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봉진용산自封秦龍山
천지분리天地分離
하늘과 땅의 분리는
미완대서未完待緖
끝나지 않았다
빛이 사라지며 달랑 밧줄 하나던 법보가 그물 모양이 되었다.
그물의 모습을 확인한 여와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에 손을 저었다. 아까 사라졌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보천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와는 신중하게 주문을 외웠다. 치우나 오작은 알아듣기도 힘든 생소한 주문이 여와의 입에서 연신 튀어나왔다.
"합!"
주문을 끝낸 여와의 힘찬 기합과 함께 보천석들이 흐물흐물 녹아 천라지망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보천석을 흡수한 천라지망은 초라한 모습을 벗고 오색찬연한 빛을 반짝이는 멋진 그물로 변했다.
"아이들을 불러야겠어요."
복희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자 여와는 편익조를 가득 날렸다. 마지막 편익조가 떠나고 채 일각도 안 되어 웬만한 강엔 몸도 못 담글 커다란 경계사들이 연신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어머니.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경계사들은 천라지망의 모습을 보고 연신 여와와 복희한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시간이 흐르며 네 개의 경계를 지키던 경계사들이 전부 몰려왔다. 경계사들은 미리 언질이라도 받은 듯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차지하고 진법을 펼쳤다.
오작과 치우 그리고 설영은 눈치껏 진법 범위를 벗어나 멀찍이 자리 잡았다.
사상진肆象陣으로 보이던 진법이 완전한 뱀 모습의 복희와 완전한 인간 모습의 여와가 가운데로 들어가자 오행진伍行陣으로 바뀌었다. 말없이 호흡을 맞추던 이들은 구령도 없이 동시에 주문을 시작했다.
장엄한 주문에 폭포도 소리를 죽이고 온천도 뜬 김을 날리지 않았다. 오작 일행도 숨을 죽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들이 연출한 장관을 지켜봤다.
- 형. 이상해.
치우가 손으로 말했다.
- 뭐가?
- 주문 말이야. 왠지 희생계 법술 같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문 소리가 점점 웅장하게 변했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경계사 한 마리가 울컥 피를 토했다.
경계사는 피를 토하면서도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더는 토할 피가 없을 정도로 바싹 마른 후에야 눈을 부릅뜬 채 죽어갔다.
경계사 한 마리가 빠졌지만, 주문 소리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리고 주문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많은 경계사가 피를 토했다.
이들이 토한 검붉은 피는 높은 지대에 있는 천라지망을 향해 거슬러 흘렀다.
경계사들이 점점 빠른 속도로 죽어갔지만, 복희와 여와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 얼굴로 단호히 주문을 읊었다.
결국, 모든 경계사가 피를 토하며 말라 죽고서야 주문이 멈췄다.
주문이 멈추고 한참 지난 후 복희가 먼저 움직였다. 복희는 큰 원을 그리며 돌다가 입으로 꼬리를 덥석 물었다.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천라지망이 덮은 땅을 복희의 몸이 둘러쌌다.
여와는 그 안에서 앳된 목청으로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춤췄다.
오작은 복희와 여와의 모습이 마치 제단과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 같다고 느꼈다.
여와의 춤은 진용산에 가득 널린 경계사들의 주검이 다 사라지고서야 멈췄다.
"천라지망 개開!"
천라지망을 밟고 선 여와가 시동어를 외치자 검붉은 피를 잔뜩 머금은 천라지망이 그대로 사라졌다. 여와는 시동어를 외친 후 픽 쓰러졌다. 복희 역시 눈을 조금밖에 못 뜬 채 축 늘어졌다.
시간이 반 각 정도 흐르고 뱀의 몸이 천천히 줄어 중년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중년 사내는 천라지망이 사라진 자리에 쓰러진 여와를 보듬어 안았다.
여와는 사내의 품에서 입을 꾹 다문 채 하염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그대로 해가 지고, 다시 달이 졌다.
"이만 오셔도 좋네."
복희의 말에 오작 일행은 느린 걸음으로 둘에게 다가갔다.
"비록 과정은 많이 틀어졌지만, 원하던 결말은 봤네."
"우선, 치우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도 원하는 바가 있었으니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네."
복희의 품에 안긴 여와는 어느새 잠들었다. 쌔근쌔근 곤하게 자는 모습만 보면 천하를 백여 년 동안 호령했던 지황이 하나도 연상되지 않았다.
"자네들이 떠나면 우린 진용산을 봉인하고 영원히 여기서 살아갈 생각이네. 자네 덕분에 천명을 완수했으니 이젠 편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군."
복희는 품에 안은 여와의 머리를 정겹게 쓰다듬었다.
"누군가가 무극을 깨우는 바람에 내가 점괘술로 봤던 미래가 대부분 틀어졌네. 그래서 훌륭한 조언은 어렵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나 알려주지. 자네만 따라오게."
복희는 여와를 안은 채 걷고 오작은 두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따랐다.
"나와 여와는 반고의 피가 흐른다네. 자네도 들은 적 있는지 모르겠네. 반고의 피는 마수와 마찬가지로 어떤 인간 몸에서도 갑자기 나타날 수 있지."
"반고는 하늘과 땅을 분리하는 천명을 타고났네. 그러나 채 완성하기도 전에 봉인 당했지. 반고의 피를 이은 우리는 그 천명의 완수를 도울 숙명을 짊어졌다네."
복희는 적당한 바위를 찾아 궁둥이를 붙였다. 오작은 복희의 맞은편에 바른 자세로 서서 경청했다.
"천계의 존재들이 삼계로 내려올 수 있고, 삼계의 존재들 역시 천계로 올라갈 수 있지. 비록 아무나 되는 건 아니지만, 천계와 삼계의 연결이 여전히 끈끈하다는 뜻이네."
"문제는 이거야. 만약 천계와 삼계를 완전히 분리하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네."
"천계의 존재들을 영원히 잃은 삼계에 강한 괴물이 생겨나는 겁니까?"
오작의 말에 복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구랑 반각을 만났고, 대모왕과 대봉각도 만났습니다. 조금씩 얻어들은 걸 조합하면 대충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야. 난 욕수나 공공이나 구망 등이 백호와 현무 그리고 청룡이 천계로 가는 바람에 생긴 공백을 메우려는 화신임을 알았다네. 그래서 천계를 삼계와 완전히 분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되었지. 그러나 천명을 완수하지 못하면 어마어마한 벌을 받게 된다네."
천계와 완전히 분리되면 구망은 더는 청룡의 화신이 아니라 청룡 자체가 된다. 천구나 반각 그리고 답산 등 천계에서 쫓겨난 존재들의 후손인 개와 여우나 양과 염소 그리고 말 등은 괜찮지만, 늑대처럼 조상이 천계에 남아있는 자들은 갑자기 강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삼계가 대혼란에 빠지고, 약한 인간은 생존이 어려워진다.
"나와 여와는 수십 년 동안 해결책을 고민했네. 다행히 내가 우연히 점괘술을 만들었고, 점괘술로 미래를 점치며 해결책을 찾아냈지."
복희는 점괘술을 너무 자주 펼치는 바람에 법력이 모두 굳어버렸다. 그래서 천황의 자리를 여와한테 물려줬다.
여와가 지황으로 불리다가 자리를 신농한테 물려준 건 찾아낸 방법을 실현하려고 준비하는 데 복희 혼자로는 벅찼기 때문이었다.
"법보 미천망은 부친이 나한테 물려준 유일한 유산이야. 결승법 법술을 제물로 바치면 천라지망이 될 수 있어. 그런데 결승법은 나도 여와도 익히지 못했네. 사실 결승법과 탁목조를 훔쳐 도망친 하인의 위치는 오래전에 파악했지. 그러나 그자가 결승법의 인연자를 찾아내는 실마리가 되기에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네."
복희와 여와는 둘 다 뱀의 몸이거나 둘 다 인간의 몸인 날이 가끔 있다. 둘 다 뱀의 몸일 때 수백 개 알을 낳아 경계사를 키웠다. 진용산에 세상을 새겨야 하는 복희와 여와를 대신하여 바깥일을 봐줄 손발이었다.
"반고의 피를 이은 존재는 우리 둘 외에도 여럿 있네. 우리가 파악한 건 원시천존과 서왕모야. 원시천존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천계와 삼계를 완전히 분리하면 어떤 폐해가 생기는지 알기에 시도하지 않았고, 서왕모는 원시천존이 곤륜산의 용맥에 묶어버렸네."
"그런데 얼마 전에 무극이 생기고부터 내가 점쳤던 미래가 틀어지기 시작했네. 내 점에 따르면 반고의 개천부를 뽑는 건 치우라는 아이였네. 그런데 엉뚱하게도 불의 아이가 해냈더군."
"형천은 반고의 피가 흐르지 않습니까?"
"그렇다네. 내 생각엔 영생과와 약속의 아이 때문에 뭔가 비틀린 것 같네. 이 둘에 관해선 나도 잘 모르니 묻지 마시게."
점괘술은 미래를 점칠 뿐 모르는 지식까지 발굴하진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자네와 치우 둘이 함께 진용산에 와서 날 찾아야 했네. 그런데 일의 진행이 완전히 틀어졌고, 심지어 치우는 귀기에 홀려 예정에도 없던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네. 점괘술도 믿을 게 못 되어 내가 직접 나서서 치우를 여기로 데려왔네. 자네도 함께 데려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천라지망은 완성되지 못했을 거야."
'힘이 강하고 미래를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구나.'
"자네가 지혜과를 먹은 것도 원래는 예정에 없던 일이야. 이게 약속의 아이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난 원하는 바를 다 이뤘기에 자네한텐 고마운 마음이네."
"그리고 확신은 없지만, 조언 하나 건네지. 자네 진목액을 얻지 않았는가? 그걸 지금 당장 쓰지 말게. 다른 긴한 용도가 있을 걸세."
"그런데 천라지망으로 뭘 한 겁니까?"
복희는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쿵 때렸다.
"가장 중요한 걸 얘기하지 않았군. 천라지망으로 천계와 삼계를 분리했네. 보천석을 흡수했기에 천계에서 삼계로 내려오는 일도 힘들어지고, 삼계의 존재들이 승천하는 것도 어려워졌다네. 천계와의 연결이 희미해져서 인간을 제외한 하계의 꽤 많은 존재가 강해질 걸세."
"반고부를 뽑았기에 인간도 강해질 여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러나 인간이 강해지는 건 시간도 걸리고 노력도 필요하네. 요괴들은 뜬금없이 갑자기 강해질 걸세. 그래서 부탁이 하나 있네. 자네나 치우 중 누군가가 황이 되어 인간들이 큰 화를 당하지 않도록 힘써주게."
"제 앞가림도 못 합니다."
"겸손할 필요가 없네. 그리고 자네 귀곡자한테서 천기 보는 법을 배웠다지?"
"배우긴 했는데, 전혀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복희는 대화 중에 처음으로 껄껄 웃었다.
"너무 크게 깨우쳐서 그래. 작은 건 안 보이고 큰 것만 보일 거야. 언젠간 자네가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르지. 그때 부디 인간을 많이 생각해 주시게."
"좋은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작별하는 게 좋겠군. 밖의 반각은 대처할 자신 있지?"
"그럼요."
"집사람은 몇 달 깨지 않을 걸세. 그러니 지체 말고 어서 떠나시게."
복희한테 허리를 숙여 인사한 오작은 몸을 돌려 치우와 설영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만 떠나자."
"밖에 반각은 어쩌고?"
설영의 질문에 오작은 편하게 웃었다.
"놈은 아마 우릴 보면 도망칠 겁니다."
설영은 반신반의하면서 오작의 뒤를 따랐다. 치우는 복희가 있는 곳에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오작을 따라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셋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반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작은 소매에서 창을 꺼낸 후 창끝으로 허공에 동그라미 하나 그렸다.
굳은 얼굴로 한참 서 있던 반각이 말 한마디 없이 돌아서서 떠났다.
"어떻게 한 거야?"
"반각은 생명 한둘만 직접 죽이면 천벌을 받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반각이 죽을 겁니다. 그래서 수백 년 동안 아무도 안 죽였다고 하더군요."
"하나만 죽여도 되잖아."
설영의 말에 오작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왜요? 이익도 없는데 왜 모험해야 합니까? 게다가 방금 내가 그린 원을 보고 하나를 죽이는 것도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구하려던 영혼은 이미 녹아 사라졌고요. 얻을 게 하나도 없는데 굳이 모험할 필욘 없죠."
"마수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이대로 돌아가면 아마 법력이 꼬이거나 화병이 터지거나 하겠죠. 그러나 우리랑 싸우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낫습니다. 괜히 싸워서 지면 더 큰 화를 당할 거고, 어렵게 이겨봤자 천벌을 받을 위험이 있으니깐요."
반각은 싸워서 얻을 게 전혀 없고 잃을 것만 가득하다. 이겨도 져도 손해인 싸움이고, 안 싸우는 게 가장 손실이 적다.
"형. 우리 어디로 가?"
"천일도로 간다. 그쪽이 훨씬 급하다고 했어."
오작은 속으로 암암리에 탄복했다. 귀곡자가 복희와 여와의 천라지망까지 예상하고 한 얘긴지 모르지만, 지금은 청룡을 시급히 천계로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라지망이 점점 촘촘해지고 견고하게 되어 청룡이 평생 구망의 몸에 눌러앉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누가? 혹시 탁몽이라도 했어?"
"아니. 황룡도인을 만났어."
셋은 고개를 돌려 진용산에 눈으로 작별 인사를 건넨 후 동쪽으로 달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 치우는 왜 오작을 형이라고 불러?"
"나 열네 살이거든."
설영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했다.
"조금 지나면 내 생일이거든. 곧 열다섯이 될 거야."
오작 일행이 떠난 후 복희는 여와를 품에 안은 채 진용산 바위들을 한 번씩 밟았다. 마지막 바위를 밟는 순간 크르릉 굉음과 함께 진용산이 가라앉았다.
진용산이 땅속 깊은 곳으로 사라진 후, 진용산이 있던 곳엔 똑같은 모습의 진용산이 생겨났다.
온천과 냉천이 있고 폭포가 수십 개나 되는 멋진 진용산은 순식간에 요괴와 인간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전쟁터가 되었다.
- 작가의말
복희랑 여와는 그만 퇴장합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