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_나랑 진짜 연애할래요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17화>
나랑 진짜 연애할래요
* * * * *
“저랑, 정말 연애하실 거예요?”
“뭐라고?”
“이건 꼰대의 계약서잖아요. 연애를 아무리 몰라도 시대를 아무리 몰라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그, 그래? 밤샘해서 쓴 거야.”
“그렇기도 하셨겠어요. 자, 그럼 핫한 제가 아주 핫하게 쓴 계약내용을 보실까요? 우린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고 가짜연애를 하는 거니까요.”
“그.. 그래... 가짜..... 그래, 가짜지. 가짜연애.”
“하하, 싫어요, 가짜연애?”
“설마.”
“저도 안 돼요. 제 나이 이제 꽃다운 스물넷이에요. 아직 결혼은 노! 노노!”
“알았어. 자, 그럼 벼리의 가. 짜. 연애계약서를 볼까?”
벼리도 준비해둔 것이 있었다.
벼리는 아이패드를 꺼냈다.
“종이계약서가 뭐예요. 꼰대처럼. 이렇게 스마트하게!”
“알았어, 날 너무 꼰대 취급하지 마.”
재인은 벼리의 이런 말들이 싫지 않았다.
꼰대라고 하는 것도 싫지 않았다.
무의식으로 어떤 사고와 행동이 우러나오는 것이 나이다움일 것이다.
재인은 자라면서 어린이가 되어본 적도, 성인이 되어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나이에 맞는 생각이나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재인은 늘 어른이 되어야 했고 빈틈 없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냥 그런 어른이어야 했다.
벼리는 재인에게 꼰대라고 말했다.
꼰대는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이나 선생님을 비하하려고 학생들이 쓰는 은어다.
재인은 자신에게 특정 지워지는 나이다움에 갑자기 뭉클해졌다.
‘바보. 정신 차려. 진짜 꼰대가 된 거야?’
벼리가 만들어온 연애계약서는 다음과 같았다.
*** 연애 위장계약서 ***
다음과 같이 연애 위장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다.
1. 당사자: 남(재인), 여(벼리)
2. 계약내용
- 위장을 들키지 않도록 비밀 유지에 최선을 다한다.
- 스킨십은 없다.(키스나 기타 등등)
※ 예외: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있을 경우, 애인이 취하는 최소한의 스킨십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 허용범위: 손잡기, 어깨에 손 올리기, 가볍게 포옹하기 등
- 애인으로 보이기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한다.
1) 핸드폰 바탕화면에 상대 사진 저장
2) 프사에 커플사진 올리기
3) 핸드폰 저장 이름: 내사랑
4) 하루 3번 안부 톡
5) SNS에 데이트 사진 올리기
※ 데이트란? (멋길, 맛집, 카페, 영화관, 놀이동산 데이트)
- 최소한의 가족놀이 참여
※ 1주 1회 주말에 가족과 식사
“하하하”
계약서를 보고 재인은 크게 웃었다.
“왜요? 우스워요? 열심히 썼는데..... 이렇게 웃을 일은 아닌데.”
재인은 한참 더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재밌어. 벼리.”
“뭐가요?”
“그런데 있잖아. 나한테 진짜 연애를 생각했냐고 하더니 본인이 혹시 진짜 연애하고 싶은 것 아냐? 이렇게 깊이 있는 연애계약서는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 아닌가?”
“허얼, 그건 아닌.”
“맘에 쏙 들어. 좋아. 칭찬하는 거야.”
“그럼?”
“그래. 연애계약서는 벼리의 것으로 하자. 대신.”
“대신?”
“이 정도는 추가해도 되지 않을까? 가벼운 스킨십이 애매해. 적어도 버드 키스 정도는 허용?”
“음흉 재인이었어요?”
“저런, 절대 아냐. 내가 얼마나 젠틀한데.”
“그리고 재인의 계약서도 작성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서브 계약서로 인정!”
“오, 인심 좋은데? 고마워. 이 배려쟁이.”
재인은 벼리의 머리를 헝클이며 쓰다듬었다.
벼리는 갑작스런 재인의 스킨십에 고개를 피했다.
"뭐얼, 이 정도는 연애의 가장 기본인데."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훅!"
"그렇다고 매번 예약을 해? 아니잖아."
재인은 다시 벼리의 머리를 헝클었다.
"아이, 머리는 왜..."
"귀여운데."
"안, 안 돼요. 이런 연애 감성. 그냥 연애 위장에 딱 맞는 정도만."
"하하, 철벽치는 거야? 조금 넉넉. 넉넉이 좋아. 알았지?
"은근슬쩍 넘어오기 안 돼요. 경고!"
"하하, 재밌어."
둘은 계약연애에 들어갔다.
둘 다 가족들에게 각자 이야기를 한 후 가족 인사를 가자고 했다.
벼리는 계약연애의 시작이 이상하게 설렜다.
‘그래, 이건 그냥 새로운 일이니까 설레는 거야.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설레잖아? 재밌는 일인 거야.’
재인과 벼리는 계약연애의 증거를 사진으로 남기기로 했다.
연애는 먼저 SNS 공표가 신빙성이 있다고 했다.
그린섬에 있는 정우의 레스토랑 랑데부에 점심을 예약해 두었다.
예약은 그린섬 일을 도와주고 있는 박 여사가 도와주었다.
박 여사는 재인의 펜트하우스 일 등 재인을 도와주고 있었다.
펜트하우스 일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같이 숙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했다.
박 여사는 벼리가 펜트하우스에 갔을 때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벼리 씨.”
유난스럽지 않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벼리는 인사를 받으며 재인의 성품과 닮은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
둘은 랑데부로 들어섰다.
정우가 음악을 준비하고 있었다.
“왔어? 벼리 씨네. 그렇잖아도 네가 예약을 했다고 해서 누구랑 식사하나 했어.”
“응, 오늘 데이트야.”
재인이 벼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벼리는 움찔, 살짝 놀랐으나 태연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데.. 데이트... ”
“데이트?”
정우는 농담으로 생각했다가 둘의 미묘한 다정함을 보고 놀라서 다시 물었다.
“정말 데이트?”
정우는 재인을 한쪽으로 잡아 끌더니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거야? 데이트라니? 주영이가 어젯밤 와서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었어.”
“주영이 왔었어?”
“주영이가 너하고 틀어지면 늘 나를 찾잖아. 내가 너희들 연애해결사도 아니고. 싸우고 나서 이런 모션은 뭐야? 왜?”
“진짜야. 벼리 씨랑 데이트. 그렇게 됐어.”
재인은 벼리의 곁으로 갔다.
“정우, 우리의 데이트를 위해 좋은 음악 부탁해.”
정우는 당황해 했다.
그러나 식당에서 연주할 시간이 되었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치는 직원이 정우를 불렀다.
함께 연주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준비가 끝났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재인, 식사하고 좀 보고 가. 도현이랑 주영이 온다고 했는데....”
식사가 나오자 벼리는 핸드폰을 열었다.
카메라를 열고 음식 사진을 먼저 찍었다.
“사진을 왜 찍어?”
“연애를 하면 이게 기본이에요."
"유난스럽긴. 기본은 무슨."
"같이 먹는 음식 사진을 찍어두면 데이트의 기억이 오래 남거든요.”
“그런게 어딨어?"
"몰랐어요? 사람이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잖아요? 상황을 시각으로 한 번 더 각인하는 과정이에요."
"각인?"
"각인요. 어떤 상황을 사진으로 각인하는 단계를 거치면 기억이, 추억이 아주 오래 간다는 거죠.”
“갖다 붙이기는. 원래 갖다 붙이는 거 좋아해?”
“미술 전공 교수님 맞아요? 사진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없으시다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이어져?”
“그리고 중요한 게 또 있어요. 뭐냐면 이게 음식의 영정사진이라는 거죠.”
“영정사진은 또 뭐야?”
“보세요. 이 음식은 이제 우리가 먹을 거잖아요. 그럼 음식이 없어지겠죠?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바로 사망이죠. 그러니까 음식이 살아있을 때의 마지막 찬란한 순간의 기록인 거예요. 그래서 이 사진은 음식의 영정사진.......”
“...........”
재인은 벼리의 이야기에 재미있게 반응하더니 사망이란 어휘가 나오면서부터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벼리는 미묘하게 그것을 느꼈다.
“하하, 재밌으라고 하는 말이에요.”
벼리는 일부러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우리 커플사진을 찍어야겠죠?”
재인은 얼굴이 어두워져서 내키지 않아 했다.
“다음에....”
벼리는 재인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안 돼요. 우리가 커플이려면 먼저 프사부터 바꿔야 하는데 우린 현재 커플사진이 없잖아요. 계약연애하지 말아요?”
“아니야..... 찍어.”
벼리는 재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셀카모드로 카메라를 위로 올리며 각도를 잡았다.
재인은 굳은 얼굴이었다.
“안 돼요. 굳은 얼굴. 웃어야죠. 안 읏어지면 이렇게 브이를 해보세요. 손을 움직이면 얼굴이 좀 자연스러워져요.”
재인은 벼리가 시키는대로 손을 올려 브이를 했다.
손가락으로 힘이 들어가자 얼굴이 조금 자연스러워졌다.
“웃어요. 활짝.”
벼리의 말은 마법처럼 재인의 얼굴을 활짝 웃게 만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한 것이었는데 웃으니 기분이 실제로 좋아졌다.
웃음치료사들이 일부러 웃는 것만으로 마음이 웃는다더니 그런 것 같았다.
재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애인으로 보이기 적극 참여니까.”
“그럼요, 애인으로 보이기!”
둘은 연인처럼 다정하게 프사를 여러 컷 찍고 있었다.
.
“재인.........”
도현과 주영이 랑데부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현은 재인과 벼리가 다정하게 사진 찍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부러 모르는 척 재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시선은 벼리에게 향해있었다.
부르는 것은 재인이었지만 벼리를 부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는 재인을 부르는 소리였다.
“재인....”
재인은 둘이 들어오자 당황했다.
옆에 있던 벼리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오빠,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한 마디 말이라도 해야지.”
주영이 큰소리를 내자 재인은 다시 작은 가슴이 되고 말았다.
애초 거부할 줄 모르던 재인이었다.
거부했던 당사자를 맞닥뜨리자 다시 쪼글거리는 심장이 된 것이었다.
재인은 자신이 거부한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고양이 앞의 쥐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재인, 주영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재인은 주영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심장이 쪼글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정이었다.
“그래, 주영이와 이야기가 있지.”
재인은 벼리를 바라봤다.
미안해 하는 눈빛을 보자 벼리는 재인이 안쓰러웠다.
자신을 두고 다른 이를 만나러 간다는데 오히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일이 있으신가 봐요. 전 괜찮아요.”
도현이 끼어 들었다.
“재인, 내가 벼리 씨와 함께 식사하고 있을게.”
“응, 그래, 그럼 벼리 씨 좀 부탁할게.”
재인은 주영과 함께 랑데부를 나갔다.
도현은 재인의 자리에 대신 앉았다.
“벼리 씨, 제가 대신이네요. 괜찮죠?”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혼자 있어야 했는데 고마워요.”
도현이 자리에 앉자 레스토랑에서는 알아서 음식을 내왔다.
도현은 어떤 자리든 요구하지 않아도 뭔가가 항상 준비되었다.
도현은 재인의 대신으로 자리에 앉았는데 너무도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도현의 자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벼리, 이 음식 먹어봐요. 이 음식 정말 맛있는데.”
“네.. 네....”
벼리는 주영과 나간 재인이 신경쓰이고 걱정되었다.
도현은 그런 벼리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그러는지 평소와 다르게 더 밝게 벼리를 대했다.
“벼리, 이거 봐요. 음식 세팅이 정말 예쁘죠.”
도현은 핸드폰을 꺼내 음식 사진을 찍었다.
“도현 씨, 이런 것도 찍어요?”
“그럼요, 이렇게 맛있게 생긴 음식은 사진을 남겨야죠."
"역시 뭘 아시네요. 사진이야말로 예쁜 음식에 대한 예의죠."
"어떤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이에요."
"좀 아쉽죠."
"난 사랑하는 존재가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하하, 그럼 우리 함께 찍어보는 것은 어때요?”
“그, 그건 좀.”
“뭐 어때요. 우린 친한 사이니까. 친한 벗으로 한 번 찍어요.”
도현은 벼리 곁으로 와서 셀카를 찍었다.
사진 속의 도현은 너무도 밝은 표정이었다.
<찰칵>
<찰칵>
도현이 사진을 몇 컷 더 찍었다.
도현은 사진을 찍으며 활짝 웃었다.
벼리도 웃어야 할 것 같았다.
벼리도 살짝 웃었다.
도현의 밝은 웃음에 비해 벼리의 웃음은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그래도 두 사람의 사진은 아름다웠다.
함께 찍은 사진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도현이 말했다.
“벼리 씨, 남자친구 없죠?”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내가 사람볼 줄을 좀 아는데, 벼리 씨는 남친이 없어요.”
“아니.. 저...”
벼리는 재인이 애인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망설여졌다.
도현이 벼리의 얼굴 가까이 왔다.
장난끼 있는 얼굴이 되었다.
“벼리 씨, 나랑 연애할래요?”
"네?"
도현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랑 진짜 연애할래요?"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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