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에 소원을 빌어봐!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현대판타지

완결

녹색여우
작품등록일 :
2019.11.26 04:13
최근연재일 :
2019.12.07 06:10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3,491
추천수 :
94
글자수 :
143,088

작성
19.12.05 06:10
조회
86
추천
4
글자
21쪽

11. 왕년의 마법소녀

DUMMY

.


“어, 엄마? 지금 일하는 중이라······.”

- 아이고 순자 이년아! 니 나이가 몇인데 여태까지 일 타령이냐!


스피커 모드라 그런지 여기까지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와 어투만으로도 과년한 딸내미를 갈구는 어머님의 포스가 느껴지는 것 같은 건 분명 착각이 아닐 거다.


“아니 그게 일하는 중”

- 남들은 데이트다 뭐다 남자 만나기 바쁜데 왜 너는 얼굴도 반반한 애가 남자가 없어!? 느이 친구들은 벌써 다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갔는데, 도대체 왜 여태까지 너만 깜깜 무소식이냐. 응?

“자, 잠깐.”


음, 눈매가 더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내가 보기엔 그것도 매력이긴 하지만 저 날카로운 눈매는 취향을 좀 타는 인상이긴 하지.


- 엄마 친구들 자식네는 벌써 결혼하고 애 낳고 해서 깨가 쏟아진다더라! 내가 요즘 친구들 모임만 가면 속이 터져요 속이. 대기업 회사원이나 공무원까진 안 바라니 제발 아무 남자나 좀 데려와라. 응?

“아니 그게 그러니까 지금은 상황이.”


폭풍 같은 잔소리에 옆에서 듣고 있는 나도 식은땀이 절로 난다. 하긴, 스물일곱이면 좀 늦은 편이긴 하지, 몇 년 전이면 몰라도 요즘 추세는 일찍 결혼하는 추세라던데.


“으아아 부장님 빨리 오라고요! 이걸 내가 혼자서 어떻게 버텨!?”

“버텨! 무조건 버텨! 나도 있잖나! 이건 각성의 기회라고!”

“아니 그렇다고 어떻게 이 괴물 같은 꼬맹이랑······!?”

“까라면 까게!”

“아니 해서 되는 게 있고 안되는 게 있······.”

“뼈와 살에게 생이별의 고통을 안겨드리죠!”

““으허어어어억!?””


음. 저쪽은 저쪽대로 큰일이네. 복대가 있으니 죽진 않겠지만, 저거 죽을 만큼 아프지 않을까. 어이쿠, 사장 방금 명치 맞은 거 같은데.


반면 이쪽은 아직 폭풍갈굼 현재진행형이다.


- 됐으니까 얼른 집에나 내려와! 내일까지 선 자리 잡아놨으니까, 안 오기만 하면 확 그냥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버릴 테니까!

“아 엄마! 나 진짜 선 볼 생각 없다니까?”

- 그 나이 먹고 아직도 연애결혼 타령이냐? 아이고 이 철없는 것아, 너 그래가지고 대체 언제 시집갈래? 응?


연애결혼 파셨구나. 보기보다 순수하시네. 솔직히 이 누님 분위기만 보면 마음에 드는 남자 멱살을 틀어잡고 와서 납치하듯 결혼할 기세긴 한데.


“아니 일단 마음이 중요하지······.”

- 어이구, 니가 그놈의 연애결혼 타령한 지 십 년도 넘었어, 이년아! 만나는 남자도 없는 것이 퍽이나 시집을 가겠다. 응? 원래 정이란 건 서로 살 맞대가며 부대끼고 살면 다 생기게 돼 있어!

“어, 어떻게 딸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지금 엄마는 나보고 생판 본 적도 없는 남자랑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 아이고 이년이 이제 지 엄마한테 역정을 내네. 자식새끼 키워봐야 다 말짱 헛거라더니. 더 늙기 전에 손주 한번 보고 싶은 게 죄냐.

“아 엄마 그게 아니라!”

- 그래 내가 다 나쁜 년이지. 내가 나쁜 년이다 이년아.

“부장니이이이이임!”

“잠깐만 엄마, 나 이 일만 마저 끝내고······.”

- 그래, 에미보다 니 일이 먼저라 이거지? 니 멋대로 해라. 멋대로 해. 남자 만나기 전에는 집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엄마······.”


누님 완전 울상이네. 하긴 저 상황 되면 그럴만하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울먹울먹하는 모습에서 심장이 쿵.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안전부절하는 누님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뜨뜻미지근한 이 감정은······큿, 설, 설마 부성애!?


문득 누님과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저 눈이 나를 향해 뭔가 어떻게 좀 해달라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군. 기다리십시오, 누님. 깊은 유혹의 꽃미남 박카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실례합니다, 어머님?”

“어, 무, 뭐······?!”

- 뉘······신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누님이 멍하니 있는 틈을 타서, 재빨리 상황을 해결한다.


그러니까 요는 그거잖아? 남자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럼 만들면 되지!


“저희 누님이 어머님껜 아직 이야기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옆에서 듣기 좀 그래서요. 지금 누님과 교제 중에 있는 고등학생 박카스라고 합니다. 어머님.”

“······뭐, 라고?”

-······뭐, 라고?


과연 모녀. 반응이 붕어빵이군. 싱클레어 누님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했나보다.


“지금 저희 상황이 좋지 못해서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네······?

“야 너 지금 무슨 짓······.”


남자친구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누님.


“일단 받아요. 눈앞의 일부터 해결해야죠?”


그리고 젠틀한 남자의 미소를 싱긋. 음,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봐도 좀 사려가 깊은 면이 있는 것 같다.


“잠깐, 아니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너 진짜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누님이 당황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벙긋벙긋 말하는 게 보인다.


하핫. 괜찮습니다. 누님 같은 미인이라면 저야 환영이죠!


“뭐 이 미친놈아?!”

“일단 받아보기나 해요.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합시다. 네?”


앗 그랬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귀에 대는 누님. 음음. 일할 때의 어른스럽고 칼 같은 모습과 달리 뭔가 아방한 모습의 갭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구나.


“어, 엄마? 방금 그건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고······.”

- 순자야.

“으, 으응?”

- 잘했다.

“느, 네?”

- 나는 그동안 연락 한 번 안 하길래 아주 평생 결혼할 마음이 없는 줄 알았지 뭐냐. 남자가 있었으면 있었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그것도 그렇게 어린 영계를······우리 딸. 관심 없는 척 하더니 사실은 능력 있었구나? 어쨌든 이제 안심이다. 엄마는 사윗감이 좀 어린 것 정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까 걱정일랑 말고. 고등학생이면 어떠냐, 능력 있는 네가 먹여 살리면 그만 아니겠니? 그 남자친구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기다려 주마. 그래도 환갑 전에는 손주 얼굴을 볼 수 있겠구나. 나이만 먹어가지 성격은 개떡 같은 이 말괄량이를 대체 누가 데려갈 지 걱정했는데, 다 제 짝이 있긴 했나보다. 어이쿠. 이럴 때가 아니지. 젊은 애들 사이에서 이게 웬 주책이람. 엄마는 이만 끊을 테니 둘이서 오붓하게 즐거운 시간 보내거라. 이번 설 때 꼭 한번 데려오는 거 잊지 말고. 엄마가 우리 순자 사랑하는 거 알고 있지? 맛있는 거 많이 해둘게. 설 때 보자~.


뚝.


“······.”

“······어, 음. 어머님이 대단하시네요.”


태도가 아주 확 바뀌시네 그냥. 순간 다른 사람인줄 알았어.


싱클레어 누님은 핸드폰을 들자마자 쏟아져 나온 어머님의 속사포 같은 언어폭풍에 완전히 혼이 나간 것 같다. 대꾸는커녕 반응조차 못했나. 좀 안쓰럽구만.


사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 몰랐는데. 나중에 뒷감당을 어찌한다. 아니, 아니지. 지금 그런 게 문제냐.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정 뒷감당을 해야 한다고 하면 진짜로 가면 되지.


사실 싱클레어 누님처럼 미인에다, 능력 있고,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잘 챙겨주는 타입의 여자가 어딨어. 암암.


“누님 걱정 마세요. 저 설날에 시간 많아요.”


누님만 만날 수 있다면야 세뱃돈 정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암요.


뚜둑.


응? 방금 뭐 끊어지는 소리 안 났나?


“······하.”

“으잉?”

“하-하-하-하-!”


갑자기 누님이 웃기 시작한다······? 설마 기쁨이 너무 커서 이성을 상실해 버렸나. 어어 동공 풀렸다.


“하하하! 이런 망할! 될 대로 되라지!”


싱클레어 누님은 뭔가 이것저것 잃어버린 표정을 짓고는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음. 내 책임은 아니겠지. 아닐 거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저쪽이랑 나랑은 일단 적대관계잖아. 이렇게 되면 3:1이라 채라한테 좀 불리할 텐데.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채라가 지는 거? 상상조차 안 된다. 저거에 데미지가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 있으면 알고 싶을 정도다. 차로 들이받아도 안 되는 걸 무슨 수로 잡아. RPG 같은 걸 끼얹나? 아니지, 로켓 런쳐도 튕겨내는데 RPG가 통할 리가 없지.


“휴우. 좀 살 것 같구먼. 잘했네, 박카스 군.”


아니 이 아저씨는 왜 또 다시 돌아온 거야.


“사장님 같이 안 싸워요?”


기왕 싸우던 거 그냥 같이 싸우면 안 되나. 어떻게 상사라는 작자가 누님이 돌아오자마자 자기는 없었던 것처럼 쏙 내빼는 거지. 어우 이 인간 진짜 얄밉다.


“괜찮네. 자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


근데 아까부터 뭘 자꾸 잘했다는 건데요. 그렇게 말하려니 저 멀리서 싱클레어 누님의 외침이 들렸다.


“이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히익 사망 플래그.


“저기요 사장님. 아까 봤는데, 누님 동공 풀렸었거든요. 좀 곤란한 거 아니에요?”

“아니, 문제없다. 시나리오대로다.”


······어딜 봐서?


“자, 가라 김 부장! 자네만 믿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나한테도 뭘 좀 알려주던가. 라며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자니, 사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라를 향해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달려드는 누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이 손이 붉게 타오른다! 승리를 붙잡으라고 울부짖으며 외친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그 위압감은 마치 한 마리 범과도 같아, 다른 마법사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LOVE JUSTICE MAGIC

“사랑! 정의! ······그리고 마법!”


······음?


잠깐만. 방금 이상한 게 들어가지 않았나?


“사랑? 정의?”


그게 웬 애들 만화에 나올법한 키워드죠.


“빛나는 힘은 이 팔에, 불굴의 마음은 이 가슴에!”


아니 잠깐 그거 혹시 변신대사······?


“전력전개! 페르소나, 변! 신!”


그리고, 누님을 중심으로 찬란한 빛 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해냈다! 해냈어! 김 부장이 해냈어!”


개.


“개소리 집어쳐!”


마법소녀잖아! 마법소녀라고! 마법이고 나발이고 다 작살난 세계관인데 이제 와서 마법소녀? 웃기지 마라! 마법소녀가 X나게 만만해 보이냐?! 거기에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저 누님 스물일곱이라고! 사람이 등신 호구로 보여도 유분수지! 마법소녀의 유통기한은 길어야 열아홉이야! 이십대가 넘어간 마법소녀같은 건 없다고! 그 악명 높은 포격소녀도 스무살 찍고 마법소녀 타이틀을 버렸는데 뭐? 스물일곱이 이제 와서 마-법-소-녀-?! 니들은 양심도 없냐?!


“아니 그러니까 저건 우리 헥사곤의 비밀병······.”

“신성 모독이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지껄이는 사장을 향해 노호성을 내질렀다. 연상이고 뭐고 알 게 뭐야! 이건 상식적으로, 그리고 상도덕적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아니 이 타이밍에는 채라가 변신하는 쪽이 일반적이겠죠? 그렇겠죠? 여기서 이십대 후반 직장인녀가 변신하면 어색하잖아. 아니 아무리 요즘 이 바닥이 막장이 된다고는 하지만, 미소년도 마법소녀가 되고 애엄마도 마법소녀가 되고 심지어 2미터짜리 근육 보디빌더남도 마법소녀가 된다고는 하지만 누님은 너무 포지션이 애매하잖아. 특히 연령적으로!


“이건 이미 마법소녀가 아니라 마법숙녀잖아요! 이딴 마법 인정 못 해!”

“그만해 미친놈아! 설명해줄 테니까 진정하라고!”


사장에게 양 팔이 잡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일단 마법사라고 힘은 무식하게 세서 나의 연약한 힘으로는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분명 마력량으로 따지면 내가 세계 최강인데 왜 현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입만 살아있는 잉여인간일까. 솔직히 다 때려치우고 피시방에서 시간이나 죽이고 싶다.


“진정하고 잘 듣게, 그녀의 마법은 국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지. 고작 보기 좀 그렇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놀려둘 수만은 없다는 말일세, 이해하겠나?”


보기 좀 그렇다는 건 부정 안하십니까.


“변신소녀 마법은 다른 마법에 비해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지만 꿈과 희망을 타협으로 덮어가며 현실에 찌들어갈수록 서서히 그 힘이 약해진다네. 그런데 저런 나이에도 저런 압도적인 마력이라는 건······마음속 어딘가에 아직 순수한 소녀심이 남아있다는 소리지. 마법이 그녀의 순수를 증명한다는 소리야.”


순수한 마법소녀가 흡연하는 20대 후반 직장인 여성이라고요? 중고등학생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결혼적령기의 성인여성에게 소녀심이라니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아니 분명 하는 행동이 묘하게 소녀틱한 그런 감은 있긴 하지만······왜 누님이 마법쓰길 그렇게 싫어했는지 이해가 간다.


“마침 김 부장댁 친정에서 적절히 갈궈 준 덕분에 김 부장이 마법을 쓰게 되었어. 잘 된 일이지.”

“그래도 저건 좀······.”


말을 흐리며 싸움터를 바라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옷 벗고 반짝반짝 빙글빙글하면서 변신하는 장면은 없었다. 만약 있었으면 공개치욕이지 뭐야.


누님의 변신한 모습은 다행스럽게도,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요란한 머리스타일과 핑크노랑이 들어간 팔랑거리는 프릴 미니스커트라는 주책맞은 조합이 아니었다.


머리가 붉게 변하면서 장발로 길어지긴 했지만 일단은 원판이 원판이니만큼 충분히 어울렸고, 전투복장은 핫팬츠에 탱크 탑. 그리고 재킷의 조합으로 노출도는 좀 있지만 그래도 소화하기 불가능하기까지 한 룩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저 탄탄하고 보배로운 복근을 보니 내심 저 디자인을 생각한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주고 싶어진다. 암, 여자는 복근이지.


“······그 나이에 그런 복장, 안 창피해요?”

“큿······!”


물론, 혓바닥이 면도날이나 다름없는 채라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뭐에요? 그 조잡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주문은? 아무리 적대관계라지만 보고 있자니 좀 안쓰럽네요. 그거 꼭 해야 하나?”

“다, 닥쳐!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거든?!”


누님도 솔직히 많이 부끄러운지, 채라를 향해 소리 지르며 무기로 보이는 커다란 막대기-닭봉처럼 생겼다-를 겨누고는 채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솔직히 부끄러운 거 이해는 간다. 오늘밤 자면서 이불을 걷어찰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으아아아아!”


하지만 일단 전국구 레벨의 마법소녀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지, 방금까지 철저하게 밀리고만 있던 상황을 거짓말처럼 뒤엎고 채라를 압도하고 있었다. 데미지는 없어 보이지만, 그 무식하게 강한 채라 쪽이 조금씩 밀리는 걸 보면 채라도 좀 버겁긴 한가보다.


마법소녀 대단하네. 소녀라는 점이 더 대단하긴 하지만서도.


“아무리 강해도 맞지 않으면 소용없지! 이대로 리타이어해 줘야겠어!”

“윽, 쓸데없이 재빠르긴······!”


구도는 딱 민첩에 몰빵한 캐릭터가 힘과 방어에 몰빵한 캐릭터를 상대로 마구 공격을 쏟아내는 구도. 채라도 일단 아주 무적은 아닌지, 아주 조금씩이지만 데미지가 들어오는 듯 가드를 올린 상태였다.


“좀 맞으라고요!”


참다못한 채라가 가드를 풀고 위협적인 일격을 날렸지만, 노출도와 속도는 비례한다는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듯한 누님에게는 닿지 않았다.


“느려······네년의 공격 따윈 모조리 보인다!”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싱클레어 누님, 과연 마법을 쓰니 그 압박감부터가 아까전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하지만 이상한데. 상대는 채라다. 핵폭탄을 가져와도 ‘괜찮아, 튕겨냈다!’라면서 버텨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무적의 초등학생이라고. 이대로 이렇게 끝날 리가 없을 텐데,


퍼억! 그때, 가드를 푼 채라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기 무섭게 그 얼굴에 누님의 하이킥이 직격했다.


“채, 채라야!”


방어고 뭐고 할 틈이 없이 정통으로 들어갔기에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크게 휘청이는 채라의 얼굴과 복부를 향해 폭풍우처럼 꽂히는 주먹과 발차기.


채라가 워낙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어서 그렇지, 겉보기엔 영락없이 초등학생을 구타하는 이십대 여성의 모습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나지만 나도 모르게 절로 주먹이 쥐어질 정도로 잔혹한 광경.


하지만 나는 몰랐다. 저 채라라는 소녀는, 결코 내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연약한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하! 느려서 보고 막을 수 있다고요? 그럼 봐도 못 막게 하면 되지!”

“뭣?!”


안면을 노리고 들어온 마법사의 강력하기 그지없는 킥을 그대로 받으면서 양 팔로 홀드. 그야말로 무적의 내구력를 자랑하는 채라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니 실제 싸움에서도 저런 거 불가능하지 않나?


한 손으로 누님의 다리를 붙잡은 채, 반대쪽 손을 하늘 높이 드는 채라. 저것은 분명 수도로 내리꽂으려는 자세다! 당황한 얼굴을 한 누님을 내려다보며 채라가 사납게 미소 지었다.


“극한류 오의, 빙-주-깨-기!”

“히익?!”


쿠궁! 하는,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자마자 가드를 올린 싱클레어 누님이 아스팔트에 처박힌다. 이 무슨 무식한 힘이란 말인가. 사람이 사람을 쳤는데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는 거야. 방금 크레이터 생긴 거 보면 복대가 있어도 과연 멀쩡할까 싶은데.


“으, 으윽······.”

“후우······후······. 그러게 작작······좀······때리셨어야지.”


주머니에서 꺼낸 물티슈로 먼지가 묻은 얼굴을 살짝 닦아내며 태연스레 말하는, 가드도 뚫리고 수십 대나 얻어맞은 초등학생. 반면 한 대를 간신히 막은 누님 쪽은 그 한 방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대관절 무슨 초등학생이 저렇게 세단 말입니까. 기껏 마법소녀로 커밍아웃하고 파워업해서 달려들었는데 먼지 좀 묻힌 정도가 한계라고? 전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실력자가 달려들었는데도?


아니 복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예의상 데미지가 들어간 기색은 보여야 할 거 아냐. 저건 대체 어디의 괴물이야.


“그 나이 먹고도 사랑과 정의라니, 동심이 통곡하겠네요. 차라리 일찌감치 현장에서 손 떼고 사무직 가서 서류업무나 보시죠?”


반쯤 그로기상태인 누님을 내려다보며 내리꽂히는 독설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난 니가 그 동심의 대표주자인 어린이라는 게 더 통곡스러워요.


어느새 다른 마법사들의 싸움도 대충 소강상태로 들어가 있었다. 역시 공권력이 세긴 센지, 헥사곤 소속 마법사들이 더 많이 쓰러져 있는 모습. 말인즉슨, 난 일단 살았다는 말이렸다?


“큭. 이럴 수가. 이렇게 된 이상, 박카스만이라도······!”


어어 이게 아닌데. 사장이 갑자기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오, 오지 마! 남자는 꺼지라고! 특히 댁처럼 똥내나는 양반은 더 싫단 말이야!


“아뇨 사장님.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터억.


응? 최 대리 아저씨······?


문득 어깨에 턱하니 올라온 손을 주인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그곳에는 여태까지의 멍청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을 지은 최 대리가 있었다.


뭐야, 왜 갑자기 이렇게 시리어스한데. 아니 원래부터 진지한 내용이긴 했지만 댁은 이런 캐릭터가 아니잖아.


하지만 사장은 뭔가 알아챘는지, 최 대리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싹 굳혔다.


“네놈, 설마······.”

“죄송합니다. 사장님.”


사장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그는 왼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았다.


“마침 지금은 오후 일곱 시. 사람이 가장 잔인해질 수 있는 시간이군요.”


잠시 말을 멈춘 최 대리. 오금으로부터 스물스물 불안감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설마, 최 대리가 배신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양반이 기어코 마법협회 쪽에 붙은 건가? 그럼 우리 편이 맞는 거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품속에서 커다란 군용대검을 꺼내든 최 대리는, 공허한 눈동자를 굴려 나를 응시하곤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박카스······지금이라면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을 떼어버려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


뭐······?


순간,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과격파 쪽에선 오빠를 거세시켜서라도 후환을 막겠다고 하던데요.’


이 자식. 과격파, 라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이브에 소원을 빌어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7 후기&잡다한 설정 19.12.07 243 4 13쪽
16 14. 에필로그~그리고 세상은 +1 19.12.07 142 4 4쪽
15 13. 크리스마스 이브의 소원 19.12.07 93 5 31쪽
14 12. 배신, 그리고 진정한 목적 19.12.06 86 4 24쪽
» 11. 왕년의 마법소녀 19.12.05 87 4 21쪽
12 10. 마법사가 싸우는 방법 19.12.04 83 4 27쪽
11 9. 터미네이터 그녀 +1 19.12.03 77 4 14쪽
10 8. 마법협회 습격 19.12.02 79 4 17쪽
9 7. 압도적인 향취 19.12.01 90 5 22쪽
8 6. 납치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19.11.30 103 3 21쪽
7 5.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 19.11.29 139 5 33쪽
6 4. 소녀와 함께 음양모텔 19.11.28 179 5 12쪽
5 3. 전국구 마법사 19.11.27 145 7 19쪽
4 2. 보이 밋 걸 19.11.26 395 7 28쪽
3 1. 크리스마스 이브 +3 19.11.26 383 10 23쪽
2 0. 지극히 평범한 +1 19.11.26 525 11 2쪽
1 소개글 +1 19.11.26 643 8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