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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본
작품등록일 :
2020.01.20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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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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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9. 그리움의 망령-가을에 찾아온 캐럴(3)

DUMMY

“어서 오세요!”

아침과 점심의 문턱, 로제는 그 애매한 시간대에 엔트의 문을 열었다. 그만큼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이었다.


“혹시 어제 봤던 경찰분이세요?”

루나의 물음에 로제는 긍정의 끄덕임을 보였다.


“반가워요, 어서 들어오세요.”

“제가 식사하려고 온 건 아니라서요.”

“그럼 무슨 일로···”

“학생과···”

루나를 바라본 로제의 시선은 설거지를 마친 강혁에게로 향했다.


“강혁 씨요.”

“저랑 우리 자기요?”

루나의 시선 역시 강혁에게로 향했다. 깨끗하게 손을 씻은 강혁은 자신을 향한 두 여인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일 때문에 여길 오게 됐어요.”

“아, 네.”

경찰의 방문을 어느 정도 예상한 루나 덕분에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강혁은 문 앞에 눈치껏 재료 준비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같이 마실 차를 가져왔다.


“괜찮아 보이네요?”

“저야 뭐, 괜찮죠.”

루나의 시선은 로제에게로 향했다. 어딘가 힘겨워 보이는 모습에 그녀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경찰 언니는 괜찮으세요?”

“네? 아, 저야 뭐···”

물론 괜찮지 않았다. 그녀가 처한 상황은 근본적으로 괜찮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죠. 성함이 루나 씨?”

“보름이라고 합니다. 문보름. 루나라고 해도 괜찮아요.”

“네, 루나 씨. 루나 씨한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가요?”

루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가짜 해방기의 기억을 잃지는 않았나요?”

“가짜 해방기요?”

루나는 방으로 돌아가 가짜 해방기를 가져왔다.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금이 갔기에 멀쩡하게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잃을 게 있나요?”

루나의 의문, 그것은 강혁도 마찬가지였다. 두 연인의 시선에 로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이 간 정도로는 기억을 잃지 않는 건가?’

어쩌면 다행이었다. 응급실에 마주쳤던 준수를 비롯한 학생들은 가짜 해방기의 모든 기억을 잃었다. 그 때문에 확신할 무언가를 얻을 수 없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이지만 희망이 보였다.


“그럼 이 가짜 해방기는 누구한테 받았나요?”

“친구한테요.”

“혹시 어제 그 악마로 변했던 그 친구?”

“아, 그 새끼는 친구도 아녜요.”

루나는 정색하며 손을 저었다.


“그 새끼는 우리 자기의 인생을 망치려고 했던 진짜 죽일 놈이에요.”

“이, 인생을 망치려고?”

로제는 강혁을 바라보았다. 강혁은 해탈한 것처럼 옅은 미소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우리 자기는 절 구하려다 격투가의 길을 포기했어요.”

“그거 어디서 듣던 이야기인데?”

로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그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뉴스에 나왔었죠?”

“그, 그렇죠.”

시선을 돌린 강혁. 로제는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고 헛기침했다.



“뭐, 어쨌든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 응급실에 있다는데, 같이 갈까요?”

“응급실이요?”

로제는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뇨. 그게···”

응급실에 있다는 말은 결국 기억을 잃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작게나마 확인했던 희망은 다시 어둠 속에 빠져버렸다.


“경찰 언니···”

루나는 그녀를 걱정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응급실에 가야 소용없거든요.”

“이유가 뭡니까?”

강혁이 입을 열었다. 로제는 그와 루나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강혁 씨와 시영이, 소인이랑 이터널이 같이 괴인을 쓰러뜨렸잖아요?”

“그렇죠.”

강혁은 잊을 수 없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제는 그렇게 쓰러진 아이들이 모두 기억을 잃었어요.”

“기억이라니, 그게 무슨···”

일순간 당황한 강혁은 몸을 움찔거렸다.


“강혁 씨가 잘못한 것도 아니에요. 가짜 해방기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었거든요.”

“정말이에요?”

루나는 금이 간 가짜 해방기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 저는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때를 떠올리자 루나는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당시 그녀는 하진의 무리와 어울리는 등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시행했고, 자신만 강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리고 토끼 괴인으로 변한 사실로 자칫하면 강혁과 싸울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도달하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루나 씨도 다 기억하지는···”

“기억해요···”

소녀의 부끄러운 눈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막상 강혁은 그녀의 볼이 새빨갛게 된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의문만을 표했다.


“얼마나 기억하시죠?”

“제가 아는 한 전부?”

“대체 얼마나 아는지···”

어둠 속에서 미묘한 빛이 새어 나왔다. 로제는 그 빛을 향해 이미 손을 뻗어버렸다.


“그, 부끄러워서 그러는데··· 자기는 나가줄래?”

“나?”

의외의 지적에 강혁은 자신을 가리켰다.


“으, 응. 경찰 언니랑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

“그래, 알았어.”

강혁은 그렇게 방으로 올라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루나는 약 2분 정도 입을 다물었다.


“가짜 해방기를 만졌을 때는 아무 느낌도 없었어요.”

“그, 그렇군요.”

약 2분의 시간 동안 차를 마시던 로제는 갑작스러운 발언에 몸을 움찔거렸다.


“스크롤 배틀이라고 아세요?”

“예, 그거 요즘 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 아닌가요?”

“맞아요. 가짜 해방기는 그 스크롤 배틀을 더 잘 즐길 수 있게 만든 물건이랬어요.”

“누가요?”

“친구들이 그랬거든요.”

“아.”

정황상 루나의 정보는 친구들에게서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들이 응급실에 있다면 사실 확인은 할 수 없다.


“그 애들도 다른 애들한테 받았거든요. 가장 처음 받은 사람이···”

루나는 생각에 잠겼다.


“준수? 그런 사람이었나?”

“준수라면···”

로제는 응급실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 하진이라는 녀석의 선배일 거예요. 아마, 그 준수라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받았다고 했을 거예요.”

“하필이면···”

로제는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에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이야기를 꺼내야 달라지는 건 없다. 그나마 루나가 기억을 잃지 않았기에 이렇게라도 알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뭐, 기억은 해도 이런 게 전부라서 도움이 될까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이런 거라면 굳이 강혁 씨를 보낼 이유가 없지 않나요?”

“저, 그게···”

루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엔트라는 공간 속에 자신과 로제만 있음을 여러 번 확인하고는 조용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가짜 해방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건, 우리 자기가 절 위해서 무형이라는 걸 배우려고 했을 때였어요.”

“무형?”

로제로서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무술? 그런 거라는데, 그때가 토요일 새벽이었을 거예요.”

“어제네요?”

“네.”

루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저 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 자기를 보고 강해져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사실 그 전부터 생각은 했었는데, 그 일이 본격적으로 가짜 해방기를 사용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요. 그때 제가 가짜 해방기를 들고 있었던 게 기억나요.”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지금은 안 그러는데···”

루나는 금이 간 가짜 해방기를 잡았다.


“무언가 이게 진짜 힘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괴인으로 변한 건 자각했나요?”

“자각이라기보단, 마치 자연스러웠어요. 제가 괴인으로 변한 게.”

“그렇군요.”

로제는 루나의 증언에 가짜 해방기 무서움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러고선 자신의 해방기를 꺼냈다. 공교롭게도 가짜 해방기와 같은 느낌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 해방기가 힘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로 부끄러울 일은 없잖아요?”

“여러 가지로 창피한 생각도 했고···”

루나는 고개를 숙였다.


“원래 저라면 절대 안 했을 행동도 하니까, 괜히 부끄러워요.”

“제 생각에는 강혁 씨를 적대한 그런 행동 같은데···”

“네, 그게 제일 심해요.”

루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뭐, 일단 알겠습니다.”

로제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조용한 엔트에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들리자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죠?”

“음성 녹음이에요. 여기 오기 전부터 틀었었는데, 이야기는 다 하셨잖아요?”

“네, 이런 이야기밖에 없어요.”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아, 네. 자기야! 끝났어!”

루나의 부름에 즉시 내려온 강혁. 그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나요?”

“네, 뭐.”

로제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경찰 언니, 우리가 도와드릴게요.”

“예? 하지만 두 분은 장사를···”

“괴인 사건은 저도 책임이 있어요.”

“그런가요?”

로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가 너무 힘들어해서 도와주고 싶기도 해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뭐, 어려울 때는 서로 돕는 게 맞는 것 같군요.”

강혁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루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찰이 도움만 받아서···”

“뭘 그렇게 생각해요? 경찰이기 이전에 언니도 다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그, 그런가?”

뺨을 긁적이는 로제. 이들의 도움 역시 고맙기 그지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미 유마와 고속의 협력을 받았다. 어려운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해성을 비롯한 탐정 사무소 식구들에게도 많이 도움을 받았었다. 정작 로제의 초자연 사건부의 힘만으로 해결된 일은 많이 없었다.


더 나아가 로제는 항상 시영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런 생각은 항상 도움만 받는 경찰인 자신이 올바른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자신의 무능함을 생각하는 사소한 계기가 되었다.


“아는 게 생기면 경찰서로 찾아갈게요.”

“그, 그래요. 고마워요.”

“생각해보니 전화번호 알려주실래요?”

“예? 하지만···”

“됐으니까 줘봐요.”

로제의 스마트폰을 강제로 손에 넣은 루나. 그녀는 즉시 자기 번호를 입력하여 전화를 걸었다.


“뭐 찾으면 연락드릴게요. 너무 힘들어만 하지 마시고, 힘들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루나는 금이 간 가짜 해방기를 건넸다. 지금 그녀가 줄 수 있는 최선에 로제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았다.


“아, 네.”

로제는 적극적인 루나의 모습에 조금이지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경찰서로 돌아온 로제는 지금까지 알게 되었던 정보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무언가가 나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을 때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유마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는 건 행운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경찰이라는 직업상 오히려 입장이 역전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부끄러워만 할 수는 없었다. 부상당한 동료들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괴인 사건에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로제는 지그시 경찰 서장을 노려보았다. 서장은 하품을 길게 쉬었고, 로제는 그의 모습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독특한 억양의 소녀가 경찰서를 찾아온 건 그때였다. 일에 집중하던 로제는 워낙 특이한 발성에 잠깐 그녀를 바라보았고, 외국인인 걸 확인하자마자 다시 일에 집중했다.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사람이요?”

소녀에게 다가간 경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인가요? 가족인가요?”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예?”

모호한 대답에 경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제를 제외한 모든 경찰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집중되었고, 누구 하나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로제!”

그때 서장이 로제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예?”

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맡아라.”

“뭘요?”

로제는 반사적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나도 몰라.”

곧장 시선을 돌린 서장. 일에 집중했기에 아무것도 듣지 못한 로제는 경찰서를 찾은 외국인 소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녀는 눈치껏 로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으로 다른 경찰들은 각자 자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죠?”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예?”

공교롭게도 로제는 지금 바빴다. 더군다나 팀원 모두의 일을 혼자 도맡은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소녀의 부탁은 들어주기 어려웠다.


“제게 가장 소중한 그녀를 찾고 싶습니다.”

“아, 아니···”

로제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며 서장을 노려보았다. 서장은 의도적으로 뒤통수만을 보이며 딴청을 부렸다.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랬음을 눈치챘고, 적절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캐럴을 바라보았다.


“저, 학생. 지금은···”

“지금은?”

어딘가 간절한 소녀의 눈빛. 로제는 차마 그녀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이, 이름부터 알아야겠죠?”

“아, 그렇습니다. 저는, 캐럴 크리스마스라고 합니다.”

“캐럴 크리스마스요?”

특이한 이름이었다. 외국인임을 감안해도 명확한 의미를 갖는 캐럴의 이름은 그녀의 억양과 더불어 로제에게 독특한 인상을 남겼다.


가을에 찾아온 캐럴, 로제는 묘한 느낌에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말 따스한 겨울이 생각나는 듯한 이국적인 외모였다.


“그렇습니다.”

“반가워요, 캐럴.”

“저도 반갑습니다. 경찰, 님.”

서툴렀지만 그래도 우리말을 괜찮게 구사하고 있었다. 로제는 그녀를 캐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라고 했는데, 누구를 찾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이럴 시간은 없었지만, 마음 약한 로제는 이대로 그녀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나래라고 합니다. 박나래.”

“예?”

그 순간 시작된 눈 깜빡임. 로제는 자신이 눈을 세차게 깜빡거린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아챌 수 있었다.


“나래라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아, 네.”

힘겹게나마 평정심을 유지하는 로제.


“혹시 그 나래라는 사람은 캐럴의 친구인가요?”

“아닙니다. 저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습니다. 경찰, 님과 비슷할 겁니다.”

“저와 비슷한?”

로제는 조용히 긴장을 삼켰다.


“혹시 그 나래라는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고 있나요?”

“주로 하얀 옷을 입었습니다. 다양한 색의 옷도 입었지만, 저는 나래의 하얀 원피스와 하얀 페도라가 가장 좋았습니다.”

“그, 그렇군요.”

로제는 다시 한 번 긴장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캐럴은 나래라는 사람과 어떤 관계죠?”

“나래는 제게 살아갈 의미입니다.”

“살아갈 의미요?”

“그렇습니다. 제가 혜성에 유학을 오고, 많이 힘들었을 때 나래를 만나고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캐럴이 입을 열 때마다 로제의 목이 말라갔다. 그만큼 표정도 심각해졌기에 고개를 살짝 내리고 시선을 그녀와 마주치지 않았다.


“그럼 나래를 마지막으로 본지는 얼마나 됐죠?”

“올해 1월? 그때 만나고 8개월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럴 거예요. 아무래도···”

로제는 지그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래를 찾는 이유는 뭐죠?”

“이것들을 얻은 뒤로 갑자기 나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캐럴의 작은 손가방에서는 가짜 해방기가 나왔다. 로제는 그것의 존재에 혼란스러웠고, 뒤이어 캐럴은 조금 특이한 형태의 스크롤을 꺼냈다.


모양과 크기는 보통 스크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어딘지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쉽게 읽을 수도 없는, 이른바 뜻을 파악하기 힘든 스크롤이었다.


“얼마 전 이것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그리고 나래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6개월 정도 연락되지 않았을 거예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럴 것 같았어요.”

로제는 코를 훌쩍거렸다. 캐럴은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캐럴, 지금 한 말 진짜죠?”

“그렇습니다. 저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 가짜 해방기와 스크롤을 제게 맡길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캐럴의 말에 로제는 그것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래를 찾아준다면 얼마든지 맡길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순간 로제가 뻗은 손이 움찔거리며 멈춰버렸다. 하지만 이내 그것들을 잡았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캐럴 크리스마스.”

“고맙습니다.”

캐럴은 희망찬 눈길로 로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제는 그 희망찬 눈길을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캐럴은 어디서 왔죠?”

“저는 네메시스 사립 여학원에서 왔습니다.”

“유학생인 건 대충 알고 있어요. 이 나라에 오기 전에 어디서 왔냐고 묻는 거예요.”

“아, 저는 이 나라 말로 ‘행복한 눈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아하, 거긴 들어본 적 있어요. 눈이 많이 내리지만, 항상 행복이 가득한 포근한 나라.”

“맞습니다! 언젠가 나래에게 제 고향을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그, 그래요?”

로제는 아예 사색이 되었다. 나래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마음이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네메시스? 그런 학교가 있어요?”

“그렇습니다. 북쪽 산에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학교입니다.”

“그렇군요.”

정황상 캐럴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가짜 해방기의 일도 여러 가지로 의문이었고, 그녀가 가져온 특이한 스크롤은 새로운 궁금증을 제시했다.


더군다나 나래라는 이름에 로제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믿지도, 믿지 않기도 어려웠다. 여러 가지로 애매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최대한 노력할게요.”

“감사합니다.”

캐럴은 로제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로제는 캐럴에게 더 정중한 경례를 보냈다.



“있긴 있네···”

캐럴이 나가자마자 로제는 그녀가 말한 학교를 검색했다. 그곳은 엄연히 정식으로 있는 학교였다. 여러 가지 소문과 아름다운 외형을 자랑하는 교내의 모습에 로제는 반사적으로 그곳을 보고 ‘마법 학교’라고 읊조렸다.


“주인님의 학교예요.”

“주인님?”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미호. 로제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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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Episode 14. 깨어난 용-정의의 이름으로(2) 21.06.22 30 0 12쪽
252 Episode 14. 깨어난 용-정의의 이름으로(1) 21.06.21 25 0 16쪽
251 Episode 14. 깨어난 용-미르(3) 21.06.19 21 0 14쪽
250 Episode 14. 깨어난 용-미르(2) 21.06.18 20 0 13쪽
249 Episode 14. 깨어난 용-미르(1) 21.06.17 19 0 15쪽
248 Episode 13. 굶주린 이리-아랑(3) 21.06.13 19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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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Episode 13. 굶주린 이리-아랑(1) 21.06.11 2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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