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리치는 보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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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루파루파
작품등록일 :
2020.03.28 18:38
최근연재일 :
2020.04.2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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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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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리암은 결심했다. (2)

DUMMY

리치가 되는 과정은 복잡하다.

우선 생명력을 담을 용기를 제작한다.

오래 가고 깨지지 않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

용기에는 감각을 대체할 유사감각 재현 마법진, 의식을 아바타에 고정할 좌표 고정 마법진, 그리고 생명력을 흡수함으로써 재구성할 아바타의 정보를 새긴다.

두 번째로 마법사의 몸에서 생명력을 가진 부분. 피와 살, 내장 등을 벗겨낸다.

그리고 온갖 포션과 시약, 가공한 마법 재료와 갖가지 도구를 사용해 절이고, 끓이고, 압착하고, 걸러내 순수한 생명력만을 추출한다.

추출한 마법사의 생명력을 용기에 담아 밀봉해 라이프 포스 베슬이라 부른다.

리치의 의식을 담는 몸, 아바타의 설정에도 광증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마법적 지식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가장 좋은 재료는 마법사 본인의 신체.

고깃덩이는 생명력을 뽑아내느라 이미 없으니 남은 것을 사용한다.

즉 마법사의 뼈이다.



---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과정을 산 채로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지. 내가 그랬거든."

리치가 설명을 마치자 미리암이 벌리고 있던 입을 겨우 닫았다.

그리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리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결론적으로 마왕이 만든 마법은 내 아바타의 정보를 새로 덮어씌우는 마법이다."

"그런데 왜 어제까지는 모르셨어요?"

"생명력이 부족해 가사상태에 빠져있었던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구나."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한쪽 팔에 상처가 있고 근육통에 시달리는 몸.'을 갖게 되었다는 거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다행히 살아있는 몸이니 곧 회복될 거다."

의문이 대충 풀렸음에도 리치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이런 마법은 불가능하다."

"왜요?"

"마법은 자연의 법칙을 뒤틀 수는 있어도 역행할 수는 없어."

"···?"

리치는 불가능한 마법을 가능하게 만든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가장 큰 단서는 마왕 그 자체였지만 어쩌면 마법의 시동에 그리 많은 양의 마나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인간 한 명당 한 명분의 생명력. 하나의 라이프 포스 베슬.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생명력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아바타로 사용할 수 있다고?

리치에게 두 개의 목숨이 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하나는 없어진 라이프 포스 베슬에.

하나는 자신의 아바타로서.

"역시, 불가능해."

생각을 마친 리치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보고 있느냐?"

미리암이 반짝반짝한 눈으로 리치를 쳐다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저··· 궁금한 게 몇 가지 있는데."

미리암이 수줍게 물었다.

"눈치볼 필요 없다."

미리암은 '크흠.' 하고 목을 푼 후 질문을 시작했다.

"아바타를 유지하려면 생명력을 흡수해야 하는 거죠?"

"그래.”

"그럼 시간이 지나서 아바타가 늙더라도 생명력을 흡수하면 젊어지는 건가요?"

"더 젊어지지는 않겠지만 이 모습으로는 돌아오겠지."

미리암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스마엘의 몸이 늙어서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입게 된다면?"

"그건···."

어느새 흥분한 미리암이 빠른 속도로 질문을 퍼부었다.

"리치 님은 의식을 잃게 되는 걸까요? 과다출혈은? 병에 걸리면? 소변이나 대변이 마려울 때 재구성하게 되면? 이미 먹은 음식은 사라지나요?"

리치가 당황할 정도였다.

"···모르겠구나."

"너무 궁금해요! 다음 실험은 뭐죠?"

"진정하거라."

"앗···."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미리암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죄송해요."

평소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항상 침착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본 모습을 숨기고 있었군."

미리암은 어색하게 미소짓고는 쭈뼛쭈뼛 말을 꺼냈다.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어요. 말썽도 많이 부렸죠."

'지금도 어리다만.'

"다섯 살 때는 서쪽 산맥에 드래곤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배낭에 인형과 빵만 넣고 숲으로 들어가 길을 잃은 적도 있었어요."

리치가 껄껄 웃었다.

"어쩐지. 변명이 술술 나온다 했더니, 숲에서 조난당한 경험이 있던 거였군?"

미리암이 머리를 긁었다.

"울고 있던 저를 찾아낸 건 아그네스 부원장님이었죠. 저를 끌어안고 기도하시던 부원장님을 보고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다음부터는 생각한 걸 그대로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죠."

"그랬군."

리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리암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자라처럼 집어넣었다.

"···."

"···."

꼬르르륵.

어색한 침묵을 깬 건 리치의 배에서 난 소리였다.

"···3일을 굶으셨으니 그럴 만도 해요."

마침 저녁 시간이었기에 리치와 미리암은 이고르를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1층으로 내려왔다.

식당은 변함없이 왁자지껄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평소처럼 뛰어다니지 않고 얌전히 앉아 수프 그릇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맛있어!"

"맛있다."

사제복 위에 낡은 앞치마를 동여맨 엠마 사제가 거드름을 피웠다.

"하하하! 많이 먹어라."

나무 그릇을 들고 탁자에 앉은 리치가 옆에 앉은 카인의 그릇 안을 들여다보았다. 카인이 그릇을 끌어안고 으르릉거렸다.

"안 줘."

"안 뺏어 먹는다."

엠마 사제가 국자 한가득 수프를 퍼 리치의 그릇에 담아주었다.

"부족하면 더 드세요."

"고맙네."

전날 보았던 식욕을 떨어뜨리는 멀건 수프가 아니었다.

"제법이군."

감자를 잔뜩 갈아 넣었는지 걸쭉하고 진한 냄새가 나는 수프를 스푼으로 몇 번 휘젓자 큼직한 베이컨 조각이 둥둥 떠올랐다.

엠마 사제가 리치의 옆에 앉았다.

"모험가 한 분이 무려 베이컨을 기부해주셨어요. 원정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셨다던데요."

"그렇군."

엠마 사제는 리치의 팔을 살피더니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상처가 이쪽 팔이었나요?"

"어···. 그렇네만."

엠마 사제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너무 얇아서 좌우를 헷갈렸나? 아무튼, 다음에는 안에서 쓰러져주세요. 저랑 코리 사제님, 둘이서 원장님을 옮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자네가?"

엠마 사제는 말랐지만 이스마엘처럼 비리비리하지 않았다.

꽤 큰 키의 이스마엘보다도 컸고 펑퍼짐한 사제복으로도 가릴 수 없는 길쭉하고 탄탄한 뼈마디는 웬만한 장정들 뺨칠 만큼 튼튼했다.

코리 사제가 양손으로 겨우 드는 커다란 솥을 한 손으로 들고서 뛰어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네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네만?"

엠마 사제는 눈과 입을 크게 벌리더니 쩌렁쩌렁 소리쳤다.

"어머나! 지금 가냘픈 아가씨한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야!"

귀가 얼얼했다.

"가냘픈 아가씨는 뱃심을 가득 담아 소리치지 않네."

"연약한 아녀자가 이 많은 아이들을 돌보려면 목소리라도 키워야 한다구요!"

리치는 '자네가 나보다 무거울 텐데?' 라고 받아치려다가 그만두었다.

슬슬 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리치는 화제를 돌릴 겸 수프를 한 스푼 떠 입에 넣었다.

후루룩.

포슬포슬 따뜻한 감자 향과 짭조름한 베이컨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군."

노린 대로 엠마 사제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하하! 당연하죠."

으레 하는 요리사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 엠마 사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리치는 빈말을 몰랐다.

빈말을 할 필요도, 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아니, 정말로 맛있네. 이런 건 오랜만이군. 정말로 오랜만이야."

리치는 말없이 스푼을 놀렸다.

그제서야 엠마 사제는 리치의 표정에서 그리움, 혹은 회한에 가까운 감정을 읽었다.

"원장님···."

엠마 사제가 리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겼다.

리치가 표정을 구겼지만 엠마 사제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라니, 베이컨이 그렇게 드시고 싶으셨던 거에요? 더 있으니 많이 드세요."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 고맙게 먹지."

엠마 사제는 애수에 젖은 눈빛으로 수프를 쉬지 않고 퍼주었다.

그어억.

그 결과, 리치는 여섯 그릇의 수프를 먹고 16세기 만에 거한 트름을 했다.

"원장님 더러워."

아이들은 리치를 흉내 내며 자지러졌다.

리치는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배를 만족스럽게 쓰다듬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별게 다 재밌구나."

아이들이 돌림 노래를 하듯 리치의 말을 따라했다.

"별게 다 재밌어!"

"따라 하지 말아라."

"원장님, 트름 대결하자."

호기롭게 소리친 것은 어디에서 뛰어놀다 왔는지 얼굴에 긁힌 상처가 가득한 카인이었다.

리치가 노곤한 눈에 이채를 띠었다.

"감히 도전장을 내미는 거냐? 가소롭기 그지없구나. 좋다, 받아주지."

"꺼어억!"

문답무용으로 시작된 카인의 선공에 고무된 리치가 힘차게 입을 벌리려는 순간, 눈에 불을 켠 사제들이 국자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이 녀석들이! 식탁에서 더럽게 뭐 하는 짓이야!

원장님은 말려야지 같이 장난이나 치고 계시면 어떡해요!"

두 사제가 리치와 아이들에게 식사 예절에 대해 교육하는 동안 미리암은 아이들이 먹은 식기를 주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설거지까지 마친 미리암이 식당을 지나갈 때도 리치와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엠마 사제의 멈추지 않는 설교를 듣고 있었다.

"···."

리치를 처음 보았을 때 미리암은 다리가 떨릴 만큼 무서웠다.

붉은 안광을 빛내며 산 사람의 생기를 빼앗는 리치의 모습.

하지만 리치는 이득이 전혀 없는데도 미리암을 구해주었다.

보육원 식구들에게는 퉁명스럽지만 친절했다.

아이들도 귀찮아할 뿐 싫어하지는 않았다.

'나쁜 사람이 아니다.'

리치에 대한 미리암의 평가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잠깐!"

엠마 사제의 호통을 버티지 못한 리치가 주춤주춤 반격에 나섰다.

"이··· 이 꼬맹이가 먼저 하자고 했네."

리치로서는 사력을 다한 반격.

당연하게도 엠마 사제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엠마 사제는 현기증이 난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앙다문 입에서는 신음처럼 탄식이 흘러나왔다.

"원장님은···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카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배신하다니!"

"와, 원장님 치사해."

"소인배."

"혼자만 혼 안 나려고!"

리치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1,600년 동안 다른 사람과의 교류 없이 살아온 여파가 찾아온 것이다.

밀고자를 향한 아이들의 따가운 눈총에 리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니··· 그게."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 순식간에 밥상 예절 머리도 없는 소인배 밀고자로 낙인찍힌 리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잘못했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리암은 생각을 조금 고쳐먹었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순수한 사람일지도 몰라.'

미리암은 방으로 돌아기기로 했다.

"왔어?"

"응."

열한살의 아나이스가 긴 금색 머리칼을 빗으며 미리암을 반겼다.

"엠마 사제님 목소리가 여기서도 들리더라."

"주방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간단히 인사를 나눈 미리암이 읽던 책을 꺼냈다.

[제국의 역사 (상)]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를 펼치자 낡은 책 냄새가 났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냄새였다.

미리암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흠."

탁자에 앉은 미리암이 책을 읽으려다 말고 생각했다.

리치는 사람처럼 사는 법을 모두 잊어버렸다.

혼자 두면 반드시 실수를 저지른다.

혹시 배고픔과 배아픔을 구분하지 못하면?

바지에 말 못할 것을 지려버린다면?

자존심 강한 리치라면 그런 수치심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목격자의 기억을 지우려 할 수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리치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리치 자신도 모를 것이다.

'사람의 몸에 적응하실 수 있도록 내가 많이 챙겨드려야 해. 이제 내가 도와드릴 차례야.'

미리암은 자신만의 결심을 단단히 다졌다.


작가의말

댓글과 추천 모두 감사드립니다.

연재주기는 수목금토일.

연재시간은 오후 6시 20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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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외전. 이고르 +4 20.04.25 151 6 7쪽
25 9. 승화 (2) + 에필로그 +2 20.04.25 177 4 18쪽
24 9. 승화 (1) +2 20.04.24 137 5 12쪽
23 8. 습격 (2) +2 20.04.23 128 5 13쪽
22 8. 습격 (1) +2 20.04.22 147 5 14쪽
21 7. 때 아닌 던전탐험 (3) +4 20.04.19 169 7 12쪽
20 7. 때 아닌 던전탐험 (2) +2 20.04.18 167 5 12쪽
19 7. 때 아닌 던전탐험 (1) +2 20.04.17 192 6 12쪽
18 6. 수도사 아리타. (4) +2 20.04.16 207 3 13쪽
17 6. 수도사 아리타. (3) +2 20.04.15 203 5 12쪽
16 6. 수도사 아리타. (2) +2 20.04.12 222 4 12쪽
15 6. 수도사 아리타. (1) +1 20.04.11 224 7 13쪽
14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3) +2 20.04.10 251 5 12쪽
13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2) +2 20.04.09 231 5 12쪽
12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1) +2 20.04.08 284 5 12쪽
» 4. 미리암은 결심했다. (2) +2 20.04.05 298 9 12쪽
10 4. 미리암은 결심했다. (1) +2 20.04.04 314 6 12쪽
9 3. 마신교도 피니언 (2) +5 20.04.03 313 11 12쪽
8 3. 마신교도 피니언 (1) +2 20.04.02 359 7 12쪽
7 2. 리치는 이스마엘 (3) +1 20.04.01 383 8 12쪽
6 2. 리치는 이스마엘 (2) +1 20.03.31 416 11 12쪽
5 2. 리치는 이스마엘 (1) +1 20.03.30 490 12 12쪽
4 1. 보육원장 이스마엘 (3) +1 20.03.29 599 11 13쪽
3 1. 보육원장 이스마엘 (2) +1 20.03.28 662 13 12쪽
2 1. 보육원장 이스마엘 (1) +1 20.03.28 863 15 12쪽
1 프롤로그 +1 20.03.28 957 18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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