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Auditi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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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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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8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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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DUMMY

12월 17일 새벽 1시 20분.

CBC 라디오 스튜디오에서는 주말 심야 프로그램인 <순정남녀의 편안한 밤>이 한창 진행 중이다.


정완이 우진과 아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노래와 광고가 끝나고 부스 안에 ‘ON AIR’ 불이 들어오자 우진이 먼저 멘트를 시작했다.


“<목소리 초대>입니다. 오늘은 10분 일찍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청취자 분들께서 듣고 싶어 하셨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여기 스튜디오에 모셨어요.”

“아까 <C-POP Artist season 5> 3라운드 첫 방송이 있었지요. 거기서 여우비가 저희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 캐스팅되었다는 사실, 청취자 분들도 아셨을 겁니다.”

“그리고 방송 끝나자마자 저희 회사에서 보도자료를 배포했죠. 지난주 주말에 저희를 대신해서 여우비의 강서희 씨와 함께 축가를 불러주었던 분이 저희 회사에 공채 입사했다고요.”

“오프닝 때 예고 드렸던 대로 그분, 그러니까 서희 씨의 연인이자 제 형이 스튜디오에 나와 있습니다.”

“저를 끔찍이 아껴주시는 아주버님이에요. HAP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HAP입니다.”


서희는 회사 숙소의 침대에 앉아 라디오를 듣다 정완의 목소리가 들리자 미소를 올리며 박수를 쳤고, 위층에 있던 은별은 그녀를 보고 빙긋 웃었다.

서희의 옆에는 예린이 있었다.


“청취자 분들께 인사 부탁드릴게요.”

“어. 먼저 제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셨던 청취자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순밤>은 청취자들의 숙면을 추구하는 방송이고 저 역시 이 프로 애청자인데, 저는 오늘 숙면하기는 글렀네요.”

“왜요?”

“아리 씨하고야 처음부터 존댓말을 썼으니 괜찮은데, 우진 씨 이름에 ‘씨’ 자를 붙이고 존댓말을 써야 하는 이 상황이 억울해서 저는 방송 끝나도 잠 못 잘 것 같습니다.”

“후후. 제가 HAP 씨한테 존댓말을 듣게 되어서 아까부터 기분이 좋았나 봅니다.”


우진뿐 아니라 정완의 옆에 앉았던 PD도 웃었고, <순밤> 청취자게시판의 글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리 역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오후에 제작진 부탁받고 제가 급하게 섭외 전화를 드렸었어요. 그 뒤에 서희 씨하고도 통화를 했는데, 서희 씨는 걱정이 안 되는데 HAP 씨 본인이 여기 나오는 걸 많이 걱정하셨다고 들었어요.”

“부족한 사람을 불러주셨으니 감사합니다만, 라디오에 단독으로 출연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도 되고, 프로그램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요.”

“사실은 저희도 걱정은 안 됐거든요. 오늘로 입사하신 지 정확히 일주일째인데, 그 동안 HAP 씨가 회사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다 봤으니까요. 워낙 논리적으로 말씀도 잘하시고 해서 섭외하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우진이 약간의 틈을 두고 말했다.


“노래 먼저 듣고 자세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HAP 씨와 서희 씨가 함께 불렀던 두 곡 중 첫 번째죠. <사랑나무 아래 소녀>입니다.”

“청취자 분들한테 이 노래에 관한 뒷얘기 전해주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올게요.”


정완은 <사랑나무 아래 소녀>와 <소녀 나타샤>가 만들어진 과정을 전한 후 청취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사랑나무 아래 소녀>와 <소녀 나타샤>는 몽환적이고 감성이 복잡하다는 공통점이 있었거든요. 어떤 이유가 있나요?”

“꼭 그런 분위기로 만들려던 건 아닙니다. 그냥 지금 저희 분위기나 이야기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노래가 나왔다고 보시면 돼요. 서희 씨의 음악적 기량이 많이 향상되어서이기도 합니다.”

“청취자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우진 씨가 병원에서 수액 맞으면서 형한테 연락해 달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HAP 씨한테 전화 드렸는데 30분도 안 돼서 서희 씨랑 같이 왔어요. 그 자리에서 저희 행사 대신하는 문제랑 HAP 씨의 프로듀서 입사에 대해서 상의했는데 갑자기 HAP 씨가 서희 씨를 데리고 나가더라고요. 조금 뒤에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두 분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거든요. 서희 씨가 소녀가 된 게 그때부터였죠.”

“아니 제, 아니 아리 씨. 그 얘기를 왜···.”

“헐. 뭐야? 매아리 지금 내 남친한테 공격 들어갔어? 나 없는 데서 내 얘기로?”


서희는 정완의 당황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고 정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래할 때야 소녀든 아이든 될 수 있지만 실제의 모습도 그렇다고 알려지는 건 서희에게 좋을 게 없다.

서희의 어머니에게 혼삿길 막히니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주의를 들은 게 불과 몇 시간 전이다. 이 방송을 서희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들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정완은 자신이 얼빠진 남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어. 그때 서희 씨는 제 고백 받아주면서 제가 하도 얼빠져 있으니까 저한테 맞춰주느라고 그랬던 겁니다. 그 전까지 저희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어요. 그러니 그 사람 성격상 남자친구 됐다고 저한테 바로 뭐라고 할 수가 없었겠죠.”

“그래요?”

“여우비가 뮤컬트 엔터에 캐스팅된 날 저와의 계약이 끝났고, 다시 서희 씨를 만난 건 며칠 전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취한 건지 홀린 건지, 지금도 제 주변 상황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뭐가 뭔지 모르겠고 정신도 못 차리겠습니다. 곡에 그런 마음이 그대로 담겼다고 보시면 돼요. 그 사람과의 이야기로 또 곡을 쓴다면 한동안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멜로디만 생각날 것 같습니다.”


한편 정완은 미투리 밴드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 아버지의 투병 및 타계로 인해 밴드에 지속적으로 부담을 주어서라고 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연을 밝히며 피아노를 버리고 기타를 잡은 후 세상을 미워하며 음악을 했다고 말했다.

음악을 이겨보겠다는 뒤틀린 마음으로 만들었던 노래를 좋아해준 팬들에게 감사와 미안함의 인사를 전하며, SS라는 이름을 더 쓰지 않음을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정완은 음악계를 떠났던 이유에 대해 음악으로 생계를 꾸릴 수가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돌아온 이유 역시 우진이 프로듀싱 때문에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그 일을 함으로써 우진의 짐을 덜고 자신의 생계까지 가능해지는 한편, 서희를 자주 만날 수 있고 그녀와 화제를 공유하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우진은 정완과 의형제가 된 일과 함께 그가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 경력직 프로듀서로 입사한 과정을 전했다.

프로듀서가 급한 상황이었기에 회사에서는 정완을 특별채용 형식으로라도 입사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정완은 공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입사하면 뒷말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프로듀싱한 모든 앨범과 프로듀서 추천서까지 갖추어 공개채용 절차에 의거하여 지원서를 접수했다.


정완에게 추천서를 써준 프로듀서는 몇 달 전까지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의 수석 프로듀서였던 한성혁 PD였다.

정완은 자신이 다녔던 대학교에 문의하여 성혁과 연락했고, 성혁은 여원에게 전화하여 자신의 후임이니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HAP 씨께서 회사에서 제일 많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티스트가 아니다’거든요. 알고 계시나요?”

“예.”

“지금 제 얘기 듣고 청취자 분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예요. 담여원 선생님을 비롯한 저희 회사 아티스트들도 그 말을 납득 못하고 있습니다. HAP 씨는 피아노와 기타, 두 악기를 굉장히 잘 연주하시지요. 보컬트레이너도 하셨고, 음역이 아주 넓은데 모든 범위에서 가창력이 좋고 감성도 대단하시고요. 심지어 고음의 한계는 여자 보컬들이랑 비슷하거든요. 식장에서 여자 노래를 여자처럼 부르기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아티스트는 시청자나 팬들 앞에서 빛나는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실력도 물론 필요하지만 중요한 다른 여러 요소들도 많아요.”

“그런가요?”

“예. 저는 기본적인 실력이 있다면 그 다음엔 다른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시청자나 팬 분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첫 번째로 보고, 그 다음은 무대에서 빛나고자 하는 욕심, 즉 열정이라고 봅니다. 그 외에도 대중에게 줄 수 있는 감동이나 긍정적인 영향력도 있어야죠. 그리고 시청자 분들로 하여금 저 사람의 팬이 되어야겠다, 저 사람을 또 보고 싶다, 다음 무대가 기대된다, 혹은 공연장에 가고 싶다고 마음먹게 만드는 힘, 그러니까 흡인력도 있어야겠습니다. 갑자기 말하려니까 생각이 다 안 나네요.”

“네.”

“제 실력은 아티스트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면은 부족하고 그걸 채울 욕심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티스트가 아니죠. 다만 프로듀서는 아티스트가 시청자 분들께 빛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이고, 저는 이 일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서희 씨와는 무대에 설 생각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무대에서도 프로듀서 역할 위주로 할 겁니다. 서희 씨를 빛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게 우리가 함께 빛날 방법이니까요.”

“서희 씨가 중심이 되는 무대로 만들겠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서희 씨와 함께 노래한다고 해도 자선공연에 게스트 정도로 나간다는 거지, 앨범을 내고 활동한다든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상업적인 일은 오로지 프로듀서로만 할 겁니다.”

“그래서 이번 OST 음원 수익금도 기부하시기로 한 거군요.”

“예.”

“이제 이 얘기를 마무리해야겠어요.”

“아. 그러네요.”


1시 45분.

우진이 시계를 보며 말하자 아리가 아쉬운 외마디 소리를 내뱉은 후 말했다.


“HAP 씨, <목소리 초대>에 출연한 소감 말씀해주세요.”

“먼저 <C-POP Artist> 측에 죄송합니다. 출연자도 아닌 사람이 프로그램 밖에서 자꾸 이슈를 만들어내서 프로그램에 누를 끼친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여기까지 나오게 된 건 저를 좋게 봐주신 <C-POP Artist>와 <순밤>, 두 프로그램의 제작진 분들과 시청자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 훌륭한 아티스트들 많은데, 그들이 좋은 음악으로 멋진 모습 보일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프로듀서가 되겠습니다. 응원 부탁드립니다.”

“나타샤한테도 한 말씀 해주세요.”

“예?”

“그 사람이 이 시간에 잠 안 자는 건 제가 잘 알아요. 거기다 남자친구가 라디오 나왔는데 당연히 듣고 있겠죠.”

“어어.”

“전화통화 하는 것처럼 편하게 얘기하세요. 길게 말씀하셔도 돼요.”

“라디오에서는 오디오 3초 이상 비면 방송사고입니다.”

“어, 예.”


우진이 덧붙인 말에 정완이 머뭇거리다 느리고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서희야.”

“꺅!”


라디오를 듣던 예린이 소리치며 서희를 보았다.

서희는 떨리는 손으로 이어폰의 볼륨을 높였다.


“덕분에 오늘도 의미 깊은 하루를 보냈어. 고마워.”

“네. 저도 고마워요.”


서희의 답을 들었을까.

정완의 말은 딱 그만큼의 틈을 두고 이어졌다.


“지쳤던 나를 지켜주고 다독여가며 일으켜준 소중한 사람.”

“···!”

“네 덕분에 나는 마음부터 일상까지 모든 게 바뀌었어. 그 고마움을 말로 다할 수가 없어.”


서희의 커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 슬퍼서는 아니었다.

이어폰 안으로 들려오는 정완의 목소리가 메어 있었다.


“네가 내일도 나로 인해 맑고 밝은 모습이길 바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네 현명함에 한 발 더 가까워진 하루를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네.”

“지금의 마음을 오래 간직하고 싶게 해주어서 고마워. 내일도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낼 것을 약속할게. 잘 자.”


스튜디오의 아리 역시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와아. 멋있는 말이었어요. 서희 씨 좋겠네.’ 같은 말로 대꾸할 수 없었다.

행복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이 없는데도 깊은 행복과 그리움, 사랑이 모두 느껴졌다.


아리가 말을 잇지 못하자 우진이 재빨리 말했다.


“아. 이 라디오를 듣는 분들 모두 아셨을 겁니다. HAP 씨 말씀에 힘이 느껴졌지요. 진심만이 갖는 힘. 최근에 HAP 씨가 작곡한 노래에 진심이 담겼기에 저 역시 그 노래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고맙습니다.”

“끝으로 HAP 씨께서 청취자 분들을 위해 노래 한 곡을 라이브로 불러주시겠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 대해서 저희한테도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우진 씨는 잘 알 겁니다. 이승환 선생님의 작품이니까요.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어 좋습니다.”


정완의 말에 우진이 미소를 머금었다.


“HAP 씨가 전에 불렀던 <화양연화> 들을 때 제 가슴이 저렸습니다. 그건 아니죠?”

“아닙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예요.”

“후후. 어쩐지 알 것 같은데요.”

“그러면 후렴을 따라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청취자 분들도 노래 아시면 마음속으로 불러주세요.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모두의 가슴에 닿을 겁니다.”

“예. 저도 따라 부르겠습니다.”


아리가 마음을 수습하고 말했다.


“HAP 씨, 늦은 시간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해요.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 역시 이 자리에 불러주신 순정남녀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어요. 푹 쉬시길 바랍니다.”

“HAP 씨의 라이브 듣고 전하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저희는 잠시 후에 올게요.”


정완은 PD의 사인을 받고 연주를 시작했다.

전주를 듣자마자 우진의 눈이 커졌다.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임엔 분명한데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가족> 원곡 : 이승환


밤늦은 길을 걸어서 지친 하루를 되돌아오면

언제나 나를 맞는 깊은 어둠과 고요히 잠든 가족들.


때로는 짐이 되기도 했었죠. 많은 기대와 실망 땜에

늘 곁에 있으니 늘 벗어나고도 싶고.


어떡해야 내가 부모님의 맘에 들 수가 있을지 모르고

사랑하는 나의 마음들을 그냥 말하고 싶지만 어색하기만 하죠.


힘이 들어 쉬어가고 싶을 때면 나의 위로가 될

그때의 짐, 이제의 힘이 된 고마운 사람들.


어떡해야 내가 부모님의 맘에 들 수가 있을지 모르고

사랑하는 나의 마음들을 그냥 말하고 싶지만 어색하기만 하죠.


(합창 2회 반복)

[사랑해요 우리. 고마워요 모두. 지금껏 날 지켜준 사랑.

행복해야 해요. 아픔 없는 곳에 영원히 함께여야 해요.]


사랑해요 우리.

고마워요.





정완은 남은 시간을 확인하여 2절을 생략하고 후렴으로 넘어갔다.

스튜디오의 우진과 아리, 숙소의 서희와 은별, 예린뿐 아니라 청취자들도 고요히 잠든 가족을 생각하며 후렴을 따라 불렀다.

PD의 태블릿 PC에는 ‘스마트라디오 클릭과 댓글 수 동시간대 최고기록입니다’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떴다.


‘ON AIR’ 등이 꺼지고 광고가 나가자 부스 안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완이 <순정남녀의 편안한 밤> PD와 인사하자 아리가 그에게 말했다.


“아주버님 감사해요. 갑자기 부탁드렸는데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 잘해주셨어요.”

“아니에요.”

“난 형이 공장장님 노래한다고 해서 <화려하지 않은 고백> 할 줄 알았는데.”

“가족들이 고요히 잠든 시간이니까.”


정완의 말에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는 정완이 단지 이 이유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른 것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고맙고 고생했어. 갑자기 나오라고 해서 놀랐을 텐데.”

“고생은 아닌데, 다음부터 이런 일은 네가 얘기해. 제수씨한테 떠밀지 말고.”

“형한테는 나보다 이 사람이 얘기해야 잘 먹히잖아.”

“그래서 그러는 거야. 안 하고 싶으니까.”

“풉.”

“차에서 기다릴게. 간다.”


정완은 부스 밖의 제작진들과 인사를 나눈 후 스튜디오를 나갔다.


광고가 나가는 동안 우진은 청취자게시판의 글 제목과 라디오 메신저의 댓글을 훑으며 마무리할 이야기의 주제를 ‘진심’으로 정했다.

이윽고 ‘ON AIR’ 불이 켜지자 우진과 아리가 방송의 마무리를 위해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 시간은 구성이나 대본 없이 두 사람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순밤>을 마무리할 시간인데도 청취자게시판에 글이 많이 올라오고 있어요.”

“더구나 오늘은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날이라 일찍 일어나셔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HAP 씨에 대한 글이 많아요. 한 청취자 분께서 말씀하셨는데, 슬프지는 않은데 눈물이 날 뻔했다, 이게 지금 딱 제 마음이거든요.”

“저도 그렇습니다. 특히 서희 씨한테 보냈던 편지와 노래 <가족>이 그랬죠.”

“조금 전에 HAP 씨는 가족들이 고요히 잠든 시간이라 이 곡을 불렀다고 하셨어요.”

“저는 <화려하지 않은 고백> 부를 줄 알았습니다. 역시 형만한 아우 없지요.”

“한 댓글이 눈에 띄네요. HAP 씨에게 있어 ‘고마워’는 ‘사랑해’와 동의어가 아닐까.”

“아마 그럴 겁니다. 그게 그분의 진심이지요. 노래가 제 마음을 세게 때렸던 것도 진심이어서 그런 거라 생각합니다.”

“진심을 말하기 힘든 세상에서 두 분이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 보이는지도 모르겠어요.”

“청취자 여러분들도 가까운 분들에게 먼저 자신의 진심을 말씀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그 진심들이 모이면 세상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저희가 HAP 씨의 가족이라 부럽다고 글 올려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여운이 참 길게 남네요. HAP 씨와 서희 씨의 미래를 청취자 여러분들도 함께 응원해주세요.”

“마지막 곡으로 김광진님의 <진심> 띄워드리며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순정남녀의 편안한 밤> 청취자 여러분.”

“이번 주도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순밤지기 매아리.”

“순밤지기의 지기 서우진이었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진심>이 재생되고 ‘ON AIR’ 등이 꺼지며 방송이 모두 끝났지만, 우진과 아리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일어서지 않았다.





순정남녀의 차가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의 건물 앞에 섰다.


“아주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제수씨 푹 쉬세요.”

“고마워, 형. 쉬고 내일 봐.”

“그러든지.”


정완의 심드렁한 대꾸에 우진의 눈이 슬쩍 찌푸려졌다.


“아니, 형은 나한테 말하는 거랑 이 사람한테 하는 거랑 왜 이렇게 달라?”

“너는 너 안 챙기고 제수씨는 너 챙기니까.”

“···.”

“쉬어라. 고생했어. 제수씨 쉬세요.”

“네, 아주버님. 푹 쉬세요.”


정완은 할 말을 잃은 우진의 어깨를 툭 두드려주고 차에서 내렸다.

차가 출발하자 정완은 제 숙소를 향하여 몸을 돌렸다.


“어?”


서희가 저 앞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다.

정완은 깜짝 놀라면서도 미소를 담으며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왜 나와 있어. 추운데.”

“라디오 잘 들었어요. 고생했어요.”

“이게 고생이랄 게 있나.”

“힘들죠? 첫 휴일인데 일찍 일어나서 대전도 갔다 오고 이 시간까지 일하느라.”

“아니야. 덕분에 부모님도 뵙고 좋았어. 그리고 오늘도 쉬는데 뭐.”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짧은 길을 걸었다.

서희는 라디오에서 정완이 자신에게 전했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담아둔 말이 있었다. 그 말을 하려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 말을 꺼내면 이 남자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문득 걱정되었다.


갈림길에서 걸음이 멈추었다. 두 사람의 숙소로 가는 길은 여기서 갈라진다.

정완이 생각에 잠겼다가 서희를 보았다.


“나와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네가 빨리 잠자기를 바라는데 보내기가 싫다.”


서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그러니까’로 제 얘기를 하면 되는데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우리, 같이 있자.”

“···!”

“걱정할 일 없어. 실망하지 않게 할게.”


서희의 커진 눈이 정완을 빤히 보았다.

마음 한편의 답답함이 내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 말마저 제 마음속에 들어온 듯 딱 한 타이밍 먼저 말한단 말인가.

어쩌면 이 남자는 자신이 그 말을 하고 싶어 했다는 걸 알았는지 모른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가져야 할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것일까.


서희는 조그맣게 미소 지으며 정완의 팔을 잡았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응.”

“걱정 안 해요. 믿으니까.”

“그래. 고마워.”


두 사람은 정완의 숙소 방향으로 걸었다.


“PD님은 제가 실망할까봐 두려워요?”

“응.”

“왜요?”


정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예전에 난 일주일 만에 소중한 걸 모두 잃었어.”

“아.”


정완은 은별과 헤어진 지 이틀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그로부터 닷새 후 미투리 밴드를 탈퇴했다.


“이제 난 직업이 바뀌었고 해묵은 고민이 해결됐어. 그리고 내 주위에 소중한 사람들이 모였어.”

“네.”

“너는 그 모든 일의 출발점이었고 중심이야. 그래서 두려워. 좋은 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진 적은 없었고, 좋은 걸 빨리 잃은 적은 있으니까.”

“알아요. 근데, 혹시 제가 조금 실망하더라도 그냥 둬요. 전 완벽한 모습만 볼 생각 없어요.”

“시간이 지나다보면 조금씩 그렇게 되겠지. 완벽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조심해야지. 안 좋은 게 쌓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널 함부로 대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해서 그래.”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팔을 세게 잡았다. 묘한 감정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자신을 대하는 이 남자의 마음이 문득 투명하게 보였다. 정확히 이 남자를 대하는 자신의 마음만큼인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저한테 다 맞추려고 하지 마요.”

“다 맞추려는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없어. 대신에 많이 상의하자.”

“알았는데, 가끔은 트레이닝 할 때처럼 싸우기도 하고 성질도 긁고 그래야죠.”

“싫어.”

“그러다 나중에 말 한 마디 때문에 회복도 못할 만큼 크게 상처 받으면요? 그러기 전에 작은 상처 주고받고 면역 생기는 게 낫지 않아요?”

“그런가? 상처든 실망이든 정말 안 주고 싶은데.”

“괜찮아요. 저도 어지간한 일로 실망 안 해요. PD님 지금까지 실망하게 행동한 적 없고, 앞으로도 안 그러려고 노력할 건 알아요.”


서희는 정완의 숙소 건물의 계단을 오르다 문득 지난 일을 떠올리고 배시시 웃었다.


“아니구나. 저번에 한 번 있었네.”

“어? 언제?”

“우리 첫날이요. 저한테 말도 안 하고 집 앞에 온 거. 그때 병원 가고 행사 뛰는 바람에 저한테 혼날 시간 없었죠?”


정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지. 미안해.”

“미안할 일은 아니에요. 근데 아무리 그날 좋았어도 혼날 건 혼나야죠.”

“그래. 혼나야지.”


정완의 숙소 현관문 앞이었다.

서희가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으면 들어가서 갈아입을 옷 챙겨 나와요.”

“어?”

“저번에 제가 골라준 옷이랑 속옷이랑 양말 들고 나오세요.”

“여행 가게? ···아야!”

“1분 줄게요.”


서희는 정완의 엉덩이를 탁 때린 후 그를 숙소에 밀어 들여보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함께 숙소 건물을 나온 후에야 서희의 입이 열렸다.


“PD님 소원 들어주고 싶었어요.”

“내 소원?”

“제 집 조용하고 햇빛 잘 들어와요. 일주일은 안 되지만 하루라도 걱정 말고 푹 쉬어요.”

“아.”


정완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어리광 받아줄 테니까 저한테 엉덩이 몇 대 맞으세요. 제가 해준 밥 먹고 책 읽다 자고요.”

“어. 그럴게. 고마워.”

“밥은 주는 대로 먹어요. 밥투정 했담 봐요. 잡채 접시 째로 던져 버릴 거니까.”


서희가 눈에 힘을 주고 짐짓 살벌하게 말했지만 정완은 피식 웃었다.


“무섭지 않네.”

“뭐요?”

“네가 만든 잡채 맛있다던데.”

“누가 그래요?”

“미란이가. 근데 잡채 하려고?”

“왜요? 안 좋아해요?”

“아니. 좋아하는데 그거 하기 힘들잖아. 손 많이 가니까.”

“그 정도는 후딱 해요.”

“그러지 말고 그거 할 시간에 그냥 나랑 놀지? 응? 서희야?”

“네? 풋!”


의외의 말에 서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피잇. 갑자기 뭐예요?”

“어리광이었는데 엉덩이 안 때리네.”

“여기서 어떻게 때려요. 집에서 때려야지. 적립할게요.”

“집이 아닌데 맴매를 적립해?”

“제 마음이에요.”


피로가 느껴졌지만 두 사람은 걸음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개울가 호젓한 길을 천천히 걷는 건 연인만의 특권이리라.


“아까 아리 말 때문에 당황했죠?”

“응. 방송 전에 협의할 때는 안 했던 얘기니까. 어머님 말씀하신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랬지.”

“그래서 그런 거예요? 정신은 PD님이 나가 있었고 저는 거기 맞춘 거라고?”

“말이 그냥 그렇게 나온 거야. 어차피 난 사랑나무에서부터 정신 나가 있었으니까. 알잖아.”

“저도 정신 나가 있어서 몰랐어요.”


서희가 생긋 웃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 매아리 그 계집애, 한 방 먹이고 싶네.”

“왜?”

“전국방송에 사람들 다 듣는데 내 남친 당황시켰잖아요.”

“난 상관없는데 네가 난감할 일이었으니까···.”


정완은 말끝을 흐리다 말했다.


“아까 제수씨한테 얘기했어. 어머님 말씀도 있고 해서 행동을 조심하던 참이었는데, 협의 없던 얘기가 나와서 내가 당황했었다고.”

“걔가 뭐래요?”

“나한테 사과하려고 해서 말렸어. 난 괜찮으니까 너랑 얘기해보라고.”

“알았어요. 사과는 필요 없고 복수나 해야겠네. 어떡하지?”


정완은 서희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너도 똑같이 하겠다고 해. 사전 협의 없이 일 하나만 벌이겠다고.”

“벌일 만한 일이 있어요?”

“있어. 잘하면 부부싸움까지 할 만한 거.”

“와아.”


서희가 탄성을 질렀다.

서로를 마주보는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야. 천천히 상의하자.”

“네.”

“내가 운전할까?”

“제가 해요.”


천천히 걸어왔지만 회사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데 혹시 맴매 말고 깨물어도 돼요?”

“어?”

“내 남친 지금 되게 귀여워요.”

“어어.”

“어? 할 말 없구나? 잘생겼다고 하면 ‘뭐 그냥 사람같이 생겼지.’ 그럴 건데, 이건 매뉴얼에 없나 봐요?”

“푸후후. 내 속에 아주 들어앉아 있구나.”


가로등 불빛만 드문드문한 고요한 변두리의 새벽을 두 사람의 미소가 밝히고 있었다.


작가의말

오늘은 다소 늦게 올립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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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Epilogue. 이제야 불러본다 +4 21.09.08 68 5 33쪽
53 Final. 두 사람의 마지막 경연 21.09.06 67 5 37쪽
52 Round 8.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21.09.01 66 5 26쪽
51 Welcome. 하루를 마무리할 때 21.08.28 60 5 19쪽
50 Change. 모두의 힘으로 21.08.27 65 5 20쪽
49 Round 6. 아쉬움과 미련이 없도록 21.08.23 74 5 28쪽
48 Ago.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21.08.18 84 6 29쪽
47 Confidence. 생각할 시간 일주일 21.01.04 93 5 27쪽
46 Round 5. 어느 배우와의 이별 +2 21.01.01 88 6 28쪽
45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2 20.12.04 116 6 26쪽
44 Self. 돌아선 길 위에서 +2 20.11.20 124 6 30쪽
43 Encore. 복수의 시간 +2 20.11.13 116 6 26쪽
42 Special 2. 바보가 된 천재들 +2 20.11.09 118 7 28쪽
41 Special 1.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 +2 20.11.02 132 6 28쪽
40 Preparing. 서로를 만나는 이유 +2 20.10.26 132 6 26쪽
39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4 20.08.18 158 8 22쪽
38 Composer. 눈은 이미 맞았고 +2 20.08.13 147 7 21쪽
» 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2 20.08.11 136 8 26쪽
36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2 20.08.04 152 8 26쪽
35 Innocence. 꿈이라고만 여겼던 것 +2 20.07.30 169 7 23쪽
34 Producing. 입 헤벌리고 표정 관리 못하지만 +2 20.07.28 165 9 26쪽
33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2 20.07.21 175 7 38쪽
32 Along. 대타로 때려낸 홈런 +4 20.07.16 171 9 30쪽
31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6 20.07.12 158 8 34쪽
30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4 20.07.07 167 10 22쪽
29 Opening. 속 깊은 이야기들 +4 20.07.05 166 9 28쪽
28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6 20.06.30 176 9 20쪽
27 Quest. 그녀의 마지막 미션 +2 20.06.25 156 10 29쪽
26 Showdown.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다 20.06.18 164 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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