훨씬 늦게 온 버스는, 역시나 평소보다 훨씬 느릿느릿 움직이더니, 병태의 예상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대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10분마다 있는 셔틀버스 운행시간이 이미 살짝 지나버렸다. 셔틀버스를 기다렸다간 늦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열심히 인도를 따라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씨발, 하필이면 왜 산 위에 학교를 지어 가지고. 돈이 없으면 세우지를 말든가!”

병태가 얼굴도 모르는 학교 설립자를 욕하며 열심히 뛰어올라 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옆으로 셔틀버스가 쌩하니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으악!! 조금만 더 기다리는 건데!!’

웬일로 셔틀버스가 늦게 도착했던 모양이었다.

손을 들어 셔틀버스를 잡고 싶었지만, 버스는 냉혹하게 그를 무시하고 올라갔다.

“에라이!!”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병태는 계속 내달렸다. 이윽고 조교 사무실이 있는 도서관 건물에 도착한 그는 가쁜 숨을 진정할 새도 없이 1층 승강기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병태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단 두 대뿐인 승강기 앞에는 이미 수많은 대학생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앞에 선 학생들 중에는 아까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봤던 얼굴들도 다수 보였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셔틀버스를 타고 느긋하게 올라왔을 그 모습에 병태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마음속으로만 삭였다.

‘될 놈은 뭘 해도 되고,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되는 이 더러운 세상!!’

자신의 불운을 애써 세상의 부조리와 연결시키며 병태는 더러운 기분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역시나 기분이 더러울 때는 남 탓 하는 게 최고였다!

병태가 가만히 학생들의 수를 세어보니 아슬아슬하게 승강기를 탈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안될 거 같기도 했다.

병태는 왼쪽 구석에 있는 비상 계단문을 잠시 쳐다봤다.

‘어떡하지, 기다릴까? 그냥 계단으로 뛰어 올라갈까?’

하지만 학과 조교 사무실이 있는 11층까지 뛰어서 올라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병태는 모처럼 나온 학교에, 2학기의 첫 단추를 끼우게 될 수강신청의 현장에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으로 들어서고 싶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조교 사무실에는 여학생들도 꽤 있을 것이었다. 2학기의 첫인상을 땀에 절어 버린 후줄근한 모습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후, 덥다, 더워.”

막 1층으로 내려오는 승강기를 바라보며 이마를 닦던 병태는 문득 든 위화감에 깜짝 놀라 몸이 굳어버렸다.

‘어, 뭐야. 이거?’

병태는 이마를 닦던 팔로 다시 한 번 천천히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난 다음 눈앞으로 팔을 내렸다. 역시나 방금 느낀 느낌은 거짓이 아니었다. 손목에는 당연히 흥건하게 묻어있어야 할 땀이 단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깜짝 놀란 병태가 멈칫 하는 사이, 도착한 두 개의 승강기에 학생들이 가득 올라탔다. 순식간에 하나는 완전 가득 들어차버렸고, 남은 하나도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었다.

‘어떡하지?’

발을 들였다가 ‘만원’이라고 벨이 울리기라도 했다가는 쪽팔림도 그런 쪽팔림이 없을 터였다.

그렇게 병태가 잠깐 고민한 사이에 뒤에서 달려온 한 사람이 잽싸게 승강기의 그 빈 공간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 새치기?’

병태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억지로 몸을 밀어 넣었던 학생이 고개를 돌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뭐하냐, 늦었는데. 먼저 간다.”

닫히는 승강기의 문틈으로 히죽거리는 고교 동창이자 학과 동기인 강성근의 얼굴이 잠시 보이고 사라졌다. 그렇게 멍하니 올라가는 승강기의 층 정보를 보던 장병태는 이윽고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으아악, 나 늦었는데!!”

항상 마지막 순간에 절실하고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장병태는 서둘러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남은 시간은 1분 남짓. 1분만에 11층까지 뛰어 올라가야 했다.

“개새끼!!”

막 뛰어 올라가기 시작하는 병태의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지만, 그 대상이 새치기를 한 강성근인지, 멍하니 있다가 기회를 놓친 제 자신인지는 불분명했다.


역시나 착각이 아니었다라는 걸 깨달은 건 대략 6층 가량의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갈 무렵이었다.

‘숨이 안 차?!’

그러고 보면 병태는 학교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서 도서관까지 족히 1킬로미터는 됨직한 오르막길을 뛰어올라왔고, 거기에 도서관 비상계단까지 단숨에 뛰어올라오는 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숨소리는 살짝 거칠어졌을 뿐에, 이마에는 고작 땀 한 방울 맺힐까 말까 하는 상태였다.

그동안 자신의 몸이 몰라보게 튼튼해지고, 몸매도 멋있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까지 신체 능력이 뛰어난 줄은 몰랐기에 병태가 느끼는 위화감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런 위화감 속에서도 병태의 발걸음은 여전히 빠르게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크크크, 변태 그 자식 표정을 니들이 봤어야 하는 건데.”

“뭐? 어디서 봤는데?”

“방금 일층에서. 엘리베이터에 딱 한자리 남았은데 병태가 타려하길래 잽싸게 타고 보니까, 그 녀석이 그 앞에서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라. 크크크.”

“그럼 그 새끼, 이번에도 혼자 수강신청 해야 되겠네. 이제 곧 시작할거니깐.”

막 조교 사무실 문 앞에 도착한 병태의 귓가로 사무실 안의 대화가 들려왔다. 언뜻 들었는데도 그는 남자 동기들이 하는 얘기가 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를 소재 삼아 웃어대는 동기들의 그 목소리에 문고리를 잡아가던 병태는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야, 너네들. 누구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하냐?”여자 동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이 맞다면 과내에서 퀸카로 통하는 그녀, 이지수의 목소리였다.

“변태 얘기하는데?”

“아, 고교 동창이라는 장병태?”남자 동기의 말에 이은 자연스러운 이지수의 대꾸를 듣는 순간, 병태는 온몸의 기운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여기서도 날 이렇게 불러?’

마치 사부의 어마무시한 기공에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에 병태는 의식이 아득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나 떼어 내고 싶었던 악랄한 꼬리표가 초중고 12년도 모자라 대학교까지 따라왔다. 여학우의 입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자 병태는 그만 뒤로 돌아서고 싶었다. 좀 전에 들었던 이지수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웅웅거리며 맴돌았다.

‘여자애들까지 알 정도면 이미 모두 아는 거야.’

“뭐해, 안 들어가?”

갑자기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병태가 깜짝 놀라 돌아보자, 작은 체구에 귀여운 인상을 한 조교 누나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수강신청 하러 온 거 아냐? 얼른 들어가.”

병태는 조교 누나에게 등을 떠밀려 엉겁결에 사무실에 들어서고 말았다.

“어?”

가장 먼저 강성근이 병태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라왔지?’

이런 날에는 승강기를 한번 놓치면 족히 10분은 지체되곤 했었다. 그렇기에 거의 비슷하게 올라온 장병태의 모습을 강성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1학기 때 유일하게 빠졌던 병태까지 온 걸 보면 이번에는 전부 다 온 모양이네?”

조교 누나가 빙그레 웃는 목소리로 말하며 조교 책상에 앉았다.

“혼자 다녀보니 할 짓 아니었지?”

조교가 병태에게 윙크를 보내며 말을 걸어왔다.

“아..네.”

병태가 멍청한 표정으로 대답하려는데, 이지수가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기끼리 똘똘 뭉쳐야죠. 언니.”

그녀의 말에 조교가 컴퓨터를 조작하며 말했다.

“그래, 2학기에는 병태도 같이 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정말 니들 동기들끼리 똘똘 잘 뭉칠수 있겠네. 그런데 어쩌지?”

갑자기 조교가 정색을 하더니,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2학기부터는 전공 수업이라서 들을 수 있는 수업이 다들 똑같은데.”

“네? 정말요? 그럼 집에서 수강신청 했어도 됐다는 말인가요?”

“으잉? 이건 무슨 돌발 상황?”

“우와!! 나 새벽부터 KTX 타고 왔는데!”

조교의 능청스런 발언에 십여 명에 이르는 동기들이 다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병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1학기 때의 처절한 실패를 번복하지 않고자, 그렇게나 열심히 사부를 설득하고, 역시나 등에 땀이 나도록 교내 오르막길을 질주하고, 11층에 이르는 계단까지 미친 듯이 뛰어 올라왔는데...

‘가만, 땀은 안 났던가?’

몇몇 동기들이 조교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조교님. 그럼 미리 좀 알려주셨어야죠. 괜히 헛걸음한 셈 아닙니까?”

“언니, 너무해요.”

“학과 학생에게 제대로 공지하지 않아서 학생들로 하여금 금전적 시간적 손실을 입힌 것에 대해 정식으로 학과장님께 항의하..”

하지만 조교는 귀여운 외모와 달리 물렁물렁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다.

“야! 아닥하고(아가리 닥치고)!!”

조교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온 샤우팅에 불만을 늘어놓던 입들이 움찔하며 멈추었다.

“이렇게라도 안하면 집구석 기계에나 틀어박혀 있을 것들이! 그래도 이런 기회를 통해 방학 중에 동기들 얼굴도 한 번 보고, 좋잖아, 응? 이왕 온 김에 차례대로 나랑 학점 상담도 좀 하고, 오늘 일찍 끝낼테니까, 좀 있다가 다 같이 술 한 잔 하러 가자. 어차피 수강신청 하려고 시간들 비워놨을 테니까 선약 있다고 구라치는 년놈들은 이 언니가 미워할 거야!”

조교의 귀여우면서도 살벌한 위협에 다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조아렸다.

병태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조교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가상현실 복지과 새내기들, 오늘에야 완전체로 다 같이 술 한번 빨아보겠네. 기대된다. 야~ 그치?”

조교 누나의 말마따나 병태도 약간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가 학과 동기들과 함께 술을 마셔보는 건 학년 초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기대감에 들뜬 병태에게 성근과 대식이 다가왔다.

성근이 이마를 찌푸리며 병태에게 물어왔다.

“야, 너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라왔냐?”

“설마 계단으로 뛰어 올라온 건 아닐 거고.”

한발 앞서 대식이 단정 짓 듯 말하자, 병태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도 자신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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