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혈홍영창嗜血紅纓槍
仟里塵沙 천리진사
먼지와 모래가 천 리를 덮고
黃土遮日 황토차일
누런 흙이 해를 가린다
뜨겁게 달궈진 여름 사막의 뿌연 모래 먼지를 헤치고 말 한 필이 나타났다. 말도 사람처럼 미추美醜의 구분이 있다면, 아마 잘생긴 거로 수위를 다퉜을 준마駿馬다.
웬만한 사람은 평생 구경조차 힘든 늠름한 자태의 말에는 빛이 바래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모를 낡고 해진 옷차림의 사내가 탔다.
등에 빈 광주리를 메고 품에 아이 하나 안은 사내는 세찬 모래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차가운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여기가 우리 목적지다."
굵은 모래알을 가볍게 날리는 강풍에도 사내의 단단한 목소리는 흩어지지 않았다. 서리가 내린 귀밑머리에서 연륜이 보이지만, 곧고 다부진 몸매는 건장한 청년 못지않다.
"숙부. 이번엔 진짜 있을까요?"
사내 품에 안긴 아이가 말을 받았다.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하얀 피부의 사내아이였다. 또박또박한 말투나 어른스러운 눈빛이 서너 살로 보이는 외형과 커다란 괴리감을 빚어냈다.
"귀한 바다 진주 세 개를 주고 얻은 정보다. 거짓이라면 돌아가서 놈들을 다 죽여야지."
"못난 조카 탓에 숙부의 살업殺業만 느는 것 같습니다."
"약한 소리 하지 마라."
숙부의 질책에 아이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봤다.
누런 모래 먼지에 가려진 해가 사막을 창백하게 비춘다. 구름이 해를 가릴 땐 시원하기라도 하지. 사막은 해가 흐릿하게 보여도 여전히 뜨겁다.
찾는 물건이 없더라도 그냥 진주만 돌려받자고 아이가 입을 떼려는 순간, 둘을 태운 말이 투레질했다.
푸르르.
"마적이 근처에 있다. 등으로 가거라."
숙부의 지시에 아이는 재빨리 어깨를 넘어 등의 광주리로 들어갔다. 대나무로 짠 광주리는 삼 년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튼튼했다.
광주리 뚜껑을 닫고 안에서 걸개까지 건 아이는 눈을 감고 나직이 무공 구결을 외웠다.
아이가 광주리에 안전히 들어간 걸 확인한 남자는 말을 몰아 마적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편.
마적 무리도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저 말을 봐. 우리 말보다 머리 두 개는 커."
마적들의 거주지는 꽤 깊은 사막에 있었다. 약탈하려면 최소 말을 두 시진 달려야 사람 사는 마을이 나온다. 가끔 사막을 가로지르는 장사치들이 있긴 하지만, 개가 빼문 혀를 거두지 않는 무더운 여름엔 보기 어렵다.
그저 찌뿌둥한 몸이나 좀 풀려고 산책 삼아 나온 마적들에겐 반가운 손님이고 뜻밖의 횡재였다.
"들뜨지 마. 혼자 사막을 다니는 놈이 평범하진 않을 거야."
두목의 말에 마적들은 입을 삐쭉이며 불만을 표했다. 숫자가 스물이 넘어서 마을 하나 차지하고 편하게 살아도 되련만, 신중한 두목은 여전히 사막을 고집했다.
목숨 귀한 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십 년 가까이 안전하게 노략질을 하다 보니 너무 조심하는 두목에게 점점 불만이 쌓였다.
"두목. 등에 광주리 있다."
두목은 짙은 모래바람을 헤치며 다가오는 상대를 자세히 가늠했다. 우람한 덩치의 말에 비해 위에 탄 사내는 평범해 보였다. 마적들과 비슷한 덩치에 옷차림도 허름.
"치자."
마적들이 두목을 재촉했다. 점점 사라지는 권위에 두목은 조만간 값진 물건을 챙겨서 야반도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들은 신중한 성격을 명분으로 삼지만, 사실은 나이를 먹으면서 약해진 두목의 무력이 진짜 이유다.
"그래. 도망 못 가게 한꺼번에 덮친다. 그리고 말은 안 다치게 조심해."
두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적들이 뛰쳐나갔다. 마주 오는 사내는 모래바람에 시야와 청력을 잃었는지 마적들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죽어!"
어느새 사내를 포위한 마적들이 동시에 손에 든 무기를 뻗었다.
슉, 휙, 털썩. 마적 하나가 피를 뿌리며 낙마했다.
빈손으로 알았는데 언제 꺼냈는지 창 한 자루가 사내 손에 들렸다. 길이가 십이 척(2m) 정도로 보이는 창엔 붉은 수술이 있었다.
수술은 창날과 창대 사이에 묶는 천으로, 창날의 피가 대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이다.
웬만큼 잘 죽이는 사람 아니면 창에 수술을 달지 않는다. 피를 잘 흡수하는 천은 귀하니까.
'설마.'
사내가 팔을 뻗음에 따라 수술이 허공에 빨간 무지개를 그린다. 마적의 몸을 헤집고 창을 거둘 때,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허공에 뻘건 무지개를 피운다.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마적 둘이 피를 쏟으며 낙마했다.
"도망쳐. 홍영창紅纓槍이다."
두목은 말머리를 돌리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부질없었다.
사내가 탄 건 평범한 말이 아닌 오행마五行馬다. 사막의 모래보다 누런 몸통에 검은 갈기, 푸른 주둥이에 하얀 꼬리, 네 발굽은 노을처럼 붉다.
그리고 덩치만 큰 게 아니라 주인과 대화하는 영물이다.
사십 년 가까이 함께 한 주인과는 마음이 통할 정도다. 오행마는 주인이 허리를 틀 필요도 없게 알아서 전후좌우로 움직였다.
사내는 수비도 잊고 그저 수십 년 수련한 관일홍貫日虹 초식을 편하게 펼치면 되었다. 창을 뻗을 때마다 마적은 목이나 이마로 피를 뿜으며 숨을 거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말머리를 돌린 마적들도 몇 걸음 못 가고 창날에 목이 헤집혔다. 숨 열 번 쉴 겨를도 안 되어 사내를 덮쳤던 마적들 모두 목숨을 잃었다.
털썩.
도망치던 마적 두목이 금세 돌아와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오행마와 홍영창의 주인이자 북부 최고수로 알려진 자단의 투창술 천리추흉仟里追兇을 벗어날 자신이 도무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행마에 탄 자단과 무릎을 꿇은 마적 두목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아이가 광주리에 숨어서 무공 구결을 외우는 소리만 가끔 세찬 모래바람을 뚫고 두 사람 귀에 전달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무공 구결을 외우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혹시 자단이 떠난 게 아닌지 요행을 바라며 고개를 든 두목은 그만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자단의 무기이자 천하 마병魔兵의 수좌首座로 유명한 홍영창이 죽은 마적의 심장에 박힌 채 피를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피를 다 마신 홍영창은 저절로 날아서 다른 마적의 심장에 날을 꽂고 창날과 수술로 피를 흡수했다.
스물이 넘은 마적의 피를 마신 홍영창이 창신을 부르르 떨며 기쁨을 표하더니 얌전하게 자단 손으로 돌아갔다. 자단은 홍영창을 다정하게 몇 번 쓸어준 다음 소매에 집어넣었다.
십이 척이나 되는 커다란 창이 소매 안으로 감쪽같이 사라지는 걸 본 두목은 놀란 나머지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너희 소굴로 안내해라."
부들거리는 몸을 겨우 주체한 두목은 말 위에 힘겹게 올라탔다. 두목의 뒤를 오행마가 따르고, 주인을 잃은 말들이 오행마 뒤를 쫓았다.
방금 스물이 넘은 목숨을 빼앗고 죽은 자들의 피마저 마병이 먹어 치웠건만, 자단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한 기색이었다.
심지어 광주리에서 고개만 내밀고 주변을 살피는 아이도 전혀 놀라거나 겁에 질린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절 대화도 없이 길만 재촉한 일행은 반 각(7분 반)도 안 되어 마적 소굴에 도착했다.
"사막이라고 모래만 있는 건 아니군요."
어느새 광주리에서 나온 아이가 감탄했다. 마적들의 소굴은 세 개의 바위산 가운데 있었다. 교묘하게 바람과 태양을 막아줘서 마적 소굴은 낮인데도 뜨겁지 않았고 바닥에도 모래가 얼마 없었다.
추운 밤을 대비하여 한쪽에 장작이 한 더미 있었다. 장작 주변엔 작은 무더기의 마른 말똥이 가득했다. 아이는 모르지만, 말똥이나 소똥은 사막에서 꽤 귀한 불쏘시개다.
자단이 소매에 손을 넣자 마적 두목은 허벅지 힘이 풀리며 말에서 떨어졌다. 몇 년을 함께 한 말이 걱정스럽게 고개를 숙여 킁킁대며 두목을 살폈다.
소매에서 홍영창 말고 부적 한 장을 꺼낸 자단은 새끼손가락을 이로 뜯어 피를 냈다. 자단의 피가 묻은 부적은 순식간에 타올라 검은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무 변화도 없어 마적 두목이 의아해할 때, 부적이 타면서 생긴 회색 연기가 사라지지 않고 동그랗게 뭉쳐서 움직였다. 자단과 아이 모두 기쁜 표정인 걸 확인한 두목은 자신들이 노략질한 물건 중 아주 귀한 게 있었음을 짐작했다.
연기가 멈춘 곳은 작은 상자 앞이었다. 어떻게 된 놈인지 틈 같은 것도 없고, 나무 주제에 단단한 돌멩이로 힘껏 내리쳐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싸게 팔기는 싫은데 비싸게 팔려면 아주 먼 곳까지 다녀와야 했다. 몇 년째 처리한다고 벼르고만 있던 애물단진데, 결국엔 자단이라는 사신을 불러 두목을 제외한 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필요한 물건 챙겨서 떠나라."
자단의 말에 두목은 손으로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덕분에 와들와들 떨리던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두목은 비싼 물건보다는 자단과 같은 대단한 사람이 거들떠보지 않을 만한 물건 위주로 챙겼다.
말 오줌보로 만든 수통 두 개를 물로 가득 채운 후 공손히 절을 올리고 떠났다. 말 등에 물건을 싣고 천천히 걷는 두목 귀로 자단의 외침이 들려왔다.
"말 한 마리 갖고 가라."
흉신악살兇神惡煞이라는 평판과 달리 무척 관대하고 친절한 자단에게 깜짝 놀랐지만, 겁 많은 마적은 감히 후의를 사양하지 못하고 가장 비루한 말 한 필을 골라 탔다.
마병 홍영창의 주인이자 북부 제일의 고수로 불리는 자단은 결코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냥 죽여도 되는 마적 두목에게 자비를 베푼 건, 이십 년 동안이나 찾아다니던 물건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오작아. 드디어 주작란朱雀卵을 손에 넣었구나."
"못난 조카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또. 너와 난 세상에 둘밖에 없는 혈육이다. 그런 내외하는 소린 하지 말아라."
"그럼 제 부모의 정체와 지금 형편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자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영민한 조카는 숙부가 기분 좋을 때를 귀신같이 눈치채고 진실을 캐묻곤 한다.
"네가 저주를 풀어 힘을 얻은 다음에 알려주마."
"제가 자신을 돌볼 정도가 되면 숙부가 목숨 걸고 복수하려는 것이지요?"
자기 속을 꿰뚫어 본 오작의 말에 자단은 말문이 막혔다. 자존심이 강한 성격 때문에 거짓말도 잘하지 못하기에 대답을 하지 않는 거로 조카의 질문을 긍정했다.
"어서 주작란이나 먹어라."
자단은 소매에서 홍영창을 꺼냈다. 홍영창은 주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예리한 창끝으로 상자에 구멍을 뚫었다.
총 여덟 개의 구멍을 뚫자 자단이 상자를 잡고 내공을 움직였다.
여덟 개 구멍을 중심으로 작은 실금이 가더니 상자가 깨졌다. 법술에 능한 자라면 해봉술解封術로 쉽게 열었겠지만, 자단은 전투와 관련된 법술만 익혔기에 힘으로 해결하는 길밖에 없었다.
깨진 상자에는 살구 크기의 작은 알이 있었다.
"어서 삼켜."
알을 껍데기째 입에 넣은 오작은 몇 번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켰다. 알의 크기가 분명히 오작의 목구멍보다 굵을 텐데, 기름 잔뜩 바른 떡을 넘기듯 쉽게 해냈다.
알을 넘긴 오작은 바닥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다리는 접지 않고 편하게 뻗었고 양팔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뿌드득. 쩌적.
자단은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조카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건 아무렇지 않지만, 조카가 아픈 건 견디기 힘들었다.
약 반 시진 지나고 고통의 소리가 멈췄다.
"끝났더냐?"
"아직 조금 남은 것 같습니다."
겨우 삼 척(50cm) 정도던 오작의 키가 육 척이 되었다. 주작란을 먹고 저주가 일부 풀리며 순식간에 자란 것이다.
갑자기 뼈가 자라면서 온몸의 살이 찢기고 아물고를 반복했다. 다른 아이는 수년에 걸쳐 이루는 성장을 반 시진도 안 되어 급작스럽게 맞이하는 바람에 오작이 느낀 극통은 웬만한 어른도 버티기 힘든 정도다.
쿨럭. 피를 크게 두 모금 토한 오작은 그제야 창백한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작이 몸을 일으키자 옷에 묻었던 피들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법보가 분명한 자색 옷은 먼지도 안 묻고 물에도 안 젖으며, 오작의 성장에 맞춰 크기가 자랐다.
자단은 그새 찾아낸 닦은 쌀과 말린 고기를 오작에게 줬다. 오작은 예의를 차리던 평소와 달리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음식을 입에 넣기 바빴다.
약 보름 치 식량을 해치우고 나서야 분주하던 손이 드디어 멈췄다.
"다음 행선지는 어딥니까?"
"청제靑帝 영위앙靈威仰을 찾아갈 거야. 다음 목표는 청룡주靑龍珠다. 동쪽을 수호하는 목신 구망句芒이 나랑 절친한 사이니까 어렵지 않을 거다."
"바로 출발할까요?"
자단은 고개를 저으며 어떻게 말할지 고민했다.
"영위앙이랑 구망이 안 친한가 보군요."
영민한 아이는 숙부가 뭘 걱정하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그래. 여기서 머물면서 멸천공을 수련한다. 몸이 성장했으니 거기에 맞춰 이미 익힌 초식들도 다듬고."
흑색과 회색이 뒤섞인 바위산. 세 바위산 사이의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공터. 약간 흐리지만, 둘이 씻고 마시기엔 넉넉한 물.
오작은 당분간 정착해야 하는 이곳이 꽤 마음에 들었다.
- 작가의말
즐겁게 읽고 추천할 수 있는 글 되도록 열심히 정성 들여 쓰겠습니다.
일이삼사오육칠팔구십백천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百千
壹貳參肆伍陸柒捌玖什佰仟
밑에 글자가 중국 금융권에서 장부나 수표 액수를 고치는 걸 막으려고 쓰는 옛 숫자입니다. 이번 이야기의 배경이 대략 5천 년 전이기에 숫자는 밑줄로 통일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저 중2병입니다. 밑에 글자가 멋져 보인다는 이유가 더 큽니다.
이 글에서 일 장은 1.7m입니다. 일 척은 17cm이고 일 촌은 17mm입니다. 역시 철저한 고증으로 설정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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