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Auditi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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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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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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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DUMMY

오후 7시 10분. 정완과 서희는 세 곳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다.

나영은 다른 건과 다른 이번 행사의 특별한 점을 설명했다.


“여긴 스몰웨딩 하우스인데 사장님이 팬카페 회원이고, 화성시 팬카페 회원 모임도 대부분 여기서 해요.”

“그럼 하객들 중에 회원이 많겠네?”

“그냥 다라고 보시면 돼요. 순정남녀도 여기서만 세 번 했는데 다른 데보다 한두 곡 더 불렀어요. 우진 선배도 여기 오면 얘기 많이 하고, 아리 언니는 작년에 김장봉사 한다고 여기서 김치도 담갔어요.”

“우리도 네 곡은 불러야겠네?”

“그래주시면 좋죠. 부탁드려도 되겠어요?”


서희와 나영의 대화를 듣던 정완이 말했다.


“다섯 곡 하자. 내가 솔로 할게.”

“왜요?”

“하객들 전부 순정남녀 본다고 기대하고 있을 텐데 조금이라도 덜 실망하게 해야지. 하나라도 더하는 게 나을 거야.”

“제가 할게요. PD님 힘든데.”

“괜찮아. 내가 할게.”


그 말에 나영이 말했다.


“여기 분들은 두 분 오시는 거 알고 있을 거예요. 지금 두 분 이름이 검색어 순위에 올라 있어요.”

“왜?”

“두 분 행사 동영상이 여기저기 퍼 날라진 모양이에요.”


운전석에 앉았던 나영이 뒤돌아 서희를 보고 빙긋 웃었다.

정완과 서희는 행사가 끝나면 곧바로 차 안에 들어왔다. 정완은 의자에 몸만 묻으면 잠에 빠졌고, 정완에 빠진 서희는 잠든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바라보며 볼에 입을 맞추고 사진을 찍다가 전화와 메시지가 자꾸 오니까 아예 스마트폰을 꺼버렸다.

두 사람이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두 시간 전 정완과 서희의 행사 동영상이 순정남녀 팬카페에 올라왔다.

카페 회원들은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이 영상은 여우비 팬카페와 <C-POP Artist> 시청자게시판에도 올라갔다.


이 영상을 통해 정완의 얼굴이 공개되며 HAP가 우진의 의형이자 서희의 연인일 뿐 아니라 미투리 밴드의 SS였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시청자들이 그간 여우비에 관해 가장 궁금해 했던 이슈들이 정리되었다.

그런데 미투리 밴드의 팬들은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무대를 부숴버릴 듯한 모습으로 기타를 연주했던 SS와 색 없는 안경을 쓰고 생글생글 웃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HAP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HAP! 차라리 SS랑 쌍둥이라고 해라. 기타로 무대를 잡아먹던 그 포스는 대체 어디로 간 거냐!’라는 절규의 글까지 올라왔다.


식장의 하객들은 <사랑나무 아래 소녀>에 대해 여우비의 자작곡만큼 좋았을 뿐 아니라 오늘 연인이 된 두 사람의 호흡이 완벽해서 행복한 마음으로 들었다고 후기를 남겼다.

게다가 팬카페의 한 후기글에 아리가 <사랑나무 아래 소녀>가 순정남녀의 차 안에서 한 시간 만에 만들어져 식장에서 연주되었다고 댓글을 남겨 이슈에 기름을 부었다.


한편 순정남녀에게 축가를 부탁했던 의뢰인 중 한 사람이 팬카페에 글을 올렸다.

순정남녀가 받기로 한 행사 개런티가 고스란히 남아 그 금액 전부를 순정남녀 이름으로 아동복지재단에 기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카페 회원들은 축하와 환호를 동시에 보냈고, 내일 결혼이 예정된 커플들도 똑같이 하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거기다 두 분이 서로를 너무 좋아하셔서 사람들이 엄청 놀랐대요. HAP님은 건반도 안 보고 언니만 보면서 연주하고 노래하셨고, 언니는 방송하고 완전 다르게 계속 웃고, HAP님 연주하는데 물 먹이고 사람들 다 보는데 그거 입 대고 마셨다고요.”

“그게 왜? 이분은 두 손 다 키보드 치니까 물을 못 마셔서 그런 걸.”


서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그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문득 정완이 그녀를 불렀다.


“서희야.”

“네?”


서희는 나영과 이야기하다 정완을 보았는데, 정완은 무표정한 눈으로 수첩에 뭔가를 끼적이다 그녀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배시시한 미소가 비어졌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을 보고 설레어도 고개를 돌려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순서 이렇게 해도 되지?”

“마지막엔 뭐하려고요?”

“내가 분위기 봐서 할게.”

“네.”

“아. 이제 올라가시면 돼요.”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나영이 말했다.


“여긴 아마 어른들이 없을 거예요. 신랑 신부 모두 부모님이 안 계셔서 지인이랑 근처 회원들만 초대해서 파티처럼 한대요. 그리고 신부는 신랑 전여친 친구인데, 봉사모임에서 우연히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됐대요.”

“어?”

“푸후후.”


정완과 서희의 머릿속에 한 여자가 동시에 생각났다.


“신랑 전여친은 어떻게 됐대? 혹시 알아?”

“하객으로 와 있을 거예요. 지금은 다들 친구로 잘 지낸대요.”

“다행이네.”

“그런 건 회사에서 사전에 다 확인해요. 행사 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렇구나.”


서희는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순정남녀 팬카페 지역별 게시판 보니까 봉사활동 모임도 자주 올라오더라?”

“네. 선배랑 언니가 봉사나 기부를 자주 하니까 팬들도 그래요.”

“그런 모임에서 만나면 눈 많이 맞겠네? 그런 덴 착한 사람들만 올 거 아냐.”

“네. 특히 이 동네에 봉사 모임이 많아요. 그러다보니까 아무래도 여기가 결혼식도 많죠.”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멈추고 문이 열리자 함성이 쏟아졌다.


“와아아아!”

“어?”


통로 옆에 앉았던 하객들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박수를 쳤고, 정완과 서희는 여기저기에 인사하며 걸었다.


“어. 이걸 왜 저희한테···.”

“감사해요.”

“축하합니다!”

“잘 어울려요!”

“HAP 씨 멋집니다!”

“서희 씨 예뻐요!”

“와아아!”


여기는 다른 곳과 달리 서희가 앉을 의자도 준비되어 있었고, 신랑과 신부는 두 사람이 앉을 자리의 맞은편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발 앞 스탠드 카메라가 촬영을 시작했다.

정완은 신랑 신부에게 인사한 후 서희의 의자를 자신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겨 앉혔다.


“박연규 군과 주지민 양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보컬 강서희.”

“작곡가 HAP입니다. 첫 곡 부르고 말씀드릴게요.”

“와아!”


함성이 조금 줄어들자 정완은 곧바로 첫 곡을 시작했다. 레게리듬의 이 곡은 서희와 은별이 본선 3라운드를 준비하면서 연습했던 곡 중 하나다.

하객들은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치며 호응해 주었다.





<결혼할까요> 원곡 : 씨야(SeeYa)


(합창)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HAP's song)

그대의 작은 목소린 무엇보다 내게 큰 힘이 되죠.

세상을 등지고 싶을 때 그대의 작은 어깨에

기댈 때면 난 다시 꿈을 꾸죠. 희망이란 단얼* 찾죠.

내 두 눈에 항상 그댈 담고 싶네요. 사랑해.


(서희's song)

푸른 하늘보다 더, 넓은 바다보다 더

그댈 사랑할 수 있는 나에요.

세상 어떤 말도 부족하지만

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


그대를 사랑할게요. 영원히 지켜줄게요.

처음과 같은 맘을 매일 선물할게요.

한여름 날에 눈이 내릴 때까지

나의 사랑 변하지는 않아요.


평생 행복을 안겨줄 소중한 사람이에요.

지금 꼭 잡은 두 손 다시는 놓치지 마요.

약속해줘요. 항상 같은 자리에

나와 함께 하기를.


(HAP's song)

알고 있나요. 그대 때문에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우는 것조차 모르던 내가 당신이 아파할 때면

눈물이 나요, 아프지 마요. 언제나 웃어요, 약속할게요.

그대만을 사랑해요. My lover, lover, 너무 감동되죠.


(서희's song)

거친 파도가 와도 먹구름 밀려와도

내 사랑은 그대와 함께하죠.

어두운 밤에 그대 길 잃어도

내 사랑이 환하게 비추죠.


그대를 사랑할게요. 영원히 지켜줄게요.

처음과 같은 맘을 매일 선물할게요.

한 여름날에 눈이 내릴 때까지

나의 사랑 변하지는 않아요.


평생 행복을 안겨줄 소중한 사람이에요.

지금 꼭 잡은 두 손 다시는 놓치지 마요.

약속해줘요. 항상 같은 자리에

나와 함께 하기를.


나나나나나, 나나 나나나나나

나나 나나나나나. 그댈 사랑해요.

서쪽 하늘에 해가 뜨는 날까지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어요.


내 행복을 다 잃어도, 세상 눈물 다 가져도

지금 꼭 잡은 두 손 다시는 놓치지 마요.

약속할게요. 세상 누구 보다 더

그댈 사랑할게요.


(합창)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서희는 오늘 이 노래를 꼭 부르고 싶었다. 축가로 널리 불리는 노래인데다 정완을 향한 자기 마음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미소를 담은 눈으로 정완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렀다.


정완은 원곡의 랩 부분을 노래로 바꾸어 불렀고 서희의 파트에서는 약하게 화음만 넣었다.

그는 서희의 목소리를 부각시키는 역할에 치중했는데, 그것이 두 사람이 ‘우리’로 가장 아름답게 빛날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의 하객들은 두 사람의 첫 행사 동영상을 보았고, 지금의 공연 역시 순정남녀 팬카페에 올릴 예정이다.

그들은 서희의 실력이 아까보다도 더 향상되었고 그 이유가 저 남자에게 있음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와아아!”


정완은 인사를 마친 후 서희의 귓전에 나지막이 말했다.


“저기. 서희야.”

“네.”

“내가 들은 네 노래 중에 지금이 최고였어.”

“그래요?”

“너 지금 정말 아름답다.”

“네?”

“그 이유가 나라는 게 느껴져서 더 고마워.”


서희가 고개를 끄덕이다 숙이고 정완의 무릎에 두 손을 얹었다.

정완은 서희의 손을 잡고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제 여자친구라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우리 서희 노래 정말 잘했죠?”

“와아아!”

“여러분들 모두가 좋은 분들이어서 그런지 저는 여기가 굉장히 편하게 느껴집니다. 얘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정완은 주위를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자리의 하객들은 순정남녀가 좋아서 모였고, 선한 뜻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봉사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우진과 아리의 오디션 후 2년.

정완은 두 사람이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또다시 느꼈다.

이 자리의 좋은 사람들이 그 증거이자 정완이 두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였다.


“휴우. 벅차네요.”

“···?”

“우진이랑 아리 씨는 씨팝쓰리 때부터 선한 일에 앞장섰고, 여러분처럼 훌륭한 분들을 모여들게 함으로써 세상을 따뜻하게 할 힘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사람을 존경해요. 제가 우진이보다 2년 먼저 태어나서 형이 됐지만, 우진이가 형이고 제가 동생이 되었다 해도 저는 좋았을 겁니다.”

“아!”

“우진이랑 제가 무슨 도원결의처럼 거창하게 의형제 하자고 했던 건 아닙니다. 여우비와 <비 오는 아침>이 세상에 나온 날 우진이가 저한테 편지를 썼고, 저는 걔가 결혼하는 날 답장에 형이라고 불러라, 반말 쓰자, 그냥 이렇게 썼던 건데···.”


정완은 말끝을 흐리다 힘주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술 마시고 기분 좋을 때나 듣는 형 소리를 원한 건 아니었습니다. 힘들 때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한날한시에 죽어도 좋을 만큼 정말로 우진이의 형, 아리 씨의 아주버님이 되고 싶었어요. 아침에 우진이 쓰러졌다고 아리 씨한테 전화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고마웠습니다. 저를 불러주어서요.”

“아아.”

“아시겠지만 오늘은 토요일이라 그 회사 아티스트들은 스케줄이 많아요. 그래서 제가 두 사람 마음 편히 쉬었으면 해서 다시는 서지 않으려했던 무대에 서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 서희 양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고 믿었죠. 우리니까.”

“와아!”


서희가 정완의 손을 깍지 끼어 잡아주었다.


“우진이는 아까 저녁 먹고 약 먹고 잘 쉬고 있답니다. 제가 아침에 봤을 때보다 많이 좋아졌대요.”

“와아!”

“이 자리에서 순정남녀와의 만남을 기대한 팬 분들께 두 사람을 대신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진이 걱정하셨던 분들은 이제 걱정 놓으시고 쾌유 기원해주시고, 이 자리에서 저희 노래 즐겨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예!”


우렁찬 답이 나오자 정완은 서희의 손을 꾹 쥐었다가 놓고 연주를 시작했다.

전주가 연주되는 동안 서희가 말했다.


“순정남녀의 두 곡 먼저 부를게요. <약지에 낀 반지>랑 <여행이 끝나도>예요.”

“이어서 저희의···.”

“<사랑나무 아래 소녀>요!”

“감사합니다. 이어서 부르겠습니다.”


정완과 서희는 순정남녀의 축가 <약지에 낀 반지>와 <여행이 끝나도>를 부른 후 두 사람의 노래인 <사랑나무 아래 소녀>까지 불렀다.

특히 하객들은 <사랑나무 아래 소녀>를 매우 집중하여 들으며 입을 떡 벌렸다가 노래가 끝난 후 한동안 박수를 쳤다.


그런데 네 곡이 끝났는데도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정완이 다시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여우비도 방송에서 보셨죠?”

“예.”

“여우비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고, 저는 시청자 분들께서 이 팀을 꾸준히 응원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 2라운드 방송까지 보셨을 텐데 그 녹화가 9월에 있었어요. 서희의 지금 노래를 들으셨다면 그때보다 더 성장한 게 느껴지셨을 겁니다.”

“예.”

“앞으로 순정남녀뿐 아니라 여우비와 민은별 양도 많이 사랑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서희 씨는요?”

“이 사람은 제가···.”

“와아아!”


노래를 마친 후보다 더 큰 함성이 나왔고, 서희는 정완을 툭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신랑 신부님이 계시는 자리에서 제가 이러면 안 되는데.”

“됩니다!”

“HAP님 SS 맞습니까?”


앞쪽 테이블에서 한 하객이 질문하자 정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근데 지금 제 얘기도 인터넷에 올려주실 수 있나요?”

“예.”

“미투리 밴드와 SS를 기억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SS란 이름을 쓸 일이 없을 거예요.”

“왜요?”

“SS는 제가 미투리 밴드 멤버일 때 썼던 이름입니다. 저는 밴드를 탈퇴한 후 많이 변했고 가수로서 무대에 오를 생각도 없습니다. 앞으로 저는 작곡이나 프로듀싱만 할 거라 HAP란 이름을 쓸 겁니다. 미투리 밴드의 팬들께 죄송합니다.”

“예명에는 뜻이 있나요?”


신부의 물음에 서희가 긴장했는데 정완이 바로 답했다.


“저는 노르웨이 피아니스트인 호콘 아우스트뵈(Hakon Austbø)의 연주를 좋아합니다. 그분 이름과 성의 첫 글자랑 피아니스트의 P를 붙여서 HAP라고 했죠. 이젠 프로듀서의 P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SS는요?”

“제가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스티븐 스틸스(Stephen Stills)의 이름에서 땄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서희의 눈이 커졌다.

정완은 서희를 향해 눈을 찡긋한 후 하객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한 곡 더 부르고 물러가려고 합니다.”

“와아아!”

“아까 수원에서 축가를 마치고 차에서 깜빡 잤습니다. 눈을 떴는데 이 사람이 저를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어땠어요?”

“저희 오늘이 1일인 거 아시죠? 솔직히 정말 좋았습니다. 할 말도 생각이 안 나는데 이 사람은 예쁘고, 그냥 입만 헤벌리고 멍 때리고 봤어요. 꿈인 줄 알았어요.”

“하하!”

“그래서 신랑 박연규 군과 신부 주지민 양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때 생각났던 노래를 지금 부르겠습니다.”

“해주세요.”

“와아!”

“두 곡을 한 절씩 부를 건데 아시면 따라 불러주세요.”


정완은 생소한 곡을 연주하다가 한 음씩을 리드미컬하게 튕긴 후 분위기를 바꾸었다.

익숙한 멜로디가 나오자 하객들이 환호를 울렸고 서희의 눈이 커졌다. 정완이 이런 노래를 고르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완이 노래를 시작하자 서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식장 한쪽에서 노래를 듣던 나영은 피식피식 웃었다.

모닝커피가 아니라 이브닝커피였던 것만 빼고 도입부 가사의 내용이 아까의 상황과 똑같았다.

어쩌면 정완은 잠을 잤던 게 아니었는지 모른다.


하객들은 영어 가사 부분을 따라 부르며 호응해 주었다.





<Sweet Dream>(1절) 원곡 : 장나라 / ‘내 사랑 팥쥐’ OST


[It's gonna be another day with a sunshine.

햇살은 나의 창을 밝게 비추고

반쯤 눈을 떴을 때 그대 미소가 나를 반겨요.]


내 볼에 살짝 입 맞추고 사랑한다고 속삭였죠.

내 머리맡에 모닝커피 혹시 내가 꿈을 꾸나요.


It's gonna be another day with a sunshine.

햇살은 나의 창을 밝게 비추고

반쯤 눈을 떴을 때 그대 미소가 나를 반겨요.


When we can get together I feel paradise.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 지금 내 곁에 그대가 있잖아요.


[너무 흔해서 나조차도 싫어했었던 내 이름도

왠지 그대가 불러주면 예쁘게만 느껴지네요.]


It's gonna be another day with a sunshine.

그대가 나를 아름답게 하네요.

나를 안아줄래요. 사랑한다고 말해줄게요.


When we can get together I feel paradise.

마치 난 영화 속에 주인공처럼

사랑받기 위해서 그대 맘속에 다시 태어난 거죠.


지금 이 순간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겠죠.

깨지 않게 해줘요.

Don't Break it, 난 이 꿈 안에서-


(전조 및 변주)





<마법 소녀>(2절) 작사 : 전현수 / 작곡 : 서우진 / 노래 : 전현수


그래 크게 외쳤지

철 들자, 더 잘 하자, 네 곁에 있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담 나, 뭐든지 다 하고파.


우리가 선 캠퍼스, 그녀와 내 캔버스

수줍은 내 고백에 환하게 미소 답해

그녀는 마법 걸고, 나는 웃고 또 웃네.


문득문득 생각해

나의 이 영혼이 그녀의 지팡이 돼

우리 세상 밝혀줄 꿈이 되는 마법을.


이제는 기도하지

그 미소 그 마법이 절대 안 끊어지기.

그녀와 내가 함께 바라보고 바라기.





정완은 꿈에서 깼을 때 느꼈던 마음으로 <Sweet Dream>을 선곡했고, 서희와 연인으로서 함께 만든 첫 음악의 키워드를 ‘소녀’로 정의하다가 마법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동생이 작곡한 소울 곡 <마법 소녀>까지 불렀다.

하객들뿐 아니라 서희도 눈을 크게 뜨고 정완의 노래를 들었다.


정완은 두 곡 모두 원곡에 가깝게 불렀다.

<Sweet Dream>은 원곡과 같은 여자의 음역으로 바이브레이션조차 거의 넣지 않고 부드럽게 부르다 마지막에 고음을 길게 터뜨리며 다음 곡으로 연결했고, <마법 소녀>에는 전현수와 비슷한 소울을 가미하며 바이브레이션뿐 아니라 애드리브까지 섞어 불렀다. 다양한 장르의 보컬리스트들을 가르쳤던 트레이너였기에 가능한 선곡과 가창이었다.

몇몇 여자들은 정완이 서희에게 눈웃음을 보내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두 주먹을 얼굴에 붙인 채 노래를 듣기도 했다.


정완이 노래를 마치자 서희는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와아. 정말 잘했어요. 멋있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정완은 서희를 향해 미소 띤 눈으로 손을 내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하객들을 향해 인사했다.


“지금까지 작곡가 HAP.”

“강서희였습니다. 감사해요.”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두 분 잘 어울립니다. 축하해요!”


정완과 서희는 하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서희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그럼 머리 좀 쓰다듬어주지?”

“아, 네.”


서희는 자신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장난스럽게 정수리를 들이미는 정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


“근데 아까 그 예명이요.”

“어?”

“저는 HAP가 하 프로듀서의 세 글자고 SS는 실버스타인 줄 알았어요.”


정완은 고개를 끄덕이다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맞아.”

“네?”

“네가 옆에 있는데 SS가 전여친 이름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 더구나 전여친이···.”

“그건 알겠는데 HAP는 그냥 뜻대로 얘기해도 되잖아요.”

“그럴까 했는데 사람이 너무 단순해 보일 것 같아서.”

“네? 풋!”


서희가 입을 막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름을 단순하게 붙여놓고 단순해 보이기는 싫다니.


“그럼 그 피아니스트랑 기타리스트 이름은 뭐예요?”

“전에도 SS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스티븐 스틸스라고 얘기했어. 그래서 HAP도 호콘 아우스트뵈라고 한 거고.”

“그러니까 예명 먼저 단순하게 짓고 음악가들 이름은 나중에 갖다 붙인 거예요? 단순해 보이기 싫어서?”

“응.”

“풋! 앞으로는 이름 붙일 일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아무리 고양이라고 가비, 나비, 다비, 라비가 뭐예요?”

“어. 알았어. 난 그런 거 못하겠어.”

“되게 이상해. 다른 건 다 잘하면서 그걸 못해요?”

“···.”

“다솜아지는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그건 다르지···. 머리 아팠어.”


정완과 서희는 차에 탄 후 각자의 스마트폰을 켰다.

서희의 폰에 수십 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는데 대부분 남자친구가 생긴 것을 축하한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 멋진 공연 잘 봤다는 말이었다. 서희는 ‘영상 잘 봤어요. 축하해요. 행동에 옮기는 그 힘이 부럽네요.’라는 세은의 메시지에 감사하다고, 언니도 할 수 있다고 답장했다.

정완에게도 프로듀서 채용 관련하여 보낸 우진의 메시지와 함께 한결과 한울, 통인시장에서 만났던 봉길 등 지인들의 축하 문자가 와 있었다.


뮤컬트 팀원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의 말들이 눈에 띄었다.

하트헤르의 유찬이 ‘서희 누나가 오늘부터 1일인 남친이랑 순정남녀 행사 대타 뛰고 있어요.’라고 글을 올린 후 <C-POP Artist> 홈페이지에서 찾은 ‘강서희 카리스마 실종사건’이라는 게시물의 링크를 걸었고, 다른 팀원들은 게시물에 달린 동영상을 시청하고 너나없이 챗을 달았다.


두 사람의 무대에 대해 도진은 ‘서희 누나가 SS님, 아니 HAP님이랑 식장 깨기 하시네. 근데 피아노 정말 예술이다.’라고 했고, 지혜는 ‘언니가 왜 상사병 걸렸는지 알겠네. 피아노보다 미소가 더 예술. 나였음 이미 죽어 뼈까지 썩었을 듯’이라고 이야기했다.

미란은 ‘이거슨 일인가 데이트인가. 나 좋단 작곡가는 없나. 엄청 예뻐해 줄 수 있는데’라고 했고 예린은 ‘자작곡만 4번째 반복 청취 중. 소리 더 잘 들리는 영상 있음 알려주세요.’라고 했다.

서희의 눈길은 마지막에 은별이 남긴 ‘둘 다 좋아 보여 다행이다’라는 글에 한참 머물렀다.


서희는 새삼 은별이 고마웠고, 이따 정완과 헤어진 후 은별과 통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과 동시에 마음이 아파졌다. 정완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저녁인데 서울로 진입하는 도로가 막히지도 않는 게 문득 야속했지만 서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완은 제 집 앞에 놓아둔 탑차를 몰고 속초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여기에 와야 한다.


정완이 우진에게 전화를 걸자 서희는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예식장에서 축가 중이라며?]

“오늘은 다 끝났어요.”

[밥은?]

“먹었어요.”

[엄마도 영상 봤어. 아까 서준이한테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무슨 댓글이 오백 개가 넘어? 보느라고 눈 아파 죽겠어.]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근데 상황이 급해서···.”

[상황이 급한 것 치곤 너무 행복하던데.]

“···.”

[네 이모들이 전화해서 나한테 뭐라는 줄 아니?]


이 말을 듣고 서희가 떠올린 답은 ‘누가 그 엄마에 그 딸 아니랄까봐’였다.


[네가 남자에 눈이 멀어서 정신이 나갔대. 아무리 걔가 좋아도 그렇지,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티를 내면 어째?]

“···.”

[아빠가 너보고 지 혼삿길 지가 막는단다. 그럴 거면 그 순정남녀? 차라리 걔들처럼 약혼을 하래.]

“정말요?”

[어머나, 얘 좀 봐!]


어머니의 외침에 서희는 몸을 움츠리며 입을 비죽였다.


[순정남녀에 걔 동생이 독감 걸려서 너희가 대신 하는 거라며.]

“네.”

[언제까지 하는 거야?]

“내일까지요.”

[걔 지금 옆에 있어?]

“네.”

[걔도 너 어지간히 좋아하더라. 피아노 치면서 너 안 보면 눈에 가시라도 나온다든?]

“···.”

[너 하여튼 적당히 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 많은 데서 너무 좋아하는 모습 보이지 마.]

“알았어요.”

[그리고 걔한테 우리 얘기했어?]

“아니요. 아직.”

[잘 얘기하고, 우린 언제든 괜찮으니까 너희들 시간 맞춰서 정해. 서울에서 보자고 하면 올라갈 테니까.]

“아니에요. 저희가 내려가야죠.”

[하여튼 조심하고 밥 챙겨먹으면서 해. 사람들 많은 데서 너무 좋아하지 말고.]

“네. 고마워요.”

[엄마가 문자를 보냈으니 전화는 해야겠는데, 애인 옆에 있으니까 빨리 끊고 싶어서 아주 다 고맙지?]

“···.”

[알았으니까, 하루 종일 여기저기 다니면서 노래하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얼른 들어가 자.]

“네. 엄마도 푹 쉬어요.”


서희가 통화를 마치자 정완이 물었다.


“어머님이야?”

“네.”

“전화 드릴 시간도 없었지. 우리 영상 돌아다닌다고 혹시 싫어하시지는 않아?”

“그건 아닌데 저보고 적당히 좋아하래요. 혼삿길 막힌다고.”


정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희의 손을 잡았다.


“부모님 입장에서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시지. 보는 눈이 많으니까.”

“네.”

“내일은 식장에서 너를 좀 덜 볼게. 안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알았어요.”


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완의 어깨에 기댔다.

문득 그가 자신에게 오해하지 말라고 몇 번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은 그 말은 기억하지 못하고 오해하곤 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피곤하지?”

“전 괜찮은데 PD님이 힘들죠.”

“너 고생하는데 나 때문에 죽만 먹고.”

“괜찮아요. 우리니까요.”

“그래. 내일은 우리도 식장 뷔페 먹자. 나 잠 많이 자고 올게.”

“네.”


정완은 한참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는 마지막 행사 때 민망했던 기억을 떠올리다 물었다.


“아까 장나라 노래 부를 줄은 몰랐어요. 왜 그거 부른 거예요?”

“자다가 꿈을 꾸었어. 그래서.”

“꿈이요?”

“응. 꿈이 아주 선명했어. 내가 옛날에 겪었던 일을 다시 봤는데 일부는 기억이랑 달랐어. 꿈 깨는 순간 네가 날 보는 게 꿈이랑 너무 자연스럽게 연결돼서 정말 신기했거든. 그래서 그 노래만 생각났어.”

“무슨 꿈이었는데요?”


정완의 기억이 두 번째 행사를 마친 후 잠들었을 때로 나아가며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분명히 내가 스무 살 때였어. 지금까지 내가 대전에 간 게 그때 딱 한 번이었으니까.”

“대전에 왔었어요?”


날씨가 참 좋은 봄이었을 것이다.

정완은 기타 연습을 하다 피크가 부러져서 조치원의 악기점을 뒤졌지만 그가 찾는 피크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청주로 갔겠지만, 그는 기타 관련 물품을 최대한 다양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외버스를 타고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대전으로 갔다.


“대전 사는 동기가 알려줬어. 삼촌이 둔산동에서 악기점 하는데 없는 게 없고, 자기가 전화해 놓을 테니까 싸게 사라고.”

“어? 저희 집도 둔산동이에요.”

“그렇구나.”


정완은 고개를 한참 끄덕이다 말을 이었다.


“거기 가서 이것저것 보다가 피크랑 기타 줄 사고 돌아갈까 했는데, 처음 와본 도시가 깔끔하고 조용해 보여서 구경하느라 한참 돌아다녔어. 그러다 도서관이 보여서 들어갔는데, 입구 바로 오른쪽 등나무 아래에 여고생쯤 돼 보이는 애가 있었는데 하마터면 내가 걔한테 갈 뻔했지.”

“애가 예뻤나 보네요?”

“멀리서 봐도 허리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 정말 단정해 보였어. 하늘 빛 원피스 입고 허리 근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노란 리본 달린 파란 머리띠 차고. 뭐랄까, 팬시 노트에 있는 예쁜 여학생 그림 같았어.”

“···!”


서희의 눈이 커졌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어. 근데 거기 주위에 아무도 없이 걔 혼자 앉아 있는데 가면 이상한 놈으로 볼 것 같고 민망해서, 당시엔 그냥 그 자리에서 걔를 한참 보다 건물로 들어갔지. 근데 꿈에서는 내가 그쪽으로 가더라고.”

“어어.”

“걔 옆모습이 보이는데 울 것 같은 거야. 무슨 일이 있나 해서 보니까 자기 노트를 펴고 있었어.”

“노, 트요?”

“노트에 글귀를 보고 이유 알았어. 나도 암송하는 시였으니까.”

“뭐, 뭐였는데요?”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앗!”

“그거 보고 나도 마음이 가라앉아서 가만히 있다가 걔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꿈이 깼는데, 걔 얼굴이 보이려는 곳에서 네가 나를 보고 있었어. 마치 걔가 너였던 것처럼.”


서희의 커진 눈이 마구 떨렸다.

정완은 9년 전 자신이 자주 앉았던 도서관의 등나무 아래와 자신이 맑은 날 입던 옷과 좋아했던 머리띠를 말했다.

그리고 그 시절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도 여린 마음을 헤집어놓았던 구절만을, 마치 그가 백석 시인인 양 자신의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시 서희는 그런 애틋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가 자신에게 산골로 가자고 하면 더러운 세상 같은 건 언제라도 버리고 마가리(오막살이)를 마다하지 않고 떠나겠다는 꿈을 품었었다.

분단된 땅에서 평생토록 백석을 그리워하다 간 자야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서희는 정완의 팔을 두 팔로 감으며 그에게 기댔다.

꿈속의 정완처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정말.”

“어?”

“사실 저, 지난달에도 그 시 읽으면서 울었어요. 그 시를 처음 봤을 때 기억이 되살아나서요.”


정완은 반대편 손으로 서희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제가 트레이닝 부탁했을 때 PD님이 저보고 한 손에 아빠 회사, 다른 손에 오디션 들고 있다고 했죠? 그때 다 버리라고 했던 말뜻 알았어요.”

“···.”

“PD님의 나타샤가 되고 싶었어요. PD님이 가자면 마가리, 아니 불구덩이라도 따라가고 싶었어요. 오디션이고 아빠 회사고 손에 든 거 다 버리더라도 가고 싶었어요.”

“서희야···.”

“그 원피스는 낡아서 버렸지만 머리띠랑 노트는 아직 대전에 있어요.”

“뭐?”


정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그 애가 정말로 너···.”

“저는 오늘 PD님의 나타샤가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아니었어요. 9년 전에 저는 이미 PD님의 나타샤였네요.”

“아.”

“나중에 노트 들고 그 도서관에 같이 가요. PD님이 그 머리띠 제 머리에 채워주세요.”

“그래. 그럴게.”

“저 머리 기를까요? 그 머리띠는 머리가 길어야 어울리는데.”

“아니야. 그거 때문에 힘들게 그러지 마. 지금이 더 좋으니까.”


서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에 처음 본 줄 알았는데 9년 전에도 같은 곳에 있었구나.”

“우리 인연이 길었네요. 그게 이렇게 고마울 줄은 몰랐어요.”


정완은 고개를 돌려 서희의 정수리에 입술을 대고 눈을 감았다.

9년 전 느꼈던 향기가 꿈을 타고 날아와 지쳤던 그의 세월을 보듬어주었다.





서희의 집에 가까워지자 나영은 두 사람에게 내일의 스케줄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일 첫 행사는 12시 반 남양주예요. 11시 반까지 언니 집 앞으로 갈게요.”

“남양주 어디예요?”

“호평동이요.”


내일은 다섯 건이 예정되어 있고 마지막 행사는 오후 7시 30분에 일산 신도시다. 남양주에서 시작하여 경기도 광주와 여주, 이천을 거쳐 일산으로 오는 동선으로 이동 거리가 상당히 긴 편이고, 이천에서 일산으로 오는 길은 일요일 오후의 교통체증에 걸릴 가능성도 있다.

정완은 12시까지 식장으로 직접 오기로 했다. 그는 속초에서 와야 하므로 식장으로 바로 오는 것이 서울 쪽보다 한 시간 이상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부대표님이 내일 행사 끝나고 두 분 다 회사에 들어올 수 있는지 물어보셨어요.”

“여원쌤이?”

“네.”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완을 보고 말했다.


“알았어. 끝나고 회사 들어갈게. 그 뒤에 남양주 태워다줘.”

“네. 회사에는 제가 얘기해둘게요.”


나영은 정완의 탑차 옆에 차를 세웠다.


“나영아, 고생했어. 어서 가 쉬어.”

“네. 내일 뵐게요. 고생하셨어요.”


나영의 차가 사라지자 정완은 서희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서희가 그의 팔을 세게 붙잡으며 제자리에 섰다.


“어?”

“바로 가요.”

“너 바래다주고 갈게.”

“저 PD님 도착했다고 연락 올 때까지 안 잘 거예요. 저 일찍 자는 거 바라시면 여기서 가세요.”


서희의 하루는 끝나가지만 정완은 이제 이 탑차를 몰고 속초로 가야 한다.

그게 제 탓도 아닌데 서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이런 데서 할 수가 없어. 5분만 시간 줘.”


서희는 제 뜻을 관철하지 못하고 정완의 팔을 잡으며 집으로 향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그와 더 함께할 수 있어 좋은 마음도 있었다.


“여원쌤이 PD님한테 하실 말씀이 뭘까요?”

“프로듀서 채용 관련된 걸 거야. 아까 제수씨가 그분이랑 통화했다고 하더라고.”

“아.”

“너희 회사는 프로듀서를 경력자만 뽑고 공채 절차도 까다롭더라고. 정규앨범 프로듀싱 경력이나 포트폴리오 있어야 하고, 다른 프로듀서 추천서도 받아야 해.”

“정규앨범 경력은 있으니까 우진 씨한테 추천받으면 되겠네요.”

“그렇게 될 리가 없겠지만 된다고 해도 안 해. 공정하지 않으니까.”

“채병안 PD님은요?”

“싫어.”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정완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 안에 들어가도 돼?”

“···!”

“신발은 안 벗을게.”


서희는 깜짝 놀랐지만 곧바로 현관문을 열었다. 뒤늦게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 마음도 모르고 등 떠밀어 보냈다면 안타까웠을 것이다.


문이 저절로 잠기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완전히 단절되자마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갔다.

둘은 가슴을 꼭 맞대고 서로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맞닿은 볼이 불에 델 듯 타오르며 가슴에 지진이 일어났다.


“우리 서희 참 따뜻하다.”

“PD님도요.”

“나한테 네 체온이랑 향기 가져갈 시간은 조금이라도 줘야지 않아?”

“전 빨리 보내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피곤하니까.”

“난 앞으로도 헤어질 때는 꼭 안아주고 갈 건데.”

“알았어요. 안 그러기만 해봐요.”


정완은 맞닿은 볼을 떼더니 서희의 볼에 입을 맞추고 다시 껴안았다. 감은 눈에 초승달이 그려졌다.

둘은 서로의 귓전에 따스한 입김을 남기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저도요.”

“네가 참 아름다웠고, 난 이런 마음이 얼마만인지도 모르겠어.”

“저도···. 그런 말 왜 자꾸 먼저 해요?”

“앞으로 이런 얘긴 내가 먼저 할게. 넌 그날 속초에 온 걸로 할 얘기 다했으니까.”

“저도 할 거예요. 말리지 마요.”

“아. 가기 싫다.”

“저도 보내기 싫어요. 근데 가야죠.”

“그래야겠지?”

“네. 내일 잘 만나려면 가야죠.”

“내가 간 자리에 여운이 길게 남았으면 해. 욕심일까?”

“아니요. 저는 그것까지 즐기고 있을게요. 운전 조심해요.”


두 사람은 품에서 떨어져 나와 손을 맞잡고 눈을 지그시 응시하다 서로의 볼에 입술을 남겨주었다.

저로 인해 빨개진 연인의 얼굴이 마냥 귀여워 또, 그리고 또 양 볼에 입을 맞추었다.

볼 뽀뽀만으로 밤을 새울 것 같아 서희는 아쉬움을 접으며 정완의 손을 놓아야 했다.


“이제 가요. 더 늦으면 안 돼요.”

“응. 갈게.”

“피곤하면 꼭 쉬었다 가고 조심해요.”

“알았어. 도착하면 전화할게.”


정완은 짧게 손을 흔들어준 후 현관문을 나섰다. 문이 저절로 잠기는 소리가 아쉬웠지만 경쾌했다.

서희는 곧바로 창가에 붙어 섰다.


창밖에 나타난 정완이 문득 뒤돌아 손을 흔들었고 서희 역시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잠시 후 삐죽하니 보이던 그의 탑차 앞부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까 어머니와의 통화가 생각났다.


“이런데 어떻게 적당히 좋아하라는 거야. 엄마도 연애할 때 아빠가 무지 아껴주셔서 정신 못 차리셨다면서. 내가 누구 딸인데.”


이전 연애 때도 첫날은 있었다.

하루 종일 자신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연인으로부터 열 번 넘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좋았다.


그런데 지금 이 감정은 결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

단지 오늘이 첫날이기에 피어난 감정만은 아니었다. 좋아한다고, 행복하다고 외치고픈 마음도 커졌지만 저 남자를 존경하는 마음 역시 깊어진 하루였다.


정완의 모든 행동과 화법이 자신을 조심스레 대하고 있었고 자신은 거기에 차분히 따랐다. 연인사이의 흔한 스킨십도 그의 손끝을 거치면 의미가 되었다.

혹 그가 삐딱하게 나갔다면 자신도 삐딱하게 나가지 않았을까. 만약 조금 전 그가 자신을 안아 들고 침대로 갔다면 자신은 침대에 도착하기 전에 그의 옷을 풀어헤쳤으리라.


물론 그랬다면 지금 같은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단단하기에 서희는 더 행복했다.


“네가 쓴 <어땠을까> 랩 가사 보다가 내가 네 첫사랑한테 정말 나쁜 새끼라고 했지? 그 말 해놓고 후회돼서 잠을 못 잤어. 그때였어. 내 마음속에 네가 있다고 느꼈던 게···. 너한테 말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조심하면서 보게 됐어. 넌 강해 보이지만 감정은 유리 같이 섬세하고, 깨지면 다시 붙일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지더라.”


아까 차 안에서 했던 정완의 말이 기억났다.

서희는 몇몇 노래에서 들었던 ‘서로 물든다’는 표현을 좋아했는데, 오늘 하루가 바로 그렇게 서로 물들어간 시간이었다.


두서없는 생각을 주워섬기던 서희의 눈이 문득 빛났다.


“아! 그거 가사 써야겠다. 먼저 씻고···. 곡 못 쓰겠다고 하면 나도 체온 못 주겠다고 할까? 풋!”


서희는 정완이 말한 꿈 이야기, 즉 9년 전 자신이 나타샤가 되었던 사연을 가사로 쓰고 싶었다. 이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전문을 찬찬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입을 막고 웃었지만 체온을 못 주겠다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그녀 자신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작가의말

사정이 있어 예약연재로 올립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릴게요.

다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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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Round 8.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21.09.01 66 5 26쪽
51 Welcome. 하루를 마무리할 때 21.08.28 60 5 19쪽
50 Change. 모두의 힘으로 21.08.27 65 5 20쪽
49 Round 6. 아쉬움과 미련이 없도록 21.08.23 74 5 28쪽
48 Ago.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21.08.18 84 6 29쪽
47 Confidence. 생각할 시간 일주일 21.01.04 93 5 27쪽
46 Round 5. 어느 배우와의 이별 +2 21.01.01 88 6 28쪽
45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2 20.12.04 116 6 26쪽
44 Self. 돌아선 길 위에서 +2 20.11.20 124 6 30쪽
43 Encore. 복수의 시간 +2 20.11.13 116 6 26쪽
42 Special 2. 바보가 된 천재들 +2 20.11.09 118 7 28쪽
41 Special 1.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 +2 20.11.02 132 6 28쪽
40 Preparing. 서로를 만나는 이유 +2 20.10.26 132 6 26쪽
39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4 20.08.18 158 8 22쪽
38 Composer. 눈은 이미 맞았고 +2 20.08.13 147 7 21쪽
37 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2 20.08.11 135 8 26쪽
36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2 20.08.04 152 8 26쪽
35 Innocence. 꿈이라고만 여겼던 것 +2 20.07.30 169 7 23쪽
34 Producing. 입 헤벌리고 표정 관리 못하지만 +2 20.07.28 165 9 26쪽
»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2 20.07.21 175 7 38쪽
32 Along. 대타로 때려낸 홈런 +4 20.07.16 171 9 30쪽
31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6 20.07.12 158 8 34쪽
30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4 20.07.07 167 10 22쪽
29 Opening. 속 깊은 이야기들 +4 20.07.05 166 9 28쪽
28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6 20.06.30 176 9 20쪽
27 Quest. 그녀의 마지막 미션 +2 20.06.25 156 10 29쪽
26 Showdown.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다 20.06.18 164 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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