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화 돌아온 황태자
제 16화 돌아온 황태자
“물론 정면으로 붙었으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겠죠. 다행히 염 소령이 상재 기자의 목을 조르고 있는 틈을 타서 보디첵을 했습니다. 기습하지 않았으면 쉽게 쓰러뜨리지 못했을 겁니다.”
“상재의 말로는 점점 더 강해질 거라고 했는데 전과 비교해서 어땠어?”
“제 암바를 10분이나 견뎠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어설프게 들어간 것도 아니고 완벽했는데도 말입니다.”
범호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다음에는 맞부딪치지 말고 가급적 피해. 알겠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걱정입니다. 저런 괴물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범호와 조 형사는 이 재인 과장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 이 과장은 눈을 부릅뜨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런데 사이버크루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사이버크루라는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조 형사가 말하려고 하자 범호가 가만히 조 형사의 손을 잡았다. 이 과장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범호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돌고 있는 말입니다.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일반 시민들을 마구 때리고 잡아가고 있는데 그들이 사이버크루 라고요.”
이 과장은 범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확인되지도 않은, 떠돌고 있는 말을 사실처럼 나에게 보고하고 있었단 말인가?”
범호도 지지 않고 이 반장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는 그런 떠도는 소문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되곤 했습니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 형사가 말을 했다.
“이 상재 기자는 국군병원에서 나온 후 검정색 지프차를 탄 일행에게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짧은 군인 머리를 했고 우두머리는 직접 자기가 염 복동 소령이라고 신원을 밝혔습니다.
간신히 빠져나왔는데 어제 저녁 또 공격을 당했습니다. 제가 연락을 받고 달려가서 간신히 염 소령을 체포하고 이 상재 기자를 구해냈습니다.”
범호가 이어서 말을 했다.
“그런데 국가정찰국 박 대령이라는 자가 일방적으로 염 복동 소령을 인계해 갔습니다. 조 형사가 직접 잡은 범인입니다. 조 형사가 없었으면 민간인이 살해당할 뻔 했습니다. 이유를 알아보고 우리가 사건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과장은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국가정찰국 이라면 아주 껄끄럽게 됐어. 이미 우리 손을 벗어난 거 아냐?”
범호가 말했다.
“국가정찰국과 연관이 있다고 해서 덮어버리려는 겁니까? 피해자가 기자입니다. 경찰에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여론몰이를 하려고 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이 과장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네. 알았어. 황 검사와 상의해 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범호는 밖으로 나오면서 조 형사에게 말했다.
“이 과장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해. 특히 사이버크루에 대해서 말이야. 상재가 세컨드브레인을 조사하다가 공격을 당했으니 세컨드브레인과도 연관이 있어.”
“정말 복잡해지는데요.”
“아차. 상재의 신변이 위험해. 아까 기자 이야기를 할 때 반장님의 얼굴에 살기가 도는 것을 보았어.”
“설마, 반장님이 그럴 리가요?”
“어떤 때는 이성 보다 직관을 믿어야 할 때가 있어. 특히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질 때는 더 직관에 귀를 기울여야 해. 수사를 할 때 사방의 길이 모두 막히는 경우는 없어. 반드시 한 두 개의 단서가 있기 마련이야.
그런데 지금처럼 모든 길이 막혀있다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길을 조작하고 있다고 보면 돼.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를 방해하려고 한다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상재야. 여차하면 여론을 움직일 능력이 있으니까 말이지. 조 형사가 상재를 보호해 줘.”
“알겠습니다. 참, 김 형사님. 천 재중이 김 형사님을 보자고 합니다.”
“천 재중이 누구야?”
“사이버펌핑 클럽 엠디(소비자의 클럽 입장과 테이블 예약을 돕는 영업직)잖아요. 형님은 정보원 이름도 까먹어요?”
“엠디는 무슨 엠디. 걔는 그냥 삐끼야. 그런데 무슨 일이래?”
“박 시훈의 정보가 있나 봐요.”
“뭐라고? 재중이 어디 있어?”
천 재중은 사우나 실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었다. 수건으로 앞을 가린 채 큰 대자로 누워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비교적 잘 생긴 얼굴에 몸매도 탄탄했다.
조 형사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탁탁 쳤지만 인사불성이었다. 범호는 찬물을 한바가지 퍼서 재중의 몸에 확 뿌렸다. 재중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범호를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김 형사님.”
“어제 뭘 했는데 정신을 못 차려?”
재중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크게 켜며 말했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요.”
“팔자 좋구나.”
“형사님.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세요?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에요.”
재중의 표정은 눈물이 쏟아질듯이 금방 어두워졌다. 범호는 손바닥으로 재중의 뒤통수를 치며 말했다.
“연기 하지 마. 자식아!”
“아, 정말 형사님은 너무해요. 지금 저한테 부탁하러 오신 거 맞아요?”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잠시 까먹었다.”
“내가 참죠 뭐. 그런데 전에 형사님이 찾는 박 시훈이라는 사람을 본 것 같아요.”
“박 시훈을 어디서 봤어.”
“우리 사이버펌핑 클럽에서요.”
“정말이야?”
“예. 한 달쯤 전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왔어요. 클럽의 제일 높은 형이 깜짝 놀라서 그를 밀실로 안내했고요. 그리고 잠시 후에 나와서 직원들에게 절대 그가 온 것을 알리지 말라고 했어요. 우린 얼굴도 보지 못했고 잠깐 스쳐 지나간 것이어서 금방 잊고 말았죠.
소문에는 그가 이 클럽의 실질적인 소유주라고 했어요. 그 후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이층에서 사람들이 춤추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살짝살짝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기도 했었어요.
순간 형님이 보내 준 시훈이란 사람의 사진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그가 한 달 전에 모자를 눌러쓰고 들어온 사람과 옷차림이 같다는 것을 기억해냈어요.”
재중은 범호를 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범호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기억력이 대단하구나. 클럽에서 썩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래서 어떻게 됐어.”
재중은 환하게 웃으며 신나게 말했다.
“그 사람이 실종된 게 한 달 전이라고 했잖아요. 클럽에 들어온 것도 한 달 전이고요. 나에게 준 사진과 생김새도 비슷하고요. 그 정도면 대충 맞는 것 아닌가요?”
“우리를 안내해줄 수 있겠어?”
“내가 직접 그랬다간 저는 맞아 죽습니다. 대신 그가 있는 밀실을 그려줄 테니까 찾아가 보세요.”
“고맙다. 재중아.”
범호와 조 형사는 천 재중이 알려준 대로 사이버펌핑 클럽으로 갔다. 건물 뒤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 뒤로 거무스름한 땅거미가 느릿느릿 따라왔다. 거리에는 하나 둘씩 네온 등이 켜졌지만 아직 클럽이 열리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범호와 조 형사는 클럽 뒷골목으로 향했다. 음식물 찌꺼기와 술 냄새가 뒤섞인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몇 개의 쓰레기 더미 사이를 지나니 작은 철문이 보였다. 조 형사가 문을 당기자 슬며시 열렸다. 재중의 말대로 잠겨있지 않았다.
안쪽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는데 조리실과 연결돼 있었다. 범호와 조 형사가 쓱 들어가자 음식 준비를 하고 있던 요리사들이 깜짝 놀라서 쳐다봤다.
범호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옆을 지나갔다. 얼핏 보면 클럽의 대단히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요리사들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하고 다시 요리를 했다.
식당 밖으로 나가자 바로 클럽 홀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디제이와 댄서들이 모여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범호와 조 형사가 지나갔지만 영업 준비에 정신이 팔려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갔다. 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좌석을 지나 옆으로 들어가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한 쪽으로는 호텔처럼 방들이 죽 이어져 있었다. 말로만 듣던 VIP 룸이었다.
재중의 말로는 복도 끝까지 가면 VVIP라고 쓰인 문이 네 개 있는데 V자가 조금 깨진 곳의 룸이 박 시훈이 있는 룸이라고 했다.
범호는 손잡이를 살짝 돌려봤다. 역시 잠겨있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살금살금 들어가던 범호는 소파에 있는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표정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을 보았다. 조 형사가 말했다.
“박 시훈이 맞는 것 같은데요?”
범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위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박 시훈 씨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나는 박 시훈입니다.”
대답하는 말투와 억양이 어딘가 이상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텔레비젼을 보고 있으니까 기다려주십시오.”
거의 억양이 없는 목소리였다. 범호는 가까이 가서 시훈의 눈을 봤다. 눈동자가 옅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마트의 노인의 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호는 다시 말했다.
“미안합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시훈은 범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자연스럽게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어 소름이 쫙 끼쳤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회장님의 부탁으로 당신을 데리러 온 사람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훈은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텔레비전에는 클럽 무대 위에서 댄서들이 리허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무대 카메라와 텔레비전을 연결시켜 놓은 것 같았다. 조 형사가 참지 못하고 시훈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우리도 바쁜 사람입니다.”
순간 시훈은 벌떡 일어나며 조 형사의 손을 옆으로 쳤다. 조 형사는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몽둥이로 맞은 느낌이었다. 범호는 그 모습을 보고 시훈에게 다가갔다.
시훈은 범호의 명치를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범호는 피하며 시훈의 발을 붙들고 한쪽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고 했다.
영락없이 넘어졌다고 생각했으나 한쪽 발을 붙잡힌 채로 공중으로 점프를 하며 다른 발로 범호의 턱을 걷어찼다. 범호는 턱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시훈이 범호를 발로 찍어 누르려고 할 때 조 형사는 시훈의 등을 향해 몸을 날리며 옆차기를 했다. 시훈은 충격을 받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 형사는 시훈을 누르고 팔을 뒤로 꺾으려고 했다.
그러나 시훈은 놀라운 괴력을 발휘했다. 팔이 꺾인 채로 조 형사를 들어 올린 것이다. 시훈은 조 형사를 팔에 매달고 앞뒤로 흔들다 벽에 힘껏 집어던졌다. 조 형사는 벽에 부딪쳐 주저앉으면서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훈은 우뚝 서서 잠시 동안 범호와 조 형사를 노려보았다. 범호와 조 형사는 눈빛을 교환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순간 시훈은 몸을 홱 돌려 문을 열고 밖으로 달아났다. 너무나 빨라서 손을 쓸 틈도 없었다. 둘은 시훈을 쫓아서 달려갔다.
범호와 조 형사가 밖으로 나왔을 때 시훈은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클럽 직원들은 달아나는 시훈을 보며 “뭐야? 뭐야?”라고 소리쳤다. 뒤 이어 범호와 조 형사가 나타나자 “야, 저건 뭐야? 잡아!” 라고 외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둘의 무술 실력은 경찰 내에서도 상대할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두 사람은 가로막는 직원들에게 주먹질을 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며 앞으로 나갔다.
앞을 막던 직원 몇몇은 악 소리도 내지 못 하고 쓰러졌다. 범호와 조 형사는 그들을 뛰어넘어 날듯이 시훈을 쫓아갔다. 클럽 직원들이 둘을 따라잡으려고 했을 때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범호는 시훈이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거리가 상당히 벌어져 서둘러 쫓아갔는데 시훈은 두 갈래 길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동작은 빨랐으나 길을 잘 몰라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 골목은 갈림길이 사방으로 퍼져있고 작은 술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미로 같은 곳이었다. 범호도 자주 오긴 하지만 올 때마다 길을 잃고 헤매곤 했다.
시훈은 두 사람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오른 쪽으로 급히 달아났다. 범호는 숨이 턱까지 차서 학학 거렸다. 조 형사는 범호를 추월해서 전속력으로 시훈을 쫓아갔다. 잠시 후 시훈이 높은 벽에 가로막혀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 형사는 주먹을 쥐고 시훈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시훈은 조 형사를 보다가 갑자기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조 형사는 달려가서 시훈의 다리를 잡았다. 시훈은 안간힘을 다해 붙잡힌 다리를 들어 올리려 했다.
얼마나 힘이 센지 조 형사가 딸려 올라갈 지경이었다. 마침 달려온 범호가 조 형사와 합세해서 다리를 잡아당겼다. 시훈은 벽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었다. 범호도 지쳐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때 조 형사가 당황해서 말했다.
“김 형사님. 이 녀석 이상한데요. 정신을 못 차려요.”
“그렇게 팔팔하던 녀석이 왜 그래?”
범호는 시훈에게 다가가 호흡을 살펴보았다.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떨어질 때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범호는 시훈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시훈이 정신을 차린 건 6시간이나 지나서였다. 바깥은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시훈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범호와 조 형사는 병실로 달려갔다. 시훈은 병실에 누워 멍하니 천정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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