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견훤, 고려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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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해달
작품등록일 :
2020.01.1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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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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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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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감사합니다

DUMMY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며 고민하고 있을 무렵, 다시 한번 견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피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태수가 견훤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태수님.”


“어, 그래. 오랜만이로군.”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다 기다리다 못한 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지헌이 결국 사달을 벌였다지?”


“예. 하지만 금방 진압이 되었으니,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으실 것입니다.”


“내 그 사람이 결국 일을 벌일 줄 알았다니까. 나야 워낙 힘이 없으니 그자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는 없었지만, 견훤 자네는 다르지 않은가? 결국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날뛴 것이지.”


초조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답이었다. 견훤이 딱히 질책한 것도 아닌데, 제 발이 저린 태수가 미리 숙이고 들어갔다.


진골이면 뭐하고, 태수면 뭐하겠는가. 왕경은 멀리 떨어져 있고, 승평군의 무력을 손에 쥔 견훤은 바로 앞에 있으니 말이다.


업무건 뭐건 호족들에게 다 떠넘긴 채, 신분을 앞세워 제 배만 채우는 태수였지만, 자신의 안위가 걸려있다면 누구에게,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눈앞에 선 젊은 장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견훤은 금세 그 속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렇지만 태수가 그런 사람인 덕분에 어렵게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인가?”


“지역의 유지라는 자가 감히 왕경에서 내려보낸 장수의 목숨을 사사로이 거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국법에 따라 처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소관은 군문에 관한 일만 다루고 있을 뿐이니, 이에 대한 것은 당연히 태수님께 여쭤야지요.”


평소와 다름없이 공손한 태도였지만, 태수 역시 금방 견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게 처결을 맡기는 것도 아니고, 물어본단다. 이건 앞으로 지가 마음대로 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고작해야 4두품 위사에 불과한 주제에 감히 나를···.’


그렇지만 생각만 그렇게 할 뿐,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승평의 대호족들을 실력으로 몰아낸 자다.


자신이 이곳에서 그에게 앞서는 것은 신분과 관직뿐이다. 평소라면 어느 정도 먹혀들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허울 좋은 장식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난 몇 해 동안 서라벌 밖을 돌면서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이 있지 않은가?


‘쉽게 생각하자. 명목상으론 휘하에 있던 놈이라고는 하나 어차피 저대로 따로 놀던 놈이 아닌가? 결국엔 호족이 다른 호족으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다. 또 내가 군사들을 움직인다고 해봐야 내 말을 따를 놈들이 몇이나 있을까? 내가 이곳에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고, 재물이나 잘 챙겨 서라벌로 돌아가면 그만이지.’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하지만 내가 공무에 바빠 그렇게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구만. 그건 견훤 자네가 알아서 하도록 하게나.”


태수의 입에서 원하던 대답이 흘러나오자, 능환과 박영규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태수는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다는 사실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태수님, 소관은 이견훤 장군 휘하에서 낭관을 맡은 능환이라 하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명령이 아니라면 감히 말을 섞어보지도 못할 자가 나서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거기다 위사에 불과한 견훤을 가리켜 감히 장군이라고 한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 같은 태도에 순간 울컥했지만, 겨우겨우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태수였다. 그리고 낭관의 말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에는 견훤의 입을 대신하는 것일 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잖아도 대사들로 공사다망하신 태수님인데, 이번 소동으로 생긴 소사들까지 챙기실 여유는 없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니 겸사겸사 호족들이 대리하던 잡무 또한 저희가 대신하는 것이 어떤가 합니다.”


자신의 추측이 여지없이 맞아떨어지자 잠깐 고민하던 태수였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고 나름 체면까지 세워주는데, 이 상황에서 거부해봤자 견훤에게 자신을 칠 빌미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나. 아무래도 호족들보다 같은 중앙의 관리가 믿을만하지.”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숨길 수가 없었는데, 그 기색을 알아차린 박영규가 한발 나서며 태수 앞에 섰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들이 불법으로 축재한 재물들을 압류하게 되었습니다.”


심드렁해하던 태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개중에 이미 원주인이 죽거나, 다른 이유로 원주인을 찾을 수 없는 재물이 상당했습니다. 이를 어찌할까 고민하던 차에 위사 견훤에게서 그렇다면 관의 창고를 채우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해서 태수님께 이를 여쭙고자 합니다.”


말이 끝나자 태수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해졌다. 말이 관의 창고를 채우는 것이지 결국엔 자신에게 넘기겠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 아닌가.


견훤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견훤은 한껏 미소를 띠면서 그 생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박영규에게서 정리된 물목을 전달받아 확인한 태수는 좋아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난 두 해 동안 이곳 호족들에서 받았던 성의를 다 합친 것을 훌쩍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압류재산 중 십 분의 일이 될까 말까 한 양이었지만, 그것까지는 알 리 없는 태수는 그저 두 눈만 휘둥그레질 뿐이었다.


한참을 그러다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애써 표정을 관리하는 태수였다.


“흐, 흐흠! 나라를 걱정하는 자네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잘 알겠네. 원래라면 사사로이 재물을 받는 것은 거절해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근자에 들어 워낙 관의 사정이 좋지 않으니 이번만은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겠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 태수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그럴 것까지야. 그리고 이위사에게는 내 따로 위임장을 써줄 테니, 군무뿐 아니라 승평군의 모든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도록 하게나.”


당장 수중에 들어온 재물과 앞으로 들어올 재물을 가늠해본 태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견훤에게 모든 실권을 넘겼다.


‘결국 저놈이 원하는 것은 이것이겠지. 그러니 이만큼의 재물을 내게 넘긴 것이고. 어차피 나는 조만간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이 뒤에 오는 놈들이야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고, 여기 있는 동안 내 안전만 보장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그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시간을 들여 실권을 장악하려던 견훤들은 너무 쉽게 원하던 것을 얻게 되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데? 뭔가 함정이라도 파고 있나? 이건 나중에 두 사람과 상의를 해봐야겠군.’


“그럼 소관은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게. 그리고 언제 한번 술자리나 같이하세.”


견훤과 그 일행이 문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태수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걱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장 급한 불은 껐으나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군. 언제 저놈들의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구만. 형님에게 연통을 넣어 빨리 서라벌로 불러달라고 해야겠다. 또, 재물들은 어떻게 옮길지 그것도 생각해 놓아야겠고. 괜히 저놈들에게 맞서봤자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어.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야지.”


=====


그날 저녁. 박지명의 저택에서는 작은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지헌을 몰아낸 것에 대한 자축과 살아남은 호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견훤을 비롯한 주최자들은 연회장에 잠깐 얼굴만 비추고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따로 자리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태수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지난 2년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태수가 일을 저지를 공산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재물을 밝히나 어리석은 자는 아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안위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어떻게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박지명의 말에 박영규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라며 동의했다. 견훤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니, 견훤 역시 수긍할 수밖에는 없었다. 능환은 자신 역시 견훤과 같은 외지인이고, 태수를 본적이 손에 꼽아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으니, 두 사람의 의견을 따르겠고마 한 상태였다.


“혹시 모르니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마시오.”


이런 상황에서 견훤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그때 능환이 누가 들을세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장군의 몸을 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만 집중하여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박지명과 박영규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였다. 애초에 견훤과 함께하기로 한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처음 만났을 때, 견훤이 예지몽 운운하며 속내를 언뜻 내비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정확한 내용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된 기반을 손에 넣은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했다.


동석한 애술과 숭겸 역시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견훤을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견훤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게 달아올랐다.


아마 저들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말을 뱉어내려니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허세에 가득한 남자가 술김에나 뱉어낼 만한 내용을, 맨정신에 진지한 표정으로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만 할 일, 견훤은 속으로는 두 눈을 딱 감고, 겉으로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신라의 천년 사직은 그 수명을 다했습니다.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고, 호족들이 난립하는 시대지요. 하지만 서라벌은 이미 혼란을 다스릴 힘을 잃었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발톱을 숨겼던 야심가들이 저마다의 기치를 들고 일어설 테지요. 오래전 한漢나라의 한 장수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사내로 태어났다면 7척 칼을 들고 천자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나는 이 난세를 평정하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7척의 칼을 든 사내가 아니라, 계단 위에서 그 사내를 맞이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작가의말

- 첫 등장시 한자 표기가 없는 인명은 가상인물입니다.

- 댓글을 가끔 확인합니다. 의견 있으신 분들은 그때그때 쪽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오늘 댓글을 쭉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많이 고민되기 시작했습니다.

댓글에 상처 받았다는 게 아니라, 재미가 없다고 하시니 말이죠.

맞춤법 틀리는 거, 유치한 표현이나 문장은 어떻게든 고칠 여지가 있는데...

재미가 없는 건 진짜 문젠데, 이걸 어쩌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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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현웅전투 +4 20.12.07 1,412 48 12쪽
60 현웅전투 +7 20.12.04 1,584 48 12쪽
59 상대의 예상은 항상 틀려야지요 +7 20.12.03 1,680 48 12쪽
58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5 20.12.01 1,773 45 12쪽
57 어쨌든 청해진은 재건하고 봅니다 +7 20.11.30 1,730 51 13쪽
56 송년회 중입니다 +4 20.11.27 1,878 50 12쪽
55 송년회 중입니다 +5 20.11.26 1,893 5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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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지금 신라는 +7 20.11.23 2,121 51 12쪽
52 지금 신라는 +5 20.11.20 2,225 50 12쪽
51 지금 신라는 +8 20.11.19 2,279 58 12쪽
50 해적 넘어 왜구네요 +6 20.11.18 2,156 47 12쪽
49 해적 넘어 왜구네요 +6 20.11.17 2,246 49 12쪽
48 동남해의 패자覇者 +5 20.11.16 2,433 52 12쪽
47 동남해의 패자覇者 +4 20.10.30 2,846 69 12쪽
46 동남해의 패자覇者 +2 20.10.29 2,903 63 12쪽
45 동남해의 패자覇者 +5 20.10.28 3,121 64 12쪽
44 무슨 일에든 돈이 필요합니다 +7 20.10.27 2,914 65 11쪽
43 무슨 일에든 돈이 필요합니다 +4 20.10.26 3,091 68 12쪽
42 호족들을 어찌 할까요 +5 20.10.23 3,217 67 11쪽
» 허수아비 감사합니다 +10 20.10.22 3,255 80 12쪽
40 알아서 싸워 주세요 +7 20.10.21 3,382 72 11쪽
39 기반을 다져야 할 때지요 +3 20.10.20 3,575 8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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