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사랑한 사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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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무서운시간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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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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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KILLING GINGERMAN (11)

DUMMY

아그리나는 물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멍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는 동안,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몸 상태를 실감할 수 있었다.


뒤통수와 이마는 깨질 것 같고 속은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고 입 안은 쓰다 못해 매웠다.


그녀는 기침을 하며 일어나려다 자신의 발치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직선으로 뻗어 내려가는 선과 넓은 등은 그녀에게 매우 낯익은 것이었다.


“ 하슬라? ”


그러나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지스크라였다.


하슬라의 것과는 대조적인 그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원망과 슬픔, 그리고 벅차오르는 애정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깨어났소? ”


“ 제게 약을 쓰신 겁니까? ”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물을 건넸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그의 손등을 밀쳐냈다.


“ 저를 이곳에 가둬놓을 생각이시냔 말입니다. ”


아그리나는 그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촛불빛이 반사되어 어둠속의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 눈빛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지스크라에게는 없었다.


“ 자네는 언제나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지. ”


“ 그게 제 일이니까요. ”


“ 명예로운 일이야. 존경받아 마땅하지. 나도 당신의 그런 모습을 귀하게 여겨. 하지만 이젠 자네도 알았겠지. 모든 사람을 지키려 하는 게 항상 옳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걸. ”


“ 제 아버지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 우리 모두에게 벌어진 일을 말하는 거야. ”


그는 태양이 부조된 황동잔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잠시 침묵했다.


여전히 아그리나는 그를 타오르듯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이젠 하슬라를 설득할 수 없어. 당신조차도. ”


“ 폐하께서는 해사 사제에 대해서 전혀 모르십니다. ”


“ 그는 이미 사제직을 버렸어. 그게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는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건가? 아니지. 어쩌면 내가 잘못 알았던 걸지도 모르겠어. 자네 둘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당신이야말로 해사 하슬라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 같아. ”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그는 묘한 쾌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최근 들어, 이 모순된 감정에 대한 혐오감이 그를 괴롭혀왔다는 것을 그녀는 절대 모를 것이다.


“ 당신이 모든 사람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해사 하슬라는 전쟁에서 이기려고 불의 신앙까지 이용했어. 해사 하슬라와 나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저잣거리까지 퍼졌고, 어떤 사람들은 불이 노했다고 떠들고 다니기까지 해. 내 국민들은 동요하고 있어. 강력한 붉은 군대의 힘을 목격하고서도, 내가 질까봐 두려워하고 있다고. ”


“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폐하. 저를 이곳에 가둬놓은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폐하께서 후회할 말씀을 하실까 두렵습니다. ”


지스크라는 벌떡 일어났다.


“ 합리화? 그래. 그렇군. 내가 왜 자네에게 일일이 내 행동에 대해 변명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어. 나는 파토스의 유일한 태양인데 말이야. 그렇지?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데 말이야. ”


그가 풍기는 위압적인 태도에도 그녀는 눈썹 한 번 꿈틀거리지 않았다.


“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저를 가둬놓으실 겁니까? 이렇게 계속? ”


“ 반항하면 약을 먹여 재워서라도 데리고 있을 거야. ”


“ 이유가 뭡니까? ”


“ 계속 말했잖아. 당신은 나를 또 비참하게 만드는군. ”


“ 전 폐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


“ 알고 있어. ”


아그리나는 그의 상처받은 눈빛을 외면했다.


“ 사랑해달라고 해도 당신은 날 피하겠지. 그러니까 겨울까지만 옆에 있어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당신은 내게 약속한 걸 깨고 그놈에게 돌아가려고 했어. 당신이 잘못한 거야.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


“ 하. ”


허탈한 웃음 뒤에 그녀는 지스크라의 손에서 황동잔을 빼앗아 물을 들이켰다.


잔을 내리자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 제가 얼마 동안 여기에 있었던 겁니까? ”


“ 이틀. ”


“ 전쟁은요? ”


“ 이미 시작됐어. 서로 죽고 죽이고 있지. 궁금한가? ”


그는 이불로 덮인 그녀의 무릎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그녀가 잘 볼 수 있게 등불을 들어 비춰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수비대장의 보고서에 딸려 있던 그림이네. ”


붉은 물감을 주로 쓴 그 삽화는 처참했던 전투현장을 묘사하고 있었다.


아그리나는 중앙에 그려진 파토스의 병사와 독수리처럼 낙하하고 있는 잿사람을 보았다.


잿사람은 한 손으로 병사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의 목을 베고 있었다.


뻘겋게 벌어진 상처에서 솟아나는 자신의 피 때문에 병사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아그리나는 그림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지금 이곳에 하슬라가 있을 것이다.


그가 싸우고 있을 것이다.


다쳤을 수도 있고,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마음일까?


“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 해사 사제에 대해 잘 모르나 봐요. ”


그림 위로 그녀의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 이젠 정말 모르겠어요. ”


지스크라는 말없이 그녀에게 다시 잔을 건네주었다.


옛 이야기처럼, 그녀가 이 잔을 마시고 하슬라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하슬라를 생각하며 우는 그녀 앞에서 그의 마음은 산산조각 났다.


✣✣✣✣


하루 전.


하슬라는 파토스의 국경성벽을 지키는 수비군과 마주하고 있었다.


통일된 갑옷을 입은 적과는 달리 그의 군대는 기묘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베일로 감싼 샤롯의 병사들과 흰 사제복 위에 갑옷을 입은 전직 사제들, 회색 로브의 잿사람들까지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같은 편이 되어 싸워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이상한 동맹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기세는 돌이킬 수 없이 파토스 쪽으로 기울게 되어 샤롯과 아나메노의 땅, 그들의 고향이 위험해지게 될 것이므로,


서로 다른 생김새, 나이, 출신의 사람들이 한 깃발 아래, 하슬라의 곁에 모여 있는 것이다.


“ 적군이 성벽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룩스 무하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하슬라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도 준비합시다. ”


“ 네. ”


“ 지휘관님, 정말 탄을 이번 전투에 내보내지 않으실 겁니까? 아주 불만이 많아 보이는데요. ”


그녀는 하슬라가 가리키는 쪽으로 흘깃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옆에는 볼을 잔뜩 부풀린 검은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고 있었다.


“ 탄이 사람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걸 저들이 일찍 알아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일단 탄 없이 우리끼리 해 보죠. ”


“ 이번에는 쉬어야 되겠네, 재투성이야. ”


“ 내 도움이 필요할 때 질질 짜지나 마라. ”


탄은 우물거리다가 동그란 털뭉치를 퉤 뱉었다.


“ 조막만한 인간 녀석들이 생각은 아주 복잡하단 말이야. ”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


적군의 나팔 소리에 다행히 탄의 투덜거림이 멎었다.


곧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더니 붉고 검은 사람들의 물결이 성벽 밖의 메마른 땅을 메워나갔다.


태양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거리며 햇빛에 이리저리 반사되었다.


“ 대열을 갖춰라! ”


무하의 외침에 모두가 자기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샤롯의 병사들은 활과 곡도를, 잿사람들은 창을, 전직 사제들은 검과 방패를 들었다.


탄은 털로 뒤덮인 앞발을 내밀었다.


“ 보이십니까? 붉은 투구를 쓴 자가 지휘관입니다. ”


하슬라는 무하가 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군대의 맨 앞에 서서 오른쪽에 깃대를 든 병사를 대동하고 검은 말을 탄 사람이 지휘관인 것 같았다.


그런데 지휘관의 왼쪽에 흰 말을 탄 사람이 어째 낯이 익다.


하슬라는 경악하여 중얼거렸다.


“ 플레어? ”


그와 동시에 플레어도 하슬라를 발견한 것 같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녀의 얼굴은 비장해보였다.


저 비장함을 갖추고 이 전투에 나오기까지 그녀가 겪었을 괴로움을 그는 알 수 있었다.


‘ 플레어 ······ ’


하슬라는 가슴이 아팠다.


뒤늦게 알긴 했어도,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 전진! ”


지휘관의 외침에 둘은 앞으로 말을 몰았다.


양쪽 군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플레어도 하슬라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굳게 다문 입과 찌푸린 미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일렁거리는 갈색 눈.


그의 얼굴은 비장해보였다.


존재도 몰랐던 큰오빠가 등장하자마자, 지스크라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또 하나의 가족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예전의 밝게 웃던 모습을 이제 우리는 서로 절대 볼 수 없겠지.


우리는 원래 가족이었어야 했는데.


지스크라와 나처럼, 당신도.


그녀는 문득 드리워진 그림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새가 태양 주위를 돌며 날고 있었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 그 새는 자세히 보니 잿사람이었다.


파토스 병사 중에 한 명이 잿사람을 향해 활을 쐈다.


화살은 새의 날개를 스치며 빗나갔다.


그 새는 공중을 몇 바퀴 선회하더니 선뜩한 소리를 내질렀다.


우우우우우우우 -


뿔나팔 소리, 신호였다.


무하는 칼을 높이 빼들고 소리쳤다.


“ 공격하라! ”


우우우우우우우 -


사방에서 뿔나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샤롯의 병사들이 활을 높이 치켜들었다.


“ 돌격!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소리와 함께 파토스의 군대가 하슬라 쪽으로 달려왔다.


수많은 말발굽이 땅을 부셔버릴 것처럼 진동시켰다.


활시위를 힘껏 당긴 샤롯 사람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툭 하면 터져버릴 것처럼 핏줄이 솟아나온 근육은 어느 순간, 탕 - 놓친 활시위 소리와 함께 이완되었다.


“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려라! ”


파토스의 지휘관이 소리쳤다.


그들은 일제히 머리 위로 방패를 올렸다.


하늘에서 짧은 시간 머물러있던 화살은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내리꽂혔다.


“ 으아악! ”


화살에 맞은 말과 사람이 바닥을 굴렀다.


외마디 비명은 말발굽소리에 묻혀 그 주인과 함께 사라졌다.


“ 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방패를 내리지 마라! ”


다시 한 번 화살이 내리꽂혔다.


어느 것은 방패를, 어느 것은 사람의 살을 맞추었다.


하슬라는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의 뒤편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검을 볼 수 있었다.


파토스의 군대를 향해 겸이 겨누어진 순간,


“ 돌격하라! ”


하슬라와 무하가 제일 선두에서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 돌격하라! ”

“ 돌격! ”

“ 공격하라! ”


뒤이어 샤롯의 군인들과 사제들이 따라 돌진하고, 잿사람들은 창을 고쳐 잡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슬라는 이제 플레어의 투구 끈과 올려 묶은 그녀의 붉은 머리칼까지도 볼 수 있었다.


지독하게 닮은 두 쌍의 갈색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를 향해 돌격하던 이질적인 사람들의 물결이 하나로 합쳐졌다.


“ 으아아악! ”

“ 으억! ”


샤롯의 곡도에 팔이 잘려나가고, 파토스의 검에 얼굴이 베였다.


하슬라의 검과 파토스 지휘관이 휘두른 검이 서로 맞부딪히며 지나갔다.


“ 이랴! ”


하슬라는 말고삐를 잡고 검을 한 바퀴 돌려 옆에 있던 병사의 목을 베었다.


하늘로 치솟았던 머리통이 마른 풀 위에 떨어졌다.


말과 사람이 뿜어내는 뜨거운 입김이 연기처럼 시야를 가렸다.


“ 잿사람이다! ”

“ 방패 들어! ”

“ 안돼애애애애! 내려줘! ”


전쟁에 나선 잿사람들은 토끼를 사냥하는 독수리 같았다.


하늘을 선회하며 먹잇감을 찾다가 큰 덩치가 무색하게 급강하해서 한창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파토스의 병사를 낚아챘다.


그들은 발톱에 으깨지는 토끼처럼 땅에 떨어져 머리가 박살나거나, 머리가 이미 박살난 채로 땅에 떨어졌다.


병사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내던 하슬라의 옆에도 시체가 떨어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잿사람들은 미친 듯이 창을 내리꽂고, 방패 틈으로 손을 우겨넣어 적군의 기마병을 바닥으로 던져 버리고 있었다.


파토스 성벽 위에서 날아온 화살이 등에 몇 개씩 박혀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샤롯의 병사들과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흰 사제복은 붉게 물든 지 오래였고, 곡도의 날은 무뎌지고 있었다.


피는 쏟아지고, 비명소리와 쇳소리는 끊임없이 울리고, 적군과 아군과 말은 모두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땅 위에는 그들의 친구와 적이 엉망이 되어 함께 누워 있었다.


젠장.


하슬라는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 이야아아아아! ”


그때, 그의 등 뒤를 누군가가 급습했다.


하슬라는 겨우 검을 휘둘러 쳐냈지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했다.


“ 윽! ”


그는 옆구리 근육까지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상대는 덩치가 크고 힘이 무식하게 셌다.


재빨리 굴러 일어난 하슬라는 검을 단단히 쥐며 자세를 잡았다.


적은 파토스의 사제인 듯 했는데, 갑옷 안에 받쳐 입은 사제복 밑단에는 금색 선이 둘러져 있었다.


후우 -


사제의 투구 밑으로 한숨 섞인 입김이 삐져나왔다.


하슬라와 사제는 서로를 노려보다 동시에 달려들었다.


✣✣✣✣


“ 조심해! ”


고군분투하는 헤이든의 옆으로 커다란 회색 물체가 날아오더니 병사와 부딪혔다.


병사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기절한 채 저 멀리 나가 떨어졌다.


헉 - 헉 -


바닥에 쓰러져있던 헤이든은 땅을 짚고 돌진해온 물체를 바라보았다.


야힐이었다.


“ 괜찮아? ”


그는 손을 내밀어 헤이든을 일으켜 세웠다.


“ 어디 다친 데 없어? ”


“ 괜찮아. ”


헤이든은 칼에 찢기고 베여 넝마조각이 된 야힐의 로브를 말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는 함박미소를 지으며 헤이든이 놓친 검을 건넸다.


“ 안 다쳐서 다행이야. ”


“ 야힐, 제발 좀. 네 몸이나 신경 써. ”


“ 네가 위험에 처한 걸 봤는데, 나보고 그냥 지나치라고? ”


“ 아니, 대뜸 몸통박치기를 하는 놈이 어딨냐고! ”


막 적군의 심장을 뚫은 무하가 성큼성큼 걸어와 헤이든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목에는 고개를 치켜든 검은 뱀이 걸쳐져 있었다.


“ 사제님들,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닐 텐데요.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다고요. ”


“ 무하, 오른쪽! ”


탄의 새된 목소리를 들은 무하는 오른쪽으로 검을 휘둘러 달려온 병사를 베어 넘겼다.


“ 왼쪽! 왼쪽! 그 다음엔 뒤! ”


다시 전투에 임하러 달려가는 무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헤이든은 중얼거렸다.


“ 난 싸움은 질색이야. ”


“ 나도. ”


야힐은 눈을 찡긋하더니 무섭게 소리 지르며 적군에게 달려갔다.


“ 잿사람이 뛰어온다! ”

“ 더 무서워! ”


혼비백산하며 흩어지는 적군의 외침에 그제야 헤이든은 야힐이 날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을 날던 잿사람들이 꽤 많이 땅에 내려와 있었다.


싸움이 길어진 탓에 그들도 지쳐버린 것이다.


“ 하슬라, 이 자식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


헤이든은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걸음을 옮기려다가 푸르르 투레질을 하며 튀어나온 흰 말 때문에 뒤로 펄쩍 물러났다.


투구가 벗겨진 탓에 말에 탄 여자의 붉은 머리칼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헤이든을 발견하고서 등에 메고 있던 창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 오, 이런. ”


헤이든은 자신을 겨눈 날카로운 창끝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하슬라는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상대도 어깨를 들썩이는 것을 보아 점점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사제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은 머리가 아직도 징징 울린다.


적군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만큼, 아군의 숫자도 줄고 있었다.


좋지 않았다.


파토스에겐 남아있는 군사가 많았지만, 그들에겐 이 군대가 전부였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 유다 발카와 지스크라를 만나지도 못했다.


어쩌면 후퇴해야 할지도.


하슬라는 자신의 명치를 노리고 찔러오는 사제의 검을 위로 쳐냈다.


이번엔 그가 사제의 목을 노렸지만 역시 왼쪽으로 튕겨나갔다.


젠장, 이래서는 끝이 없어.


그는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서로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이 중요한 때에, 사제가 어딘가로 한눈을 팔았다.


다시없을 기회.


지금이다!


누워있던 그의 검이 번쩍 빛을 내며 땅과 수직이 되었다.


그가 공격해 들어가는 동시에, 사제가 대포를 삶아먹은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 공주님! ”


뭐?


하슬라가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그의 검이 사제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 헉! ”


사제의 외침을 들은 플레어는 야힐이 던진 창을 가까스로 피했다.


칼에 찔린 사제를 본 플레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 안 돼! ”


그녀의 절규가 전쟁터에 울려 퍼졌다.


하슬라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말도 안 돼.


으으으 -


사제는 비틀거리더니 뒤로 쓰러졌다.


안 돼. 안 돼.


하슬라는 죽어가는 사제에게 다가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적의 머리에서 투구를 벗겨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사람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투구 속에 들어있던 친숙한 얼굴을 보고 하슬라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 왜 ······ 왜 여기 계세요, 사제님. ”


[ 그러나 이제 목숨이 다했으니, 나는 왕과 왕비님을 속이고 그 두 사람을 죽인 죗값을 치르러 가오.


운명의 굴레를 바꿀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형이 동생을 죽이는 비극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죄가 저 먼 바다 끝까지 뻗어나가도 좋소. ]


- 『 해사 하주트의 유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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