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음성 들리니 (33)
“죽어!”
땅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며 외쳤다.
“어라?”
땅에서 솟아 나온 그 존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찌푸린 하늘을 더 엉망인 표정으로 올려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사방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등장한 것이었다.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친구를 죽인 놈이 눈앞에 있어야 했다.
그 존재는 자신의 만든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다시 점검했다.
'시작은 제물 의식이었을 테고, 그다음엔 술과 음식을 먹었을 거고, 마지막엔 모두가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졌어야 하는데...’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계획이 어긋난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 맞아.
그랬군.”
그는 다시 원망이 가득한 눈초리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마치 구멍이 뚫린 듯, 엄청난 장대비가 쉼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비...
바로 이 비 때문이군.
이런 비라면 그 누구라도 일을 빨리 끝마치고 따뜻한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을 테지...
젠장!”
그는 짜증 섞인 말투로 계속 궁시렁거렸다.
“술에 곯아떨어져 코를 고는 소리가 아니라, 비 오는 소리였다니...”
그는 자신의 눈이 어두운 것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눈이 안 보이는 대신에 반경 2km 밖에서 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청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그 놀라울 정도로 밝은 청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청각으로 인해 이번 작전은 완벽한 대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해야 한다고 너무 뜸을 들였나?’
스스로 주인공이라 생각하며 가장 극적인 순간에 등장하리라고 마음먹었던 자신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하긴...
내가 그렇지 뭐...’
또다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자괴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그는 별 볼일 없는 놈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무수히 되뇌었지만, 이젠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또 실패야...
역시 난 뼛속까지 루저야...’
그의 생각이 부정의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다.
“으악!
저게 뭐야?”
그의 눈은 한참을 열십자 형틀에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 시체인가...?"
그는 차갑게 몸을 떨었다.
'복수도 못했는데, 거기에 더해 시체라니... 아,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그는 자괴감에 빠진 채로 한참 동안 스스로의 불운함에 치를 떨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십자 형틀에 달려있는 것이 누구의 시체인지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내 친구를 죽인 놈이 천벌을 받아 저곳에 매달려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천천히 십자 형틀을 오르기 시작했다.
땅을 파는 것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었으나, 비를 뚫고 형틀을 올라가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비에 젖은 형틀은 매우 미끄러워 그는 수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한참을 그렇게 씨름하고 나서야 겨우 형틀을 올라갈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 걸린 시체를 보고 깜짝 놀라 겨우 올라온 형틀 아래로 곤두박질칠 뻔했다.
그곳엔 자신과도 알고 지냈던 담비가 달려 있었다.
그는 빗속에서 형틀에 달린 담비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쯧쯧...
불쌍한 놈...
그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더니, 갈 때도 이렇게 불쌍하게 가는구나...’
그는 불쌍한 담비의 시체라도 자신이 가져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형틀을 내려오려고 하다 보니, 옆 형틀에 이리가 온갖 인상을 쓴 채로 죽어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어떤 작은 여자아이가 십자 형틀에 달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담비의 시체만 치우려고 했었는데, 그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비를 손으로 연신 닦아내며 생각했다.
‘아...
오늘도 재수 옴 붙은 날이구나...
치워야 할 시체가 세 개씩이나...’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눈물인지, 비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 작가의말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 (왕상 13: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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