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류장은 마왕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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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헌킬
작품등록일 :
2020.04.08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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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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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7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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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Chapter 3. 이번 정류장은 골델스 호수입니다 (3)

DUMMY

레쉬메프는 나무에서 단숨에 뛰어내려, 발차기로 화로를 허물어뜨려 불을 껐다.


“으아··· 어떻게 만든 건데···”


“잔말 말고 일단 숨어.”


하는 수 없이 버스 쪽으로 움직이려는데, 미온이 손톱을 빼 들었다.


“이미 녀석들은 도착했다.”


순간 사방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라도 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


“조급해하지 마라. 손동현.”


그때 누군가가 풀 속에서 호숫가로 걸어 나왔다.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미온처럼 검은 전신 가죽옷을 입고 10개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을 늘어뜨린 서큐버스였다.


“미온. 그렇게 움직임이 굼떠서야 쓰겠니?”


낯선 서큐버스는 미온과 마찬가지로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녀의 뽀얀 피부와 새빨간 입술은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나를 흥분시켰다.


정신 차려! 손동현! 갑자기 왜 그래!


두근! 두근!


그녀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성욕이 치솟았다. 가슴이 뛰고 머릿속이 흥분으로 가득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몸이 내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곁눈질로 봤다. 하필이면 그때 그 서큐버스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날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는데, 단지 미소만 봤을 뿐인데 온몸이 짜릿한 쾌감으로 버무려진 느낌이다.


그녀가 날 만져준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때. 누군가가 내 목덜미를 잡고 강하게 뒤로 끌어당겼다. 나는 거칠게 땅바닥에 엎어졌다.


순간 시야에 나타난 레쉬메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짜악!


번개 같은 충격이 뺨에 흐르고, 그 순간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은 냉정하기 그지없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네. 아파 뒤질 것 같아요.”


“한 번만 더 저런 거에 넘어가면, 다음엔 걷어차일 줄 알아.”


레쉬메프가 내민 손을 잡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릴리트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아깝네. 새로 생긴 장난감이야?”


“닥쳐. 릴리트.”


미온은 차분한 태도로 릴리트를 노려본다.


마치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 같은 눈.


그걸 본 릴리트는 온몸에 경련이 일 정도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깔깔깔! 왜 그래 미온? 너 그런 애 아니잖아. 넌 너를 위해서라면 동족도 죽여버리는 악마잖아. 그런데 그 눈은 뭐야?”


미온이 표정을 풀지 않으니, 릴리트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웃어젖혔다.


“아니 미온! 도대체 뭐가 문제야? 엔에게 가는 길이 무료하기라도 했어? 소꿉장난이라도 하고 싶었냐고! 이해가 안 되는데요?”


깔깔거리며 웃던 릴리트는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웠다.


“널 증오할 틈도 없었잖아. 짜증 나게.”


릴리트의 말이 멎은 순간, 수풀 속에서 박쥐 날개를 펼친 서큐버스들이 쏟아져나왔다.


/////


“고마··· 으악!”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레쉬메프에게 감사를 전하려는데, 그녀는 다시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순간,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빠른 속도로 미온이 스쳐 지나갔고, 뒤이어 수십 마리의 서큐버스들이 그 뒤를 빠르게 쫓았다.


미온이 도망친 곳은 호수였다. 그녀는 마치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호수 위를 달렸다.


“손동현.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이야.”


그 말에 다시 정신이 번쩍 들어 곧장 버스 뛰었다. 레쉬메프가 경계를 해주는 사이, 서둘러 운전석에 앉아 키를 돌렸다. 시동이 걸리고 엑셀을 밟으려는데,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네? 우리 귀염둥이.”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옆에 서큐버스가 서 있었다.


“안녕. 나는 릴리트라고 해. 반가워~”


내 목은 이미 그녀의 검지와 중지 손톱 날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녀는 마치 단두대의 끈을 잡은 처형자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생애와의~ 이별의 순간~ 너는 무슨 생각을 하니~”


슉! 캉!


순간, 눈앞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릴리트의 손톱은 내 얼굴을 향한 채 갑자기 나타난 단검에 가로막힌 상태였다.


단검이 아니었다면, 정말 한순간에 죽었을 것이다.


단검은 교묘한 위치에서 내 목을 감싼 손과 나를 찌르는 손을 동시에 막아냈다. 양손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릴리트는 놀란 소리를 냈다.


“헤?”


끼기긱! 끼리릭!


하지만, 두꺼운 철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손톱 날이 단검을 서서히 파고들었다. 그리고 서큐버스의 콧노래는 다시 이어졌다.


“차라리 꿈속에서 만났다면~ 영원의 쾌락 속에서~ 죽어갔을 텐데~”


콧노래가 길어질수록 단검을 잡은 레쉬메프의 손은 심하게 떨렸다.


파캉!


단검이 두 동강이 나는 소리와 함께 레쉬메프가 자신의 몸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내 목을 감싼 손톱을 맨손으로 부여잡았다.


“미안··· 난 여기까지인 것 같아.”


“레쉬메프!”


푹! 푸욱!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던 손톱은 레쉬메프의 어깨를 관통했다. 릴리트는 가차 없이 목을 감산 손을 빼낸 뒤, 그걸로 레쉬메프의 배를 찔렀다. 그녀의 배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릴리트는 레쉬메프를 집어 던졌고,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방해꾼은 이제 없어졌네. 음. 너한테 뭔가 특별한 게 있나 봐? 다들 너를 지키려고 하네. 그게 뭔지 궁금한걸?”


릴리트는 허리를 숙이자 그녀의 매혹적인 입술 밑으로 풍만한 가슴과 가슴골이 드러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젠장···! 레쉬메프··· 난···!


당장이라도 저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내 정신은 마치 유리병에 갇힌 것처럼 몽롱해졌다. 릴리트는 내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만지도록 했다. 그녀의 피부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살결을 만지는 듯한 보드라운 느낌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날카로운 것이 돋아났다. 그녀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하아··· 죽을 때까지 누나가 이뻐해 줄게.”


그녀의 이빨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뻐억!


그녀가 갑자기 날아온 무언가에 얻어맞아 뚫린 창문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철마차를 움직여라. 손동현.”


눈 깜짝할 새에 나타난 미온은 다시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레쉬메프의 상태를 살피려고했지만, 버스 옆으로 서큐버스 무리가 날아오는 걸 확인했다.


“제길!”


엑셀을 밟았다. 하지만 발이 미끄러져 브레이크를 밟아버렸고, 버스는 움찔했다. 페달 쪽을 바라보니 핏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레쉬메프를 향해 소리쳤다.


“레쉬메프!! 조금만 버텨줘!”


다시 엑셀을 밟았다.


부아아앙~!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길을 달렸다. 산길이기 때문에, 버스 내부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게다가 길은 점점 경사가 높아졌다.


경사가 거의 30도 가까이 기울 때쯤, 버스 내부의 모든 것들이 슬슬 뒤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레쉬메프 역시 자신의 피로 미끄러져 뒤쪽 의자에 맞닿아 있었다.


사이드 미러 양쪽에서 서큐버스들이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대는 날아오기 때문에 정직하게 움직인다면 따돌릴 방법이 없었다.


머리를 굴려야 한다.


길이 아닌 다른 곳은 전부 경로를 알 수 없고, 울퉁불퉁 구불길이었지만 경사는 비교적 완만했다. 그걸 이용해 최대한 경사가 적은 쪽으로 움직여 속도를 높여야 한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주저 없이 핸들을 틀었다.


버스는 한쪽으로 급격하게 쏠리며 울퉁불퉁한 산골짜기로 들어섰다. 중간마다 작지만, 위협이 되는 돌이나 나무를 과감하게 뚫고 지나갔다. 버스 밑바닥이 부딪히고 갈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엑셀을 밟았다. 휘어지는 구간에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드리프트를 시도했다.


회전할 방향으로 핸들을 꺾은 다음, 주차 브레이크 스위치를 올리고 바퀴가 잠길 때 반대쪽으로 핸들을 돌린다. 거의 레이싱 선수나 할법한 드리프트를 버스로 성공시켰다.


골짜기의 회전 구간에 들어서니 드리프트를 더 자주 하게 되고, 그만큼 서큐버스들이 꽤 멀리 떨어졌다.


길 사이에 나무가 자라났거나 깊은 웅덩이가 있어도 마치 미꾸라지처럼 그 사이를 교묘히 피했다.


와··· 지금 나 미쳤어.


신이 내린 듯한 운전실력에 자신감이 붙었다. 골짜기 길은 어느 순간 산맥을 넘어가고 있었다. 경사가 아래쪽으로 쏠리니 속도계는 급격히 올라가 100km를 가리켰다.


경사가 심해져 거의 곤두박질치는 수준에 이르니 작은 나무들은 그냥 들이받았다. 하지만 속도의 상승은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엑셀을 밟아도 속도는 올라가지 않았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순간 버스에 스피드 리미터가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쿵!!


소리가 난 곳은 뒤쪽이었다. 백미러로 보니 벌써 도착한 서큐버스 하나가 뒤쪽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한 마리라도 버스 내부로 들어오면 끝장이다. 그들을 떼어내려 수시로 핸들을 이리저리 꺾었다. 그러자 서큐버스들은 중심을 잃고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스피드 리미터가 달려있는 이상, 속도는 이미 한계점이었다.


반면에 서큐버스는 뛰어내리듯 수직 낙하하며 곧장 버스 뒤편에 벌 때처럼 다닥다닥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들이 버스 내부로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했다.


엑셀은 이미 오래전부터 풀 차지 상태였다. 버스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밤의 산길을 곤두박질치듯 내려가고 있다. 헤드 라이터에 작은 바위만 보여도 곧바로 반응할 정도로 내 정신은 무섭도록 깨어있다.


수시로 백미러를 확인했다. 그리고 가장 뒤쪽에 있는 좌석 창문에 한 서큐버스의 손바닥이 들러붙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주차 브레이크 스위치를 누르는 동시에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익!!!


버스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뒤집어지기 직전까지 한쪽으로 쏠렸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은 발에 힘을 빼지 않은 채 오로지 완력으로 핸들을 꽉 붙잡았다.


다행히 버스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뒤이어 강력한 관성의 힘에, 붙어 있던 서큐버스들이 일제히 우수수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그건 레쉬메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운전석 옆까지 미끄러져 동전통에 부딪혔다. 그녀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그녀를 본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창문 너머로 서큐버스들이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핸들을 돌렸다.


다시 엑셀을 밟고 움직이려던 찰나. 갑자기 릴리트가 창문에서 튀어나와 손톱 날을 내 머리에 찌르려 했고 그것을 미온이 아슬아슬하게 쳐냈다.


하지만 릴리트는 그 반동을 이용해 버스 밑으로 내려갔다.


펑! 펑!


바퀴 터지는 소리가 났다.


“킥킥킥! 넌 아무데도 못 가!”


웃음소리와 함께 릴리트가 달아났고, 미온은 그 뒤를 계속해서 쫓았다.


황급히 엑셀을 밟아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엑셀을 밟아도 터진 바퀴가 중간마다 공회전을 하는 바람에 속도계는 40km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서큐버스는 순식간에 날아와 버스 뒤쪽에 붙었다. 핸들을 아무리 흔들어도 속도가 붙질 않아 그들을 떼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백미러 너머로 한 서큐버스가 들어오려 하는 게 보였다.


“씨X···”


나는 핸들을 냅다 왼쪽으로 돌리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버스는 크게 헛돌며 그대로 뒤집어졌다.


우우웅! 쾅!


엎어진 버스는 많은 양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꽤 멀리까지 쓸려나갔다.


버스 옆면에 붙어있던 서큐버스들이 바닥에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버스는 멈췄고, 내부엔 정적이 감돌았다. 내 몸은 안전벨트에 묶여있어, 의자에 매달려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출입문 위에 쓰러진 레쉬메프가 보였다.


달빛에 비친 레쉬메프는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린 채 다소곳이 누워있었다.


레쉬메프··· 미안해···


“죽여! 죽여!”


살의에 가득 찬 서큐버스의 속삭임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버스 하나로 참 멀리까지 왔다. 하지만 이제 버스도, 나도 한계였다.


나는 조용히 핸들을 잡았다.


그 순간 서큐버스 한 마리가 내 심장을 향해 손톱 날을 들이밀었다.


“마지막 선물이다.”


빠아아앙!!!


버스 클락슨이 울리자 내게 손톱을 들이민 서큐버스가 움찔했다.


“어때? 놀랐지?”


그러자 잠시 뒤 그 서큐버스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내 왼쪽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푸욱!


심장이 찔린 느낌은 참 생소했다. 심장이 찔리면 감각도 전부 잃어버리는 걸까. 칼날이 내 몸뚱어리를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 아니라 단순히 바늘로 찔린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를 바라보는 서큐버스의 표정은 참 미묘했다. 마치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서큐버스가 손톱을 뽑자 갑자기 목 아래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끼리리릭!!!


목 아래서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던 나도, 양쪽 귀를 막게 할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였다.


그러나 서큐버스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소리였는지, 깜짝 놀라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소리가 멎었을 땐 이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안전벨트를 풀고 레쉬메프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그녀의 코밑에 가져다 댔다. 놀랍게도 숨을 쉬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숨이 멎었을 법한 상태인데도 그녀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희망이 생겼다.


일단 여기서 빼내야 돼.


그녀의 양팔을 잡아 버스 앞창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끌어냈다.


“손동현. 살아있었군.”


그녀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로 버스 위쪽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반가우면서도 빨리 레쉬메프의 상태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온! 레쉬메프가 아직 살아있어! 치료만 잘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녀석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직 숨을 쉬고 있는데···?”


“겨우 목숨만을 붙들고 있을 정도지.”


“하지만 치료를 잘만 하면···”


“치료? 무슨 수로? 부상자를 데리고 다닐 시간은 없다.”


“하지만···!”


“당장 출발해라 손동현. 녀석들은 다시 돌아올 거다.”


미온은 엎어진 버스를 단숨에 들어 올려 똑바로 세우고 서큐버스들의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레쉬메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얗던 얼굴은 시퍼렇게 식어가고 있었다.


나 같은 게 뭐라고···


목이 메었다.


“미안해··· 미안해 레쉬메프···”


그녀의 얼굴이 눈시울에 흐려졌다.


“나는··· 나는··· 지금껏 겁쟁이 같은 삶을 살아온 놈이야··· 흐흑! 넌 몸을 던져 날 지켜줬는데··· 난 아무것도 못 했어···”


그 순간 미온이 내 멱살을 잡아올렸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손동현. 어째서 저 녀석이 제멋대로 행동한 걸 네놈의 문제로 삼고 있는지.”


“이거 놔!”


“네놈이 여기서 질질 짜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아니면, 네놈도 여기서 저 풀벌레랑 함께 뒤질 셈인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어!! 레쉬메프는 날 위해서 목숨을 걸어줬는데···!”


짜악!


순간 번쩍 빛이 보이며 고개가 돌아갔다.


“네놈이 질질 짠다고 모든 상황이 돌아갈 것 같나? 너같이 약해 빠진 놈은 마족들에게 있어 딱 좋은 먹잇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 잡아먹으면 되잖아.”


“그 말. 진심인가?”


“그래! 이 악마야! 어차피 너도 나 같은 놈들 잡아먹어 왔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여태 해왔던 것처럼 날 잡아먹으라고!”


“알겠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순간 미온의 분홍빛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내 정신은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릴리트에게 느꼈던 감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한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미온에게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강아지를 훈련하듯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명령 없이는 나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미온은 자신의 숨결을 내 뺨에 불어넣었다. 마치 뇌가 녹아내리는 듯한 황홀감이 일었다. 내 몸을 터치하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미칠 듯이 짜릿했다.


언제쯤 그녀의 입술을 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내게는 금지된 것이었다. 그저 그녀의 다음 행동을 목놓아 기다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 간절함과 초조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녀는 내 입술과 그 외의 모든 것을 탐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쾌락과 혼돈의 바다에서 나는 그저 떠다니는 조각배일 뿐이었다. 그녀는 내 욕망을 끝까지 남김없이 완전하고 깨끗하게 빨아먹었다.


/////


눈을 뜨니 푸른 하늘이 보였다. 대낮처럼 밝은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내가··· 살아있어···?”


어리둥절 주위를 둘러보는데 버스 위에 다리를 꼰 채로 걸터앉은 미온이 보였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날 잡아먹는 것 아니었어?”


“그래. 네놈은 참 맛있었다. 남김없이 먹어치웠지.”


먹어 치운다는 게 그쪽이었단 말인가. 나는 갑자기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레쉬메프는?”


“철마차 안에 넣어뒀지.”


“그게 무슨··· 부상자를 데리고 다닐 시간 없다며?”


“풀벌레의 목숨이 얼마나 끈질긴지 궁금해지더군.”


하룻밤만에 생각이 달라지다니.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악마였다.


바퀴는 새로 갈았다. 버스 수납장에 있는 여분의 바퀴가 다행히 멀쩡했다. 힘이 강한 미온의 도움으로 바퀴를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출발 준비를 마치고 나는 뒷자리에 누워있는 레쉬메프의 상태를 살폈다. 배의 상처에서 출혈은 멎은 상태로 미약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일단···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돼.”


미온은 자기가 한 말대로 치료를 돕기 위한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빨리 치료사를 구하기 위해 운전을 하는 것이었다.


멀리 갈림길이 보였다.


그러자 미온이 뜬금없이 말했다.


“지름길은 왼쪽에 있다.”


“지름길이라는 게 마계로 가는 지름길 말하는 거야?”


“당연하지.”


마음 같아서는 반대로 가고 싶었지만, 내가 보기엔 이 갈림길은 중요하다.


완전히 다른 길 같단 말이지···


점점 갈림길은 다가오는데 고민은 깊어지기만 했다.


지금 최우선 문제는 레쉬메프를 치료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음이 급해졌다.


둘 다 모르는 길이라면 이왕이면 빠른 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결국 나는 미온이 말한 대로 왼쪽 갈림길로 들어섰다.


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속으로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길을 따라가는데 미온이 경고했다.


“바람의 마녀하고 안 마주치길 비는 게 좋을 거다. 손동현.”


그게 무슨 소린가 생각하고 있는데, 곧 내 눈앞에는 황금빛 모래로 가득한 거대한 사막이 펼쳐졌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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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Chapter 10. 이번 정류장은 쾌락의 층입니다 (22) 23.11.15 29 0 15쪽
101 Chapter 10. 이번 정류장은 쾌락의 층입니다 (21) 23.11.13 29 0 13쪽
100 Chapter 10. 이번 정류장은 쾌락의 층입니다 (20) 23.11.10 31 0 14쪽
99 Chapter 10. 이번 정류장은 쾌락의 층입니다 (19) 23.11.09 30 0 15쪽
98 Chapter 10. 이번 정류장은 쾌락의 층입니다 (18) 23.11.08 30 0 14쪽
97 Chapter 10. 이번 정류장은 쾌락의 층입니다 (17) 23.11.07 36 0 14쪽
96 Chapter 10. 이번 정류장은 쾌락의 층입니다 (16) 23.11.06 30 0 14쪽
95 Chapter 10. 이번 정류장은 쾌락의 층입니다 (15) 23.11.05 33 0 12쪽
94 Chapter 10. 이번 정류장은 쾌락의 층입니다 (14) 23.11.03 33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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