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독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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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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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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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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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3장 : 3급 용병 류 몽블랑(2)

DUMMY

<2>

아직 이른 오후.

용사는 느긋하게 도시로 향하는 오솔길을 걸었다.

멀리 광산 호수의 폐수 정화시설이 오늘도 열일하며 시민들의 지방세를 퍼먹는 모습이 보였다.

용사는 저런 게 필요 없다고 느끼지만, 똑똑한 놈들이 저게 꼭 있어야 한다고 귀찮게 하기에 ‘그래 니들이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하고 승인해줬던 기억이 있었다.

서민계급의 건강이 개판난다나. 의료복지가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제국에 환경법이 제정됐다. 용사가 무신경한 분야라서 자세히는 기억 못 하지만 핵심은 이랬다.

환경을 불필요하게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실수든 고의든 100자리 이상의 타인에게 환경오염으로 인한 심각한 상해를 입히면 걔는 피해자 숫자를 곱한 노역형을 받는다.

어쩌고 저쩌고.

예를 들어 15년 전에 몽블랑에서 규정을 무시하고 밸브를 잘못 열여 최종 215명의 중증 중금속 중독 환자를 만들어낸 광산의 이름 모를 담당자는 215년의 노역형을 선고받고 지금도 북부의 어느 작은 광산의 막장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게. 이번 르네상스 세계관이 중범죄자의 형벌에 특히 엄하다는 것이었다.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는다.

마법은 노환으로 죽어가는 노인조차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비용이 발생하지만 제국은 그정도 금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경제를 갖추었다. 양형의 단위가 생물학적 수명을 넘어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골때리는 세계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형법의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당시, 뒤가 캥기던 많은 기득권들이 서로 결탁하여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논리로 민심을 움직였다.

각지마다 앞잡이들을 파견하고 그들과 결탁한 치안청의 관리들을 조금만 움직여주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잠깐이지만 인권운동은 성공하는 듯했다. 피해자의 아픔은 온데간데없고 범죄자만 감싸는 말 같지도 않은 인권에 당시 하드모드였던 용사가 배후세력부터 싹 다 죽여버려서 그렇지.

여신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지는 부끄러운 과거.


“이런 폭거는 독재의 발판과 완벽히 같습니다.”

“알아.”

“그런데 당신은 한점도 부끄럽지 않아 보이는군요.”

“나는 절대 썩지 않을 테니까.”


수십 년 전.

용사의 기억 속에서, 전대 재상은 크게 웃었다.

그렇게 오랜 개국공신의 가문이 사라졌다.


“하하하. 어디 먼저 가서 내 지켜보리다. 당신이 언제까지 어머니 여신 아래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할 수 있을지.”

“······.”


용사는 대답 대신 스산한 칼날의 피를 한 번 털었다. 그 핏방울 속에는 그가 아끼던 부인과 금지옥엽 하던 아들딸의 피도 섞여 있을 터였다. 용사는 여전히 무심했지만.

그리고 그 앞에서 전대 재상은 곧 다가올 죽음에 체념하며 가족부터 권력까지 모든 것을 다 잃고 마지막으로 품에 남아있던 금화 하나를 보란 듯이 손에 꾹 쥐었다가 미련 없이 바닥에 놓아버리며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는 결국 허수아비 황제마저 밀어내고 전 대륙을 짓밟고 강간하게 된다는 데 이 금화 한 닢을 걸지.”


재상이 침을 퉤 뱉으며 양 팔을 벌렸다.

스산한 칼날이 자신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음에도 그는 도발이라도 하듯 용사를 응시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겉만 멀쩡할 뿐 정신은 완전히 무너진 것일지도 몰랐다.

용사는 망설임 없이 칼을 내리그었다.

예고 없이 시작된 상념이 예고 없이 끝난다.

용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늘따라 옛 친구들이 보고싶어지는 용사였다.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의 친구들이.


‘요즘 왜 이러냐. 진짜.’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달래본다.

확실히 용사는 요즘 정신이 망가지긴 했다고 느낀다.

잡생각이 시도때도 없이 떠오르고, 그걸 억제할 수가 없다. 감정의 급격한 변화에 좀처럼 따라갈 수가 없다.

아직까지는 그게 폭력성으로 표출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폭주하는 용사를 막을 사람은 이미 인간 세상에는 없는데. 그 때도 용사는 새로운 회차의 시작에서 여신의 얼굴을 부끄럼 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날씨 좋네.”


새파란 하늘.

용사는 문뜩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평범한 사람도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겠다던 허풍쟁이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였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날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갔다 싶었다.




&




나른한 저녁. 어느 떠들썩한 주점 구석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청년이 있었다. 언뜻 보면 흔한 애송이인가 싶지만 그의 외투에 붙은 낡은 용병장은 단숨에 그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렸다.

물론 현실은 애송이든 앞길 창창한 엘리트 3급 용병이든 용사의 입장에서는 도토리 키재기의 잣대에 불과했지만.

용사가 물었다.


“단장은 온다고 하디?”


지금 막 용사의 앞자리로 걸터앉던 사내가 예고도 없이 날아든 용사의 목소리에 순간 움찔하며 대답을 골랐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걔도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올 시기는 지났지.”

“······.”


별 의미 없는 한마디에 사내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가자 용사가 여전히 시선은 술잔에 둔 채 마지못해 한마디를 보탰다.


“그냥 친한 사이에 농담이니까 긴장 풀고.”


제국의 중앙 감찰단은 업무의 성격상 극도로 폐쇄적인 조직이었다. 단장은 한가한 자리도 아닐뿐더러, 일개 지부의 대원이 단장의 행방을 아는 쪽이 오히려 수상한 일일 것이다.


“짧게 해봐. 나머지는 보고서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다음 순간 떠뜰썩하던 식당의 소리가 단절되었다.

익숙한 마력의 흐름. 용사가 빙그레 웃었다.


“마법 특기였냐?”

“예. 공국 아카데미 35기입니다.”

“그 재능으로 이거 배우기 쉽지 않았을 텐데.”

“예······.”


용사는 그 담담한 대답에서 자존심보다는 현실에 대한 체념을 읽었다. 하지만 용사의 시선은 오히려 온화해져만 갔다.

노력이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럼에도 죽도록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흔치 않았다. 그리고 용사의 안목에 사내는 훌륭히 자신의 한계를 돌파한 상태였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했다면 이 경지는 꿈도 못 꾸었을 범재였으니까.

용사는 노력하는 자를 비웃지 않는다. 본인부터가 노력 없이는 도전해볼 수조차 없는 불공평한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재능이든 노력이든 시작부터 차별하지 않으며.

늘 능력만큼 대우해준다.

그것이 용사가 설계한 작금의 제국.


“흠잡을 곳 없네. 잘 배웠어.”

“감사합니다.”


용사가 만족한 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절대 쉽지 않은 마법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방첩 마법과 같아 보여도 그 안에 담긴 수식과 마나의 배열은 용사의 전생동안 거쳐간 무수한 천재들의 이해를 담고 있기에.

그 결과 마나에 대한 재능만 타고났을 뿐, 그것을 제외하면 수재조차 못 되는 재능으로도 웬만한 고위 마법사들도 쉽게 도청할 수 없는 완벽한 밀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 보고하겠습니다.”


용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 사내가 안고 있던 서류통에서 문서들을 꺼내 펼쳤다. 일목요연한 보고가 시작되었다.




&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지부의 말단 정보원이 다녀간 뒤. 용사는 홀로 남은 테이블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기억을 조금 더듬어본다.


“시작은 작은 충돌이었습니다.”

“충돌이라 함은?”

“파벌 사이의 사소한 파워 게임입니다.”


하나는 현 황제체제 이후 명문가를 중심으로 굳건하게 결성된 정통파 귀족집단. 르네상스 이후 융성한 상공업보다는 광업권 등의 영토와 관련된 이권 자체를 소유한 오랜 세력이었다.

여기에 제국의 대대적인 정치 개편으로 평민이 귀족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신흥 귀족 세력이 등장했다.

정통파 귀족들이 이권 자체를 쥐고 있다면 이들은 상업이나 공업 등의 사회를 순환하는 돈의 흐름 자체에 빨대를 꼽은 세력이었다.

그동안 워낙 정신없이 사회가 급변하기도 했고. 서로의 영역이 다르다보니 아직은 큰 충돌 없이 공존해오긴 했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제국이 과도한 이윤을 억제하는 상황에서 슬슬 하룻강아지들이 이권 자체에 눈독을 들일만한 때가 되긴 했다고 느낀다.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첫 무대가 광산이었고.”

“그렇습니다. 물론 이곳이 유일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봤자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광산을 통해 공급되는 유동성이 대도시 하나를 기름칠할 수준이라고는 해도 무려 귀족 세력이 두고 싸우기에는 격이 떨어지겠지.


“상징적인 의미였겠군.”

“그렇습니다.”


예컨대 탐색전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만큼 준비도 철저히 되어있었을 것이다.

근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용사의 생각에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몇 매수했다고 쉽게 꿀꺽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을텐데.


“결과적으로는 미수에 그쳤습니다.”

“그랬겠지.”


용사의 숙청을 피해서 살아남은 명문가의 저력은 애들 장난이 아니었다. 시작도 전에 얻어맞는 것이 당연했다.

매수된 광산의 임원과 직원들은 사고를 가장하여 곳곳에서 하나 둘 죽어나갔다. 광산 내에서의 실종은 일부에 불과했을 정도로.

결행을 앞두고 시작된 연이은 사고에 초조해진 광산의 내부자들은 독단적으로 조사단을 구성했고. 9번 램프에서 몰살당했다. 아마 용사가 봤던 것이 맞을 것이다. 명문가 급에서 믿고 보낼 최측근 기사나 마법사 정도 되면 충분히 수사를 교란할 실력이 있었다.

물론 정황증거는 남겠지만 이쪽이든 저쪽이든 고작 지방 치안청 수준의 수사팀에 그정도 압력도 넣지 못했겠는가.

승자든 패자든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는 사건이었으므로 수사가 종결되며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되는 것이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변수가 등장했다.

상념에서 깨어난 용사가 테이블 위에 처음모습 그대로 놓여있던 가죽 주머니를 힐끗 살펴보았다. 안에 들어있는 해골은 아직 용사만이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감찰단 쪽에서 이 변수를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사도 직접 광산에 들어가보고서야 겨우 의심했던 부분이었으므로 아직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쪽은 역량부족이라기보다는 아직 문제가 되는 단계가 아니어서 발각되지 않은 쪽에 가깝겠지만.


‘껄끄럽네.’


어차피 파벌 문제는 아직 용사가 걱정할 단계는 아니었다. 머리가 크면 개기고 싶은 것이 사람이라고. 용사가 직접 나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들 뼈저리게 기억하는 만큼 조만간 크게 문제되지 않을 선에서 차차 교통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이 다소 죽긴 했지만 개중에서 진짜 억울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 뻔히 봉급 주는 사람 놔두고 더 성공해보려다가 숙청당한 것을 누굴 탓할까. 자업자득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일이 껄끄러워진 것이다. 여기서 용사가 움직여버리면 한쪽을 편드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몰래 움직일 수는 없어.’


비록 용사가 위장 신분으로 몽블랑에 내려왔다고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용사의 행적을 꿰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실력행사를 해버리면 그거야말로 용사가 이번 사태에 공식적으로 개입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몰랐다.

아직은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용사는 지금의 생활이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3급 용병이라는 표면적인 신분 내에서 절차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인데... 그렇게 되면 용사가 동원할 수 있는 인재의 범위가 극단적으로 좁아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부르려고 하면 얼마든지 부를 수 있겠지만 하나같이 용 잡는 칼들을 벌레 잡는데 쓰는 것도 웃긴 일이었고.


‘하아. 어쩔 수 없나.’


결국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없으면 현지에서 조달해서 쓰는 수밖에.

이제는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막잔을 기울이는 용사였다. 매번 신세만 지는 것 같아 자꾸만 미안해진다.


[용사지만 독재합니다]

08. 3급 용병 류 몽블랑(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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