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구 산신령 도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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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20.02.0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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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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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5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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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화. 산에 산신이 없다(1)

DUMMY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관청의 보호수로 등록된 몇 백년, 혹은 천 년 이상 묵은 거목은 아니었다.

음. 그래도 가로수로 심을만한 반백 년 정도 된 은행나무 정도의 크기라고 보면 될까.


그 주변에는 어떠한 나무도 없었고, 자잘한 덤불이나 들풀만이 그것과 함께 했으며, 작은 연못이 그들의 목을 축이고 있었다. 홍싸리 씨는 저 물의 냄새를 맡고 온 것이리라.


"나무가 죽었어?"


원래는 찬란한 녹빛의 나뭇잎을 자랑하고 있을 녀석이었건만,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나무는 이미 새카만 흙빛으로 물든 채 그 몸뚱아리마저 비틀려져 있었다.

마치 무협소설에서 보던 목내이(썩지 않고 마른 상태로 오랫동안 원형으로 보존된 인간이나 동물의 시체를 일컫는 말, 미라)가 눈 앞에 있는 듯 했다.


"마른 나무를 보지 못한 건 아니지만... 이건 그래도 상태가 좀 심각한데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어."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홍싸리 씨는 살짝 침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있던 산신님은 이미 떠나고 없군 그래. 그것도 좋지 못한 방향으로 말이야."


소위 말하는 재선충 같은 병에 걸린 나무들도 이런 꼴은 아니었다. 번개를 맞아 고사한 벽조목도 이렇게 거멓지는 않다.


"이런."


나는 급히 땅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으로 쥔 흙은 바로 바스러졌다. 근처에 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습기를 전혀 머금지 못한 흙.


나는 땅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예로부터 지관들과 농부들이 행해왔던 일이니까.

겨우 외할머니가 이루신 것의 편린만을 습득한 나에게 땅을 파악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이곳, 위험해요."

"왜?"

"홍싸리 씨는 느껴지지 않으세요? 이 근방이 엄청 불안정하다는 걸요. 그, 개체 하나하나가 아니라 이 공간 전부가."


단 하나만의 존재를 위해 인위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설계된 공간이라고 하면 믿겨지겠는가?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특별유물전시라 하여 모든 스포트라이트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전시대 위에 살포시 놓여진 유물이 온데간데 없어진 상황. 허공만을 비추는 밝은 삼파등 불빛. 아무리 비싸고 좋은 것들을 썼던지 간에 전부 무용지물이 된 것이나 다름 없으리라.


지금의 상황이 그러했다. 또르르 흐르는 물소리 하며 안정을 노래하면 딱일 것만 같은 이 공간이, 산신나무의 존재가 사라진 것만으로 완전히 불안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어버렸다.


내 말을 듣고선 홍싸리 씨는 침침하게 눈을 좁혀 주변을 바라보았다. 마치 티베트 고원에 사는 한 마리의 여우라도 된 것마냥 말이다.


그러기를 십여 분. 내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는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단은 몸을 피하는 게 좋겠어, 도 서방."

"맞죠?"

"응. 조금만 기다려줘. 금방 나갈 수 있게 해줄게."


그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곤 다시 무언가를 게워내는 소리가 내 귓가에 스쳤다.

찜찜한 기분이 확 피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지. 그가 만들어내는 도깨비 구름에 다시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겨우 간신히 때에 맞췄다.


우지끈! 촤라라랑!


굳건한 나무가 넘어가고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는 열린 귓바퀴에 그대로 꽂혀 들어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눈을 감지 말 것을 그랬나 싶기도 한데, 손으로는 구름을 맞잡고 있어야 하니 귀를 막을 여력이 없었다.


오랫동안 밀봉되어 있던 자리에 우리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면서 불안정해진 것은 아닐까.


괜히 땅을 파헤쳐서 그 해의 김장을 망치게 만드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홍싸리 씨가 다시 눈을 떠도 된다고 할 때까지 불안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다시 바라 본 세상은 다행히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까 전과는 달리, 우리가 발을 디딘 곳이 정규 등산로라는 것만 빼면.

돌 계단과 나무 지지대로 이루어진 난간이 눈에 밟혔다. 근처에 쉴 수 있는 벤치도 있는 것을 보니 집에 돌아갈 걱정을 덜었다.


"벌써부터 시작이네. 어휴."


그에 반해, 홍싸리 씨의 얼굴은 근심이 서려 보였다. 무사히 빠져나간 것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결국 나는 입을 열어 궁금증을 해소할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세요?"

"나는 돌아갈 위치를 그곳으로 잡았거든. 도 서방도 알지?"


알다마다. 산신나무의 위치도 정확히 모른 채, 그저 산길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곳을 헤치고 지나가던 곳이니까.

이름만 알지, 다시 가라고 하면 못 갈 곳이었다. 어쨌든 이 분위기에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홍싸리 씨는 다행히 더는 묻지 않았다.


"주술의 위치가 비틀렸어. 단순히 입구만 뚫은 건데도 요동을 친다고?"


눈꺼풀의 살을 긁적이며 도깨비 양반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내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그를 안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로 저 양반이 반응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했을 때.


내 집이자 내 살림살이가 있는 이곳, 관악구가 위험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을 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나는 그 네덜란드의 한스가 아닌데. 비록 오해로 빚어진 결과라지만 나는 그 가공의 인물처럼 이 사태를 해결할 자신이 없다.


"쩝."


짝!


나는 손뼉을 치며 도깨비 양반의 주의를 내 쪽으로 돌렸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우리가 아니었더라도 법사님의 의뢰를 받은 누군가가 확인했을 것이다.

나조차도. 뭐, 사실 내가 무슨 큰 힘이 있겠냐만은. 어찌되었건 홍싸리 씨의 도움을 빌려 겨우 알게 된 사실. 관악산 산신의 자리가 공석이라는 것.


그것은 이 일대에 큰 파란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설마 바로 일어나겠어?


산신나무를 보호하고 있던 결계가 깨어진 지 이제 두 시간도 안 지났다.

벌써 일이 터지면 진작에 터졌어야지. 무슨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것도 고문헌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만약 진짜로 일이 터지면 난 울 거다. 엉엉 울어도 그 이유를 타박할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일단 법사님에게 상황을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혹시 또 몰라, 잘했다고 지갑을 열어줄 지도 모르고. 일단은 내 손으로는 이 흔들림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애초에 그가 먼저 나에게 의뢰를 한 것이니, 막을 방도가 있다면 그가 그 또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오늘의 운세를 확인하니까 나는 한동안 운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상아탑을 나온 신지식인이 그런 것에 맹목적이면 어쩌냐 핀잔을 주는 이도 없진 않았는데, 결국 내가 그런 것을 팔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 아이러니하다.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죠. 저녁 어떠세요?"

"오. 밥 사주는 건가?"

"가게에서 시켜먹으면 되요. 닭 피나 돼지 피 없는 거면 되죠? 그러면 백순대는 안되겠네."


요즘은 배달 어플을 이용해서 백순대를 배달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가스버너 가지고 볶아먹어도 좋은 데 말이다. 좀 꿀꿀한 기분을 풀기에 적절한 음식이었는데 아쉽다.

어쩔 수 없이 근처에서 찜닭을 포장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다행히 찜닭은 맛있었고 나는 그 배부름을 무기로 삼아 밀려오는 악몽을 누를 수 있었다. 잠은 편안했다.

적어도 그 날은 그랬지.


* * *


며칠이 지났음에도 그리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물론 오랫동안 약속의 장소로 꼽혔던 음식점이 이사를 갔다던지, 새로운 점포가 문을 열었다던지 하는 일은 이곳에선 으레 있는 일이었기에 생략을 했다.


나만 해도, 여기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천막 치고 점을 보시는 분과 말다툼이 있어서 좋게 대화로 해결하느라 애를 먹었었다.

나는 타로 점 같은 것은 볼 줄 모른다고 했더니, 그래도 그 분은 확실히 영력이 있으신 분이었는지 나를 유심히 쳐다보신 후.


"그래요. 당신의 말이니 믿어보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아시죠?"

"암요. 상도덕은 당연히 지켜야죠."


겨우 그쪽과 화해를 성공했다.


최근에 쓰고 있던 글은 많은 인기를 얻진 못했다. 그래도 꾸준하게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연재는 하고 있는 와중에, 한 독자 분이 남긴 댓글이 눈에 밟혔다.


[수수부꾸미: 와, 최근에 갤러리 돌아다니다 본거랑 글 내용이랑 비슷해서 놀랐네요. 거기서 모티브 얻어서 쓰신 건가요?]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마치 누군가의 글을 베끼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쉽게도 나는 많은 독자들이 댓글을 남겨주는 편이 아니다. 이 댓글 하나로만 가지고 어디서 그 글을 찾을 수 있을 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누구냐. 지금은 이래 보여도 끈기 하나는 남에게 칭찬받은 사람이라고.

몇 시간에 걸쳐 인터넷을 돌아다닌 끝에 확인한 글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ㅇㅇ: 야, 밤에 도림천 돌아다니지 마라 개무서움]

[내가 그래도 건강 관리 하려고 밤 되면 집 근처 산책로 돌거든? 그런데 오늘 따라 되게 다리 밑이 겁나 추운 거 있지.]

[그래서 그냥 빨리 돌자 하고 조금씩 뛰었는데 ㅅㅂ 반대편에 겁나 어두운 형체가 멀쩡히 서있는 거 봤잖아. 근데 그 사람.]

[다리가 없었어 ㅅㅂ. 개소름 보자마자 개빠르게 튐. 눈이라도 마주쳤어 봐. 나 여기에 글 못 썼을 수도 있음. 오죽하면 나 어제 잘 때 노트북에다가 십자가 띄어놓고 잠]


[ㅇㅇ: 쫄?]

[투강: 그거 내가 봐서 암 너 이제 이거 IP추적해서 너 잡으러 쫓아간다 발 닦고 기다리고 있어라]

[고사리리조또: 야 고시촌 그 정도로 망가짐? 아무튼 개소름일듯]


익명의 힘을 빌려 올린 글이라 정확한 사실은 판단되지 않는다. 일단 확실한 것은 나는 결코 저 글을 베끼지 않았다는 것 정도.

인터넷 탭을 다시 띄워 댓글을 남겨준 독자에게 답글을 달았다.


[글쓴이: 선생님께서 보신 글은 확인해봤는데, 저는 저 글에서 모티브를 얻어 차용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항상 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 이 정도면 되었겠지. 기지개를 쭉 편 후, 오늘도 아침 산책을 나갔다.

여전히 아침의 이슬은 싱그럽게 원룸 옆에 심어진 나무의 잎을 타고 흘렀고, 빠르게 골목길을 따라 지나는 차들과 버스는 그 동안 쭉 봐왔던 고시촌의 풍경과 여간 다를 바가 없었다.


"젠장."


단 하나, 검게 물든 소금병을 보기 전까지는.

검게 물든 소금병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인터넷을 켜서 오늘의 운세를 확인했다.


'한동안 고난이 좀 있을 거에요.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화이팅.'


앞으로 이곳의 운세는 더 이상 믿지 않을 거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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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17화. 오랜 기억의 꿈(2) +2 21.01.15 111 7 11쪽
117 116화. 오랜 기억의 꿈(1) +3 21.01.13 119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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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113화. 아랑(1) +3 21.01.06 128 10 12쪽
113 112화. 몽랑(3) +5 21.01.04 150 10 12쪽
112 111화. 몽랑(2) +1 21.01.01 157 12 11쪽
111 110화. 몽랑(1) +1 20.12.30 150 9 12쪽
110 109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4) +1 20.12.28 144 9 12쪽
109 108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3) +1 20.12.25 147 8 12쪽
108 107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2) +5 20.12.23 153 7 12쪽
107 106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1) +1 20.12.21 142 10 12쪽
106 105화. 다시 피어나는 산 +3 20.12.18 146 1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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