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견훤, 고려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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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해달
작품등록일 :
2020.01.1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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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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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할 것 같습니다

DUMMY

“...덧없고, 덧없는 인생이었구나...”


쌕쌕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는 노인의 눈에는 짙은 회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젊었을 적에는 세상이 좁다 하고 사방팔방 거침없이 질주했었건만, 이제는 모든 기력을 잃은 노인이 된 안타까움, 자신을 배신해 적에게 의탁해야 했던 초라한 말년을 만든 자식들에 대한 분노, 무엇보다 그런 상황을 만들었던 자신의 어리석음.


이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생기를 잃어가는 주름진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히도록 만들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노영웅의 그것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충복들의 눈가를 붉게 만들기에도 충분한 것이었다.


“폐하...”


목이 멘 신하들의 입술에서는 그저 ‘폐하’라는 말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랴.


주군과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그들의 머릿속에도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할 뿐이었으니.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그대들까지 힘들게 만들었음이다. 이미 늦었으나 생의 마지막 가는 길에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구나...”


다시 한번 거친 기침 소리가 노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여태껏 셀 수 없을 만큼 들어왔던 소리였지만,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모든 것을 쥐어짜 낸 듯한 소리라고나 할까? 이제 최후가 다다랐음을 직감한 사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주체할 수 없는 눈물만 뿌려대고 있을 뿐이다.


“내가 검이를 조금만 더 믿어 주었더라면... 아니, 아버님께 조금만 더 고개를 숙였더라면...”


두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소리를 연신 내뱉으면서도 희미하게 중얼거리던 노인의 눈이 한순간에 부릅떠졌다. 주마등. 여느 때보다 강한 눈빛으로 천정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자신의 인생이 빠른 속도로 되감겼다.


총애하던 아들을 죽이고 금산사로 자신을 유폐하던 장남의 모습. 지금은 자신이 몸을 의탁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적 수괴를 턱밑까지 추격하던 과거.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던 왕성을 불태우고 그 왕의 목을 베던 자신. 요충지를 급습당하고 그 화를 주체할 길이 없어 분노하던 그때.


그리고 집을 떠나던 자신의 모습에 걱정을 숨기지 못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동시에 눈앞이 점점 어두컴컴하게 변해갔다.


몸이 무거워지며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죽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순간이 자신에게도 찾아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노인의 입가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자포자기인지 안도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70년이라는 긴 평생 한 번도 지어보지 않았던 것임은 분명했다.


“폐하!”


이내 좁은 방안이 사내들의 눈물 섞인 절규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경쾌한 목탁 소리와 염불을 외는 소리가 온 절간을 휘감아 갔다.


견훤. 백제를 건국함으로 후삼국 시대를 열고, 자신의 손으로 백제를 멸망시켜 시대의 종막을 고한 노영웅의 마지막이었다.


=====


“끄어어!”


웅장한 관악기의 소리와 차분한 해설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마지막 역사극으로 불리며 200회가 넘어가는 대작 드라마를 기어코 완주한 주인공은 깍지낀 손으로 기지개를 켰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은 어느덧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물론 오전이 아닌 밤 10시다. 아침을 빵으로 때우면서 시작한 드라마 시청은 10시간 넘게 진행되고 나서야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가 있었다.


동시에 1달 가까이 반복된 주말이 끝나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물론 평일에도 드라마 시청에 2시간씩은 꼬박꼬박 시간을 꼬라박았고. 그렇지 않았다면 1달 안에 ‘왕건’을 완주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다.


어떤 이가 본다면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하기도 했겠지만, 취미에 쓸데 있고 없고가 뭐 중요할까?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라고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말하기도 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굳어있던 몸을 풀어낸 세훤은 하품을 하느라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손으로 비벼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랜 시간 모니터만 들여다보느라 밥때를 놓친 위장은 자신을 가득 채우라고 계속 비명을 질러댔다.


녹색 체육복을 입고 서서히 빠지기 시작한 머리에 생긴 까치집을 긁어대는 남자의 이름은 견세훤. 이제 막 40대가 될락 말락 하는 지잡대 출신의 중소기업 사원. 평균 이하의 빠듯한 급여로는 자신 한 몸만 겨우 건사하는지라 결혼은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포기한 평범한 대한민국 아저씨.


그나마 다행이라면 돌아가신 부모님으로부터 20평이 안 되는 좁고 오래된 아파트나마 물려받아 주거 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것? 다만 반대급부로 재산세 및 각종 잡세를 내야 해서 가기 싫은 직장을 울며 겨자 먹기로 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은 덤이다.


물론 몇십만 원, 심하면 백만 원에 넘어가는 월세를 내며 평생 남의 집을 전전하는 그것보다야 훨씬 나았겠지만 말이다.


업무 관련을 빼면 인간관계는 없고, 게을러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전형적인 방구석 폐인인 그의 취미는 당연히 집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장난감 수집, 웹서핑, 게임하기, 장르 소설 읽기 등등.


얼마 전부터는 인터넷에서 대역물을 읽는데 꽂혀있었다. 고려 시대 회귀물을 읽다 역으로 타고 타고 올라간 그 끝은 후삼국. 아쉽게도 그 시대를 다룬 대역물이 없어서 드라마 ‘왕건’에 꽂힌 게 지지난달 말이었다.


“그나저나 영웅은 영웅이었네.”


내친김에 자신이 보던 드라마의 숨겨진 주인공, 견훤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까지 보기 시작한 세훤이 불어터진 라면으로 배를 채워가며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견훤의 후손, 견훤의 후손 노래를 부를 때는 오히려 뭐 자랑거리냐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뭐, 지금도 딱히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거의 모든 국민이 성씨와 본관을 가진 시대. 왕실과 고관대작의 후손들만 존재하는 이 시기에 후삼국 시기의 망국에 불과한 왕족의 후손이라는 게 딱히 자랑거리가 되지는 못한다.


간혹가다 정말 나이 많은 노인들이 하릴없이 자신의 시조를 자랑하고, 가문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꼴같잖다고 생각하던 것이 바로 세훤이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요? 아니, 그전에 정말 그분들의 후손이 맞기는 합니까? 5,000만이 전부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이라는데, 족보 위조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런 노인들의 논쟁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도 아니고, 입 밖으로 내뱉어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테니 한 번도 말해본 적은 없지만 그게 세훤의 생각이었고, 아마도 대다수 사람의 생각일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당사자들 대부분 자신은 거기서 예외라고 생각했고. 세훤 역시 얼마 전부터는 그런 모순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뭐, 대한민국에 고작 1,000명 밖에 없는 성씨니까 딱히 거짓말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


나이가 들면 남자도 감성적으로 변한다는데 그 영향이 아닐까 싶어 피식거리기는 했지만, 예전보다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재미있게 봤고, 마흔이 다 되어 다시 정주행하게 된 드라마의 영향이 컸다. 어릴 적에는 제목이자 주인공인 왕건을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드라마의 주인공은 그 대척점에 서 있던 남자 중에 상남자 견훤이었다.


물론 드라마라서 허구와 미화가 듬뿍 담겨있었겠지만, 그걸 차치하고라도 혹시나 해서 찾아본 실제 역사에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이미 영웅이라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인생 그 자체가 드라마다.


사서에 이름을 남긴 사람치고 그렇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냐 싶지만, 그것이 자신의 선조, 더해서 위조확률이 지극히 낮은 가계라면 국뽕, 아니 조상뽕을 들이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근데 왜 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대역물은 없지? 일생으로 보나 업적으로 보나 아쉬움으로 보나 충분히 쓸만한데...”


충분하다고는 못하지만, 탄생, 업적과 말년 같은 기본적인 기록은 남아 있고, 자세하지는 않으니 오히려 상상력을 발휘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그를 주인공으로 한 대체역사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모든 대역물을 본 것도 아니니, 제대로 찾아본다면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세훤의 기준으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굳이 구석구석 찾아볼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정도? 넷은 광대하고, 대역물은 차고 넘쳤다.


“에라, 알게 뭐냐. 내일은 일찍 출근해야 하니까 잠이나 자야겠다.”


우물거리던 마지막 라면 가락을 목구멍으로 삼키고는 대충 주변을 정리하며, 혼자서 떠들고 있던 모니터의 전원마저 내렸다. 그렇게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간 세훤은 모로 누워 태블릿을 켠다.


약간의 기다림 후 들어간 꺼라위키는 누워서 읽으면 잠이 그렇게 잘 올 수가 없는, 최고의 수면제다. 오늘은 드라마 완주기념으로 검색창에 후삼국을 입력한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견훤 항목에 이르러서는, 5분이 채 되지 않아 어두운 배경의 글씨를 읽어가던 세훤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한다. 이윽고 드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진 세훤의 얼굴을 비추던 태블릿 화면의 밝기가 설정해둔 시간에 따라 점점 어둡게 줄어들었다.




「견훤. 통일신라 시대의 장수이자 후백제의 건국자. 생몰 연도 867년~936년. 사벌주(현재 상주)의 호족이었던 아자개의 장남으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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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현웅전투 +4 20.12.07 1,412 48 12쪽
60 현웅전투 +7 20.12.04 1,584 48 12쪽
59 상대의 예상은 항상 틀려야지요 +7 20.12.03 1,680 48 12쪽
58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5 20.12.01 1,772 45 12쪽
57 어쨌든 청해진은 재건하고 봅니다 +7 20.11.30 1,730 51 13쪽
56 송년회 중입니다 +4 20.11.27 1,878 50 12쪽
55 송년회 중입니다 +5 20.11.26 1,893 5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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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지금 신라는 +7 20.11.23 2,121 51 12쪽
52 지금 신라는 +5 20.11.20 2,225 50 12쪽
51 지금 신라는 +8 20.11.19 2,279 58 12쪽
50 해적 넘어 왜구네요 +6 20.11.18 2,156 47 12쪽
49 해적 넘어 왜구네요 +6 20.11.17 2,246 49 12쪽
48 동남해의 패자覇者 +5 20.11.16 2,433 52 12쪽
47 동남해의 패자覇者 +4 20.10.30 2,846 69 12쪽
46 동남해의 패자覇者 +2 20.10.29 2,903 63 12쪽
45 동남해의 패자覇者 +5 20.10.28 3,121 64 12쪽
44 무슨 일에든 돈이 필요합니다 +7 20.10.27 2,914 65 11쪽
43 무슨 일에든 돈이 필요합니다 +4 20.10.26 3,091 68 12쪽
42 호족들을 어찌 할까요 +5 20.10.23 3,217 6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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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알아서 싸워 주세요 +7 20.10.21 3,382 72 11쪽
39 기반을 다져야 할 때지요 +3 20.10.20 3,575 8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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