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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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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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4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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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3쪽

'고치' 20.3

DUMMY

“그래.” 내가 말했다. “달리 가야 할 곳이 있어서 피하려던 중이었지.”


“마음이 아프네, 테일러. 서로 이야기한 지도 오래됐잖아. 그래도 예전에 친구였는데, 기억 못 하는 거야?”


“기억하지.” 나는 대답했다.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물러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에 남았던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며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거리로 미루어 볼 때 끼어들어서 날 도울 것 같지는 않았다. 탓할 수는 없었다. 지난 몇 달간의 브록턴 베이는 영웅이 오래 살아남는 곳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도 신중하게 위험을 피해 다닌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반면 엠마의 친구들은 달랐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 엠마를 심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그들도 끼어들지는 않았다. 여기서 선봉은 엠마였다. 그녀는 일을 벌일 생각이 가득해 보였고 이 자리의 다른 모든 사람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었다.


경비원들은 주변 사람들보다 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두세 명 정도였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오히려 엠마의 편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주먹을 날리거나 언젠가 소피아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귀를 반쯤 찢어놓는다면 제지당하는 것은 내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랬다간 시간이 더욱 지체될 것이었다.


“스타일을 바꿨니? 확실히 뭘 입어도 어울리네.”


은근하게 빈정대는 말투였다. 그리고 무언가 기억이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과거의 어떤 일과 관련이 있는 말 같았다. 나는 대충 흘려넘겼다. 굳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애쓴다.” 내가 말했다.


“정말 까칠하네.” 엠마가 말했다. “새로 이미지메이킹이라도 하는 거야? 버릇없는 컨셉으로 주위에 벽이라도 치려고? 애쓰는 건 너겠지.”


표정만 봐도 그녀가 일부러 역설적인 말을 하며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한테 던지는 말이 전부 자신한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작게든 크게든, 일단 이기고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내내 그녀는 내가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수천수만 마리의 벌레들, 거미, 지렁이, 지네, 달팽이. 나는 주먹질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듯이 녀석들을 억제하고 있었다.


해를 입히는 건 사실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금 이 순간, 몇 년 만에 그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 이 순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벌레들이 목구멍으로 파고드는 순간 엠마가 지을 표정을 보고 싶었고,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서서히 깨닫는 그 순간을 보고 싶었다.


간단한 동작 하나만으로 내가 지금까지 몇 년에 걸쳐 느낀 모든 공포와 분노와 역겨움의 일부를 체험시켜 줄 수 있었다. 더 강한 존재 앞에서의 절망과 무력감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녀가 미처 가리지 못한 입속으로 벌레들이 파고드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입을 막는다면 벌레들은 그사이에 콧속으로 파고들 테고, 숨을 쉬려면 벌레들을 삼키는 수밖에 없겠지. 그걸 깨닫는 순간의 표정을 보기 위해서는 주위의 벌레들을 물려야 했다. 물론 그대로 토해버릴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히어로들이 출동하기까지는 일이 분 정도가 걸릴 테니—


“지금 멍때리는 거니, 히버트? 아니면 너무 햇볕을 많이 받아서 머리가 익어버렸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렇겠지.”


“왜냐면 이젠 너 같은 게 무슨 상관이 있나 싶거든. 난 지금까지 마약상들과 깡패와 약탈자들도 상대해야 했고, 돌아다니면서 여자애들을 납치해가는 갱들도 상대해야 했어. 심지어 마네킹이 보드워크를 공격했을 때 나도 거기 있었지.”


“용감하네. 아주 여장부 나셨어.”


주변의 사람 한두 명이 심기가 불편한 듯 자세를 바꾸는 모습이 보였다. 아군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겪은 일을 깎아내리는 말에 엠마에 대한 호감도는 내려갔을 것이었다.


“관점에 깊이가 생겼지.” 내가 말했다. “사람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도 봤고,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우던 사람들도 봤어.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을 짓밟으려 드는 사람이 있었지. 본받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말을 계속했다. “굶주림에 못 이겨서 쓰레기를 주워 먹던 사람도 있었고,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살아보겠다고 도둑질을 하던 사람도 있었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아무리 많이 봐도 너보다 추한 사람은 없더라고.”


그 말에 그녀가 눈가를 좁혔다.


“지금 네가 날 모욕한 거야?”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나는 대답했다. “지금 하는 이 이야기만 해도 네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알겠어. 예쁘게 꾸미고 학교에서 인기를 끌 생각으로 가득해 보이네. 그게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천 분의 일은 될까? 이 좁쌀만 한 언덕의 꼭대기에 서 보겠다고 정말 열심히 발버둥을 치고 있구나.”


“네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이제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언덕에서도 넌 내 밑이야. 그러면 넌 뭐가 되는데?”


“엠마, 네가 아무리 어떻게든 모욕할 거리를 찾아보겠답시고 으르렁댄다고 해도 의미는 없어. 그렇게 할 때마다 서열 싸움에서 점수가 몇 점씩 올라가리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거야? 애초에 난 여기 학생도 아니야.”


“넌 중퇴생이야. 실패자라고.”


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참신한 접근법이네. 처음에는 교묘한 척을 하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대충 아무 욕이나 하면서 뭐가 통하나 시험해보는 거야? 하지만 난 정말로 아무 느낌도 안 드는데.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결국에는 너만 추해질 뿐이야.”


조금 더 시간을 끌면서 그녀가 의미 없는 모욕을 이어가길 기다린 다음에 꼬집을 걸 그랬나?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녀의 일행 한 명이 끼어들었다. “넌 누구길래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거야?”


또 다른 한 명이 끼어들었다. “자기가 똑똑한 줄 아나 봐, 이래라저래라—”


엠마가 손을 들어 올리자 여자애는 말을 멈췄다. 엠마는 날 노려보고 있었다. 비웃음과 잔인한 미소 이외의 표정을 본 게 얼마 만이더라? 게다가 이번에는 무게감이 있는 감정이었다. 그 모금 행사에서 가족과 함께 덜덜 떨던 모습과도, 쇼핑몰에서 내게 따귀를 맞았을 때 놀랐던 모습과도 달랐다.


설마 정말로 화난 건가?


몇 달 전의 테일러였다면 그 사실을 기꺼워하거나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말에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반응에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옛날에는 그렇게나 질질 짜놓고 이제와서 아무 느낌도 안 든다고? 넌 겁쟁이야, 히버트. 넌 지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센 척을 하려는 것뿐이잖아.”


“아니.” 나는 대답했다. “난 아빠랑 점심을 먹고 싶을 뿐이야. 자기위로를 하고 싶은 거라면 내가 간 다음에 혼자서 하지그래.”


어찌어찌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지금도 화는 나 있었고 그녀에게 고통을 주며 표정을 감상하고 싶다는 마음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고등학교니 세상이니 말을 하다 보니 나 자신의 그런 감정도 지금 이 상황에 비해 과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무시무시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벌레들이야말로 그 무시무시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벌레들은 내 감정에 따라 마치 맥동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떼로 내게 몰려오려다가 무의식적인 지시를 받고 다시 물러나는 움직임의 반복이었다.


아무 느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의도한 반응이 아닐 뿐.


“계속 겁쟁이처럼 도망치려고 하네, 히버트. 넌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내가 너한테? 한번 들어나 보고 싶네.”


“네가 처음부터 이런 용감한 척을 하기만 했어도 모든 게 잘 풀렸을 거야.”


“어째선지 믿기 힘드네.”


“싸울 줄 알아야 존중을 받지. 이런 짓이라도 조금 더 일찍 했다면, 매 맞은 강아지처럼 움츠러드는 대신에 똑바로 서서 장난이나 농담을 좀 받아줬다면 통했을 거야. 다시 친구 사이가 됐을 거고, 모든 게 잘 풀렸을 거야. 네가 시간을 끈 바람에 당하는 쪽이 된 거라고.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몇 가지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소피아 말이네. 걔가 날 끼워줬을 거라는 거야?”


“그것도 있지.”


이제 화제는 소피아, 그러니까 섀도우 스토커였다. 엠마는 그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도 알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활용할 수는 있었다.


“그 애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나 보네. 넌 정신이 나갔니? 그 짓거리들을 해 놓고도 내가 다시 너랑 친구를 하려고 할 것 같아?”


“정말 지금 네 위치가 더 낫다고 생각해?”


“지금 말이야? 당연하지. 시발, 지금이 아니라 그때로 돌아가서 선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조금 전에는 널 보고 한심하다고 했었지만, 소피아는 너보다 더 한심한 인간이야. 폭력과 폭언 없이는 삶을 견딜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한테 생떼나 부리던 불쌍한 정신병자였지. 장점이라고는 얼굴이 예쁘다는 것과 마침 네가 걔를 우러러볼 정도로 멍청했다는 것밖에 없었어. 그것만 해도 웃기는 일이지.”


“말조심해.” 그녀가 말했다.


“사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결국에 소피아는 널 자기 수준까지 끌어내렸고, 네가 열심히 노력해준 덕분에 소피아는 그냥 정신 나간 깡패가 아니라 인기 많은 정신 나간 깡패가 될 수 있었지.”


그녀의 친구 중 하나가 반박하려는 듯 앞으로 걸어 나왔지만 엠마가 그녀를 밀쳐냈다.


“그만!” 경비 하나가 외쳤다. “손 떼라!”


말다툼이 이 지경까지 가는 건 그냥 내버려 뒀으면서, 밀치는 건 안 된다고? 뭐, 상관없었다.


엠마는 친구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


“됐어.” 여자애가 중얼댔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엠마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감이 가득한 특유의 심술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갈 데까지 갔으면 좋겠어, 테일러?”


“난 점심을 아빠랑 같이 먹고 싶을 뿐이야. 이미 말했을 텐데. 애초에 지난 몇 년 내내 갈 데까지 가지 않았나?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걸 가지고 날 조롱한 적도 있으면서 뭘 어떻게 더 나가겠다고. 총이라도 뽑을 생각인가?”


“물론 더 나갈 수 있지.” 분노는 사라지고, 이제는 냉정하고 침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한마디 한마디를 즐기듯이 말했다. “네 엄마는 네가 죽인 거야.”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기억나? 전화를 받았을 때 우리 집에 있었잖아. 원래는 네가 네 엄마한테 전화했어야 하는 거였지. 사고 직전에 너한테 전화했던 거야.”


“설득력이 없네, 엠마. 난 그렇게 생각 못 하겠고, 내가 볼 때는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게 다가 아닌걸. 네 아빠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네 아빠는 널 탓했어. 지금도 탓하고 있지. 기억나? 갑자기 뭔가가 끊어지기라도 한 듯이 널 버려두기 시작했던 게? 네 아빠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머물러도 되냐면서 우리 집에 찾아왔었잖아.”


기억났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순간,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우리 아빠가 대니 아저씨와 이야기했을 때 네 아빠가 그랬어. 네 탓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고. 네가 전화를 하지 않는 바람에 걱정한 네 엄마가 차를 탔던 거라면서 널 원망했어.”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내가 모르는 부분에 끼워 넣을 수 있는 정보였다.


엠마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그녀의 말은 내 생각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사이가 멀어졌던 것 기억나? 어쩌면 지금도 멀어진 채일지도 모르지. 네 아빠는 아마 널 사랑하긴 하겠지만, 미워하기도 할 거야. 우리 아빠한테 다 털어놨거든. 네가 연락을 하기만 했다면, 집에서 전화를 걸었을 때 받기만 했다면 아내가 아직 살아있을 거라고 했어. 멋지고 아름답고 똑똑한, 자기한테는 과분한 여자가 지금도 곁에 있을 거라고 했지. 하지만 이제는 너만 남았어. 의무감 때문에 돌봐줄 수밖에 없는 너 말이야. 아빠가 널 좋아하긴 하니?”


아빠는 날 사랑할까? 사랑할 것이었다. 좋아할까? 그건 고민해볼 여지가 있었다.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엠마의 말 때문인지, 그 시절을 떠올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학교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연장선에 있는 느낌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조용히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나 엠마의 편을 들려는 기색은 없었다. 방관자들이었다.


한편 엠마는 으스대는 태도로 날 조롱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응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태틀테일과 함께 보낸 시간이 시간인 만큼 엠마가 뭘 하는 건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약점을 찾아낸 다음, 추측을 통해 검증하기는 어려우면서도 그 자체로 파괴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초능력은 없었지만, 그 대신 우리 아빠와 그 시절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었다.


능력으로 공격할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이야말로 실행했을 것이었다. 날 괴롭히겠답시고 부모님 이야기까지 꺼내다니?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침착하게.


사실일까?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아빠와 옛날의 끔찍한 기억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이 아닌 이상 검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이 정보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무게를 갖지 못했다. 태틀테일의 정신공격에 대처하듯이 대응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 내가 말했다. “할 말은 다 한 거지? 이제 가야겠거든.”


분노는 사그라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저지른다는 게 고작 이 정도라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이제 으스대는 기색은 없었다. “아, 미안. 네가 인정이라는 게 없는 년이라는 걸 기억했어야 했는데. 신경도 안 쓰는구나.”


“네가 설득력이 없었을 뿐이야.”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네 말이 맞더라도 무슨 상관이야. 난 너보다 똑똑한 사람들도 상대해봤고, 너보다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들도 상대해봤어. 너보다 훨씬 능숙하게 사람을 조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던 적도 있지. 넌 아무것도—”


나는 말을 멈췄다.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가능성이 너무 다양했다. 특사들과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었고, 아빠일 수도 있었고, 샬롯일 수도···


나는 몸을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테일러.” 아빠가 말했다.


“네 아빠.” 내가 말했다.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니?”


“지금은 안 하고 있어요. 옛날에 같이 일하던 사람한테 전화를 받아서 잠깐 학교에 들렀어요. 지금 어디예요?”


“배 무덤이란다. 문제가 조금 생겨서 늦어졌어. 어느 학교니?”


“아르카디아요.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건 어때요? 거기···”


심어 뒀던 파리 한 마리를 통해 엠마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응 방법을 정할 시간은 한순간뿐이었고, 나는 그녀가 날 때리게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내 휴대폰을 쳐 내더니 학교 가장자리의 담벼락에 대고 나를 밀쳤다.


엠마는 아무 말도 없이 씩씩대고 있었다. 할 말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날 다시 잡아당겼다가 벽에 대고 밀쳤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힘이 센 것도, 위압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말을 할까도 생각했다. 패가 다 떨어졌구나. 이젠 욕도 다 떨어져서 남은 게 폭력밖에 없니?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경비 하나가 다가와 그녀를 붙잡아 떼어냈다.


경비는 그녀의 옷깃과 손목을 붙잡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이제 교장 선생님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이렇게 되겠지.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싸움이 날 때까지 가만히 보고 있다가 둘 다 끌고 가는 게 일인가 봐요?”


“학생들이 다치거나 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걸 막는 게 일입니다. 말싸움에 끼어드는 것까지 했다면 하루종일 뛰어다니고 있었겠죠.” 그가 말했다.


“전 여기 학생도 아닌데요.” 내가 대답했다.


“오고 가는 모습을 보니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선택하시죠. 가족분들이랑 약속이 있으시다면 지금 가셔도 되고, 같이 사무실로 가도 됩니다.”


“무슨 차이죠?” 내가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가, 엠마가 계속해서 몸부림을 치자 표정을 구겼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은 증인과 함께 사무실로 데려가는 게 원칙입니다. 학생은 아니더라도 입학할 예정이 있다면 와도 되겠죠.”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드디어 엠마가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일종의 함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 계속 일 보 전진에 이 보 후퇴였는데, 이제와서 일이 쉬워질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휴대폰을 주워서 다시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테일러?” 통화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나는 엠마와 눈을 마주쳤다. “엠마가 시비를 걸었어요. 지금 사무실로 데려가겠다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가는 게 좋겠니?”


“바쁘다면서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점심은 내일 먹는 게 어때요?”


“그러렴. 행운을 빈다.”


“네. 사랑해요.” 엠마가 떠올리게 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도 사랑한단다.” 아빠가 답했다.


나는 엠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경비가 억지로 그녀의 몸을 돌려서 학교 안으로 밀어붙일 때까지 계속해서 나를 노려보았다.


“거기 민소매 입은 학생, 머리 짧게 깎은 학생, 그리고 금발에 보라색 셔츠 입은 학생. 증인이니까 따라오세요.” 그가 지목한 사람은 엠마의 친구 하나와 밖에서 쉬고 있던 사람 두 명이었다. 후자의 두 사람 모두 브록턴 베이에 머물렀던 사람 특유의 눈빛이 있었다.


머리카락의 오른쪽 절반을 민 여자애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친구들이 가라고 손짓하자 우리를 따라왔다.


함께 사무실로 향하는 우리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엠마는 경비에게 붙잡힌 손목을 빼내고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선두에서 걸었다. 한두 번쯤 그녀는 옆으로 빠지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경비가 그녀를 살짝 밀쳐서 계속 움직이게 했다. 덕분에 학교에 들어올 때부터 사무실에 들어갈 때까지 모든 사람의 눈은 그녀를 향했다.


하웰 교장은 지각자들을 관리하는 걸 포기했는지 사무실 가장 뒤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그녀는 다른 일이 생긴 것을 오히려 반가워하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교장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고, 학생들의 소음을 막기 위해 수화기를 감싼 채 순식간에 통화를 마무리했다.


중간에 접수대가 있는 탓에 빙 돌아가야 했다. 우리가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 하웰 교장은 이미 자신의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엠마와 나는 그 앞에 앉았고, 경비와 증인 세 명은 우리 뒤에 섰다.


교장의 외모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고, 모근을 보니 머리를 염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알록달록한 블라우스와 목도리 탓인지 권위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고, 지난 몇 달간 브록턴 베이에서 지냈던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교장이 첫 한마디를 하자 그런 첫인상은 바로 깨졌다. 엄격한 목소리였다. “콜린스 씨? 30단어 이하로 요약해 주세요.”


경비가 엠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금발이 언쟁을 시작했고, 안경 쓴 쪽이 물러나려 했습니다. 금발이 떠밀고 밀치는 등의 폭력을 쓴 시점에서 끼어들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녀가 말했다. “증인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가능한 한 짧게.”


“방금 말대로예요.” 머리를 민 여자애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쟤가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이름이 엠마였던가? 네. 음, 그게, 좀 쌍년이던데.”


어째선지 초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게 어떤 함정인 건 아닐지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특사들에 정신을 조종하는 초능력은 없었다. 어쩌면 헤이븐이나 폴른에는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능력에 당하는 바람에 가만히 놔둬도 일이 어찌어찌 잘 풀리는 비현실적인 세상에 갇혀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세상이었다면 애초에 엠마가 없을 것이었다. 그렉도 그렇고.


“엠마는 잘못한 것 없어요.” 보라색 셔츠의 금발 여자애가 말했다. “과거에 얽힌 게 있어서 거기에 반응했을 뿐이라고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에요.” 교장이 말했다. “지금 당장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벅차거든요.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는데 무기가 동원된 싸움이 세 건에, 맨손 격투는 열 건이나 돼요. 지금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 세 명 중 한 명은 브록턴 베이의 최근 위기를 그대로 겪었던 이들이죠. 그중에는 상인들에 가입했던 학생도 있고, 백인우월주의 단체에 가입했던 학생도 있고, 현재 브록턴 베이의 뒷세계의 지배자들이 지배하는 영역에 머물렀거나 지금도 머무르고 있는 학생들도 있어요. 갈등은 피할 수 없고, 학생들 사이에는 PTSD가 만연하고, 생존자의 사고방식에서 아직 학생의 사고방식으로 넘어오지 못한 학생도 사방에 널려 있죠.”


그녀는 팔꿈치를 책상에 걸쳤다.


“어쩔 수 없어요. 최근 사건들을 생각한다면 그런 문제들은 인생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죠. 여러분을—” 그녀는 말을 멈추고는 나와 머리를 민 여자애와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남자애를 바라보았다. “—다른 학생들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거예요. 겪은 일들이 있으니.”


“그건 불공평하잖아요.” 엠마가 말했다.


“엠마 양,” 교장이 말했다. “당신이 오늘 한 행동은 엄청나게 멍청하고 위험한 행동이었어요.”


또 초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면 에키드나에게 파묻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에게 붙잡힌 채 이번에는 좋은 의미로 왜곡된 과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주위가 흐릿해지더니 사실은 이게 그 인식불능증 안개가 보여주고 있는 광경이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9인방일 수도 있었다.


하웰 교장은 말을 이어갔다. “거기 학생은 이름이 뭐죠?”


“테리요.”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남학생이 말했다.


“오늘 학교에 무기를 들고 왔나요?”


“아니요.”


“지난 몇 주 사이에 싸움에 휘말렸던 적이 있나요?”


“몇 번 있죠.”


“그래요. 학생은요?”


“쉴라에요. 그리고 무기는 가져온 게 있죠.”


쉴라는 뒷주머니에 손을 뻗더니 열쇠고리를 꺼냈다. 열쇠고리에는 금속 막대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울 수 있는 긴 막대에 가시 두 개가 달려 있었다. 너클더스터와 같은 원리의 물건이었다.


“감사합니다. 콜린스 씨에게 넘겨준다면 고맙겠네요.”


쉴라는 콜린스에게 경계 섞인 눈길을 보냈다.


“밖으로 나가도 되고요.” 하웰 교장이 제안했다.


“네.” 쉴라가 대답했다. “그렇게 하죠.”


그녀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당신은요? 이름이 뭐죠?”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대답을 했다. “테일러 히버트요.”


“무기를 가져왔나요?”


“네.” 내가 말했다.


“입구에서 순순히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콜린스가 말했다. “평범한 나이프였죠.”


“만약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쓸 생각이었나요?” 교장이 물었다.


나는 잠시 주저했다.


“그렇다고 말해도 혼나는 건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모르겠네요.” 내가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뭐죠?”


“그 질문은 취소할게요. 나이프를 쓴 적은 있나요?”


“그 나이프요? 아니요.”


“다른 나이프는 쓴 적이 있다는 말이군요?”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뭔가 문제가 터질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나요?” 교장이 다시 엠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다쳤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엠마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겠죠. 여긴 이제 당신이 알고 있던 도시가 아니고, 학생들도 당신이 알고 있던 학생들이 아니에요.”


“상관없어요.” 엠마가 말했다.


“그건 이제부터 봐야 알겠죠. 어디 컴퓨터에 입력해봅시다. 엠마··· 성이 뭐라 그랬죠?”


“반즈요.” 내가 말했다. “끝에는 E-S.”


그녀는 오른쪽에 놓인 자판을 두드렸다. “그리고 테일러··· 휴버트?”


“히버트요. E-B-E.”


그녀는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히버트요. 잠깐만 기다리면··· 젠장. 학교를 새로 지었으면 장비도 좀 새 걸로 줄 것이지.”


그녀는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컴퓨터가 다시 켜지기까지 일 분 정도가 걸렸다.


긴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화면이 다시 켜졌다.


“흠.” 그녀가 중얼댔다.


“뭔가 나왔습니까?” 콜린스가 물었다.


“과거에 사건이 몇 개 있었나 보군요. 윈슬로우 고등학교에서 온 이메일이 있어요. 종말초래자 습격 전의 내용인데, 엠마 반즈 양과 소피아 헤스라는 학생이 서로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 기록이 있네요. 테일러 양을 상습적이고 계획적으로 괴롭혔다는 내용으로 보이는데.”


나는 엠마를 힐끗 보았다. 얼굴이 창백했다.


소피아가 마지막으로 엿이라도 먹이고 간 건가? 알고 보면 친구도 아니었던 모양이네.


교장은 나와 눈을 맞췄다. “정식으로 고발할 건가요?”


너무나도 예상 밖의 말이라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고 왼편에는 엠마가 있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일단 바랐던 건 전부 이뤄진 상태였다. 소소한 승리를 만끽하고, 엠마의 모래성이 무너지는 걸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정식으로 고발까지 하고, 정의가 실현되는 것까지 볼 수 있다고?


“아니요.” 내가 말했다. 엠마는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보았다. 멀미가 나진 않았을까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왜죠?” 하웰 교장이 물었다.


슈퍼빌런이라서 주목받으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어차피 아버지가 변호사라서 제대로 통하지도 않을 테고···.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요.” 나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한 대답을 대충 지어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영역 일 때문에 바쁜데 이런 데까지 시간을 쓸 수는 없어. 어디까지 엮여 들어갈지 모를 일이기도 하고.


“당신의 동의 없이도 학교 측에서는 대책을 취할 수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상관없어요. 전 빨리 마무리를 짓고 싶을 뿐이니까.”


“그렇군요. 엠마 양? 우리는 9월에 다시 보도록 합시다.”


“9월이요?”


“지금 시행되고 있는 여름 수업은 권리가 아니라 특혜거든요. 물론 엠마 양도 짧은 기간 사이에 집을 두 번이나 옮겨 다니느라 힘들긴 했겠지만, 그 이상의 일을 수도 없이 겪은 학생들과 똑같은 관대한 처사를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엠마도 나만큼이나 놀랐을 게 분명했다.


“10학년 수업을 어디서부터 듣게 될지, 그리고 어디서 듣게 될지는 돌아오면 그때 이야기하도록 하죠. 일단 이메일과 과거 기록을 열람해보고···”


그녀는 자판을 몇 번 두드리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까지 말했었죠? 아, 그렇지. 테일러 양이 이곳에서 수업을 듣게 될지도 모르는 데다가, 지금 보이는 기본적인 내용만 해도 꽤 심각하군요. 어쩌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지 못한 일일 수도 있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저희 아빠는 변호사라고요. 이런 걸 그냥 두고 볼 것 같아요?”


“그럼 앞으로도 많이 이야기하게 되겠군요. 콜린스 씨? 엠마 양을 밖으로 데려다주시죠. 저는 히버트 양과 이야기하고 싶으니.”


“네.”


환각은 아닌 것 같았다. 함정인가? 어코드의 심리전인가? 아니면 교장이 특사라서 내 환심을 사려는 건가? 폴른이나 티스의 모든 능력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혹시 그쪽에 변신 능력자가 있나? 아니면 다른 가능성도 있을까?


“충분한가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뭐라고요?”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인가요? 언더사이더로서의 정체가 발각될까 봐 자제했던 거라면, 제가 책임지고 비밀을 지켜 드리죠.”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특별 취급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정체가 뭐죠?”


“어쩌다 보니 너무 깊이 휘말려버린 교감 선생일 뿐이랍니다.” 그녀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직접 경험한 건 아니지만, 이··· 계속되는 재난의 여파는 저한테까지 닥쳐왔죠. 제 전임자는 어떻게든 살아남았어요. 종말초래자 습격에서도 살아남았고, 9인방이 왔을 때도 살아남았고, 안개가 퍼졌을 때도 살아남았고, 도시가 영토 다툼에 휘말렸을 때도 살아남았죠. 그렇게 잘 살아남아 놓고서는 맨 마지막에 드디어 상황이 조금 나아지나 싶으니까 적응을 못 했나 봐요. 싸움에 휘말려서 머리를 맞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색전증으로 죽었죠.”


“정말 유감이네요.”


“17년을 함께 일했어요. 친남매 같은 사이였죠. 저는 평화를 지키겠다고 맹세했고, 그러자 누군가가 명부를 전해줬어요. 당신의 이름도 적혀 있는 명부였죠. 그 명부에 따라 특정 학생을 지지하고 특정 학생을 감시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이론적으로, 마음만 먹는다면.”


태틀테일이 한 짓이었군.


“제가 그런 특별한 학생이라는 건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겠지만—”


“물론이죠.”


“—왜 그걸 받아들였죠?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건 뭔데요?”


“평화죠. 아무리 그 과정이 지저분하더라도, 평화는 평화에요. 저는 이곳의 재난 때문에 좋은 친구 한 사람을 잃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잃지 않을 겁니다. 제 학생이라면 더더욱 잃을 수 없죠.”


왜 말한 걸까?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이건 정의의 왜곡이었다.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왜곡되어 있다 하더라도 왜곡은 왜곡이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해주세요.” 내가 말했다.


“그렇게 하죠.”


완전히 믿기는 힘든 말이었다. 태틀테일의 지배력을 다지고 태틀테일에게 갱 단원들의 정보를 넘기며 환심을 사려는 사람이라면, 완전히 중립적으로 행동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이긴 셈이었지만, 진상을 알고 나니 정의구현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갈게요.” 내가 말했다.


“엠마 양의 정학 절차를 위해 필요한 서류가 좀 있어요. 학생인가요?”


“아니요.”


“학생이 될 예정인가요?”


“아니요.”


“그럼 방문자 신분으로 쓰도록 하죠. 일단 컴퓨터를 다시 켜서 서류를 인쇄할게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한 장이면 돼요.”


나는 뭔가 구실을 대고 빠져나갈 생각이었지만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는 입 주위를 감쌌다. “앞에서 기다리세요. 사무원이 갖다 줄 거예요.”


통화에 끼어들지 않고서는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엠마도 사무실 앞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녀 옆에는 콜린스가 서 있었다. 사무원을 통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거나, 그러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일 것이었다.


나는 방 반대쪽에 섰다.


기분이 멍했고, 조금 환멸감이 들었다. 이 시스템이라는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가 사실은 본질적인 부분까지 부패해 있기 때문이었다. 엠마와 싸우면서 차올랐던 분노와 흥분이 아직 남아 있었고, 아드레날린의 고양감도 남아 있었다···.


안경을 고쳐 쓰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손가락이 부들거렸다. 몸이 떨려 오고 있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무슨 감정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을 전부 합치더라도 이런 반응의 절반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목이 메었고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기쁜 건가? 두려운 건가? 안도하는 건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감정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건가?


나는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나는 숨을 깊게 쉬며 능력으로 벌레들을 느끼며 마음을 비우려 해 보았다.


“히버트 양? 테일러 히버트 양?” 사무원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접수대로 향했다. 종이가 클립보드째로 내게 건네졌다.


이미 채워진 내용도 있었고 머리말에는 내용을 확인해 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름, 나이, 학년, 주소···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주소: 긴급출동 911

다른 주소: 도주로 9191


나는 교장 사무실 쪽을 바라보았다. 교장은 창문 쪽에 서서 수화기를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도망치세요’.


내가 스키터라는 걸 아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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