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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riekun
작품등록일 :
2020.05.0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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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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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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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2)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DUMMY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2)



Made By Dr. D. D.

독립 인공지능 스페이스, 시스템 온라인.

전압 안정화, 디버크 확인 25, 80, 100%, 손상률 확인 20, 22, 60, 68, 91, 100% 완료. 네트워크 모듈 작동. 가든 군 인트라넷 접속, 아이디와 패스워드 입력, 접속 완료. 권한 확인. 승인 완료.


소대 네트워크 활성화, 현재

소대원 확인, 없음.

인공지능 보조 전술인형 확인, 새로 등록된 인형 확인, 모델명 CALL-SX2 라비에르의 딥마인드와 동기화 시작. 10, 38, 88, 100%.


어서 오십시오, 그랜트 흄 소위.




“...라비에르?”

모델명 CALL-SX2? 군 전술인형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전술인형 L. L.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의안에 뜬 정보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도달했을 때, 거친 호흡과 더불어 바닷속에서 솟아오르는 공기방울들처럼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답답하다.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억의 홍수보다도 복부와 가슴을 압박하고 있는 정체 모를 힘이 그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왼쪽 의안은 아직 시각 정보를 불러오지 못하고 있다. 오른쪽 눈에는 불투명한 유리창에 형상이 맺힌 것처럼 희뿌연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카락 부분이 까맣다는 건 알겠다. 부분부분 흰색... 아니 회색인가. 정말로 리가 아니군. 흐릿했던 형상의 점점 사람의 모습에 가까워지자, 흄은 누워 있는 자신의 몸 위에 여성이 올라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화난 듯한 눈매와 잔뜩 찡그러진 얼굴, 회색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을 부러트렸을 거야. 아니, 내 이름을 불렀으니 목을 부러트렸어야 했나?”

거참, 흥미로운 얘기군. 목의 무사함을 확인하고자 머리를 들려고 했을 때 상체가 불쑥 들어 올려지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꽂혔다.

“빨리 정신 차리고 하나만 대답해. 왜 내 딥마인드가 당신으로 가득한 거지?”


“크음... 고백치고는 신선하군. 라비에르인가?”

“...맞아.”

“내 오른손.”

“뭐?”

“오른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군. 오른손 약지를 꺾어서 네 포트에 접속시켜.”

“내가 왜 당신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데.”

“...사춘기에 휩쓸린 애처럼 징징거리지 마. 내 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당연히 알고 있다. 그의 왼쪽 눈은 전투기 한 대 값에 해당하는 전술인형에나 쓸 법한 고성능 의안이고, 오른쪽 팔과 다리 또한 이제껏 듣도 보도 못했던 고가의 인공 기관이라는 건 파악하고 있었다. 롯이 장난 삼아 화물을 전달하기 전에 뜯어서 팔면 건물 한 채 가격은 나오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라비는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순순히 흄의 오른팔을 들어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댔다.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의 약지가 그녀의 포트에 착 달라붙어 연결됐다.


[모델명 CALL-SX2, 라비에르. 소대 네트워크 접속을 환영합니다.]


손끝에 닿는 찌릿한 느낌이 딥마인드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듯했다.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양에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군 네트워크였다. 아니,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간 게 아니라, 군에서 침입해 들어온 거였다. 딥마인드가 허용할 수 있는 총량을 초과해 들어오는 정보를 거칠게 쳐내며 간신히 수도꼭지의 위치를 파악했다.


[이제 좀 감이 잡히나?]

[내 리소스를 마음대로 가져가지 마!]

[그건 어쩔 수 없다. ...과부하 모듈이 설치했군. 배터리는 충분한가?]

[...별로 없어. 생체 에너지도 보충해야 해.]

[...우리 둘 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 일단 응급 정비를 받도록 하지.]


라비는 처음과 달리 순순히 그의 상체에서 내려왔다. 뻐근한 몸을 일으키다가 오른쪽 어깨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통증에 놀란 흄은 급히 호흡을 들이켰다. 까만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냄새를 통해 피를 흘렸다는 걸 알았다. 셔츠 안쪽을 들추자 생긴 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부상이 보였다.


“험하게도 굴렸군.”

“생존하려면 어쩔 수 없었거든.”


라비가 손을 내밀자 흄은 오른손을 올리려다가 찾아온 통증을 다시 한 번 참아 낸 다음 왼손을 들어 맞잡았다.


“...BB소대야. 당신을 운반하라는 의뢰를 받았어.”


BB소대. 사설업무대행업체라고 했던가. 닥터 D. D.의 연구소에서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다음 팔다리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거동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운반을 끝마치진 못했군.”

“당신 인기가 보통이 아니더라고. 군에서 소대 하나를 보냈어. 그걸 따돌리고 있었지.”


라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쓰러져 있는 전술인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 형태를 인식하자 인공지능이 알아서 인형의 모델명을 검색한다.


“...제식 모델은 아니고, 플로렌스 사의 인형이군.”

“자기 입으로 특무부 소속이라고 했어.”

“그럼 플로렌스 사의 인형이 맞겠군. 특무부는 대다수가 플로렌스 사에서 공급되는 인형을 쓰니까. 나머지 둘은?”

“내 팀이야. 아무래도 수동으로 전원을 켜야 할 거 같아.”

“난 전술인형을 맡지.”





딥마인드의 전원이 켜진다. 배터리의 충전이 끝난 이후 수면에서 깨어나는 것과는 다르다. 정기적으로 받는 소체 점검 때처럼 전원이 들어온 딥마인드는 활성화 되어 있는 모든 명령을 강제로 정지시킨 후,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명령들을 확인한다. 예컨대 코드1 같은 강제 명령이다.


입력되어 있는 강제 명령들을 실행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딥마인드는 앞서 정지시킨 명령들을 순차적으로 진행한다. 쉽게 말하자면 시각 모듈을 작동하는 것 같은.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베즈마는 몸이 움찔하며 반응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 그랜트 흄 소위님.”

“반갑군. 전술인형 베즈마.”

“절 소개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베즈마는 금세 냉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흄에게 안겨 있다는 걸 인지한 다음에는 다시 허둥거렸다.


“진정해라. 재시동을 위해 포트 접속을 시도했다.”

“감, 감사합니다.”

“어째서 전원이 꺼진 것인지 확인되나?”


그 질문에 베즈마는 버둥거리던 걸 멈추고 애써 침착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전원이 꺼지기 전까지는 EMP 공격을 의심했습니다. 로그 기록에 따르면... 딥마인드에서 전원을 내린 것으로 확인됩니다. 사유는 알 수 없습니다.”

“주위의 인형들이 함께 정지됐다면 해당되는 사항이 있나?”

“저들이 전술인형이라면 군 사령부에서 정지시킨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만, 민수용 인형과 함께라면 해당되는 사유가 없습니다. 저, 저기 그리고 그만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안 되겠군.”

“예?”

“청각에 집중해라.”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흄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기에 베즈마는 청각 센서에 회로의 점유율을 집중했다. 확실히 무슨 소리가 들린다. 휘파람 소리?


“엎드려!”


라비가 소리쳤다.


콰앙! 휘이이이익- 쿵! 쿵! 쿵! 무엇인가 저 멀리에서 날아와 근처의 건물 벽을 뚫고 떨어졌다. 흄에게 안겨 있는 모양이었기에 하늘을 볼 수 있었던 베즈마는 위에서 건물 파편이 떨어지는 걸 발견하고는 급히 몸을 일으킨 후 흄을 감쌌다. “흡!” 등 위로 제법 큰 몇 개의 파편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흄은 침착하게 시선을 돌려 계속 하늘을 주시했다.


‘폭발음이 없으니 포탄은 아니다. 뭔가 계속 날아오고 있다. 방향은 국경이 있는 쪽. 크고, 둥글다. 잠깐, 크고 둥글다? 어디서 본 기억이-!’


파편이 떨어졌던 건물의 옥상에서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물체가 보였다.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양쪽 면에는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띠 네 개가 사선으로 그어져 있다. 저 모습을 흄은 알고 있었다.


“라비에르! 침투형 전술소체다!”

“진짜 짜증 나 죽겠네!”


라비는 신경질을 내며 널부러져 있는 롯의 딥마인드를 재구동 시킨 후 근처에 있던 돌격소총을 집어들었다. 흄의 머리 위쪽 건물에 있는 전술소체를 발견했다. 마치 아르마딜로처럼 둥근 형상의 흰색 장갑을 두르고 있는 전술소체가 흄이 있는 방향으로 오른손을 뻗고 있었다. 오른손 위에는 사출구가 달려 있는 장치가 장착되어 있다. 경고를 하는 것보다 사격이 더 빠르다는 판단했다.


[화기관제 보조 시스템 연동. 자세 교정.]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지도 못했다. 지지대에 연결된 밧줄에 꽉 묶여 당겨진 것처럼 오른 팔꿈치가 옆구리에 착 달라붙어 고정됐다.


[조준 보정. 반동 제어.]


라비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흄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를 노려.] 그가 말했다. [빨간 띠 속에 시각 렌즈가 숨겨져 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다. [확인.] 두두두! 돌격소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짧은 시간 동안 이어진 총성이 끝나자 베즈마는 흄을 보호하기 위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상체를 일으켰다. 위쪽을 살펴 전술소체가 침묵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흄의 옆으로 비켜섰다.


“안전합니다.”

“베즈마, 소대장과 연락이 되나?”

“저희 소대는 전술인형 쇼콜라가 통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단독 통신은 불가합니다.”

“잘됐군.”


“예?”

“적대국 비블라인의 공격을 확인했다. 현 시간부로 전술인형 베즈마를 내 소대로 인수하겠다.”


베즈마는 실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전술인형은 인간이 아니다. 위에서 까라면 까는 게 군대라고는 하지만, 인간과 전술인형의 명령 체계는 다르다. 군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는 이상 그런 허가가 내려질 리가 없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


[모델명 VEFI-111, 베즈마. 소대 네트워크 접속을 환영합니다.]

“말, 말도 안 돼!”


롯의 재기동을 다시 한 번 시도한 뒤 린카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던 라비가 킥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이, 환영해. 너도 당했구나?”


어안이 막혀 소리가 나가지 않는다는 표현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베즈마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정식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딥마인드가 해킹을 당한 것도 아니다. 군 사령부에서 인증된 정식 명령이었다. 그녀의 상관은 더 이상 지엔 소위가 아니다.


“지엔 소위를 만날 때까지다.”

“...약속하시는 겁니까?”


흄은 이들이 자신을 쫓아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제3군단 특무부 소속. 다른 기업의 여러 연구소에서 그의 머리 속에 설치되어 있는 인공지능을 탐낸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들 입으로 말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기회만 온다면 주저 않고 닥터 D. D.의 독자적인 기술을 훔쳐 내려고 한다.


“약속하지. 가지고 있는 무장은?”

“특수무장 니들 1개입니다.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라비에르, 탄약은 얼마나 있나?”

“방금 걸로 다 소진됐어.”


“망했군. 재정비할 수 있는 장소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지?”

“바로 근처야. 하지만 애들이 안 깨어나는데?”

“하나씩 둘러메도록 하지.”

“할 수 있겠어?”


“민수용 인형이라면 가능하다. ...어느 쪽이 더 가볍지?”

“...얘가 더 가벼울 거야. 아이돌 지망생이거든. 잠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모두 입을 다물고 청각에 집중한다. 데구르르르, 마치 유리가 깔린 책상 위에서 머그잔을 굴리는 듯한 소리였다. 적어도 하나가 아니다. 소리는 공장에서 사흘 밤낮 가동되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이어진다.


“흄 소대장님.”


라비의 도움을 받아 린카를 어깨에 올려 놓은 흄이 자신을 쳐다보자, 베즈마는 팔에 수납했던 니들을 꺼내 소매와 연결했다. 그리고 전류를 흘려보냈다. 니들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전술소체 3기가 뒤편에서 이쪽으로 접근 중입니다. 저는 준비됐습니다.”

“안 돼. 같이 후퇴한다.”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지금 전투가 가능한 건 너뿐이다. 여기서 방패로 소모하면 뒷일을 감당할 카드가 없다.”

“알겠습니다.”

“결정됐어? 이쪽이야, 빨리 오지 않으면... 지금처럼 뛰어야 할 거야!”


그들의 뒤쪽 골목길 코너에서 하얀 구체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와 모습을 드러냈다.





[2호가 무리에게. 목표를 발견했으나 전술소체 1기를 손실했다. 방탄 장갑을 뚫은 걸로 보아 철갑탄을 지니고 있다. 현재 추격 모드로 녀석들을 쫓고 있다.]

[수신 완료. 리더가 2호에게. 4호가 투입된 D 지점으로 몰아넣는 게 가능한가?]

[골목길이 외길이라 앞질러 방향을 강제하기가 어렵다.]


[리더가 3호에게. 지원이 가능한가?]

[3호가 리더에게. 여기 골목길은 엿 같다. 폭이 좁고 꺾이는 부분과 계단이 지나치게 많다. 2호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D-2 지점에서 매복이 더 빠르다.]


[4호가 리더에게.]

[수신 양호. 말하라.]

[무리어미 2호의 발사체 기능 고장으로 전술소체 1기가 엉뚱한 곳으로 투입됐다. 작전은 3기로 수행하겠다.]


[알겠다. 3호와 4호는 D-2 지점에서 합류하여 매복하라. 2호는 그대로 아슬아슬하게 목표의 속도를 현행으로 조절하라. 내가 건물을 타고 이동해 옆을 치겠다.]





한자리에 모인 4개의 하얀 구체가 가까운 건물 쪽으로 질서정연하게 굴러간다.


하얀 늑대 리더는 각 전술소체의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구체 양옆에서 손바닥 크기만 한 붉은색 원이 나타나자 규칙적인 리듬으로 위잉- 위잉- 위잉- 소리가 울린다. 예열이 끝나자 구체들이 빠른 속도로 벽면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리더가 2호에게. C-3, C-4 지점으로 앞지르겠다. 속도를 유지하라.]

[수신 양호. 알겠다.]


방향과 거리를 파악한 하얀 늑대 리더는 건물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도를 올렸다. 완충 장비 없이도 고공 투하가 가능한 침투형 전술소체다. 삼각형 모양의 머리 속 깊숙한 곳에 설치된 코어만 무사하다면 내장된 나노봇으로 프레임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 정도는 얼마든지 수복할 수 있다.


구체가 옥상까지 올라가면 지정된 방향으로 쭉 뻗어 나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을 뛰어 건너는 재주는 없으나 추락과 손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꾸준함이 있다. 쿵, 쾅, 쿵, 쾅, 바닥까지 떨어진 구체는 다시 건물을 오르고, 다음 건물 옥상으로 건너간 구체는 속도를 더욱 높여 골목길 담장 위를 뛰어넘는다. 이 방법을 잘 쓰지 않은 건, 시끄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시선을 끌기 쉬웠고, 바닥에 바싹 붙어 조용히 굴러가는 이들의 매복을 돕기에 적절하다.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어째서 곧장 돌진하지 않는 거지?’


침투형 전술소체가 뒤쫓아오지 못할 만큼의 속도가 아니다. 평소에 체력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일반인이 달리는 것보다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래 봐야 부상병을 짊어지고 뛰는 병사가 빨라야 얼마나 빠르겠는가. 지칠 줄 모르는 전술소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토끼와 거북이의 비교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장 접근을 하지 않는다. 세 번째 코너에서 거의 따라잡혔을 때, 베즈마가 매서운 공격으로 가장 앞서 굴러오던 전술소체의 방탄 장갑을 꿰뚫어 버렸다. 그 이후로 미적거리는 듯했지만, 그 한 번의 공격으로 이쪽이 가진 카드는 모두 보여 준 셈이었다.


라비는 저들의 속도를 어떻게든 늦추기 위해 최대한 코너가 많은 골목길을 이용했다. 때로는 계단 난간에서 다른 골목길로 뛰어내리기도 했고, 베즈마가 시간을 끄는 동안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기도 했다.

흄은 무릎이 부스러져 가루가 될 것만 같았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쏟아지는 땀이 턱으로 흘러 고이는 걸 닦아낼 힘조차 없어질 무렵, 손가락 두 개가 보였다. 20미터 정도 남았다는 라비의 수신호를 확인했을 때 고무 망치로 벽을 강하게 두들기는 듯한 층간소음이 담장 너머에서 밀려왔다. 라비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개 같네 진짜. 저건 또 뭐야.”


건물 벽에 달라붙어 위아래로, 마치 개미가 벽을 타고 부지런히 기어가는 것처럼 거리를 가로질러 온다.


‘왜 굳이 저렇게? 일부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뒤쪽에서 아슬아슬하게 모습만 보이면서 박자를 조절하는 행동과 미친놈처럼 소리를 내며 자신을 과시하고 있는 구체들.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라비에르, 이 앞쪽에 매복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길로 빠져나가야 한다.”

“어디로 가든 지금 상태로는 저놈들을 따돌릴 수 없을 거 같은데? 그냥 항복하는 건 어때?”

“상대에게 뭘 요구할 수 있지?”

“어?”


자신의 헛소리를 담담히 받아주는 모습에 라비는 오히려 당황했다.


“항복은 목숨과 자유를 대가로 요구할 게 있을 때 하는 거다. 그것도 상대가 요구를 들어줄 때의 얘기지. 저들이 나를 쫓아왔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요구할 수 있는 게 없다.”

“저기, 곧 죽을 거 같은 얼굴로 진지한 얘기는 하지 말자. 거기 아가씨, 여기에 전기 좀 보내 주겠어요?”


라비가 땅바닥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바닥에?”

“응.”

“바닥에도 숨겨진 길이 있다고? 그럼 바닥으로 사라졌던 건가?”

“설계에도 나오지 않는 기밀 중 기밀이야. 인간이 아래에 천 쪼가리 하나만 두르고 다녔던 시절에 만든 통로라던대.”


“여긴 성벽 도시니까, 가능한 얘기군. 아래는 확실히 안전한가?”

“달 표면은 아니니까 안심해. 적어도 사람을 잡아먹는 커다란 쥐 같은 건 없어.”





[2호가 리더에게. 목표가 사라졌다. 그쪽에서는 보이는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길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면 담을 넘어갔을 가능성은 없다. 이쪽에서 계속 주시 중이었으니 그 주변에 있어야 한다. 위장막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벽을 훑으며 수색하라.]


[4호가 리더에게.]

[수신 양호. 말하라.]


[무리에서 낙오돼 방치했던 전술소체 1기의 청각 센서에서 갑자기 여러 소리들이 감지됐다. 소리가 동굴처럼 울려서 전달되고 있다. 위치 정보를 공유하겠다.]

[하늘이 돕는군. 알겠다. 소리를 역추적하라. 리더가 2호에게. 목표가 지하로 갔을 가능성이 생겼다. 흔적이 끊긴 곳 근처 바닥을 철저히 조사하라.]


작가의말

이번 주는 본업으로 여러가지로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여하튼, 이번 주는 여기까지입니다.
날씨가 선선해졌습니다.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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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6. 혼자만의 전쟁 (6) 20.11.21 14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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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2-6. 혼자만의 전쟁 (3) 20.10.31 12 0 19쪽
34 2-6. 혼자만의 전쟁 (2) 20.10.24 49 0 20쪽
33 2-6. 혼자만의 전쟁 (1) 20.10.17 14 1 20쪽
32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5) 20.10.10 14 1 21쪽
31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4) 20.10.03 15 0 23쪽
30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3) 20.09.26 13 1 19쪽
»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2) 20.09.19 17 0 19쪽
28 월간 BB 소대 - 인류는 질병 면역을 꿈꾸는가 20.09.13 13 0 11쪽
27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1) 20.09.12 12 0 16쪽
26 2-4. 가장 깊고, 가장 높고 (2) 20.09.06 14 0 11쪽
25 2-4. 가장 깊고, 가장 높고 (1) 20.09.05 15 0 13쪽
24 2-3. 술래잡기 (2) 20.08.29 20 0 23쪽
23 2-3. 술래잡기 (1) 20.08.22 23 0 18쪽
22 2-2. 닥터 마고스 (1) 20.08.15 23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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