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적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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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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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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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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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095

.




DUMMY

세경이는 튼튼했다.

기골 장대한 아기.

크루나의 아기 신체발달 표를 보고 대조해 보니 크루나 기준으로도 상위 1% 안에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 키 큰 거야 상관없지만 얼굴은 제발...'


내 딸이라서 그런지 죽을 거처럼 예쁘긴 한데,

보고 있자면 그 고기만두 같은 볼따구에 입술을 파묻고 하악거리고 싶은데,

이 와중에도 '객관적으로' 예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아기 때는 원래 미모를 파악하기 어렵지 않은가.


객관을 알기에 왕궁 사람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세나 휘비는 말할 것도 없고,

시녀들을 포함해 왕궁 여자들은 세경이 앞에서 모두가 눈이 하트로 변하니까.


내 딸이 '객관적으로' 미인이었으면 좋겠다.

부디 세나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


바란다고 되는 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여하튼,

아무리 튼튼하고 장대하다 한들 백일도 안 된 아기를 데리고 여행 갈 수는 없었다.




"오빠. 마음은 알겠지만... 세나 언니가 세경이 놓고 가는 거 서운해할 거야. 하다못해 일주일이라도 있다가 가는 게 어때요?'


어이구 이년아,

신이 난 채 가방 싸면서 할 소리냐.

뭐, 가방도 직접 싸는 것조차 아니지만.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며칠간 여행 다녀오기로 했다.

세경이는 엄마에게서 며칠 떨어져 있어야겠지만 어차피 평소에도 젖은 유모가 줄 때가 더 많다.

세나에게 남은 작은 부채감은 천천히 갚아 나가면 된다.

지금은 나를 추스르는 게 먼저일 거 같았다.


여행 장소는 꿈과 낭만이 가득한,

...서주성.


지프 통째로 텔레포트 시키면 된다.

행성간 워프와 텔레포트는 모두 중력에 관여하는 것이기에 큰 차이는 없다.

텔레포트의 경우 워프보다 에너지가 3분의 1 정도밖에 안 들며,

또한 가보지 않은 곳도 시선이 닿으면 갈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내 경우엔 '즉각적인' 텔레포트가 안 되는 단점 대신 톤 단위의 무게를 함께 옮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주 성에서 인근을 돌아다니며 잠깐 바람만 쐬다 올 생각이다.




"분명, 여행인 겁니까? 작전 아니고 여행 맞습니까?"


"그래. 여행. 하지만 '위험지역' 이잖아? 게다가 오붓한 가족여행에 너네 데려가는 이유 알겠지? 알아서 처신 해."


"그야 뭐..그러실 거면 특전수 전원 부르시면 어떻습니까? 싫어할 대원들은 없을 겁니다."


"이번엔 그냥 가자. 조용히 다녀오고 싶다."


"석돌이라도 데려가시면 어떻습니까? 걔가 은근히 잘 삐집니다."


"그 새낀 잘생겨서 안 돼. 내 마누라들이랑 눈 맞으면 피곤해."


실없는 농담에 세현이가 웃었다.


"그런 이유라면 저야말로 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지랄하네. 새끼가 주제를 몰라. 넌 내 선에서 정리되지, 새끼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세현이는 흔남과 훈남의 중간 정도.

아마 크루나 기준으로도 밉상은 아닐 거다.


키가 165로 좀 작은 편이지만, 하프 크루나인 특유의 귀엽고 선이 가는 느낌이어서 누님들에게 인기 있을 타입이다.

말하는 거나 태도도 나쁘지 않고.








서주 성내가 아닌 동쪽 30킬로미터 지점에 텔레포트 했다.




"와아- !!"


세나가 높은 하늘을 보며 소리 질렀다.

그녀의 가는 머리칼이 바람이 일렁였고,

하얀 치아가 반짝였다.


"서방님 ! 정말 이국적인 풍광입니다 !! 저 진한 토양도 ! 저 나무들은 대체 ..!!"


그러고 보면 서주성과 케른은 직선거리로 1만 2천 킬로미터.

서울에서 유럽 도시들까지의 거리도 1만 킬로미터를 넘지 않는다.

위도는 별 차이 안 나지만, 행성 반대편이나 마찬가지인 이곳 풍경은 케른이나 타하 인근과는 많이 달랐다.


나나 특전수는 이곳에서 몇 년을 싸워왔으니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세나 휘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주성 애들이 보면 귀찮게 할 거다. 서주성을 빙 돌아 서쪽으로 가자."


"넵 !! 1호 차! 시속 30킬로 항속 기동하겠습니다 !"


분명히 여행이라 말했는데도 제유는 작전 중인 것처럼 대답했다.

왜인지 왕비들에게 쫄아 있는 느낌.

아마도 휘비 때문이겠지.

어젯밤부터 휘비를 계속 곁눈질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제유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며 '평평한 땅' 만을 밟으며 달렸다.

그래서인지 세나 휘비 모두 멀미하지 않은 채 부드러운 바람을 만끽하며 세 시간이나 평원을 달릴 수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ATV에 휘비를 태우고 젠사 왕궁으로 가던 때.


휘비는 시속 20킬로도 버티지 못하고선 멀미했었지.

얼굴이 하얘진 주제에 괜찮다고 버티던 오기 있는 기집애였다.

알고 보니 아루인 치고는 꽤 큰 편이었던 그때의 휘비.

당시만 해도 집사가 이렇게나 장난 아닌 위치인지는 몰랐었지.



세나 휘비에 시녀 헤렌까지 태우고 타하 투어를 간 적도 있었다.

바이크 적재함에 거지새끼들처럼 쭈그리고 앉아 담요를 덮었던 여자들.

누가 보면 시리아 난민인 줄..

그러고 보면 생긴 것도 시리아 여자들과 비슷한 거 같고.


그때 타하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세나의 표정이 생생하다.

'그립고도 분한 느낌입니다..' 라고 말했었지.


나는,

우리는 모든 땅을 수복하는 중이다.


이미 서대륙 대부분 루아드는 우리를 적대하지 않으며,

란쥬까지는 물론이고 서주 성까지도 안정적인 보급로가 닦여 건설과 개척에 박차가 가해지는 중이다.


이제 세나의 마음 한켠에 '그립고도 분한' 마음은 없을 거다.

그러한 생각에 세나를 힐끗 쳐다봤을 때,

역시나 바로 눈이 마주쳤다.

세나는 세경이와 있을 때 빼고는 거의 100%의 확률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다.




"이렇게나 광대한 대륙이 서방님의 것입니다."


" ... "


"이토록 장대한 세계가 오직 서방님의 것입니다. 한 분 뿐이신 나의 주인님. 이 세계의 주인님. 서방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진심을 가득 담아 경탄하듯, 연극하듯 대사 치는 세나의 말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보다는 이쯤에서 운을 띄워야 할 거 같았다.


"알잖아. 세나야. 난 통치할 생각 없다는 거."


"..설령 서방님이 통치하지 않으신다 해도, 지배하지 않으신다 해도, 서대륙과 케른이 서방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 ... "




세나 휘비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스물여덟 청년 시절에 아루에 왔고,

그사이 대소 수백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싱그럽던 집사들은 원숙한 왕비가 되었고,

풋내나던 평기사들은 찌르르한 기세를 뿜어내는 수석 기사가 됐다.

그리고 나는 한국 나이로 서른다섯.

피로감에 절은 아저씨가 됐다.



더는 피 흘리고 싶지 않고, 더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명예욕. 충분하고 넘친다.

정복욕. 무얼 더 정복하라는 말인지.

권력욕. 지금도 내 말 한마디에 모두가 떤다.

더 그러고 싶지 않다.


이제는 조용히 초야에 묻혀 아름다운 아내들과 사랑스러운 딸을 지키며 늙고 싶다.

세나 휘비라면 기꺼이 케른 왕궁을 나와 나를 따를 거다.


휘비의 경우 '나 아니면 안 돼' 병이 조금 있는 타입이라서 케른의 뒷수습을 불안해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와 떨어지는 그녀를 상상할 수는 없다.




세나에게 던진 말은, 사실 세현이와 제유를 위해 던진 말이었다.


너희들도 선택해야 해.

그대로 위를 향해 나아간다면 그러한 기백을 칭찬할 것이고,

이대로 내 곁에 남는다면 그러한 의리를 칭찬할 거다.

다 큰 놈들이니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겠지.




조용해진 지프.

운전하는 세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수석의 제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딸칵,

스위치가 눌리며 쿵자라작짝, 사랑의 밧데리가 흘렀다.


.. 제유는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었나.








어두워지기 전에 차를 세웠다.

정비하고, 적외선 센서 설치하고, 드론 정찰하고...

여행이라지만, 이래서야 작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휘비는 왕궁에서 연습했었는지 드론을 제법 잘 다뤘다.

어떤 상황에서건 도움이 되는 여자다.


세나는 트레일러 내부를 정돈하고 요리 준비를 했다.

세나 역시 노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왕비들이 허드렛일하는 모습에 세현이 제유가 기겁했지만,


"귀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다들 할 일 해."


송곳처럼 찌르는 휘비의 말에 둘은 아무 소리 못 하고 쫓겨났다.


조금 웃음이 났다.

휘비는 예전에 헤렌이 제유처럼 굴었을 때는 나를 구박하며 헤렌 편을 들어주지 않았나.

입장 차이라는 걸 늘 생각하는 여자다.







세나는 부대찌개를 준비했다.

크루나표 햄과 소시지, 포크 빈, 라면 사리에 아루표 고추장과 대파가 들어갔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렇게나 갓 지은 밥맛을 내는 즉석식품이라니요 !"


세나는 햇반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왕궁에선 햇반 먹을 일 없었겠지.


"크루나인은 정말 대식가인 모양입니다. 이렇게나 양이 많은 데 일인 분이라니..."


아니, 햇반 하나 먹고 배부를 크루나인이 어디 있겠냐.

크루나 남자들은 햇반 용량에 매우 불만이 많다고.

난 마음 먹으면 다섯 개라도 먹을 수 있어.

제유만 해도 두 개는 먹을걸.


야간 불침번을 서야 하니 술 마시면 안 되지만,

그래도 맥주 두 병을 나눠 마시며 기분만 냈다.

세현이 제유만 해도 맥주 한두 잔으로 얼굴 발개질 애들은 아니고.







그날 밤,

한결 분위기가 풀린 저녁 시간이 지나고 경철과 휘비는 먼저 자리에 들었다.


"세현님, 제유님은 어찌하실 건가요?"


세나는 모닥불에 둘러앉은 둘을 보며 자분자분 물었다.


"황비님, 저는 폐하의 호위 기사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세현의 대답에 세나는 조용히 고개 끄덕였다.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더 높은 성취를 이룰 자격이 있는 분이세요. 세현 님은."


"황비님, 폐하의 곁이 가장 높이 성취한 자리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제유님은,"


"넵!! 황비님 !"


"제유 님도 폐하의 곁에 계실 건가요?"


"어... 저... 저는, 저, 저는... 어..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황비님, 저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 폐하의 호위를 할 수 있습니다 !! 여태 했었습니다 !!"


세나는 조용히 웃었다.


".폐하의 곁을 지키는 두 기사가 당신 들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아닙니다. 황비님 ! 저는 그러한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한..."


"어어..."


버벅대는 둘을 바라보던 세나는 다시 웃었다.

방긋한 웃음이 아니었다.

세현이 가여워서 방긋 웃을 수 없었다.







'배신은 우정의 양념이다.'


서대륙에서 발견된 일본어였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는 이 낙서에서 추측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1. 이 새끼는 현대에 넘어 온 놈이다.

위 문장은 1960년대 일본에서 유명했던 말이니까.

문장 자체는 '마모되어 가는 감정이야말로 성숙의 다른 의미다.'

정도의 뜻이고, 그 나름의 관점으로 이해할 법하다.

문제는 당시 그 말을 한 새끼가 자위대 부활을 외치며 질질 쳐 울고선 애인이자 부하였던 놈에게 참수를 요청했던, 어설픈 칼질로 목이 여러 차례 찍혀가며 자결 당했던, 희대의 또라이 새끼라는 거.

놈의 말을 인용할 정도라면...


2. 이 낙서를 한 새끼의 지적, 정신적 수준은 높지 않다.

'배신' 같은 쉬운 한자조차 히라가나로 쓴 것도 그렇고,

그마저 틀린 철자가 보였다.

그런데도 필체는 한껏 멋을 부렸다.

매우 유치한 정신체계를 가진 놈 같다.

낙서 당시 중딩이었을 수도 있다.




'별... 병신 같은..'


세나가 번역해준 문장을 듣는 순간 황당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딴 새끼가 두억시니와 빠가사리에 오더를 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외계에서 워프시키는 걸 수도 있다?




어지간하면,

잠수를 탈 때 타더라도 이 새끼는 잡고 싶다.

하지만 서대륙은 넓어도 너무 넓다.

인공위성도 없는 이곳에서 지프와 바이크 몇 대에 의지해 놈을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숨으려고 작정한 놈이라면 더욱.


두억시니의 개체 수를 생각해보면,

놈은 두억시니를 '만들어' 내던가 '워프' 시키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워프도 비현실적이지만 만들어낸다는 건 더욱 그렇다.

두억시니급 생체 병기를 만들어낼 정도라면 그 거지 같은 집에서 살지 않았겠지.


놈이 어디에선가 빠가사리와 두억시니를 워프시키는 게 맞다면,

'고질량의 생명체는 워프시키기 어렵다.'

혹은 '두억시니급 생명체는 애초에 거의 없다.'


..라는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놈은 내 존재를 파악한 이후에도 두억시니 개체 수를 거의, 혹은 전혀 늘리지 못했으니까.


또한 놈이 크루나의 현대 문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로도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놈은 크루나에 지극히 적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거나,

크루나에 워프할 수 없거나.


또 만약,

놈이 크루나에 워프할 수 없다면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다.


... 놈은 크루나에 가 본 적 없으며, 크루나에 가 본 적 있는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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