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해구원靑龍解舊怨
천지호연天地浩然
하늘땅 사이에 호연지기가 가득하여
정기늠연正氣凜然
기운이 바르게 선다
서리 맞은 풀처럼 시들어가는 설영을 우마왕의 영지에 겨우 눌러둔 오작과 치우는 둔각을 타고 바다를 달렸다.
두 번째로 알에서 나온 둔각은 외모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칠흑처럼 까만 털에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희미한 문양이 생겼을 뿐이다.
오작의 절대감은 둔각이 오행마를 비롯해 지금까지 봐온 말들과 다른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오행마야 요괴 출신이라 논외로 쳐도, 평범한 말들과 다른 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소오나 현작도 까마귀나 까치가 맞지만, 외모는 특이하다.'
소오는 눈동자마저 하얀 까마귀고, 현작은 덩치가 늑대만큼 크다. 게다가 가벼운 몸무게에 어울리지 않는 강한 힘을 보유했다.
그러나 둔각은 가끔 알이 되고 바다를 밟고 달리는 걸 빼면 평범함 그 자체다.
"형. 할아버지 구하면 함께 양부 있는 데 가는 거지?"
치우는 벌써 신났다. 귀신이요 허신이요 산신이요 토지신이요 하면서 신을 남발하는 삼계와 달리 천계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청룡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지 못한 탓이다.
아는 게 병이라고, 오작은 천계에서도 오방신의 칭호를 받은 청룡을 어떻게 설득해 돌려보낼지 벌써 머리가 아팠다.
"양부 있는 데 말고 소소 있는 곳이겠지."
갑갑한 마음에 오작은 오랜만에 치우한테 심통을 부렸다. 그러나 편익조가 수신되고부터 들뜬 치우는 오작의 심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신났다.
"양부랑 소소랑 재회하면 난 구려국과 함께 청제랑 싸울 거야. 형도 그럴 거지?"
"더 중요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귀곡자도 복희도 새로운 황이 나와 다섯으로 나뉜 세상을 하나로 합쳐야 함을 강조했다. 천명이 뭔지를 치우조차 깨닫지 못한 상황에 둘의 조언을 들을 수밖에 없다. 천명을 타고난 치우나 그에 휘말린 오작이나 목적한 바를 이뤘다고 만족하여 앉아서 쉴 팔자가 아니다.
그때, 힘차게 달리던 둔각이 갑자기 속도를 줄여 멈췄다. 오작은 물론, 신나서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던 치우도 세찬 둔각의 몸 떨림을 감지했다.
[어서 오거라.]
소리는 귀가 아닌 머리에 바로 꽂혔다. 감정 표현이 솔직한 치우는 물론이고, 심계가 깊은 오작도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숨기지 못했다.
[내가 급해서 마중 나왔다. 놀라지 말아라.]
바닷물이 양쪽을 쭉 갈라지며 거대한 물건이 떠올랐다.
두껍고 단단한 푸른 비늘은 생명력이 넘쳐났다. 딱 봐도 얼마나 단단할지 느낌이 오는데도 입에 넣어 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바다에서 떠오르며 둔각을 등에 태운 청룡은 작게 꿈틀거리며 엄청난 속도로 헤엄쳤다. 거북처럼 양옆으로 뻗은 네 개의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부럽지 않을 속도로 전진했다.
수면에 반쯤 드러낸 머리엔 사슴의 뿔과 모양만 흡사한 여섯 개 거대한 뿔이 있었다. 툭 튀어나온 눈은 지혜가 넘쳤고, 바닷물에 반쯤 잠긴 커다란 콧구멍으론 물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지느러미가 있네?"
치우의 말에 청룡의 몸이 살짝 떨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오작의 절대감은 청룡이 어이없어 웃고 있다고 알려왔다.
[난 청룡이 되기 전에 잉어였다.]
"그럼 남은 넷은 뭔데? 알려줄 수 있지?"
[백호는 고양이고 현무는 머리 둘 달린 뱀이다. 주작은 발 없는 새였고 황룡은 뱀 요괴와 인간의 피가 섞인 변종이었지.]
"어떻게 청룡이 됐는데?"
[물만 마시고 살았다. 죽은 벌레조차 먹지 않고 말이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천명이라고 할 수밖에.]
'천명이라는 건 본인 의지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구나. 혹시 무극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바꿀 수 있을까?'
반나절 정도 더 달려야 도착할 거로 예상했던 천일도가 코앞에 나타났다. 풍뇌신이 허물었던 남쪽 절벽은 어느새 복구되었고, 오히려 전보다 꽃과 풀과 나무가 더 무성했다.
뭍에 오르자 둔각은 하나로 합쳐서 멀리 도망갔다. 청룡은 구망의 모습으로 변해 오작과 치우 앞에 나타났다.
"내가 너희한테 원하는 건 딱 하나다. 독담혈룡을 내게 넘겨라. 그럼 이 가엾은 아이한테 몸을 돌려주고 너희한테도 큰 보상을 하겠다."
오작은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했다.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흐름 같아서 무기력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만 봐도 그때 형천한테 황금을 다 주지 않았다면 둘은 홍영창에 집착하지 않았을 거고, 청룡이 둘에게 홍영창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오작은 착잡한 마음을 감추고 질문했다.
"독담혈룡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내 자식을 죽이고 여의주를 더럽혔다. 승천하지 못한 죄에 여의주를 뺏긴 죄까지 겹쳐서 천 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무수히 고통받았다. 다행히 약속의 아이 덕분에 형벌이 멈췄다."
"약속의 아이는 누굽니까?"
"알지도 못하지만, 알아도 얘기할 수 없다. 천기를 바꾸고 세상의 법칙을 바꾸는 존재가 그리 가벼워 보이느냐."
"독담혈룡을 벌하려고 하계로 내려온 겁니까?"
"그래. 예전에도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황룡이 승천하지 않아 기회가 없었다. 황룡이 승천한 후부터 화신이 생겼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구망의 자질이 부족한 거고, 하나는 독담혈룡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그러다 약속의 아이가 개입하며 두 문제 모두 해결되었다."
'난가?'
약속의 아이 냄새가 난다거나 연관된 자들 모두 오작과 접점이 있었다. 설영이 치우와 접촉하기도 전에 약속의 아이 냄새가 났기에 치우는 배제할 수 있다.
"시간이 없다. 천라지망이 자리를 잡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복희와 여와는 반고를 도울 숙명을 타고났으나 둘은 정작 천계와 삼계의 완전한 분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떠올린 타협책이 천라지망으로 천계와 삼계의 연결을 좀 더 차단하는 것이었다.
천라지망을 제물로 바친 후 복희의 예상대로 둘에게 씐 숙명이란 굴레가 완전히 벗어졌다. 그러나 이는 천계로 올라가려는 자들이나 하계로 내려오려는 자들에겐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알겠습니다."
오작이 눈짓하자 치우는 허공에서 봉인한 홍영창을 꺼냈다. 밖으로 나온 홍영창은 구망의 모습을 한 청룡을 보자마자 두려움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오작과 치우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홍영창을 본 청룡의 지혜 가득한 눈에서 어느새 불이 뚝뚝 떨어졌다. 높은 경지 덕분에 기세가 함부로 날뛰지는 않았지만, 극도로 절제된 분노가 오히려 더 두렵게 느껴졌다.
시간이 흐르며 분노를 완전히 다스린 청룡이 오작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보아라. 오행뢰伍行雷가 아닌 진정한 오뢰伍雷다."
청룡이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자 하늘에서 어마어마하게 굵은 벼락이 떨어졌다. 그러나 시작은 창대해도 끝은 미약하여 홍영창을 때릴 때는 실핏줄처럼 가늘었다.
"천뢰天雷다. 만물을 소생하는 기운을 품어 마魔와 역병疫病을 물리친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자 이번엔 땅에서 벼락이 솟아 홍영창을 때렸다.
"지뢰地雷다. 만물의 성장을 돕는 기운을 품어 독을 물리치고 비를 맑게 한다."
세 번째 벼락은 놀랍게도 바다에서 튀어나왔다.
"수뢰水雷다. 만물을 적시는 기운을 품어 가뭄을 물리치고 용이 못 된 대요괴를 벌하는 데 쓰인다."
다시 하늘에서 내려온 네 번째 벼락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렸다.
"신뢰神雷다. 소멸의 기운을 품어 나쁜 기운이 몰린 곳을 없앤다. 예를 들면 북망산 같은 추잡스러운 곳 말이지."
마지막 벼락은 구망의 이마에 뾰족하게 솟은 뿔 끝에 맺혔다.
"사뢰社雷다. 바른 기운을 품어 삿된 존재나 법보를 파괴하는 데 쓰인다."
청룡은 어느새 거머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발버둥 치는 독담혈룡을 눈에 새겼다.
"약속의 아이 때문에 이놈한테 승천의 길이 열릴 뻔했다. 천계의 존재는 쉽게 죽지 않는다. 만약 이놈이 승천했으면 내 복수는 영원히 이루지 못했겠지."
거머리가 된 홍영창은 치우조차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계속 질러댔다. 청룡은 뿔 끝에 맺힌 사뢰를 조금씩 키워 소양궁 크기로 만들었다.
"나도 하찮은 잉어로 태어나 용이 되었다. 네놈이 편법으로나마 용이 되었다는 건, 네게 용이 될 인연이 있었다는 뜻이다. 다 네 아둔함과 탐욕이 그르친 것이니 누굴 원망하지 말아라."
말을 마친 청룡은 뿔 끝에 맺힌 벼락을 거머리한테 던졌다. 앞선 넷과 달리 마지막 사뢰에 맞은 거머리의 몸이 끓는 기름에 넣은 듯 지글지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사뢰는 징벌의 의미가 강하다. 그간 저지른 악행만큼 고통받고서야 비로소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독담혈룡은 반나절 고통으로 몸부림치다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축 늘어졌다.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자 거머리의 사체는 재처럼 퍼석퍼석하게 날렸다.
청룡은 깊은숨으로 마음을 진정한 후 손을 휘저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거머리의 잔해를 바다로 날렸다.
"이거 나 가져도 돼?"
치우는 거머리의 몸이 사라지고 남은 시커먼 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그걸 내 아이한테 전해라. 독담혈룡의 독으로 망가진 여의주라도 다시 살리면 가망이 있다. 천라지망 때문에 승천이 어려워졌지만, 어차피 용이 되어 승천하는 건 천라지망이 아니어도 쉽지 않았다."
"당신의 아이는 누굽니까?"
"나도 모른다. 단, 너희가 그 아이와 이미 만났다는 건 알겠구나."
"알겠습니다. 당신의 아이가 누군지 알아내면 이 여의주를 반드시 건네죠. 그럼 이만 어르신을 돌려주시겠습니까?"
"먼저 보상부터 해야지. 이대로 떠나면 너희한테 진 빚 갚으러 또 삼계로 내려와야 한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끝나자 치우는 싱글벙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오작은 여전히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세상에 좋기만 한 일은 없다. 굉장히 좋은 일일수록 더 나쁜 일을 물고 온다.
"우선 치우. 네가 품은 귀화는 언젠간 네 몸을 장악할 거다. 그럼 넌 세상에 다시 없을 마魔가 되어 모든 걸 파괴하겠지. 보답으로 그걸 해결해줄까 한다."
"어떻게?"
"네가 품은 삼태극을 꺼내어 칼에 봉인한다."
"뭔가 폐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치우의 경지나 법력이 더는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만 해도 삼계는 물론이고 천계에서도 강한 편이라는 걸 명심해라. 물론, 삼태극을 뽑은 다음 다시 강해지는 데 시간이 무척 걸리겠지만, 결코 손해가 아니다. 삼태극을 품은 칼은 계속 성장할 거니까."
품은 힘은 삼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치우다. 제대로 펼치지 못하여 실질적으론 백 손가락에 들기도 어렵지만, 다시 이만큼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큰 손해는 아니다. 더불어 삼태극을 품은 칼이 성장하면 치우는 지금의 두 배 이상으로 강해진다.
"절대적인 건 아니겠죠?"
"그럼. 하찮은 미물이 어찌 감히 절대를 입에 올리겠느냐. 내가 아는 지식 범위에서 그렇다는 거지."
"하자."
치우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정했다. 치우가 귀화에 몸을 빼앗기면 오작은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리려고 애쓸 것이다. 그 과정에 오작이 치우 자신의 손에 죽을 가능성도 있다.
어차피 자기 노력으로 얻은 강함이 아니라는 생각에 치우는 아쉬움을 쉽게 털어버렸다.
"천품天品이 참 훌륭한 아이구나. 그러니 마魔의 운명을 타고나고도 이리 멀쩡하지."
복수를 마친 덕분인지 청룡의 말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부드러웠다.
"네 칼을 꺼내라."
치우는 천강도를 꺼내 청룡에게 건넸다.
청룡은 이마에 자란 뾰족한 뿔에 맺힌 벼락으로 천강도를 연신 두드렸다. 삿된 기운을 없애는 사뢰로 보였다.
벼락으로 천강도를 깨끗이 한 청룡은 치우의 배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동주철갑은 물론, 황금빛 비늘 옷도 청룡의 흐릿하게 변한 손을 막아내지 못했다.
"몹시 아플 거다."
말을 마친 청룡이 오작의 배에서 손을 천천히 꺼냈다. 치우는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했다.
고통이 너무 커서 지르고 싶어도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이다.
"아파! 아프다고."
청룡이 삼태극을 완전히 끄집어내고서야 치우는 바닥을 뒹굴며 고함을 질렀다.
"다행이다. 균형이 깨지지 않았다."
태극보인의 태반은 어둡게 타오르는 귀화가 차지했다. 그러나 모양이 많이 찌그러지긴 했어도 태극구가 남은 두 구역을 굳건히 지켜냈다.
요수촌에서 영지를 부술 때, 귀기는 그저 기운을 먹어 배를 불렸으나 치우와 태극구는 귀기의 포식을 피한 알짜배기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힘을 키운 덕분이었다.
청룡은 태극보인을 천강도 위에 놓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태극보인을 제물로 바쳐 천강도를 강하게 하는 게 아니라 둘을 결합하는 것이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나를 파괴하여 다른 하나를 강하게 하는 것과 둘을 하나로 합쳐 강하게 만드는 건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해가 저무는 저녁에 시작된 청룡의 주문이 끝난 건 해가 중천에 뜬 이튿날 점심이었다.
- 작가의말
바닷물이 양쪽을 쭉 갈라지며 거대한 물건이 떠올랐다.
열도 최강의 잠수함 원폭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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