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고 천재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최발장
작품등록일 :
2020.02.15 20:35
최근연재일 :
2020.04.07 18:15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58,267
추천수 :
1,901
글자수 :
125,583

작성
20.03.21 17:40
조회
3,356
추천
103
글자
11쪽

1식 - 돌솥밥 [4]

DUMMY

4.



졸려.


졸리고, 피곤하고, 배도 고프고, 집에 가서 게임 하고 싶다.


윤가람의 심정이 그랬다.


‘뭣보다 사람이 너무 많아.’


속이 울렁거린다. 그나마 넓긴 해도 어쨌거나 한 방에 사람이, 교사들까지 합하면 서른 명씩이나 부대끼고 있으니 좀 괴로웠다.

사람이 많은 곳은 싫다. 숨이 가빠지니까.


요리가 지겨운 것도 한몫했다.


‘가람이 넌 좋겠다. 집이 <용정>이잖아. 물려받으면 그만 아냐? 최고네!’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은 말.


글쎄.


윤가람으로서는 끔찍한 말이었다.


요리가 재미없는 건 아닌데, 요리가 재미없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내가 할 일이 이미 전부 정해져 있고, 나는 거기에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드럽게 재미없어.


“드럽게 재미없어···?”


아차 싶어서 보니 하연우가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말이 새 나온 것이다. 하필 필살의 개그를 유독 무뚝뚝한 백찬우에게 시전하려던 시점에.


“아니. 연우, 너 얘기한 거 아냐.”

“······응.”

“진짜라니까···?”


다시 집중하려 노력해본다.


‘밥.’


윤가람이 눈앞의 솥을 내려다본다.


‘우리 집에 있는 것보다 구려.’


윤가람의 집에는 백년 된 솥이 있다.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 오래됐음에도 기름칠을 잘해놔서 여전히 쓸만하다. 이제 막 애기티를 벗을 때부터 그걸로 밥을 지어왔다.


재미없는 시험이다. 기본기가 있다면 얼른 증명하고 들어가라, 뭐 그런 시험.


······인 줄 알았는데.


“니 솥이 더 무겁잖아.”

“무겁다고?”

“들어봐.”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뭔 소리야. 똑같이 생겼는데.


조금 열이 올라 있는 얼굴. 어쩐지 가볍게 다독이고 있는 제스처. 적당히 이마를 깐 머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애가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대체 뭔 소리야, 저게.


그 남자애, 백찬우가 슬쩍 눈치를 본다.


‘눈 마주쳤다.’


그러나 슬쩍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피한다. 그러고는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그 옆의 우락부락한, 식자재 대신 사람을 향해 칼을 휘두를 것 같이 생긴 김동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연신 고맙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이야. 윤가람 흉내 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쉿.”

“왜.”

“대놓고 베끼려 했다 얘기할 건 또 뭐겠어.”


그 말에 김동석이 윤가람을 흘리며 미안하다는 듯 손바닥을 보인다. 사과가 아니라 위협 같았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욱 신경에 거슬리는 게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연우가 또 이상한 말장난을 치며 헤실대는 동안 슬쩍 그녀의 솥을 가져왔다.


제 솥을 들어보고, 다시 하연우의 솥을 들어본다. 천천히 그 무게를 가늠했다.


‘뭐야. 똑같은데?’


헌데 똑같다. 슬쩍 들어보니 똑같은 것 같은데.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쟤를 속인 건가?’


그러면 얼추 이해가 된다.


만약 백찬우가 김동석을 속인다면, 그는 윤가람을 따라 하지 않는 셈이 될 테니까.


똑같은 무게의, 똑같은 시간을 불린 쌀.

1미터쯤 되는 거리에 윤가람이 있다면 그녀의 타이밍을 체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멀리서 보면 알 수 없을 불 조절 역시 면밀히 관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다 문득 의아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거짓말을 하는 얼굴은 아닌데. 침 하나 안 바르고 거짓말할 것 같지도 않고.’


근거 없는 인상이 첫 번째였고.


‘저런 애를 속인다고?’


두 번째는 김동석의 용모였다. 제아무리 명문 조리고라 하여도 고등학교는 고등학교다.

당장 주먹질 한 번이면 자기를 쓰러뜨리고도 남을 저 덩치를 왜 속여? 쟤가 사실 아주 심각한 양아치면 어쩌려고?

고작 반 좀 나누는 게 고작일 임시 시험을 위해서 앙심을 품게 한다고? 정말?


윤가람이 생각하기에 두 번째 이유가 특히나 치명적이었다. 백찬우가 여리여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김동석 앞에서는 한주먹에 갈 게 뻔했다. 괜히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되는 생김새다.


말이 안 된다.


‘다시 들어보자.’


이번에는 양쪽 팔에 껴보았다. 왼쪽에 원래 솥, 오른쪽에 하연우의 솥.


······역시 모르겠다.


벽에 막히자 힌트가 하나 더 날아들었다.


“니껀 바닥이 얇아. 더 빨리 끓을 거야.”

“아. 이건 나도 대충 알겠다.”


솥의 바닥을 살살 긁고 두드린 후에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동석이 보인다.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잔소리하는 백찬우도.


그걸 따라 조용히 바닥을 긁어보았다.


‘어?’


다르다. 애매하긴 한데 다르다.

그래서 두드려봤다.


‘어???’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하연우의 솥이 더 얇다. 삼십 초는 더 빨리 끓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묘하면서 또렷한 차이였다.


바닥을 굳이 긁어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을, 미세하디 미세한 정보.


‘다시.’


윤가람은 솥을 계속 번갈아 들어보았다. 팔에 끼고, 손바닥에 올리고, 위치를 바꾸고.


긴가민가하던 마음이 확신으로 바뀌자 문득 알 것 같았다.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맞네. 내 솥이 더 무거워.”


하연우가 윤가람의 혼잣말을 듣고 돌아본다.


“뭐가 더 무거워?”

“그러니까 이 솥이······”

“철들면 당연히 무겁지~.”

“······”


이번에는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솥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이 둘의 무게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집중했을 때에야 알게 되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윤가람의 번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백찬우는 솥을 들여다보며 무언가 고민하는 중이다.


‘뭐부터 알았을까.’


순서.

순서가 신경 쓰였다.

바닥을 긁어보고 그다음에 알았다면?


윤가람이 눈을 감았다.


‘아니. 그게 더 말이 안 돼.’


무겁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의심을 품은 것이다.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이 솥들이 겉보기에 그런 것처럼 정말 같은 솥인지를 말이다.

하나가 더 무거웠으니 다른 하나를 들어보고, 두드려도 보고, 긁어도 본 거다.


이런 함정은 쉽게 쉽게, 슬렁슬렁 일하려는 사람에게 역으로 골탕을 먹이겠다는 의도다. 백찬우는 아무렇잖게 이걸 간파했다.


“가람아?”


옆에서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온 탓에 윤가람의 사색은 끝이 났다.

백찬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여태 계속 백찬우를 보고 있었다.



*



매일 기다란 국자로 국밥을 정량만 퍼담은 덕을 보는구나 싶어서 감개무량할 때였다.

뜨거운 시선이 좀 부담스럽다.


‘내가 지한테 뭐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안 오는데.

만난 지 20분이 채 됐을까 싶기도 하고.


하여튼 시험은 시작되었다.


애들이 우다다다 달려가는데, 서로 엉켜 짓밟힐까 걱정이다.


각자 지정된 그릇에 담긴 쌀을 들고 돌아왔다. 밥 짓는 과정은 따로 알려주지 않았다.


‘쌀은 200g, 물은 알아서··· 불도 알아서···’


중식 실습실이 아닌 이상 화력은 일반 가정과 비슷한 수준이다.


물도 딱히 특별한 건 없다.


육수를 내라고 했으면 낭패를 봤겠지. 어째 제대로 뽑을 자신이 없다. 24시간 내내 끓여야 하는 사골 같은 거면 또 몰라.


한참 복기하는데 어디선가 혼잣말이 들려온다.


“쌀을 씻고··· 물을 빼기를 적어도 세 번,

아예 투명한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대로 망한 거고······

잠길 정도로만 물을 맞추고.”


하연우다.

손가락을 굴러가며 하나하나 따지고 있다.

나름 인상을 쓰고 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물을 약불로 줄여서 10분에서 15분······.”


기계처럼 쌀을 씻어 물을 버리면서 중얼중얼대는 게 어지간히 집중한 모양이었다.

윤가람이 하연우에 핀잔을 주었다.


“연우야.”

“응.”

“이것도 나름 시험인데, 다 들리게 조리과정을 읊으면 안 되지 않을까.”

“아. 맞다.”


어색하게 웃기만 한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고 윤가람도 말을 더 잇지는 않았다.


솔직히 상관없는 일이다.

저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한다. 적어도 요리사를 지망한다면, 당연히.


“와. 나 잣될 뻔.”

“···몰랐냐?”

“내 전문은 고기라니까.”


옆의 이놈 정도를 빼면.


킥킥대더니 어쩐지 몽롱한 얼굴의 하연우에게 말을 건다.


“하연우 땡큐.”


대답은 한참 뒤에 돌아왔다.


“······잣.”

“뭐?”

“잣밥··· 밥에다 잣을 넣으면 맛있어. 되게 고소해. 너도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뭐라는 거야.”

“양념으로는 된장에 다시마 육수 적당히, 다진 쪽파, 다진 양파, 조청, 고춧가루 조금 넣으면 밸런스가 아주 좋겠어.”


음. 견과류 얘기하는 거겠지.

잣밥이 맛있긴 하다. 가을에 제철인 가평 잣으로 잣밥을 만들면 그것이 꽤 일품이거든.

녹듯이 부서지는 고소한 잣의 맛과 씹을수록 단 햅쌀의 조화는 정말 기가 막히지.


···아무튼, 이 간악한 시험에서 갈리는 곳은 물이 언제 끓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느냐, 그리고 바닥이 타지 않도록 불 조절을 하며 끝마칠 수 있느냐다. 윤가람도 염려 삼아 한 말일 거고.


‘막상 시험 들어가고 나니 별거 없네.’


물이 끓기 전까지는 고요했다.

원래 가게였으면 물이 끓을 때까지 뭐가 됐든 썰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접시 별로 비닐 덮어두고, 뭐 쇼를 했을 텐데.

여기서는 다르다.


밥을 안치니 그 뒤로는 고요했다.


스물다섯의 학생 중 대다수가 여유로웠다. 하긴 쟤들은 이 정도 솥밥 내지는 냄비밥을 자주는 아니어도 해봤겠지.


물이 끓기를 죽어라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는 건 나와 김동석, 그리고 하연우뿐이었다.


김동석이야 뭐 애초에 나처럼 돌솥에 밥을 해본 경험이 없는 데다 윤가람의 타이밍에 맞춘다는 필승책도 어긋났으니 당연한 일.


근데 쟤는 왜 저런대?


괜히 궁금해서 김동석에게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너 근데 쟤랑 아는 사이냐?”

“누구.”

“실실대는 애.”

“하연우?”

“어.”

“쟤네 학원 선생님이 우리 아부지임.”

“···그래?”


아니 근데 넌 왜 밥을 못 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뭐냐. 혹시 관심 있냐? 하긴 하연우가 이쁘긴 하지. 좀 사차원인 게 흠이긴 한데.”

“그런 건 아니고.”

“확실하냐?”


실실대는 것이 기분 나쁘다. 아니라니까.


김동석이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어쩐지 윤가람은 계속 나를 힐끔대고, 하연우가 여전히 솥을 죽어라 노려보던 바로 그때였다.


소리가 변했다. 가만히 가스불 타오르던 것에 단조롭지 못한 소리가 섞여들었다.


김동석은 여전히 킬킬대는 중이다.


“야.”

“그래도 하연우 되게 착··· 엉.”

“끓는다.”


그 말에 허겁지겁 김동석이 제 솥을 살피다가 나를 흘긴다.


“안 끓잖아.”


아니다. 끓기 시작했다.

이건 자신이 있다.


“소리를 들어봐.”

“음··· 끓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오. 이제 끓는다. 너 귀 좋네.”

“귀보다는 감이지.”


이어 내 것도 끓기 시작했다. 솥을 죽어라 노려보던 하연우도 반색해서 불을 줄였다.


그러고는 십 분을 더 끓인 후에 불을 껐다. 뜸을 들이는 것이다.


나는 나지막이 기도를 올렸다.


‘제발 잘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제우스, 오딘, 시바 신님, 제발 잘 되게 해주세요!


아멘.


기도를 마치고 마음가짐을 다잡는데,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읅를어랄어.”

“······?”


돌아보니 김관구쌤이 우두커니 선 채로 괴로워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계셨다.


작가의말

다준다 님, 100만원 후원 감사드립니다!

아스퍼거 님, 1,000만원 후원 감사드립니다!

아스퍼거 님, 다시 1,000만원 후원 감사드립니다!

야노노 님, 100만원 후원 감사드립니다!

우노. 님, 1,000만원 후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새우탕면에 누룽지를 말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6시쯤에 하나 더 올립니다. 근데 좀 짧아요.

사실 4화가 너무 길어져서 짜르고 좀 튀는 부분만 따로 째서 5화로 나눴었는데, 내일 짧은 거 하나만 올라오면 아무래도 읽으시기에 템포가 끊길 것 같아서...

퇴고 금방 마무리하고 올릴게요.

귀찮게 해서 죄송함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__)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조리고 천재가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안녕하세요. 최발장입니다. +10 20.04.16 599 0 -
공지 연재 중단 공지입니다. +35 20.04.10 1,574 0 -
공지 연재주기를 다시 변경합니다. +8 20.04.02 1,610 0 -
19 5식 - 달래간장국수 [3] +19 20.04.07 1,911 90 14쪽
18 5식 - 달래간장국수 [2] +16 20.04.06 1,965 81 13쪽
17 5식 - 달래간장국수 [1] +19 20.04.05 2,300 82 17쪽
16 4식 - 햄버거 [4] +22 20.04.04 2,355 90 14쪽
15 4식 - 햄버거 [3] +18 20.04.01 2,620 101 10쪽
14 4식 - 햄버거 [2] +10 20.03.31 2,714 97 15쪽
13 4식 - 햄버거 [1] +17 20.03.30 2,809 95 14쪽
12 3식 - 도미머리 매운탕 [2] +25 20.03.29 2,967 102 15쪽
11 3식 - 도미머리 매운탕 [1] +16 20.03.28 3,140 101 18쪽
10 2식 - 된장찌개 [4] +11 20.03.27 3,110 106 18쪽
9 2식 - 된장찌개 [3] +17 20.03.25 3,060 100 10쪽
8 2식 - 된장찌개 [2] +20 20.03.24 3,087 87 12쪽
7 2식 - 된장찌개 [1] +27 20.03.23 3,269 111 15쪽
6 1식 - 돌솥밥 [6] +23 20.03.22 3,329 112 18쪽
5 1식 - 돌솥밥 [5] +31 20.03.21 3,342 118 7쪽
» 1식 - 돌솥밥 [4] +17 20.03.21 3,357 103 11쪽
3 1식 - 돌솥밥 [3] +30 20.03.20 3,697 116 13쪽
2 1식 - 돌솥밥 [2] +19 20.03.20 4,121 112 13쪽
1 1식 - 돌솥밥 [1] +30 20.03.20 4,943 97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