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검객(劍客)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단공김상훈
작품등록일 :
2019.12.30 16:02
최근연재일 :
2020.04.29 11:45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2,712
추천수 :
37
글자수 :
190,722

작성
20.01.23 18:20
조회
54
추천
1
글자
9쪽

10. 술병을 든 애꾸 1

DUMMY

“어이, 이봐.”

눈을 뜨자 사방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병풍처럼 펼쳐진 밤하늘에는 별들이 영롱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버리는 정신이 돌아온 후에도 누운 상태 그대로 눈만 껌뻑이며 한 동안 멍하니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밤하늘의 별들만 보고 있었다.

“이봐, 괜찮나?”

사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나 버리는 말 할 기운도 없었다.

“끙.”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엉금엉금 기어가 초가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해진 옷에 흙탕물이 덕지덕지 묻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것도 귀찮았다. 옷에 묻은 흙탕물보다도 더 더럽혀진 건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전답을 사주려고 차곡차곡 모으던 돈.

물론 겨우 그 돈으로 땅을 산다고 하면 다들 어이가 없어 웃고 말겠지만 그래도 떠돌이치고는 꽤 많이 모은 돈이었다. 원래 재야의 삶이란 게 그렇다. 야인으로 몇 년을 떠돌아봤자 손에 쥐는 건 칼 한 자루가 다인 인생들이다. 그래도 그만한 금액이라도 모은 것만 해도 나름대로는 대견한 일이다. 그런데 그 돈을 단숨에 모두 날려버린 것이다. 버리는 자신이 쓸모없는 밥버러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가 발이 아니라 칼을 휘둘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단번에 목이 잘렸겠지. 그자 말마따나 내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봐야 하나?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절이라도 할까? 차라리 그냥 칼을 맞고 죽어버렸더라면 이런 수치스런 꼴을 보이지는 않을 것을. 죽는 게 더 낫지. 이대로 살면 뭐해? 그런 삼류들조차 못 당하는 수준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나 같은 놈은 죽는 게 나아. 살 가치도 없어. 밥만 아까워.’

사내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주 호되게 당한 모양이로세.”

시간이 조금 흐르자 어둠을 뚫고 주위의 사물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버리도 마침내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자신을 깨워준 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사내는 왼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고 그의 왼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입에선 술 냄새도 났다. 그리고 몸에선 강하진 않지만 역하고 비릿한 냄새도 풍겼다.

‘애꾸?’

사내가 애꾸라는 걸 알게 되자, 문득 이런 자도 혹시 칼잡이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자연스레 눈길이 애꾸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역시나 칼을 차고 있었다.

정말로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칼잡이 행세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 ‘나 같은 놈도 있는데 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가장 큰 어중이는 바로 자신 아닌가.

“한 잔 하겠나?”

애꾸가 들고 있던 술병을 그에게 내밀었다. 버리는 술병을 받아 벌컥 벌컥 들이켰다.

“콜록 콜록.”

그러나 마시자마자 사레들린 듯 바로 기침을 해댔다. 그리고는 술병과 애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애꾸는 아무 말 없이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탁주인 줄 알았는데.”

버리가 중얼거렸다. 애꾸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는 소매로 입가를 한 번 닦더니 이번에는 급하지 않게 조심스레 술병을 입에 갖다 댔다. 두어 모금 마시고 나서 “크”하는 탄성을 내뱉은 후 혹시나 해서 애꾸에게 물었다.

“이거... 곡아주(曲阿酒)요?”

“술을 좀 아는 친구로세.”

애꾸가 답했다.

버리는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놀랐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애꾸 따위가 흔하디흔한 탁배기가 아니라 고급 법주(法酒)를 마시다니!

버리는 술병을 그냥 넘겨주기 아까운 듯 다시 또 한 모금 마셨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애꾸의 옷차림새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바지, 저고리, 포(袍)까지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감은 포(布)가 아닌 백(帛)이었다.

‘베가 아니라 비단을 입고 있어? 견(絹)인가? 아니, 무늬가 있는데. 그렇다고 금(錦)이나 단(緞)일리는 없을 테고, 초(宵)인가?’

버리가 술을 마시는 와중에도 곁눈질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자 애꾸는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자신의 착수포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 옷 말인가? 운포금(雲布錦)으로 지은 걸세.”

버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이라고?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허섭한 애꾸 따위가 고급 비단을 걸칠 수 있지?

“왜 뒷골목의 애꾸가 비단 옷을 입고 있어서 이상한가?”

애꾸가 그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버리가 움찔했다.

“아니... 그게...”

그는 애꾸를 얕잡아보다 들키자 당황해하며 얼른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애꾸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한 몫만 단단히 쥐면 아침에 침어낙안(沈魚落雁)을 끼고 비단금침(緋緞衾枕)에서 눈을 뜰 수 있는 게 우리 같은 야인들 팔자 아니겠나?”

일개 칼잡이가 비단금침을 덮고 베? 턱도 없는 소리. 자신은 지금껏 떠돌았지만 손에 쥔 거라곤 겨우 곡식 열 섬이나 될까 말까 했다. 그마저도 삼류 칼잡이들한테 홀라당 털려버리고 말았지만.

물론 그런 일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얘기다. 애꾸나 자신 같은 야인들이 한 몫 단단히 챙기려면 든든한 물주가 있어야 한다. 하늘을 가르고 천하를 두 동강내는 솜씨를 지녔다고 해도 소용없다. 결국은 물주다. 그러나 그런 물주를 물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생긴 건 촌놈 팔푼이 같은 게 비단 옷, 그것도 제가들이나 입을 수 있는 운포금을 걸치고 있었다. 곡아주 같은 비싼 술을 들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어디서 천석꾼이나 만석꾼 하나를 물기라도 한 건가? 정말로 한 몫 단단히 챙긴 걸까?

순간, 버리는 그의 말끝에서 왠지 모를 묘한 기대감 같은 게 들면서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로 이자가 만석꾼을 물고서 한 몫 챙겼다면 친분을 쌓아두는 게 좋다. 혹시나 그 줄이 자신에게도 닿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달뜨려던 기대감은 차츰 정신이 깨이고 이성이 돌아오면서 차갑게 가라앉았다. 생판 처음 보는 자에게 누가 자신의 피 같은 돈줄을 연결해줄까? 거기에다 이렇게 처 맞고 나자빠져 있는 꼴을 보였으니 칼잡이로서의 가치는 말짱 황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한 셈인데. 혹여 저 애꾸가 든든한 물주를 물고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까지 그 줄이 닿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실은 내 다 보았네.”

거봐. 이렇다니까.

또 다시 수치심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이제와 뭘 어쩌겠는가. 어디로 간지도 모르는 비려인 패거리를 밤새 찾아다닐 순 없는 노릇이다. 또 찾는다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다. 아직도 뒤통수가 띵하고 속이 메슥거리는 것이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뭘 말이오?”

버리가 씁쓸히 물었다.

“푸줏간 앞에서 칼질할 때부터 다 보았네. 후에 당한 거야 그건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런데 칼을 꽤 잘 다루더군. 여럿을 동시에 상대하는 데도 당황해서 허둥대지도 않고. 정식으로 배운 건가?”

‘응?’

그의 말에 버리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 들었다. 특히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그것을 흠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버리는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괜히 냉정한 시늉을 했다.

“정식은 무슨. 그냥 뒈지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휘두르고 다니다 익힌 게지.”

“오? 배운 적도 없는데 그 정도라. 비려인 패도 그렇고 자네도 어설픈 선떡부스러기는 아니야. 그나저나 날 샐 때까지 그대로 있을 텐가?”

애꾸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갈 데도 없고...”

버리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 다음 말은 애꾸가 채워주길 바랐다.

“그럼 나랑 한 잔할 텐가?”

버리가 비긋이 웃었다. 기대하던 말이었다. 버리는 벽을 집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럽시다, 뭐.”

애꾸가 웃었다. 그러자 버리도 따라서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애꾸의 뒤를 따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객(劍客)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3 32. 서악 살한설 3 20.04.29 10 0 14쪽
32 31. 서악 살한설 2 20.04.15 14 0 12쪽
31 30. 서악 살한설 1 20.04.07 21 0 12쪽
30 29. 저승길을 건너온 자 8 20.03.31 18 0 12쪽
29 28. 저승길을 건너온 자 7 20.03.24 22 0 14쪽
28 27. 저승길을 건너온 자 6 20.03.20 24 0 14쪽
27 26. 저승길을 건너온 자 5 20.03.16 18 0 12쪽
26 25. 저승길을 건너온 자 4 20.03.13 23 0 16쪽
25 24. 저승길을 건너온 자 3 20.03.09 23 0 13쪽
24 23. 저승길을 건너온 자 2 20.03.05 25 0 13쪽
23 22. 저승길을 건너온 자 1 20.03.02 31 0 11쪽
22 21. 중리대형 2 20.02.27 29 0 14쪽
21 20. 중리대형 1 20.02.24 45 0 10쪽
20 19. 추격 3 20.02.20 33 0 11쪽
19 18. 추격 2 20.02.17 31 0 14쪽
18 17. 추격 1 20.02.14 43 0 14쪽
17 16. 또 다시 외당의 칼잡이들 20.02.11 41 1 10쪽
16 15. 외항 포구의 양인(梁人)들 20.02.08 47 1 13쪽
15 14. 나매참(奈買斬)의 살인 2 20.02.05 41 1 12쪽
14 13. 나매참(奈買斬)의 살인 1 20.02.02 42 1 15쪽
13 12. 술병을 든 애꾸 3 20.01.30 48 1 14쪽
12 11. 술병을 든 애꾸 2 20.01.27 41 1 11쪽
» 10. 술병을 든 애꾸 1 20.01.23 55 1 9쪽
10 9. 태학도(太學徒) 3 20.01.21 59 2 12쪽
9 8. 태학도(太學徒) 2 20.01.19 60 2 12쪽
8 7. 태학도(太學徒) 1 20.01.16 100 2 12쪽
7 6. 외당(外堂)의 칼잡이들 6 20.01.13 99 2 14쪽
6 5. 외당(外堂)의 칼잡이들 5 20.01.10 111 2 12쪽
5 4. 외당(外堂)의 칼잡이들 4 20.01.08 138 3 12쪽
4 3. 외당(外堂)의 칼잡이들 3 20.01.06 161 2 10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단공김상훈'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