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원무극창混元無極槍
작일위적昨日爲敵
어제는 적이지만
금일위우今日爲友
오늘은 벗이니라
적호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는 절망으로 가득 찼다.
처음에 오작이 홀로 달려갈 때만 해도 요괴들의 사기는 대단했다. 상대 진영에서 칼 두 자루를 거머쥔 여자와 어마어마하게 긴 창을 든 남자가 나와 오작을 막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오작이 둘한테 묶이고 상대가 차근차근 전진하자 희망이 절망으로 변했다. 희망과 절망의 낙차落差가 너무 커서 요괴들의 기세는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뭡니까?"
오작은 얼굴을 찡그리며 설영과 무사를 쏘아봤다.
무사는 오작이 위협적인 공격을 펼칠 때만 끼어들어 수비를 도왔다. 차라리 둘이 협공했다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텐데, 무사는 철저히 수비만 했다.
싸움이 길어지며 점차 설영은 공격만 하고 무사는 수비만 하는 상황으로 흘렀다.
"저는 호위입니다. 어떤 상황이건 공주가 다치는 걸 묵과할 수 없습니다."
무사는 당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그거 말고 왜 쫓아왔냐고요."
"저는 호위입니다. 공주가 어디로 가면 저도 어디에 있습니다."
"왜 저를 따라다니는 겁니까?"
오작은 공격을 멈추지 않는 설영에게 질문했다. 살짝 상기한 얼굴로 신나게 공격하던 설영은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왜. 어째서 궁금한데?"
"왜 궁금하냐니요? 저는 급하게 사람을 찾고 있고, 그 단서를 요괴들한테서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약속을 깨고 쫓아와서 절 방해하고 있잖습니까."
"그것 때문이었어? 네가 찾는 사람은 내가 찾아줄게. 그러니 일단 대결에 집중해."
설영은 타고난 재능으로 객관적으로 자신보다 강한 자들을 수없이 이겼다. 법력이 더 많거나 경지가 더 높거나 힘이 더 세거나, 혹은 셋 다인 자들도 이겼다.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을 펼칠 수 있는 훌륭한 균형 능력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적인 판단력 덕분이다.
그런데 오작과 펼친 대결에서 처음으로 판단이 빗나갔다. 두 번째로 펼친 대결에서 자신의 판단력이 왜 빗나갔는지 감이 잡히고 있어 신났기에, 오작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대결을 이어가려 했다.
"더는 손속에 사정을 못 두겠습니다."
오작의 기세가 변했다. 단단히 뭉친 것도 아니고 부드럽게 흩어진 것도 아닌, 종잡기 어려운 형태가 되었다.
오작의 빛살 같은 찌르기에 무사는 창을 뻗어 오작의 눈을 노렸다. 처음엔 그래도 무기를 부딪쳐 수비를 도왔는데, 대결이 길어지며 무기를 막을 엄두가 안 나서 오작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오작의 몸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무사는 창을 잡은 손에서 저도 모르게 힘을 뺐다. 오작은 자신의 존재감을 움직이는 거로 상대의 자신감을 앗아갔다.
분명히 창이 눈으로 향하는데도 원하는 목표에 적중할지 마음에 의문이 생겼고, 그 의문으로 무사의 손에 힘이 빠졌다.
그러나 오작은 회피하는 몸과 창을 잡은 팔이 서로 딴 사람의 것인 듯, 공격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설영의 목을 노리는 창끝은 여전히 매서웠다.
'둘 덕분에 진전이 크다.'
공격할 때 수비를 고민하고 수비할 땐 반격을 고민하는 기존 창법과 달리, 오작은 무극에서 음은 음대로 양은 양대로라는 생각으로 공격과 수비를 완전히 분리했다.
공격할 때도 수비를 고민하긴 하지만, 수비하느라 공격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수비할 때 반격을 염두에 둬야 하나, 반격 때문에 수비를 어설프게 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공격이나 수비 하나만 하는 것도 아니다. 공격과 수비가 공존하면서도 서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는 게 오작의 목적이다.
당연히 수비와 공격을 따로 생각하면서도 한쪽에만 기울지 않는 창법이라는 건 모순이다. 공격과 수비를 연관 짓지 않은 상황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벽력혼원수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벽력혼원수는 번개와 우레가 선후나 인과관계가 없이 하나라는 걸 전제로 한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가설을 기초로 한 벽력혼원수의 위력이 꽤 대단했다.
오작은 창의 공격과 수비는 따로인 동시에 하나라는 화두를 잡고 새로운 창법을 정립했다. 아직 시작만 한 단계여서 정립이라고 할 것까지는 못 되지만, 완전히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기존 창법에 새 이론을 적용했기에 완성도는 비교적 높아 실전에도 써먹게 되었다.
바로 지금 보여주는 혼원과 무극의 깨달음이 섞인 혼원무극창이다.
설영의 몸이 흐릿해지자 오작의 손도 힘이 살짝 풀렸다. 오작이 무사의 창을 피하는 방법을 보고 설영이 따라 한 것이었다.
머리로 이해하고 한 게 아니라 그저 보고 본능적으로 따라 한 것이기에, 설영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만 물러났으면 합니다."
오작은 회심의 한 수가 어긋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대로 요괴들이 지면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흩어진 요괴들을 일일이 찾아 협박하여 치우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요괴는 그냥 죽이라고 하면서 뻗댈 것이 뻔하다. 다시 태어나면 된다는 생각에 천계로 가는 걸 목표로 수련하는 요괴들 빼면 별로 죽음을 두렵게 생각지 않는다.
'늘 황금이나 재물을 지니고 다녀야겠다.'
황금 백 근 정도만 있다면 요괴와 거래하여 치우의 행방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평소 귀한 재물은 모두 치우가 보관했고, 심지어 치우마저 지금은 빈털터리나 다름없다.
오작이든 치우든 재물을 귀하게 여기는 품성이 아닌 탓이다. 재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걸 모으고 소유하며 만족감을 느끼진 않는다.
"왜? 지금 너도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텐데. 난 지금 막 깨달음이 오려고 해서 신나는데. 무사가 싸움에 임했으면 다 팽개치고 몰입해야지. 커다란 깨달음을 앞에 두고 왜 자꾸 머뭇거리는데."
빨갛게 상기된 설영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다. 평소 얼음처럼 차갑던 얼굴도 평생 보기 힘들 정도인데, 적절히 달궈진 얼굴은 수십 배나 뛰어났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혼원무극창의 제대로 된 단서를 잡을 기회기도 하고.'
오작의 눈빛이 바뀌었다. 넓게 보던 시야를 설영과 창을 든 무사한테 제한하고 치우에 관한 생각은 마음 깊은 곳에 처넣었다.
오작의 기세가 또 바뀌자 설영과 무사는 몸이 오싹하며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둘 다 무공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여 위축하기보단 흥분했다.
두 자루의 칼과 두 자루의 창이 빈번히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았다. 오작은 머릿속에서 간질거리는 감각을 억지로 참으며 창 한 번 허투루 뻗지 않았다.
설영과 무사 역시 목숨을 어디에 맡기고 온 사람처럼 두려움 없이 오작에게 맞섰다.
"어떻게?"
설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몸과 머리를 강타한 깨달음에 감격하여 주체할 수 없었다.
오작의 창은 하나인데, 자신과 호위의 목을 동시에 노렸다.
"당신을 공격하는 것과 저 남자를 공격하는 건 모순이 아닙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사항이 아니더군요."
사내 역시 자신과 육 척 정도 거리에 있는 오작의 창끝을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깨달음이 왔는데 뭔지 알 수 없어서 뱃속이 달궈진 숯을 삼킨 듯 뜨거웠다.
"이젠 날 방해하지 않을 겁니까?"
"그래. 그런데 계속 같이 다녀도 괜찮을까? 너도 아직 확신이 든 건 아닌 것 같은데."
"거절합니다."
말을 마친 오작이 창을 내렸다. 오작의 창이 사라지자 설영의 세상이 돌아왔다.
"음. 뭐지?"
셋이 정신을 놓고 싸우는 사이, 새로운 무리가 등장하여 소강상태가 되었다.
"다시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목적했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헌원검을 든 희운이 나서며 오작한테 포권했다. 방금 세 사람이 벌이는 대결을 봤기에, 오작에 대한 기탄이 예전보다 더 깊어졌다.
오작은 천천히 걸어 적호 무리로 갔다. 설영과 무사도 무기를 거두고 역목 곁으로 갔다.
"목적한 바가 있는데 당신이 방해하고 있습니다."
오작의 평이한 말투에 희운은 살짝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가 자신이 오작 일행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벌였다면, 지금처럼 상대와 대화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릇이 너무 크다. 강제명도 그렇고. 나는 황제가 끝인가 보다. 황은 제명이나 오작과 같은 사람이 되는 거겠지.'
오작은 허리를 숙여 적호 귀에 속삭였다.
"영지가 무너진 부분을 경매에 내놓으세요. 어차피 예전에도 인간이 요괴보다 많았습니다. 명확히 경계를 긋는 것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겁니다. 게다가 강한 인간 덕분에 요괴들이 더 단결하여 관리하기도 쉽습니다."
오작의 말에 적호는 시원한 물을 마신 청량감이 들었다.
'예전엔 구구방 때문에 요수촌의 일 할도 지배하지 못했다. 구구방이 사라지고 세력을 넓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할조차 안 됐다. 그런데 지금 요수촌의 절반을 지배할 기회가 나한테 왔다.'
잘린 세 번째 꼬리를 회복하지 못해 네 번째 꼬리를 못 뽑고 있다. 세 번째 꼬리만 치유하면 단번에 꼬리 두 개를 뽑을 자신이 있고, 운이 좋으면 세 개도 가능하다.
'잘하면 이 년 안에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다. 꼬리가 다섯 개 이상 되면 다시 인간을 몰아내고 요수촌을 독차지해도 된다.'
적호는 바로 모기 요괴들을 불러 상의했다. 모기 요괴들이야 법력을 목적으로 음식점을 열기에, 상대가 요괴든 인간이든 상관이 없었다.
요수촌만큼 싸움이 적고 요괴가 많이 몰린 곳이 없기에 흔쾌히 절반을 인간에게 양도하는 데 동의했다.
"자자. 요수촌의 영지가 없는 부분은 인간에게 양보하겠소. 더 후한 조건을 제시한 쪽과 손잡을 것이오."
적호의 발표에 중부와 북부 군대 모두 크게 술렁였다.
"역목. 얻은 황금의 일 할을 요괴들한테 준다고 말해라. 그럼 저들이 너랑 손잡을 것이다."
설영의 말에 역목은 뒤통수를 세게 긁었다.
"미련하여 못 알아들었습니다."
하나를 두고 경쟁하는 협상에선 먼저 조건을 밝히는 쪽이 불리하다. 상대가 더 후한 조건을 꺼내면 협상 진행이 어려워진다.
"저들 중 삼 할이 요괴야. 저자는 유웅국의 희운이라는 자가 분명하다. 유웅국은 중부에서 광산이 가장 많은 나라로, 요수촌이 딱히 탐나지 않을 거다. 아무래도 요수촌을 친분이 깊은 요괴들한테 넘겨줘 호감을 사려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요?"
"요괴들은 자기 것을 뺏기는 걸 싫어한다. 네가 일 할 주겠다고 조건을 걸면 저쪽도 비슷한 맥락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요괴의 품성으로 자신이 얻은 황금의 일부를 아무 조건도 없이 양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네가 이길 수밖에 없는 협상이 되는 것이다."
역목은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기쁜 웃음을 지었다.
'요괴들과 힘을 합쳐 중부 군대를 물리치면 부족원의 희생도 적고, 공공을 기쁘게 할 수 있다.'
공공은 명분이 없어 흑제만큼 통제력이 강하지 않다. 요수촌을 탐내는 것도 부족한 명분을 채우려고 눈에 띄는 공적을 쌓으려는 속셈이다. 역목이 중부 군대를 물리치면 공공한테는 큰 도움이 된다.
"얻은 황금의 일 할을 원래 주민들 몫으로 주겠소."
역목의 외침에 요수촌 요괴들이 술렁였다. 특히 영지가 없이 다른 수단으로 황금을 모으던 요괴들이 기쁜 기색을 보였다.
게다가 영지가 있는 요괴들한테도 나쁜 조건이 아니다. 안정적인 수익이 생기면 영지 없는 요괴들이 자신을 죽이고 영지를 뺏는 게 아닌지 걱정할 일이 줄어든다.
"훌륭한 조건이오. 중부의 의견을 듣고 싶군."
희운은 안색을 굳히고 고민에 빠졌다. 유웅국에도 금맥이 있긴 하지만, 몇 년 안에 고갈될 예정이다.
공손부보는 중부 전체를 자기 손아귀에 넣을 욕심으로 길게 생각지 않고 수많은 요괴와 유웅국의 이름으로 협조 계약을 맺었다.
금맥이 고갈되면 공짜로 황금을 주고 제대로 부려먹지도 못한 상황이 된다. 황금의 제공을 멈추면 계약이 자동으로 해지되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요수촌을 떠올리고 요괴를 잔뜩 끌고 왔는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유웅국에서 해마다 황금 천 근을 원래 주민들에게 내놓겠소."
요괴들의 몫에서 뭔가 떼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유웅국이 대신 황금을 내놓는 거로 협상했다.
"소년은 이 마을에서 일 년에 황금이 얼마 나는지 모르는 것 같소."
요수촌 주민은 웬만해서 황금 몇 근 정도는 있다. 대부분 황금을 요괴가 먹어 치우거나 모산에 가서 법보를 사는 데 써버린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일 년에 얼마나 많은 황금이 생기는지 알 수 있다.
구왕의 영지에 금맥이 생겼을 때 수습한 황금만 해도 삼천 근이 넘은 양이었다.
"이 할로 해주면 저쪽 조건을 더 안 듣고 그쪽과 손잡겠소."
적호는 일부러 애꾸가 된 쪽을 역목에게 보이며 말했다. 눈알 하나 앗아간 미안함에 상대가 양보하길 바란 것이다.
"협상은 이뤄졌소. 이제부터 우린 이웃이오."
어차피 역목도 설영의 언질로 이 할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던 두 무리가 거리를 좁혀 중부에서 온 자들과 마주 섰다.
- 작가의말
희운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굳이 재등장한 건 당연히 주인공에게 기연을 안겨주기 위해서겠죠? 기연 셔틀 희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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