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토리 1부 - 흑월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TheZXCV
작품등록일 :
2020.02.23 12:50
최근연재일 :
2021.02.2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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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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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사소한 일 (1)

DUMMY

"쳇, 또 줄을 서야 하는 건가."


이동현이 툴툴거리며 불만을 토로한다.

경비병의 주도하에 검문소로 들어가기 위한 행렬에 선 것까지는 좋았으나,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문제겠군.


"동현 씨, 아까까지는 신나서 <유메니티>를 향해 뛰어갔잖아요. 근데 지금은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졌어요?"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게다가 무슨 이유인지 짐을 나른 마차가 이렇게나 많잖아."

"하긴, 지금 보니 평소보다 많은 것 같기도 하네요."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의 원인은 아마 지나칠 정도로 많은 짐마차가 한꺼번에 들어온 탓이려나. 그것들을 일일이 조사하느라고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건 그렇고···.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이 나라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는 것 같네.)


거친 풍모를 자랑하는 수염 난 드워프.

자유로이 자신의 꼬리를 살랑거리는 수인.

긴 귀를 가진 아름다운 엘프까지.


분명 어제 지난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종족에 대한 차별의식은 낮은 편이라고. 오히려 대체로 잘 어울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호자인 지난의 관점. 현장의 관계자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정말로 여기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군요."

"그래, 너는 <유메니티>에 처음 왔으니까 이런 풍경에 낯설지도 모르겠네.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종족의 입국을 허가하고 있어."


일단 여기까지는 지난이 말한 것과 차이는 없나. 지금도 여러 종족이 입국 심사를 받고 있으니까.


"그런데 종족에 따라 다툼이 벌어지지는 않나요? 가치관이나 식성, 그게 아니라면 과거의 역사로 인해 사이가 안 좋은 종족이 있다던가."

"다른 종족과의 다툼이라···."


실제로 과거에도 수호자들끼리 몇 번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그 녀석들도 이러는데, <유메니티>는 과연 어떠려나.


"글쎄···. 평소에는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느끼기에는 그리 사이가 좋아보이지는 않았는데."

"꽤 날카로운 질문이네요. 우선 제도적으로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의 사고를 바꾸기는 힘들 테니까요. 표면적으로는 줄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 말은 법적으로는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계는 존재한다는 뜻이군.)


아마 지난은 제도적인 부분에서 차별의식이 낮다고 말한 거겠지. 어디가 더 정확한 표현인지는 내가 직접 봐야 알겠지만.


"과거의 일은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는 거겠지.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아픈 역사와 기억은 계승되는 거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족의 사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히려 서로의 취약한 부분을 보충해 주기도 하죠."


마지막에 두 사람은 그리 덧붙였다. 내가 편향된 사고를 갖지 않도록 미리 주의해준다는 느낌이네.

그렇게 현장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으며 그들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어느새 우리의 차례가 다가왔다.


(···드디어 입국 심사가 다가왔어.)


주변에는 창을 든 경비병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들을 살펴보고 있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된 정예병이겠지.


그 녀석이 만들어준 신분증이 있는 이상, 들킬 일은 없겠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칫하면 여기서 나의 휴가 계획이 끝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응? 혹시 긴장하고 있는 거 아냐, 라이?"

"아, 아니거든요.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뭐야, 이 남자. 이럴 때만 감이 날카롭다니까.

검문소 안에는 서류 작업 중인 여러 직원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다른 직원들과는 이질적인 한 남자가 눈에 띈다.


눈가에 보이는 다크서클과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한눈에 봐도 피곤해 보이는 흑발의 남성. 그는 주변에 있는 직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구석에 앉아있을 뿐이다.


"뭐지? 저 사람은 어쩐 일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요. 무슨 사건이라도 발생한 게 아닐까요?"


두 사람도 그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짐을 올려놓으며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인 것 같네.

그런데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건가.


(그게 아니면 피곤해 보여서 건드리지 않는 걸지도.)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우리의 시선을 눈치챈 건지 그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빨리도 돌아왔군. 아마추어치고는 잘 해내는 수준이네. 벌써부터 거물 사냥에 성공한 건가?"

"아니, 이 녀석 때문에 서둘러 돌아온 거야. 마차를 타고 왔다가 마물에게 부서졌다고 해서 데려왔지."

"흠, 그건 정말로 위험했겠군. 다행히도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아서 안심이야."


보기와는 다르게 나름 친절한 사람이구나. 정말이지, 옆에 있는 누군가가 본받아 줬으면 할 정도야.


"그건 그렇고 승호 씨···. 뭔가 저번에 봤을 때보다도 피곤해 보이는 모습인데요? 그러다가 과로로 쓰러지겠어요."

"괜찮아, 이래 봬도 나름 튼튼한 편이니까. 그저 조금 까다로운 사건이 터져서 골치 아플 뿐이지."

"당신도 매일 고생이 많네. 그래도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사이인지 두 사람도 살갑게 맞이하는군. 그러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악수를 청한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 내 이름은 김승호라고 한다. 이 나라의 경비 대장이지.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경비대에 찾아와도 좋아."

"아, 저는 라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유메니티>의 경비 대장인가. 기억해둬야지.

그것보다 은근히 권력이 있다는 점에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겉보기에는 그냥 수염 난 아저씨 같은데.


"그래서 너는 무슨 일로 이 나라에 온 거야? 위험한 숲을 통해서 올 정도로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거잖아?"

"네, 이 나라에 있는 명문 마법 학교에 입학하려고요. <그랜드 스쿨>이라는 학교인데, 혹시 아시나요?"

"-!"


내가 뱉은 그 한 마디와 동시에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마치 미리 합을 짜놓은 것처럼.


(뭐지···? 내가 무슨 실언이라도 한 건가?)


"···<그랜드 스쿨>이라고? 그 학교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대단한 녀석이군."

"뭐야, 우리에게는 그런 말 해준 적 없었잖아?! 한 마디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야···. 목적을 물어보지 않았으니까요."


반응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뭔가 있는 모양이군.

나름대로 유명한 학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라는 건가?


"뭐, 특별히 이번에는 타국에서 온 지원자도 받아들인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

"너처럼 <그랜드 스쿨>로 오기 위해 마차까지 타고 온 사례는 드물다는 거야.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굳이 타국까지 와서 이 학교에 다니려는 괴짜는 많이 없다는 거구나. 하긴, 이동하는 시간만 해도 몇 주는 될 테니까. 합격할 가능성도 그리 높지는 않을 테고.


사실 나로서도 이 학교에 무조건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지금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여기밖에 없었을 뿐. 대부분의 학교는 이미 모집 시기가 마감된 지 오래니까.


(예상보다는 일이 커지긴 했지만, 그래도 명문 학교니까 교육 환경은 괜찮겠지. 이제 남은 건 <그랜드 스쿨>에 합격하면 되는 건데···. 쉽지 않을 것 같군.)


"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어쨌든 이곳에 장기간 체류할 예정이라는 거잖아?"

"네, 만약 그 학교에 입학한다면 말이죠."

"그러면 우선 서류 작성을 먼저 해야 돼. 상인이라면 거래가 끝나자마자 돌아가겠지만, 너는 그렇지 않잖아? 어디 보자···. 분명 이 주변에 있었을 텐데···."


김승호는 종이 뭉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몇 번 뒤적이더니, 곧바로 원하던 물건을 찾았는지 내게 건넸다.


"라이, 너는 잠시 검문소에서 이 서류를 작성해줬으면 좋겠어. 필요한 절차니까 협조 부탁해."

"잠깐만요. 그렇다면 굳이 지금 작성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아직 저는 입학이 확정된 상태가 아닌데-"

"이런, 혹시 벌써부터 탈락할 생각으로 이곳에 온 거야?"


다크서클이 생긴 눈으로 씨익 웃는 김승호.

거기에 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투박한 수염이 합쳐지니, 한층 더 얄밉게 느껴진다. 눈에 뻔히 보이는 짖궃은 농담.


(하지만 그 말도 맞아. 난 탈락하기 위해 지원한 게 아니지.)


"크큭, 수염 난 아저씨한테 한 방 먹었네, 라이."

"하하하!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 만약 여기에 더 머무를 수 없다면 나중에 와서 다른 서류를 제출하면 될 뿐이니까."


그럴 바에야 지금 미리 두 개의 서류를 써놓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좋게 생각하면 각오의 차이라는 걸까.

어느덧 짐 검사가 전부 끝났는지 옆에서 직원이 따로 두 사람을 불러냈다. 아무래도 이걸로 두 사람과는 작별이겠군.


"그러면···. 슬슬 우리도 가봐야겠어. 이후에 약속이 잡혀있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동행은 여기까지다."

"미안해요, 저희도 선약이 있었거든요. 아! 만약 나중에 곤란한 일이 있다면 저희를 통해 의뢰해주세요!"

"아, 여기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곤란한 건 사실 지금 이 상황인데···. 뭐,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니 그건 어쩔 수 없나.)


비록 진정한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들에게 호감을 남겨준 것 같다. 처음 만났던 때를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


"이런, 너희들이랑 계속 얘기하니까 뒤에 있는 사람들이 서두르라고 재촉하는군. 그러면 이만 가봐라."

"그래, 김승호. 나중에 같이 한잔하자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부디 라이를 잘 보살펴주세요."


김승호가 손짓으로 두 사람을 재촉하자, 두 사람은 짐을 가지고선 <유메니티>의 인파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라이, 나중에 또 보자! 만약 우리에게 의뢰를 맡길 생각이라면 돈은 좀 두둑하게 가져오라고!"

"저희는 이 나라에 계속 있을 테니까, 곤란한 일이 있으면 [멸의 지룡] 클랜을 찾아와 주세요!"


(정말···. 끝까지 한결같은 모험가 파티야. 그런데-)


표면적으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나서야, 뒤에 있던 수많은 시선을 눈치챘다. 시간이 금이나 다름없을 상인들에게 있어 내 존재는 방해만 될 테지. 모두 죽일 듯이 쳐다보는군.


"자, 그러면 이쪽에서 서류 작성을 해줬으면 좋겠어. 너도 저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는 건 싫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이건 정말로 살았네요."


이곳으로 내려와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살의를 목격했다.



★★★



"하아···. 드디어 조사가 끝났네."


한 여성이 중얼거리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어젯밤에 있었던 사건을 조사받고 나오는 길로, 몇 시간 전만 해도 암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거기에 오전에는 길드 마스터 쪽에서 들어온 정보를 그녀의 증언과 일치시키는 과정이 추가된 덕분에, 시간은 더욱 늘어나 밤을 새우기까지 한 상황.


"그렇게 험한 꼴을 겪었는데도···. 생각보다 침착하네, 나는."


그녀, 이니는 과거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럽게 어제, 자신은 죽을 뻔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만약에 지난이 오지 않았다면, 그게 아니라 조금만 그가 늦었더라도 자신은 이 땅을 다시는 선 채로 밟지 못했겠지.


(그런 경험은 나로서는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 지금도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은 불안해져.)


그러나 생각보다 그녀의 정신은 멀쩡했다. 분명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겪었음이 분명한데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도 공포에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직장에서의 풍경을 떠올려봐도 확실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모험가는 다시 재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니까. 분명 자신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는데.


"범인이 모두 붙잡혀서 그런 걸까···. 그게 아니면-"


문득, 이니는 어제 그녀를 구해준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만큼은 솔직히 조금 멋있던 것 같기도···.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어, 어제는 그저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함 같은 거니까!)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어쨌든 지금 와서 깊이 생각해봐야 이유는 알 수 없다. 현재 그녀를 위협할 만한 요소는 모두 제거된 상태.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자.


"으음···. 모처럼 길드 마스터께서 휴일을 주셨으니, 오늘 이 하루를 즐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겠지?"


계속 이런 기분이 이어진다면 일이 잘 안 잡힐 테니까.

현재 시각은 12시가 조금 넘은 시점. 아직 활동하기에는 충분하다. 여가를 즐기기 위한 최적의 시간이겠지.


비록 조금 피곤하다고 해도, 이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마침 사고 싶은 물건도 생겼으니까.


"어제의 답례로 길드 마스터의 선물이나 사볼까? 헤헤."


.......


이니가 옆을 지나가자, 곧바로 방향을 돌려 그 뒤에 따라붙는다. 목표와의 거리를 두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다른 인파 속에 섞여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다.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세 사람이나.


"···확실하군. 목표가 맞아.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



작성한 서류를 김승호에게 넘겼다. 이런 건 늘 해왔던 일이므로 오래 걸리지 않는 작업이다.


"어디 보자, 나이는 16세···. 딱 <그랜드 스쿨>에 입학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이군. 정말 대단해."

"···그런 건가요?"

"응, 그 학교는 유명하기는 해도 역사는 그리 깊지 않아. 다른 나라에 알려진 것도 몇 년밖에 안 됐을걸?"


어디까지나 <유메니티> 내부에서만 유명했다는 건가.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분명 여러 천재를 배출한 학교라고 들었는데. 그 정도면 이미 소문이 퍼졌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 사람들은 학벌을 중요시하는 모양이니···.)


"그러나 몇 달 전에 <유메니티>는 이 학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그동안은 아는 사람만 아는 학교였지만, 입학할 사람을 모집하기 시작하면서 정보가 널리 퍼졌지."

"그렇군요. 그래서 타국에서 온 제가 <그랜드 스쿨>에 들어간다고 해서 놀랐던 거네요. 흔치 않은 사례니까."


처음에는 명문 학교에 도전한다는 사실에 놀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반대였군. 오히려 내가 특이한 사례였구나.

그나저나 다른 나라에서 온 지원자가 많이 없다는 건 다행이네. 나한테 있어서 경쟁자가 줄어든 셈이니.


"라이, 너 혹시 경쟁자가 적어져서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쉽게 입학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걸."

"···딱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전의 링링도 그렇고, 여기 인간들은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걸까. 그게 아니면 내 표정이 읽기 쉬운 건가?


"아니, 진짜로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작년보다 지원자 수는 줄었지만 전국에서 온 천재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지만 정작 오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잖아요? 합격할 확률이 낮은 도박에 걸 사람은 많이 없으니까 말이죠."

"···그게 너라는 건 알고 있는 거냐? 그 말이 맞아. 희박한 가능성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사람은 적지."


김승호는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결국은 내가 한 말이 맞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잖아. 일부러 나를 겁주려고 아까처럼 놀린 걸지도.


그런데 아까부터 종이 뭉치가 있는 곳에서 뭘 찾고 있는 거지? 설마 아직 내가 써야 하는 서류가 남은 건가.


"아, 찾았다. 몇 달 전의 신문이야. 아까 말했던 <그랜드 스쿨>의 공식적인 발표가 적혀있지. 한 번 읽어봐."

"이것은···."


그가 펼친 곳에는 수많은 문자가 빼곡히 적혀진 채로 이목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앞면을 장식하는 문구.


(작년 <그랜드 스쿨>의 지원자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내부에서의 지원자 수가 줄어들었으니, 이번에는 다른 나라까지 시야를 넓힌 거야."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몇 년 전부터 계속 감소했던 추세로,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허나, 아까도 말했듯이 희박한 가능성에 몸을 던지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그건 너도 동의했지."


(이에 따라 학교 측은 새로운 인재를 모으기 위한 하나의 제도를 추진할 것임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금 보는 것처럼 만약 그 가능성이 100%라면?"



-그것이 바로 칠각성(七角星) 제도로, 지원자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합격시키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뭐야, 이 새로운 제도는.

말 그대로 입학시험도 보지 않고 합격했다는 뜻인가?


이제야 비로소 김승호가 한 말을 이해했다. 만약 이 신문에 나온 문구가 사실이라면, 합격이 확정된 지원자가 <유메니티>까지 찾아올 이유는 충분하니까.


"물론 이 제도를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꽤 많아. 무엇보다도 그 기준이란 게 전혀 알려진 게 없거든."

"···그렇네요. 만약 여기에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해도 저희가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죠."


악용된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자연스레 끼워 넣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정책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뭐, 학교 측에서도 어떤 성과가 나올지 기대하고 있을 테고. 일단 결과가 나와봐야 알 수 있겠어.)


"그나저나···. 너는 어째서 <그랜드 스쿨>에 관한 정보는 알고 있으면서 이런 중요한 소식은 전혀 모르는 거야?"

"-!"


새로운 정보를 얻어 기뻐하던 찰나, 갑작스레 김승호가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것도 내가 답하기 곤란한 쪽으로.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다른 나라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 그렇지 않으면 네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을 테니까."

"....."


침착하자, 전혀 당황할 필요가 없어.

그저 호기심에서 비롯된 궁금증일 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답변하면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아하하···. 예전부터 그 학교에 진학할 생각으로 공부만 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이 부분은 신경 쓰지 못했네요."

"···그 정도로 <그랜드 스쿨>에 입학하고 싶었던 거야? 하긴, 이 정도의 의지가 없으면 합격하기는 힘들겠지."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넘겼나···.)


내가 대처를 잘했다는 것보다도 김승호가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잘 넘어갈 수 있었다는 느낌이네. 그에게 있어서는 이것 또한 업무의 일환이나 다름없는 셈이니.


그 증거로서 그는 지금도 서류에 집중한 채로 나와 대화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제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


"너희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 어른들보다 더 고생하는 것 같다니까? 음···. 이걸로 절차는 모두 끝났으니 이제 가봐도 돼. 짐은 저기서 가져가면 되고."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합격할게요!"


마침 타이밍 좋게 모든 절차가 완료됐다.

그에게 꾸벅 인사한 뒤, 재빨리 검문소를 나와 <유메니티>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가까스로 의심받지 않고 나왔군.


(조금 서둘러 나온 감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수상하게 보일 정도는 아니겠지? 어쨌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빨리 잘 곳부터 찾아야겠어.)


아까까지의 줄을 보아하니, 자칫하면 방이 없을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 제때 움직이지 않으면 바깥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그것만큼은 진짜 싫은데. 서둘러 움직여야겠어."


.......


"승호 선배, 그 꼬마는 갔나요?"

"응. 말투가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던데?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빼고는."


김승호는 자기 부하에게서 서류를 받으며 대답했다.

출신에 관한 얘기를 꺼냈을 때, 분명 라이는 얼버무리려는 태도를 보였다.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어서 관심 없는 척했지만.


"게다가 마차가 부서졌다고 했는데도, 그 와중에 짐은 잘 가져왔다는 게 좀 걸리네. 그런 것치곤 겁먹은 기색도 없는 것 같고. 평범한 녀석은 아닌 것 같아."

"그건 나중에 숲을 뒤져보면 알 수 있겠죠.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부서진 마차의 잔해가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김승호는 부하에게서 받은 서류를 천천히 열었다. 이 정보를 토대로 현장 상황을 파악해가야 한다.


"뭐, 그보다도 지금은 이 사건에 집중하자. 슬럼가의 뒷골목에서 길드원 두 명이 살해당하다니, 정말 끔찍하군."


그는 현장 사진을 보며 씁쓸함을 표출했다. 만약 길드 마스터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


(쯧, 끔찍이도 자기 부하를 아끼던 놈인데···. 이 소식을 듣고 괜찮을지 모르겠군.)


"게다가 그 현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정확히는 지금까지 수배 중이었던 범죄자의 시체로 추정됩니다."

"뭐···? 여기 말고도 시체가 다른 곳에 또 있다는 거야?"


그러나 피해자를 애도할 틈도 없이, 뒤이어 새로운 사진이 주어졌다. 그 참상을 보자마자 김승호는 역류하려는 무언가가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뭐야, 이건! 이번에는 토막낸 시체라고?!"

"네, 지금 막 현장을 봉쇄하기는 했으나,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는 바람에···."


몇 명의 것인지도 모를, 수많은 신체 조각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필히 목격자들도 경악했겠지.

아무것도 없어야 할 그곳에 누군가 죽어있는 것을 봤으니까. 그것도 여러 개로 나뉘어진 끔찍한 모습으로.


(과연···. 이래서 나한테까지 상황이 넘어오게 된 거였군. 절대 가볍게 끝나지 않을 사건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김승호는 의자에 걸쳐놓은 자신의 옷을 챙긴다. 곧바로 사건 현장으로 가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장으로 출동한다! 손이 비어있는 녀석은 나를 따라오도록! 경비대에서도 빨리 몇 명 불러와라!"

"예, 알겠습니다!"


자세한 상황은 직접 가봐야 확인할 수 있겠으나, 직감적으로 김승호는 알아챘다.



-아마도 이건 <유메니티> 사상 최악의 사건이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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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종장 (完) 21.02.18 151 1 26쪽
73 종장 (1) 21.01.23 159 0 25쪽
72 끝나지 않은 일 (完) 21.01.08 166 1 26쪽
71 끝나지 않은 일 (5) 20.12.22 158 0 22쪽
70 끝나지 않은 일 (4) 20.12.03 157 0 19쪽
69 끝나지 않은 일 (3) 20.11.30 158 0 20쪽
68 끝나지 않은 일 (2) 20.11.28 158 0 21쪽
67 끝나지 않은 일 (1) 20.11.27 141 0 26쪽
66 광장의 전투 (完) 20.11.17 139 0 25쪽
65 광장의 전투 (5) 20.11.10 143 0 20쪽
64 광장의 전투 (4) 20.11.03 143 0 21쪽
63 광장의 전투 (3) 20.11.01 135 0 18쪽
62 광장의 전투 (2) 20.10.27 150 0 24쪽
61 광장의 전투 (1) +2 20.10.18 165 0 26쪽
60 습격 (完) 20.10.12 135 1 19쪽
59 습격 (1) 20.10.03 126 0 20쪽
58 환영식 (完) 20.09.23 120 0 23쪽
57 환영식 (4) +1 20.09.15 130 1 17쪽
56 환영식 (3) 20.09.09 126 0 17쪽
55 환영식 (2) 20.09.05 137 0 17쪽
54 환영식 (1) 20.09.03 134 0 18쪽
53 새 감각 (完) 20.08.31 112 0 17쪽
52 새 감각 (2) 20.08.22 165 0 18쪽
51 새 감각 (1) 20.08.18 131 0 18쪽
50 외전 2. 그랜드 스쿨 (Grand School) 20.08.15 144 0 12쪽
49 식전 (式前) (完) 20.08.13 140 0 15쪽
48 식전 (式前) (3) 20.08.09 144 0 16쪽
47 식전 (式前) (2) 20.08.01 154 0 20쪽
46 식전 (式前) (1) 20.07.25 152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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