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등지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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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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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Episode38_지난 날, 추억조차 못할(2)

DUMMY

“이게 대체 뭔가요?”


하온과 사라가 보고있는 벽에는 수많은 무언가-아마도 글자로 추정되는-가 음각으로 새겨져있다.


그러나 각각의 모양새나 패턴이 부분별로 전부 달라서 통일성이 없다. 그런 글자들이 공간 낭비 하나 없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옛 시대에 쓰이던 글자이외다. 그 시절엔 나라마다 다 다른 글자와 말을 썼대요. 거 참 피곤하게 살았지요.”


노인은 글자마다 하나하나 가리키며 그것의 이름을 친절히 말해주었다.


“이것은 로마자라 하고, 아랍 문자, 한글, 룬 문자, 한자, 키릴··· 정말 오만가지 문자로 적어놓았수다.”


“그걸··· 다 아시네요?”


사라의 감탄에 노인은 자신은 별 것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대신 과거의 학자를 추켜세웠다.


“수백년도 더 전에 이걸 연구하던 이가 알아냈어요. 대체 어찌 알아낸건지, 과거에서 온 사람이 옆에 있었다 해도 믿을 정도로...”


“과거에서 온 사람이요?”


“예. 옛 시절에 살던 이가 아니면 모를법한 지식도 끝내 알아냈으니까요. 그야말로 대학자였시우.”


하온은 슬쩍 제 품 속을 바라보았다. 왕눈이 괴물은 꼭 부끄럽다는 듯 몸을 오므린 채 깊숙이 숨어들어갔다.


노인은 제 일생의 공로가 이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그리 신났던지, 그 안의 내용을 줄줄이 읊어주고 있었다.


이에 적힌 내용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황금시대에 인간이 가졌던 무서운 기술력과 그 악용을 상세히 기록해놓았던 것이다.


훼손된 부분만 제하고 봐도 무시무시했다. 그 어떤 창도 막는 방패와 그 어떤 방패도 뚫는 창이 함께 적힌 것도 범상치 않았다.


굉음과 함께 적에게 금속덩이를 날리는 총이라는 것도 있었고, 번개의 힘으로 땅을 뚫는 물건도 있었으며, 바람을 일으키고 지진을 멈추는 것도 가능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다는 기계도 있었고, 어떤 물건이든 완벽히 포장해서 포장한 주인조차 꺼낼 수 없게 만드는 의도를 알기 힘든 괴상한 장치도 있었다.


허나 그 뒤부터는 크게 훼손된 부분이 하나 휑하니 뚫려있었고, 그 탓에 이 보물들 각각이 어디에 숨겨졌는지는 그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불행이라 해야할지 전혀 모르겠다.


그것을 보며, 하온의 뇌리에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의 입이 저절로 움직이며 그 질문을 내뱉었다.


“이런걸 왜 만든건가요?”


“뭐요?”


“이렇게나 세세하게, 잃어버린 역사들을 기록해놓은 이유가 뭔가요? 이런 무서운 기술력들, 멸망이란 끔찍한 기억들··· 어째서 이를 돌 위에 새기는 고행까지 해가며 남기려 했죠?”


노인은 탁한 신음소리를 한번 내더니, 꽤 긴 말을 그에게 풀어냈다.


“...그것에 대해는 학자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더이다. 어떤 이는 전쟁에 패한 것이 분해, 다음 기회에는 이기라며 적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 시절 최후의 왕이 부린 수많은 무의미한 사치중 하나였다고도 합니다.”


후우, 작게 숨을 내뱉고 노인은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난 이렇게 생각하고 있수다. 이건 그들의 후회의 증거라고.”


“...”


“자신들의 실패를 후세에 알려, 미래의 인간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랬다고, 그래서 이런 단단한 돌에 흔적을 남겼다고, 난 그렇게 생각하외다. 보시오. 이름도 흉터의 벽이지 않소?”


“흉터의 벽이요?”


“그렇수, 흉터. 아픈 상처가 너무 깊어, 영원히 흔적을 남기는 것이 흉터요. 단단한 벽에 세심하게 새겨, 결코 지워지지 않을 아픈 과거가 바로 이것 아니겠소?”


지평선에 지는 태양과 그로부터 뻗어나오는 붉은 빛이 노인을 비춰왔다. 이에 그의 진지한 얼굴이 짙은 그림자에 감춰져, 그 광경은 정말 극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온은 다시한번 그 벽을 바라보았다.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글자와 그림 하나하나를 깎아낸 이들의 처절함과 아픔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때 갑자기 노인이 하온을 향해 돌아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잔뜩 놀란 표정으로.


“아니, 그런데 아까랑 목소리가 왜 이리 다르시우? 톤부터 말투까지 완전히 다른데.”


맙소사, 이제서야! 하온은 기껏 빠져든 진지한 분위기가 단번에 깨진 것에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



“이런 곳에서 혼자 연구하시면, 힘들지는 않으세요?”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되자, 하온 일행과 노인은 모닥불 앞에 삼삼오오 모여 남은 이야기를 나눴다.


하온의 질문에 노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혼자인 것 자체엔 불만 없수다. 우리 형님들처럼 결혼을 하든 농사를 하든 했다간, 연구는 커녕 책 하나 뒤적일 시간도 없을테니 별 수 있남.”

노인은 이내 얼굴을 찡그리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의 노인이 쓰던 무기력한 목소리와 비교하면 꽤나 격정적인 말투다.


“그러나... 혼자라서 우라질 놈들이 왔을 때 속수무책인 점이 슬픕니다.”


“우라질 놈이요?”


“그렇수다. 우라질 놈. 내가 지금보다 더 젊을 적에, 웬 군인 몇 놈들이 지켜준다는 핑계로 찾아왔어요. 그 때 투르나는 선왕의 병세가 위증해져 혼란기였지. 그래서 치안이니 뭐니, 신경도 안 쓸 때였고.


그 때를 노린 놈이었지. 여기 있던 값나가는 유물을 빼돌리고, 뭐가 더 있나 싶어 구조물을 깨부숴 그 속을 보질 않나, 내 연구자료도 가져가 다른 학자에게 팔기도 했어요.


가장 어이없었던 건, 단순히 기념품으로 삼고 싶다는 이유로 온갖 노력을 들여 벽의 일부를 뜯어갔을 때였소. 저 부서진 자국이 바로 그거지.”


노인은 벽에 난 큰 자국 하나를 가리켰다. 아까의 그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장치’의 위치가 적힌 곳이었다. 그 부분만이 크게 파져 떨어져나가있었다. 저 단단한 돌을 부수려면 얼마나 힘들까, 뭘 그렇게까지···


“그렇게 난 저항도 못한 채 수년간 그놈들 깽판에 몸이나 사리고 있어야 했지요.”


“...그 군인은 나중에 어찌 되었나요?”


“다른 군인에게 칼침 맞고 죽었어요. 그 군인은 처형당했고. 돈을 나누는 데 불만이 있었다는 말도 있고, 불의를 못참아 그랬다는 말도 있는데, 나야 상관 없지요. 그저 알아서 꺼져주니 고마웠을 뿐.”


그리도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을 끝마치더니, 노인은 부지깽이로 불을 쑤시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하늘 위에서 빛나는 별을 보니 어떠한 감정이 또한 파도쳤는지, 이제는 애절함이란 것이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내가 아까 말했지요? 이 벽에 새겨진건, 아픔을 영원히 되새겨주는 흉터라고. 그런데 결국 흉터도 낫기는 하나봅니다. 점점 훼손되고 닳다보면, 언젠가는 본래의 평범한 돌로 돌아가겠지요.”


그런, 깎여져 본질을 잃은 돌덩이들을, 노인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슬퍼하고 또한 애도했다.


“그러나 그 흔적마저 사라져 어찌 다쳤는지도 잊어버리면, 언젠가는 다시 다치고 말겁니다. 그럼요. 이미 몇번이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인류는 그 후에도 또다시 멸망하고 말았다. 문명을 쌓으면서 또 파멸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저는 여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돌고 도는 역사의 바퀴가 끊어져, 인류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전과는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먼 옛날 이 벽을 만든 이들이 바랬던 것 처럼...”


별이 자기를 봐달라는 듯 그렇게나 예쁘게 빛나고 있었음에도, 노인의 시선은 그렇게 벽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던 것이다.



***



하필 이런 때에, 흉터난 벽 유적지를 향해 길을 떠난 두 암살단원.


키가 큰 쪽은 페이라고 하는 자요,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어 그 능력을 인정받아 암살단에 발탁되어 충성을 다하고 있다.


다른 한 쪽은 자인이라 하는 자인데, 성질이 불같고 뭔가가 눈에 씌이면 한 우물만 파는 단순무식한 놈이나, 대장은 그 점을 높이 사 암살단의 말단으로 입단시켰다.


그들은 페이의 강한 주장 덕분에, 정말 우연히도 사라와 하온이 있는 곳으로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해는 똑같이 지고 있었고, 결국 암살단과 하온 일행의 만남은 하루가 미뤄진 채 조용히 밤을 맞았다.


“네 말마따나 사람 하나 없을텐데, 거기 가서 죽치고 있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사람 한분 계시다. 유한이라는 노인분이신데, 그곳에서 벽을 지키고 연구하고 계시지.”


“아는 사람이야?”


“가끔 찾아간다. 여러모로 군인 탓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시니, 우리 군인이 챙겨드릴 의무가 있지 않겠나.”


“그럼 안부인사 하는 김에 겸사겸사 반역자도 잡겠다, 이 소리였구만! 이것 봐라, 그런식으로 해서 어디 목표 잡겠어?”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을 거고, 어차피 한번씩은 다 찾아봐야 하는 법이야.”


“치, 안다. 알아! 농담이야! 진짜 그리 생각했으면 죽어도 안 따라왔지.”


고지식하기 그지 없는 놈. 자인은 그리 생각했다. 예전부터 이 페이란 놈은 만사가 진지하고 올바르지 않으면 참지를 못하던 놈이었다.


대대로 군인 가문이라 그런건지, 농담 하나도 제대로 받아줄 줄을 모른다. 같이 있어서 재미있는 놈이 아닌 것이다.


‘이런 놈이랑 앞으로 몇 달 간은 반역자 수색을 같이 해야 한다니. 제기! 그냥 내일 유적지에 가면 거기서 바로 반역자랑 만난다 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내일 일찍 일어나기 위해 그는 침낭 속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염원은 내일이면 이뤄질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하필 이런 때에, 그들은 유적지를 향해가고 하온은 유적지에 있었던 것이다.


내일이면 만나게 될까? 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와 하온 일행은 잡히게 되는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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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Episode275_최초의 악수 +1 22.07.25 23 2 8쪽
275 Episode274_눈물과 위안으로 22.07.21 31 2 8쪽
274 Episode273_비상 +1 22.07.12 25 2 9쪽
273 Episode272_추락 +2 22.07.04 27 3 8쪽
272 Episode271_지각과 각성(4) +2 22.06.27 30 2 7쪽
271 Episode270_지각과 각성(3) 22.06.13 34 2 7쪽
270 Episode269_지각과 각성(2) 22.06.04 26 2 7쪽
269 Episode268_지각과 각성(1) +1 22.05.31 25 2 10쪽
268 Episode267_혜성 충돌(6) +2 22.05.18 39 2 8쪽
267 Episode266_혜성 충돌(5) +2 22.05.17 41 2 10쪽
266 Episode265_혜성 충돌(4) 22.05.15 33 2 8쪽
265 Episode264_혜성 충돌(3) 22.05.10 73 2 8쪽
264 Episode263_혜성 충돌(2) 22.05.03 27 2 8쪽
263 Episode262_혜성 충돌(1) +4 22.04.22 43 3 8쪽
262 Episode261_고요한 역습 22.04.20 89 2 9쪽
261 Episode260_미래의 아이들(2) +2 22.04.18 59 2 8쪽
260 Episode259_미래로의 일발(3) +2 22.04.15 26 4 9쪽
259 Episode258_미래로의 일발(2) 22.04.08 41 5 7쪽
258 Episode257_미래로의 일발(1) +2 22.04.05 37 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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