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ition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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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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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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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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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추적(Pursuit) (5-1)

DUMMY

-5-


상어와 이성진 대리의 전투 다음날, 1988년 1월 11일 월요일 9시 13분.

강원도 양양시 인근.


파도 소리가 연하게 들리는 작은 방이었다.


두꺼운 커튼이 쳐진 창 너머로는 해가 떴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모자란 빛은 형광등이 대신 채웠다. 빛바랜 벽지는 미장이 덜 된 시멘트의 거친 표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


그 방 안에서 상어는 작전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앉은뱅이 밥상을 중심으로 방바닥에는 그간 모아온 정보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손으로 쓴 것, 어디선가 출력한 것, 신문 등등... 각종 자료가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신문 중에는 최근 강원도 고성의 해안가에서 있었던 폭발 사건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상어와 사냥꾼, 지수와의 교전으로 숲이 하나 날아갔으니 신문에 실리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기사는 의혹 제기 차원에서 끝났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아마도 군부의 은폐나 안기부의 보도통제가 들어간 것 같았다.


상어는 도수 없는 안경을 쓰고 종이에다가 무언가를 계속 썼다. 그러다 내용이 막힌 듯, 펜을 놓고 고민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참 뭔가를 생각하던 상어가 문을 향했다. 낮은 천정에 문은 그보다 더 낮아 허리를 굽혀야만 통과가 가능할 정도였다. 구부정한 자세로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와 낮은 햇빛이 방안에 들이찼다. 상어는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며 허리를 굽혀 밖으로 나왔다.


그는 모래가 흘러 거칠거칠한 마루에 앉았다. 정면에는 차가운 겨울바다가 백사장 너머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일어났드래요?”


이때 초로의 노인이 그를 보고 말을 걸었다. 상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군요.”

“허허...”


짧게 웃은 노인이 느릿한 걸음으로 집 뒤쪽을 향했다. 상어는 지금 소설가로 행세하고 있었다. 취재차 강원도를 둘러보면서 숙박한다는 설정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와 안경, 만년필, 원고지 등은 그것을 위한 장치였다. 더구나 취재라는 이유로 방안에 흩어놓은 자료들의 변명도 가능했다.


사실 예지망을 망가뜨린 이상 장소에 대한 부담은 별로 없었다. 상황만 본다면 어디든 자리를 잡아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눈을 피해서 움직일 필요는 있었다. 검문은 강해져 있었고 모습을 바꾸지 않으면 돌아다니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다행히 민박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거기에 「그릇」이 있는 속초와도 가까웠다.


“......”


솔직히 계획대로 된 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불안감과는 달리 일은 착실히 진행되어갔다. 의도와는 다르게 뭔가에 끌려가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이러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특히 「9국」의 저항은 격렬했다. 마음 놓고 쳐들어갔던 고공에 볼리셔니스트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입은 부상을 기점으로 최초 계획했던 것들이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여전히 여유 만만한 그들의 자세는 초조함을 더욱 증폭시켰다. 커뮤니티를 흔들면 당연히 전력을 다해 그릇을 찾으려 들 줄 알았다. 하지만 나타난 건 단 한 명의 볼리셔니스트 뿐이었다.


“......”


하지만, 하지만 어제를 기점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찾아낸 것이다.

그것도 우연과도 같이.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고 불안하게 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릇」을.


그러나 기뻐할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것을 찾은 순간,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규모의 문제가 자신의 앞에 펼쳤음을.


그것을 찾은 순간에 받은 충격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원치 않은 진동이 거칠게 스쳐 지나갔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그때의 느낌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허리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상어는 문 바로 옆에 있던 작은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는 쓰레기통에서 까지 않은 담뱃갑을 찾아내고는 위쪽 포장을 뜯었다. 홀리듯이 샀다가 어제 버려버린 담배는 그대로 쓰레기통 안에 있었다.


그리고 역시 쓰레기통 안에서 성냥갑을 꺼내 불을 붙였다. 차가운 바람이 닿지 않도록 몸을 깊숙이 숙였다.


잠시 뒤 하얀 연기가 상어의 입에서 퍼져나갔다. 스파이 생활에 해가 되기에, 냄새가 남는다는 이유로 20년도 더 전에 끊었던 담배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피고 싶었다.


“......”


길게 뿜어져 나온 연기가 겨울바람을 타고 바스러졌다.


초조함은 여전히 가슴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어제 교전에서 입은 허벅지 쪽 상처가 욱신거렸다. 어지간한 전문 볼리셔니스트와 비슷한 의료 계열 법칙을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이었지만, 허벅지의 검상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자신이 겪어본 볼리셔니스트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 했다. 실력 좋던 볼리셔니스트들이 우글거렸던 마법사의 나무 시절을 포함해서였다.


얼마 전 제3국을 통해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안기부의 9국이, 전술기(戰術器)가 포함된 일본 측 볼리셔니스트들과 교전했고 승리했다는 내용이었다. 저 정도의 실력자들이 다수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술기...’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일본 내각정보조사실에서 전술기를 키운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 일본 측 전술기가 누구며 또 그 육성방법까지 자세히.


당연했다.


자신도 그 방법을 만드는 것에 일조했었으니까.


갑작스럽게 색을 얻은 마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비슷한 색의 시뻘건 불똥을 거칠게 손가락을 튕겨 날렸다. 그의 옆에는 어느덧 네 개가 넘는 꽁초가 자리하고 있었다. 상어는 혼미한 머리를 천천히 흔들며, 참지도 않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불행...”


언제나 입에 담고 사는 단어가 절로 새어 나왔다. 타인의 삶을 빼앗기만 하는 자신에게, 이 단어는 스스로의 삶을 정의하는 마법주문과도 같았다. 흡사 검은 심연에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한 필사의 되뇜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이 불행이라는 단어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삶에서 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


생각을 멈췄다. 그러나 멈춰있던 무언가는 어제부터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그릇이 의지를 빙글빙글 돌려 끌어당기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나선은 회전하면서 거울 위에 쌓인 먼지를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묵혔던 먼지가 날아간 거울은 지금 자신 앞에 서 있었다. 숱하게 외면해왔던 시절을 비추기 위해.


“지랄...”


욕지기를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딴 허튼 데 생각을 쏟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제 첫 번째 작전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었고 목표까지 확인한 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적절한 돌입 타이밍만이 남은 상태였다. 상대도 곧 그릇을 발견할 테고 확보를 위해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노리는 때는 상대가 그릇을 확보하고 움직이기 직전이었다. 이쪽에서 먼저 나설 수도 있었지만, 현장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섣부르게 행동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따라서 적이 속초를 벗어날 때, 최고의 한 타를 노려야만 했다.


“......”


상어는 양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짤 때가 왔다.


최선을 다해서.

지금껏 그래왔듯이.

마음 가는 대로.


* * * *


이틀 후, 1988년 1월 13일 수요일 10시 2분.

서울 모처(某處), 국가안전기획부 「제9국」 국장실.


일요일에 있었던 이성진 대리와 상어와의 교전 소식은 9국을 다시 한 번 발칵 뒤집어놓았다. 상어에게 부상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지만, 「서울상사」라는 위장기업을 발각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상어가 전화번호부든 뭐든 다른 자료를 써서 이곳을 찾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그가 지수와 같이 전사와 마법사의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지수만큼은 아니더라도 상상도 못할 변수임은 분명했다.


당장 현장지원과 볼리셔니스트의 추가 파견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상어의 부상이 확실한 상황에서 다른 북한 측 볼리셔니스트들의 예지도 없었기에,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강진 국장은 심각한 얼굴로 이성진 대리의 전화를 주의 깊게 받고 있었다. 잡음 섞인 전화는 감도가 멀었다.


[... 입니다.]

“다시 얘기해 주게.”

[금일 13시 30분 경, 속초 시내에서 그릇을 발견했습니다.]

“발견 당시 상황은?”

[직선거리 약 100m 정도에서 의지선의 회전현상과 그 중심축을 확인했습니다. 눈으로 확인 가능한 회전반경은 100m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직후 중심축이 만들어지는 집의 구성원을 확인했습니다.]

“... 누구지?”

[대략 국민학교 저학년의 여자아이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것까지는 확인했습니다.]

“확신할 수 있나?”


한강진 국장의 말에 약간의 주저함이 들어간 공백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걸 깬 이성진 대리의 대답은 의외의 확신에 차 있었다.


[네. 뭐라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오셔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확실합니다.]

“......”


전대미문의 무언가를 확인할 때, 어떻게 보면 느낌 이상으로 중요한 건 없을 것이다. 한강진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상어는?”

[교전 이후부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볼리셔니스트의 흔적도 없습니다. 접촉할까요?]

“아냐. 일단 감시를 계속해 주게. 바로 인력을 보내겠네.”

[알겠습니다.]


투둑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한강진 국장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뒤 다시 그것을 들었다. 기어 돌아가는 촤르륵 소리가 몇 번 들리고 상대가 받자, 그가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과장? 현장지원과 전원 집합시키고, 지금 국장실로 와주게.”


잠시 뒤, 정은정 과장이 부리나케 국장실로 달려왔다. 다급함이 느껴지듯이 문이 급하게 열렸다. 한강진 국장은 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얘기를 시작했다.


“방금 이성진 대리에게서 연락이 왔네. 그릇을 발견했다는군.”

“정말인가요?!”

“그런 것 같아.”


심드렁한 그의 말에 정은정 과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생각 외로 쉽게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던 이성진 대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강진 국장은 종이뭉치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작전 개시하지. 작전명은 그대로 가고... 가급적 빨리 확보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정은정 과장의 얼굴에도 긴장이 서렸다. 북한 측 볼리셔니스트에게 대응하지 않고 있는 요 며칠 동안, 9국은 그릇 확보 작전을 짜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특히 상어와 교전하고 그릇을 찾을 징후가 보이자 작전 수립은 급가속하였다.


확칭은 아니었지만 내부적으로 「명왕성Pluto」라고 불린 이 작전은, 한강진 국장을 중심으로 9국 주요 관계자 전원이 달려들어 수립 중이었다.


물론 명확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몇 가지 가정들이 어느 정도 맞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상어가 이쪽에서 그릇을 확보하는 타이밍을 기다린다는 점이었다.


발견 장소와 이성진 대리와의 교전 장소를 고려하면 상어도 그릇을 발견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부상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이유는 뻔했다. 이쪽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개요는 간단했다. 볼리셔니스트들은 교전을 억제한 채 적과의 대치 상태를 유도하고, 그 사이에 그릇과 그 가족의 동선을 고려하여 자연스럽게 속초를 이탈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민간인 구역에서 진행하는 작전인 만큼 지휘는 한강진 국장이 직접 맡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이곳 9국의 위치가 밝혀진 것이었다.


“이곳 방어는 어떻게 할까요?”

“두 명... 정도면 방어는 가능하지 않을까? 남은 가재가 넷이니, 아무리 이쪽에 많이 돌린다고 해도 둘 이상은 어려울 테니까.”


아무리 상어가 허를 찌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릇을 버리고 9국 HQ 습격에 치중할 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밤에 바로 움직이지.”

“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런 계획은, 사색이 된 민혜림 대리가 들어오면서 모두 깨지고 만다. 발소리만으로 당황함을 한껏 드러낸 그녀는 노크도 없이 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강진 국장이 놀란 얼굴을 지었다.


“민 대리?!”

“팀장님!! 가재가 네 마리 더 내려옵니다!!”

“?!”


적의 증원도 놀라운데,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거친 호흡 속에서 민혜림 대리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리고 상어입니다! 놈이 의지봉인을 풀었어요!!”

“뭐라고?!”


그녀는 뭔가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차별한 살의를 던졌습니다... 장소는 서울 한복판이고요...”

“진정하게. 다시 얘기해 줄 수 있겠나?”


한참 숨을 헐떡이던 민혜림 대리는, 가까스로 호흡을 진정시켰다.


“가재가 더 내려오고 있어요. 크기는 전의 여섯 마리 보다는 작아요. 그리고 상어는...”


여기서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도리질을 쳤다. 완전히 뭔가에 질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선전포고와도 비슷했어요. 그만한 살의는 여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에요. 대상은 일반인과 볼리셔니스트를 가리지 않고 있어요. 너무나 명확한 이미지라 해석이 필요 없을 수준이었죠. 참, 정확한 날짜와 위치도 함께 던졌어요. 내일 밤 을지로 인근이에요.”

“적이 숫자를 어떻게 나누는 거는 예지에 없었나?”

“그건... 없었어요. 하지만 나머지 가재들도 움직이는 건 분명해요. 「이동」의 예지가 느껴졌어요.”


한강진 국장은 어이없음을 넘어 실소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상어에게 끌려 다닌다는 생각에 허망할 뿐이었다. 그는 아주 길게 한숨을 뽑아내면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 4명이나 되는 예비 볼리셔니스트가 남아 있었다는 건가?”


절망이 담겨 있는 말에 정은정 과장이 말했다.


“분명 2선 병력일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투입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네. 놈은 작전을 마무리하려 하고 있어.”


말을 마친 한강진 국장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방금 자신의 말처럼, 지금 이 예지가 말하는 바는 뚜렷했다. 상어는 전력을 다해 목적하는 바를 이루겠다는 뜻이었다.


1선이든 2선이든, 볼리셔니스트가 한 명 있고 없고는 작전상의 엄청난 변화를 야기했다. 그런데 4명이라니. 이건 재앙에 가까웠다.


“상어까지 포함하면 9명이라... 이거 외통수인데.”


당황함에 잠깐 멈췄던 그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증원이 뜻하는 건 명확해. 놈은 분명히 그릇의 위치를 알고 있어. 그리고 위협하는 거지. 수적 우위를 이용해서 우리보다 먼저 그릇을 채 갈 수 있다고. 결국 우리는 최대한 빨리 그릇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겠지. 하지만 놈은 그 타이밍을 노릴 거야. 그래야만 공자(功者)로서 교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두 번째. 서울로의 예지. 이것도 명확해. 놈은 정 과장과의 승부를 원하고 있다고 보이네. 놈이 봉인을 풀고 그만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에, 다른 뜻은 없겠지. 그리고 서울 한복판으로 정한 건... 만약 정 과장이 오지 않으면 무차별 살육을 하겠다는 협박일 테고.”


여기서 한참 생각하던 한강진 국장이 말했다.


“...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요격할 수 있을까?”


정은정 과장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이동경로를 확인하기는 힘들 겁니다. 더구나 여기까지 온 이상, 차라리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음...”


한강진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시기는 지났다. 서로가 그릇의 위치를 확인했고, 확보 과정만이 남은 상태. 거기에 적의 우두머리는 시간과 위치를 지정하여 싸움을 걸어온 상황.


하지만 물밑에만 있던 상어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특히 서울에서의 싸움은 더더욱 그랬다. 마치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조바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예지망을 박살내고, 사냥꾼도 무력화 시킨데다가 병력까지 충원 되서 자신감이 생긴 건가...”


그러나 더 생각해도 답은 없었다. 확실히 정면으로 맞서는 게 더 나아 보였다. 문제는 병력의 분산과 투입 시기였다.


지정한 시각이 내일 밤인 이상 병력의 분산은 필연적이었다. 거기에 정은정 과장이 속초로 가지 못하는 건 조금 뼈아팠다. 한강진 국장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아랫입술을 적셨다.


이때였다. 갑자기 국장실 전화기의 벨이 크게 울렸다. 순간 뭔가 싸한 분위기가 국장실 안을 스쳐 갔다. 두 번의 벨소리가 지나고 한강진 국장은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서울상사입니다.”

[......]


잡음이 잔뜩 섞인, 척 들어도 먼 곳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상대는 한참을 아무런 얘기 없이 있었다. 한강진 국장은 등줄기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서울상사입니다.”

[... 이번 작전 책임자를 바꿔주시오.]

“...!!”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상어임을 직감했다. 유창한 표준어 악센트는 상대방이 북한의 요원임을 잊게 만들 정도였다.


“내가 책임자요. 말하시오.”

[모든 것이 준비된 거 같아서 연락했소. 예지가 닿았는지도 확인할 겸.]

“예지는 잘 들어왔소. 그나저나 친절하군. ...상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보이지도 않는 상대가 웃고 있음이 느껴졌다.


[잘 들어왔다니 다행이요. 아무튼, 내일 마무리 할까 하는데.]

“마무리?”

[하얀마녀에게 전해 주시오. 내일 밤 을지로라고.]

“당신까지 해서 몇 명이 오는 거요?”

[... 셋 정도면 충분할 거요. 듀얼만으로는 재미없지 않겠소.]

“...!!"

[그리고 이번에는 힘들겠고... 내 다음에 한 번 찾아뵙겠소. 그럼.]


툭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한강진 국장은 벙 찐 표정의 정은정 과장과 민혜림 대리를 향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상어야. 진짜 제대로 알고 전화했군.”

“뭐라고 하던가요?!”

“내일 마무리 하자는군.”

“네?!”


정은정 과장의 놀란 반응에, 한강진 국장이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일 밤은 세 명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것과, 듀얼을 언급한 것. 그리고 한 번 찾아오겠다는 말도 했네. 단, 이번에는 힘들고 다음에.”


당황한 건 한강진 국장뿐만이 아니었다.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끝이 다가왔고 회전(會戰)을 준비했다고 해도, 이런 접근은 지금까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도대체 왜...?’


한강진 국장은 방금의 대화를 한 글자씩 다시 떠올려보았다. 상어가 을지로에서 정은정 과장과 대결을 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해 보였다. 듀얼(Duel), 혹은 대결이라는 단어는 볼리셔니스트에게 있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조건에서 정정당당하게 행하는 승부는 볼리셔니스트 문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아무리 허를 찌르는 것에 익숙한 상어라고 해도, 스스로 듀얼을 언급한 이상 승부를 피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했다. 거기에 세 명을 언급했다는 건 승부 결과를 증언할 요건까지 갖추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힘들고 다음에 찾아 가겠다’라는 말도 머리를 흔들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HQ 습격은 하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았으니까.


게다가 예지나 전화의 타이밍도 의문이었다. 마치 이쪽에서 그릇을 찾을 때까지 기다린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처음 말한 ‘마무리’와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말이었다.


즉 그의 말을 정리하면 간단했다. 「내일 그릇 쟁탈과 듀얼을 동시에 마무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어는 그릇 확보 보다는 정은정 과장과의 대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이곳 위치를 애써 알아냈지만 습격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 거지?”

“......”


정은정 과장도 답은 없었다. 상어의 작전 목표가 흡사 그릇에서 자신에게 옮겨온 것 같았다.


“왜 지금일까... 깨놓고 대결은 그릇을 확보한 후에 해도 되지 않나?”


추가된 4명이 2선 병력이라고 가정하더라도, 9명의 숫자란 작지 않았다. 하지만 상어는 정면승부 대신 굳이 번거로운 대결을 요구했다. 게다가 이쪽이 그릇을 찾은 걸 아는 상태로.


“정면승부에 큰 메리트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아무튼, 우리 전력을 분산시키는 게 목표라고 봐야겠지. 우리는 거기에 응해줄 수밖에 없을 테고.”

“......”

“어떻게 나눠야 할까?”

“속초에는 서창민, 김휘승 대리를 데리고 가시죠.”

“서창민 대리를... 괜찮겠나?”


서창민, 이성진 대리는 전투력으로만 본다면 가장 수위에 있는 요원이었다. 정은정 과장은 그런 두 사람을 빼고 나머지 인원으로 상어를 상대하겠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상어보다는 그릇 확보가 더 중요합니다.”

“......”

“그리고 을지로에는 성필이와 찬율이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정말 괜찮나?”


한강진 국장의 말투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옅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한강진 국장은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은정 과장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릇을 부탁드립니다.”


* * * *


같은 시각, 1988년 1월 13일 수요일 10시 12분.

강원도 양양군.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항상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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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11화 : 폭풍(Storm) (3-5) 23.04.02 14 0 9쪽
237 11화 : 폭풍(Storm) (3-4) 23.03.26 14 0 11쪽
236 11화 : 폭풍(Storm) (3-3) 23.03.26 7 0 12쪽
235 11화 : 폭풍(Storm) (3-2) 23.03.19 16 0 11쪽
234 11화 : 폭풍(Storm) (3-1) 23.03.19 10 0 11쪽
233 11화 : 폭풍(Storm) (2-5) 23.03.12 13 0 12쪽
232 11화 : 폭풍(Storm) (2-4) 23.03.12 16 0 13쪽
231 11화 : 폭풍(Storm) (2-3) 22.08.27 31 0 12쪽
230 11화 : 폭풍(Storm) (2-2) 22.07.30 25 0 14쪽
229 11화 : 폭풍(Storm) (2-1) 22.07.17 24 0 16쪽
228 11화 : 폭풍(Storm) (1-3) 22.07.03 36 0 11쪽
227 11화 : 폭풍(Storm) (1-2) 22.06.26 35 0 15쪽
226 11화 : 폭풍(Storm) (1-1) 22.06.18 44 0 12쪽
225 10화 : 폭격(Bombardment) (6-5) 22.06.06 42 0 19쪽
224 10화 : 폭격(Bombardment) (6-4) 22.06.04 37 0 11쪽
223 10화 : 폭격(Bombardment) (6-3) 22.05.29 38 0 11쪽
222 10화 : 폭격(Bombardment) (6-2) 22.05.15 40 0 12쪽
221 10화 : 폭격(Bombardment) (6-1) 22.05.01 35 0 11쪽
220 10화 : 폭격(Bombardment) (5-7) 22.05.01 48 0 13쪽
219 10화 : 폭격(Bombardment) (5-6) 22.04.10 41 0 11쪽
218 10화 : 폭격(Bombardment) (5-5) 22.04.02 39 0 12쪽
217 10화 : 폭격(Bombardment) (5-4) 22.03.28 47 0 12쪽
216 10화 : 폭격(Bombardment) (5-3) 22.03.26 41 0 12쪽
215 10화 : 폭격(Bombardment) (5-2) 22.03.20 4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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