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적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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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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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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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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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089

.




DUMMY

'하느님, 부처님, 세현님...'


세현이 새끼가 이렇게나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쌍놈 새끼들아 !!"


세현은 부모 죽인 원수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쌍놈은 뭐야.

신분제가 희미한 아루인이 그런 말 하니까 웃기잖아.


"꽝 !! 꽝 !!"


권총탄 두 발과 기름병이 우르르 뿌려졌다.

내 곁에 바로 지프를 세운 3호 차 멤버들은 긴급 구출 작전 매뉴얼 그대로 기름병을 던져 광역 화공을 시작했는데,


"확 !!"


순식간에 지프 반경 25미터에 원형 불길이 치솟았다.

불의 장벽 안에 있는 수십 마리의 빠가사리에 세현은 닥치는 대로 총탄을 박아 넣었고,

나머지 세 명은 쉴 새 없이 기름병을 던져 불길을 공고히 만들었다.




"폐하 !! 괜찮으십니까 !!!"


"씨발... 괜찮아 보이냐. 11분 27초 후에 과다출혈로 죽을 예정이다."


"지혈제 !! 항생제 !! 해열제 !! 빨리빨리 !! 소독제도 !! "


아는 약이 많기도 하다.

허세 부리면서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 한 게 포인트였는데 녀석은 내 조크를 받아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됐어. 그럴 때 아니다. 나보다 제유부터 차에 옮겨.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아마 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제유는...

살기 어려울 거다.

그런 느낌이다.


그녀가 살았으면 좋겠다.

꼭, 살아남아서 병신같은 소리로 내 복장을 뒤집어 줬으면 좋겠다.

지금 내 느낌이 틀렸으면 좋겠다.




놈들이 차마 불의 장벽 안으로 들어올 엄두 못 낼 상황이 되자 지프에는 경계와 불길 유지를 위해 한 명만 남았고 세현과 나머지 둘이 차에서 내려 놈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쌩쌩한 놈들은 이미 권총으로 죽였고 남아 있는 놈들은 대부분 어디 한 군데 부러진 놈들이다.

만만한 숫자는 아니지만 상대 못 할 전력도 아니겠지.


피 칠갑한 내가,

몸에 수십 군데 자상이 새겨진 나까지 나설 상황은 아니다.




지프 뒷자리에 앉아 제유를 살폈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애처로운 표정.

땀과 먼지로 범벅된 얼굴엔 눈물 자국이 선명했고,

끝없이 흘러내리는 피는 그보다 더 선명했다.



상갑과 웃옷을 벗겼다.

질척이는 피와 함께 노르스름한 지방질이 뒤섞여있다.

오른쪽 젖가슴이 찢겨 뚫렸다.


'... 씨발 새끼...'


뭘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깨끗한 물을 들이부어 감염을 최소화하고선 소독약을 뿌려 싸매는 것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것뿐이다.


씨발,

외과 응급처치를 배워뒀으면 좋았을 텐데.

부질없는 자책.

지금 도움 되는 생각은 아니다.


가슴을 꽉 싸맨 다음에 인공호흡기를 씌웠다.

단 한대밖에 안 가져온 인공호흡기와 압축 산소통.

그게 3호 차에 비치된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도 숨쉬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의식이 아직 있으니까.


틈틈이 창밖을 살피며 제유의 출혈 부위를 전부 드레싱해 압박했다.

수혈 팩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건 너무 염치없는 생각일까.


이젠 20세기 크루나의 위대한 발명품.

항생제의 위력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항생제에 노출된 적 없는 사람에겐 종종 기적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한다지.




지프 바깥 상황은 좋아졌다.

불의 벽 안쪽 빠가사리는 모두 정리됐고,

아직도 지프에는 백 개가 넘는 기름병이 남아 있으니까.

버티기만 하는 거라면 이십 분 이상 버틸 수 있을 거다.

물론 멀쩡한 지프로 뚫고 나갈 수도 있을 거고.


어지럽다.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원래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트라가 새침하게 뾰죽거리고, 석돌이가 실실 웃었으면 좋겠다.

선영이가 라면을 더 끓일지 말지 고민했으면 좋겠고,

라프가 드론 연습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유.

제유가 웃는 모습을 다시 본다면 정말 좋을 거 같다.








'서주성 전투 수정 특보. 대외비. 14시 30분 현재 두억시니 100여 마리와 빠가사리 6500마리 사살. 아군 사상자 400 추정. 폐하 출혈 과다 의식불명. 기사.트라 사망. 기사 영수 사망. 기사 라프 사망. 기사.미루 사망. 기사.선영 사망. 기사.석돌 중상. 기사.제유 의식 불명.'




케른에서 서주 성의 대외비 보고를 받은 사람은 고작 다섯 명.

수석 통신관과 두 명의 집사.

그리고 두 명의 황후.


통신지를 넘기는 통신관 얼굴빛은 창백했다.

수.사피가 입을 틀어막고 떨던 그때,

후.세나와 후.휘비는 울지 않았다.




"... 다들 잘 들어요. 대외비가 왜 대외비인지 알지? "


휘비는 입술을 깨물어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수.사피. 수.하라. 울고 있을 때 아냐. 그래, 폐하께서 쓰러지셨고 특전수는 와해했어. 궤멸당했어. 이 소식을 동네방네 다 퍼트릴 거야? 표정 관리해. 웃어. 내 말 알아듣지?"


".. 이해 했습니다. 후.휘비님."


"흑... 으읍...."


"사피, 뚝 안 그쳐??? 지금 시골 아낙네처럼 뭐 하자는 거야? 감정 숨겨. 진성을 바꿔. 폐하께선 건재하신 거고 특전수는 여전히 영웅인 거야. 알겠어 !!??"


"..흡... 휘비님. 조금만... 흡... 아주 조금만 시간을...."


휘비는 못마땅한 눈으로,

하지만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수.사피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통신관에게 옮겼다.


"루.케난. 당신은 지금부터 개인 집무실에서 주위를 폐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하면 서주 성에서 오는 통신은..."


"1시간 간격으로 계속 사람을 보낼 테니 통신지를 작성해 놔. 허락 없는 통신은 용서하지 않아."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후.휘비님."


그때 둘을 지켜보던 세나가 느릿하게 말했다.


"... 수.하라님. 언론 통제하시고 거짓 통신을 뿌리세요. 수.사피 님과 함께 내용과 방식을 정해주시고... 오늘 밤에 보고 받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왕비님."


"일일이 세부 지시 하지 않을 겁니다. 부하나 직원들을 통하지 않은 채 두 집사님이 모든 걸 결정하고 실행해야 해요. 이럴 때일수록 집안 단속이 중요해요. 사피님, 지금은 그저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 여인이겠지요? 하지만 감정 추스르시는 대로 집사 복귀하셔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세나는 수.사피를 다독이고는 통신실을 나섰다.

휘비는 그녀를 따라 나가면서도 세 명에게 눈 맞추는 걸 잊지 않았다.








세나는 오열하는 휘비를 바라보며 슬프게 웃었다.


의식 잃은 서방님은 물론이려니와 트라의 죽음과 생사를 헤매는 제유.

사실상 와해한 특전수...


대가 없는 성취는 없는 법이라지만,

하필이면 가장 안 좋은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보고 대로라면 서대륙 정벌은 이제 고비를 넘겼다.

남은 건 진군과 개척뿐인데,

그건 서방님의 존재가 더는 절실하지 않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두세 달 전부터 불온한 세력이 감지됐다.

아직은 그 세력을 파악하지 못한 데다가 정복 전쟁이 한창이었기에 수면 아래에서만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서대륙 전쟁이 이렇게나 급박하게 끝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설령 반역을 꾀하는 무리가 있다 한들 무엇을 걱정해야 했을까?


서방님은 그 자체로 전략 병기다.

병사는 몇백이 몰려들어도 서방님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며,

어지간한 기사들도 눈을 맞추기는커녕 고함 한 번에 얼어버릴 거다.


게다가 서방님에 버금가는 전술 병기, 특전수는 서방님의 말 한마디에 지옥이라도 따라 들어갈 충신들이며,

세 대의 지프와 총기.. 모든 게 걱정 따위는 기우라는 걸 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략 병기는 고장 났고 전술 병기는 궤멸했다.

지프는 한 대만 남았고 총기는 무용지물이 됐다.


뼈아프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판을 만들어 놓은 곳에 따라 들어가 버린 느낌이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독살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혼잣말인 척 던진 휘비의 푸념에 다시 웃었다.


".. 어쩔 수 없잖아? 서방님이라면 분명 '원인 따질 거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 라고 하실 거야."


" 뭐, 그렇지. 그랬겠지."


머리를 주억거리는 휘비.

울 만큼 울었는지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미안해 언니. 더 쉬어야 하는데. 세경이 젖 먹이다 나와서 이게 뭐람."


"그럴 때 아니잖아.."


"..오빤 분명히 훌훌 털고 일어날 거야. 의식불명. 처음도 아닌데. 오빠가 피 좀 흘렸다고 어떻게 될 리 없잖아."


서방님은 의식을 잃으셨지만 위급한 상황은 아닐 거다.

만약 그랬다면 통신에 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을 테니까.

휘비가 운 건 제유와 트라 때문이다.


".. 그래, 휘비야. 내부를 더 단속해야 해. 감찰단 보고를 재촉해야겠어.."







세현은 4일간 밤 새웠던 제유를 기억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워프 충격으로 의식을 잃으셨던 그때,

제유는 눕지 않은 채 폐하의 곁을 지켰었다.


'허락 없이 막사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 죽이세요. 그게 저라도.'


'세현 님이라도 죽입니다.'


자기를 죽이겠다는 제유의 말이 왜 기쁘게 느껴졌을까.


아니, 정말 날 죽일 자신은 있어요?

대련해도 열 번중 서너 번은 내가 이기잖아요?

게다가 말이 죽이는 거지, 정말 죽이기야 하실까.


..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생각 없이 뱉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제유는 정말이지 그 누구라도 천막이 걷히는 순간 그어버릴 기세였고,

실제로 아무도 막사에 들어가지 못했었다.




폐하의 아이를 갖고 싶다 했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게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다고도 했었다.


폐하의 호위 기사인 게 자랑스럽다고 했었다.

최후의 순간 폐하의 곁은 지킨다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고 했었다.


만약 그녀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젖을 물리지 못할 거다.

가슴이 날아갔으니까.


만약 제유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다시 전장에 서는 게 가능할까?

손가락 두 개가 사라졌으니까.


그래도 살아나기만 한다면 내게 말해줄 수 있을 거다.

페하의 곁을 지킨 그 순간을.









경철은 사흘 후 깨어났다.

야윈 몸뚱이가 안 느껴질 만큼 몸에 힘이 없었고 메슥거렸지만,

모든 걸 미루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제유는?"








의무병 피에는 며칠 전 일을 잊을 수 없었다.


기사 연감에서나 보던 유명인, 수석 기사 기사.제유가 자신의 병상에 실려 온 거다.


사람이 저렇게나 난자당하고도 어떻게 살아서 숨을 쉬는 건지.

대체 어떤 천인공노할 놈들이 우리들의 영웅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침대가 좁아 보일 만큼 큰 그녀.

사람이 이렇게 클 수도 있는 거구나 싶어 새삼 놀랐었다.


피에는 동경하던 기사님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상황이 괴로웠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기원했다.


'제발 제유님이 살아나시길...'


그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기사님의 눈이 번쩍 떠졌고,

그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을 때, 조금 전까지 시체나 다름없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는?"


" .... "


"폐하는?? 너 누구야? 관등성명."


"서.. 서주성 2군 의무병 피에입니다."


"새끼야. 대답 안 해? 폐하께선???"


..... 새끼??

태어나서 이렇게 모욕적인 말은 처음 들어봤다.

아무리 수석 기사님이시지만...


"..폐하께선 어제... 보름쯤 요양하시면..."


"씨발, 새끼가 빠져가지구. 대답 제대로 못 하냐? 니 상관 어떤 새끼야? 그래서 폐하 지금 살아 계시다는 거지?? 얼마나 다치셨어? 석돌이 선영이 어떻게 됐냐? 아, 답답해. 야, 니 윗대가리 불러와. 썅놈의 새끼야. 의무대장 데려오라고. 빨리 안 튀어가?"


... 이 성격 급한 욕쟁이 여자는 뭐지?

1분 만에 평생 들을 폭언의 10배치를 수령 당한 피에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다짐했다.


'.. 나쁜 기사님.... 앞으로 드레싱 할 때 두고 봐.... 아프게 할 거야..'




.


작가의말

앞으로 평일에만 연재합니다.

저도 생활이 있어야할 거 같아요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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