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광전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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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도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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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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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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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용의 새끼는 사냥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DUMMY

터엉!


연습용 목검이 수수깡 부러지듯 반토막이 났다. 부러진 조각이 경쾌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서 훈련장 모래밭에 푹 박혔다.


이곳은 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이 아니라, 영주성 뒤뜰에 있는 칼라일의 개인 훈련장이었다. 아직 남들의 눈에 훈련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허!"


중년의 검술 선생이 혀를 내둘렀다. 그의 입가에 탄성 섞인 미소가 걸렸다. 초반에는 여유를 부리던 선생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빛났다.


그는 유트가 수소문해서 데려온 새 검술 선생이었다.


이름은 얀 겔머. 나이는 칼라일의 부모님뻘. 솔직히 첫인상은 살짝 실망이었다. 주정뱅이 특유의 딸기코와 푸근한 뱃살은 검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니까.


웬걸, 선생의 실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알고 보니 여러 영지를 돌면서 귀족 영식들에게 검술 교습을 해왔던 사람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고 나니 잘려서 갈 데가 없었다나.


성격은 좋아 보이는데 그닥 인복은 없었는지, 그는 급여도 변변치않고 흉흉한 소문이 도는 칼라일의 검술 선생 자리에 자청해서 온 유일한 지원자였다.


“영주님께는 안 되겠네요. 또 졌습니다.”


얀 겔머가 부서진 목검을 떨구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장난스런 태도였지만 눈에는 경외심이 어려 있었다.


"선생, 다치진 않았나?“


"멀쩡합죠."


얀 겔머가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21세기 유교 국가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였다. 나보다 연장자인데다 심지어 선생님인데, 하대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얀 겔머가 존대를 한사코 거부해서 어쩔 수 없었다.


"선생이 여태까지 가르쳤던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 보면, 내 실력이 어떤가?”


순수한 궁금증이 일어서 물었더니, 얀 겔머는 정색을 했다.


"비교요? 농담이 과하십니다요."


"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아직 칼라일과 나를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지 않아서, 가끔 턱없이 뻔뻔스러운 말이 나오기도 했다.


얀 겔머는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저는 이제까지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는 선생에게 배우는 건 줄 알았는데요. 영주님을 보니 어떤 사람은 그저 무언가를 타고나는 것 같습니다.”


“타고나?”


“용의 새끼는 사냥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뭇 짐승들을 잡아먹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주님은 검을 들었으니 검술을 하실 뿐, 그냥 싸우는 재능을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


검술 선생이 칼라일의 천재성을 극찬하자, 괜히 내가 머쓱해졌다.


그리고 ‘검을 들었으니 검술을 한다’라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검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더 나은 무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번졌다.


"아쉽기 짝이 없네요.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영주님 같은 분을 만났다면, 저도 기사의 꿈을 꿔 봤을까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지만, 아주 맘에 없는 말은 아닌지 얀 겔머의 눈은 소년처럼 빛났다.


"칭찬은 됐다. 초보자를 가르치는 것처럼, 처음부터 알려줘 봐. 한참 검술 수련을 게을리 해서 기본도 다 잊었어."


지나가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검술 선생을 구한 이유가 이거였다. 그러나 몇 번이나 기본기 교육 쪽으로 유도를 해봐도 겔머는 고개만 갸우뚱했다.


"다 알고 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잊었다니까."


"복습을 하고 싶다고 하면 되지, 별나시네요. 자,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생짜 초보처럼, 기본부터.“


나는 새 목검을 잡아 들었다. 연습용 목검이었지만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 묵직했고, 폼멜 모양까지 그럴싸하게 새겨져 있었다.


칼라일의 손에 밴 습관이 알아서 목검을 단단히 쥐었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검 손잡이를 딱 알맞게 감쌌다.


선생이 목청 좋게 외쳤다.


"머리 내려베기, 준비!“


"어?"


뭐, 내려 베기? 대충 이런 자세인가.


엉거주춤하며 어색한 자세를 취하자, 선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주님, 뭐 하십니까?"


"아."


어쩔 수 없었다. 습관이 들어 있거나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동작은 거의 완벽했고, 실제 대련도 자신 있었지만, 이론적인 건 하나도 몰랐다.


"머리 내려베기요. 내려베기.“


얀 겔머의 의아한 기색을 보니, 제국에서 검술 수련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첫날 배우는 자세쯤 되는 모양이었다.


"그게 말이야."


이걸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기억 상실이니, 영혼이 바뀌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으니. 칼라일의 예전 검술 선생을 특이한 교육철학을 가진 사람으로 모는 수밖에 없었다.


이전 선생으로부터 검술과 격투술, 유술을 골고루 배우긴 했지만, 완전히 실전 전투 위주의 수업이었고, 이론이나 체계는 거의 못 배웠다는 식으로 둘러대 봤다.


놀랍게도 얀 겔머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오히려 그렇게 가르치니 효과가 좋았군요! 저도 그렇게 해볼 것을."


아냐, 그거 아니야···.


거짓말이 너무 잘 먹혀들자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예전 검술 선생은 칼라일이 무서워서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 버렸으니, 이 영지에 다시 얼씬거릴 일은 없겠지.


선생의 깊은 오해를 뒤로 하고, 나는 어린 에스콰이어(종자)들이나 배울 법한 기초 검술 훈련부터 다시 시작했다.


진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이미 몸이 다 아는 동작이었으니, 머리로만 외우면 되었으니까.


얀 겔머는 검술 교습이라는 게 이렇게 보람찬 일인 줄은 생전 처음 알았다며, 매일 아침 들뜬 얼굴로 나를 기다렸다.


그와의 훈련은 마음이 편했다. 검술 선생은 감정을 잘 숨길 줄 몰랐다. 그가 괜찮은 실력을 갖고도 왜 자주 해고되고 여러 영지를 전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새 제자인 나를 맘에 쏙 들어하는 티를 냈다.


그러나 나에겐 훨씬 큰 과제가 남아 있었다. 내 기사단의 신뢰를 얻는 것이었다.


예전의 칼라일과 기사단은 거의 교류가 없었다. 칼라일은 광증이 도질까봐 두려워서, 검술 훈련이든 마상 훈련이든 혼자 했다. 물론 젊은 기사들과 따로 시간을 내서 어울리는 일도 없었다.


기사단을 홀대하는 분위기는 무술에 관심이 없던 선대 백작 때부터 쭉 이어져 왔다. 자연스럽게 기사단은 소외받는 조직이 되어, 힘이 빠져갔다.


영주 가족의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변경백령이면 기사단의 위세가 강한 게 정상이겠지만, 영지가 침략을 받은 지 오래되어서 기사단의 입지는 객관적으로도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형식적으로나마 기사단의 모양새가 유지된 것은, 오직 조부 때부터 있었던 기사단장 비스마르 경 덕분이었다. 그마저도 가문에 충성하는 것이지 칼라일에게 충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마디로, 칼라일과 기사들은 서로 잘 모르는, 데면데면한 사이라고 보면 정확했다.


곧 이 기사들을 이끌고 할 일이 많은데 어쩐다. 물론 영주의 명령이니 따르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랐다. 그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고꾸라뜨려야 할 놈이 하나 있었다.


'이반 듀크 경.'


나는 이를 악물고 초고속 수련을 계속했다.


작가의말

선작, 추천 너무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는 분들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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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4화. 미행자 +2 20.06.24 340 15 8쪽
44 43화. 맹약의 이행 +1 20.06.22 373 18 8쪽
43 42화.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 +1 20.06.19 405 18 8쪽
42 41화. 최선의 판단 +1 20.06.19 374 18 13쪽
41 40화. 사자의 입 속으로 +3 20.06.19 433 21 8쪽
40 39화. 정면돌파 +3 20.06.18 452 16 11쪽
39 38화. 황제의 칙사 +2 20.06.17 452 19 8쪽
38 37화. 한 수 가르쳐 줘야 +3 20.06.17 491 27 9쪽
37 36화. 절대 후회하지 않게 +1 20.06.16 494 22 10쪽
36 35화. 약속대로 +3 20.06.15 554 24 8쪽
35 34화. 사형집행자 +2 20.06.13 541 22 9쪽
34 33화. 대학살 +3 20.06.11 541 21 7쪽
33 32화. 지옥도 +3 20.06.10 587 22 7쪽
32 31화. 척후병들 +2 20.06.08 619 24 8쪽
31 30화. 승자와 패자 +4 20.06.07 637 25 8쪽
30 29화. 미녀 +5 20.06.06 671 31 7쪽
29 28화. 발자국 +3 20.06.05 662 26 7쪽
28 27화. 죽여야 할까? +3 20.06.04 700 28 7쪽
27 26화. 성공이다, 일단 +3 20.06.03 708 24 7쪽
26 25화. 출정 +4 20.06.02 759 28 12쪽
25 24화. 성장통 +3 20.05.31 782 31 11쪽
24 23화. 지하 감옥 +7 20.05.29 787 40 7쪽
23 22화. 호랑이 새끼를 키우다 +2 20.05.28 800 37 7쪽
22 21화. 죽은 사람은 뭐가 돼? +3 20.05.27 803 34 11쪽
21 20화. 가문의 악덕 +3 20.05.26 850 38 7쪽
20 19화. 창작자의 가호 +4 20.05.25 862 45 8쪽
19 18화. 껍질만 뒤집어 쓴 +4 20.05.24 889 42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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