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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류.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7
최근연재일 :
2020.06.02 23:59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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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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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글자수 :
147,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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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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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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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6쪽

005. 마계로

DUMMY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에고, 그루 씨처럼 일 잘하는 사람이 관두면 안 되는데···. 아무튼 4년간 고생 많았어요.”

“네. 건강 조심하세요.”


다음 날, 그루는 직장에 가서 사표를 냈다.


인사팀장은 처음엔 퇴직을 말리려 했으나 그루의 결심이 확고해보이자 곧 포기했다. 그리고 다른 직장 가서도 잘하라는 덕담을 남겼다.


마침 그루가 담당하던 구역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서 인수인계는 다행히 할 필요가 없었다.


그루는 꾸벅 인사하고 백화점을 나섰다. 그 다른 직장이 마계입니다, 라는 말은 애써 속으로 삼키고.


그동안 그루를 무던히도 힘들게 했던 상사 이재근은, 마지막까지 나와보지도 않았다.


‘하긴. 나한테 관심을 안 보인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라.’


그루는 건물 밖을 나온 뒤에도 떠나지 못하고, 잠시 서성이다가 무기백화점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이 시간에 바라보는 일터의 바깥 풍경이 생경했다.


지난 4년간 매일매일 출퇴근했던 곳을 밝은 햇살 아래에서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루가 기억하던 백화점은 항상 출근시간대나 해가 진 뒤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미묘한 감정이 수위를 높이기 전에, 그루는 재빨리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따라 하늘이 맑고 날씨가 좋아서인지 가족 단위로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헌터 흉내를 내며 뛰어가는 꼬마들. 친구가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뺏어먹는 아이들.


서리 또래로 보이는, 머리를 예쁘게 땋은 여고생이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그루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쩐지 코끝이 살짝 찡해졌다.


모든 장면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조만간 깨질 평화라는 것을,


얼마 안 있어 여동생의 얼굴을 한 마왕이 침략을 시작할 것이고, 지구는 큰 위기에 빠질 것이다.


인간 중 오직 자신만이 마왕의 계획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그루는 속이 답답해져서 목의 붕대를 가리기 위해 입은 폴라티를 무심코 잡아당겼다.


지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겨우 5년 전의 일. 헌터업계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나 전체 헌터 인구에 비해 A급 이상인 고등급 헌터는 숫자가 현저히 적었다. 아직 정복되지 못한 던전들이 수없이 많았다.


이런 상태에서 마왕이 쳐들어온다면?


승산이 없다.


심지어 자신이 마왕 후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땐 끝이다.


그래서 그루는 도저히 지구의 헌터들에게 의존할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이 가시밭길은 혼자서 걸어야 한다.


‘정신 차려라, 권그루. 할 일이 많다. 사소한 감상 따윈 넣어둬.’


어차피 지금부터 갈 길에 망설임 따윈 없다.


‘서리를 되찾고 놈에게 복수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앞만 보고 나아간다.’


그루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주먹을 꾹 쥐고 몸을 돌렸다.


돌아선 그루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





[지구의 대형마트는 이렇게 생겼군요.]

“어. 이 근처에선 여기가 제일 큰 곳이야.”


카트를 끌면서 그루가 대답했다.


혼자서 시스템과 대화해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도록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상태였다. 평범하게 전화하면서 장 보는 사람처럼 보였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의미로 관심을 끌기는 했는지 방금 지나친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게 들렸다.


“헐, 저 카트 좀 봐. 어디 피난 가나?”

“오지에 여행이라도 가나보지, 뭐.”


사람들이 떠들든 말든, 그루는 침착하게 다음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카트 위에 이미 산처럼 거대한 짐이 쌓여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짐의 내용물은 대체로 캠핑 장비나 비상식량 류였다. 날렵해 보이는 형태의 독일제 식칼이나 아웃도어용 조리 도구도 여러 개 보인다.


생각해보니 ‘오지 여행’이라는 표현이 꽤 적절했다. 그루는 지금 '마계'로 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던전 속의 이세계로.


이미 주변 정리는 대충 끝냈다. 유서도 써 뒀고.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무빙워크에 오르며 그루는 마트에 오기 전 시스템 AI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마계로 가야 한다고?!”

[네. 정확히는, 지구에 나타난 균열과 연결된 타차원이죠.]

“그럼 던전에 들어가야 해? 나 아직 헌터 등록증도 없는데?”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귀환 기능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귀환 기능?”

[<오버로드>등급의 유저는 언제든 자신이 소속된 차원으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대신, 타차원으로 이동할 때는 시스템 재화가 필요하지만요.]

“근데 나 지금 개털이잖아. 이번에 귀환하면 지구로는 못 돌아오는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은 아직 F급이시니까요. 격이 워낙 낮아서 차원 이동에 필요한 재화가 크지 않습니다. 다시 지구로 올 차비는 마계에서 모으시면 됩니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내가 쪼렙이라고 그렇게 대놓고 말하니 기분이 이상하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주인님이 F급이라는 사실을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빨리 마계로 가셔서 튜토리얼을 수행하셔야죠.]

“그래, 미안하구나. F급인 내 죄가 크다.”

[마왕이 아직 지구에 있는 사이에 얼른 마계를 정복해 주십시오. 그래야만 마왕에게 도전할 자격이 생기니까요.]

“하···. 다시 들어도 현실감이 없는 주문이지만, 일단 힘내 볼게.”


갑자기 지끈지끈 두통이 찾아오는 것 같다.


그루가 지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럼 다른 질문은 없으십니까?]

“아. 방금 궁금한 게 생겼는데.”

[뭡니까?]

“일단, 세상엔 지구 외에도 수많은 차원이 있고 그걸 관리하기 위해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는 건 대충 알겠어. 다른 차원에는 요정이나 엘프가 실존한다는 것도 어제 들었고.”

[네. 그 차원에서 온 존재들이 여러 전설이나 신화를 만들어냈지요.]

“그럼 혹시 천계도 있어? 천사들 막 날아다니는?”

[있긴 합니다만···, 천사를 직접 만날 일은 없으실 겁니다.]

“왜? 그쪽은 당연히 마왕을 싫어하지 않아? 신규 마왕 후보자가 생겼으니 아직 약할 때 죽이겠다고 칼 들고 오는 거 아닐까 싶은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간섭할 이유가 없거든요.]

“그래?”


이건 또 의외의 대답이다. 그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재 천계와 마계는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입니다. 계속 적대감을 갖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공존해 왔으니까요.]

[차원이 달라서 서로 마주칠 일도 없으니 천사들에게 마왕이란, 그냥 다른 나라의 대통령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남의 나라 일에는 웬만하면 터치 안 한다는 소리군.”

[이해하신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망할. 천계에서 마계의 힘을 좀 깎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지만 천계 입장에서 마계의 영토는 전혀 매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복전쟁도 포기한 지 오래죠.]

[무엇보다 마계는 수많은 차원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력한 곳 중 하나입니다.]

“왕도 그만큼 강하겠네?”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아······.”


회상은 그루의 한숨과 함께 막을 내렸다. 다시 생각해도 우울함만 가중되는 대화였다.


이제는 부담스러울 만큼 묵직해진 카트를 끌면서 그루는 무심코 생각했다.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침이고, 왜 늦잠을 잤냐며 서리가 등짝을 때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무리 막막해도 현실을 도피해선 안된다.


자신의 등짝을 쳐 주는 그 손맛을 다시 느끼려면, 반드시 마계를 정복하고 마왕이 되어야만 한다.


그루는 이를 악물고 다시 전투적으로 카트에 물건을 담기 시작했다.


‘후, 그럼 이제 라면이랑 통조림은 다 샀고. 다음은 뭐지?’


지금은 돈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동안 미친 듯이 일해서 돈을 번 이유도 서리랑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루는 미리 리스트에 적어둔 품목들을 먼저 담고, 필요해 보이면 뭐든지 추가로 담았다.


고가의 아웃도어용 장비는 되도록 내구성 위주로, 후기를 꼼꼼히 참고해가며 샀다.


마치 햄스터가 해바라기씨를 모으듯이, 물건을 담은 카트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렇게 오후에 시작했던 쇼핑은 한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총 322만 5900원입니다. 양이··· 좀 많은데 자택까지 배송해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각오를 했음에도 통장에 난 회생불가의 거대한 구멍에 마음이 아프다.


인벤토리에 담아 갈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배송을 부탁했다.


굳이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루가 진이 다 빠진 채로 소파에 널브러졌다. 오늘 하루에만 몇 가지 일을 처리한 건지.


그러고 보니 바빠서 종일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으. 식욕은 없지만 살려면 뭘 좀 먹어야지.’


그루는 좀비처럼 비척비척 일어나 컵라면을 뜯었다. 잠시 후 배달 올 물건들이 도착하면 받아서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전에 어떻게든 기력을 만들어놔야 했다.


“그러고 보니 시스템. 내 인벤토리 크기가 몇이랬지? 오늘 산 게 다 들어가긴 해?”


그루가 컵라면 위에 뜨거운 물을 조로록 따르며, 지친 표정으로 질문했다.


[많이 큽니다. 그 정도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충 어느 정도길래?”

[이 집이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흠, 그럼 의자랑 식탁도 넣어가야겠네. 매일 바닥에서 벌레들이랑 겸상하기는 싫으니까.”

[현명한 선택입니다. 다만, 가급적 다른 헌터들에게 인벤토리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지 마십시오.]

“그건 왜?”

[주인님은 <오버로드> 유저시기 때문에 지원되는 인벤토리 사이즈가 남들과 다릅니다. 일반 유저들의 인벤토리는 포션 정도만 겨우 들어가는 크기임을 늘 염두에 두십시오.]

“남들은 쬐깐한 물건 꺼내는데 나 혼자 식탁을 넣었다 뺐다 하면 엄청나게 눈에 띌 거란 소리지? 알았어.”


이건 생각지 못한 정보다.


무겁게 생존 가방을 추가로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희소식이었다. 역시 뭐든지 등급은 높고 볼 일이다.


시스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이에 벌써 3분이 지났다.


얼큰한 라면 냄새를 맡으니 없던 식욕이 약간 생기는 것도 같다. 그루는 잘 익은 면발을 허겁지겁 먹었다.


컵라면을 다 먹고 치우자마자, 타이밍 좋게도 마트에서 산 물건들이 도착했다.


잠시 후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물건들로 거실이 꽉 찼다.


“살 때는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진짜 많네, 이거.”

[다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식재료를 많이 구입하셨네요.]

“응. 가서 요리도 할 거니까. 부실하게 먹으면서 마계를 정복할 수 있겠어? 한국인은 밥심이지.”

[그 발언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주인님의 강인해 보이는 생존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근데 인벤토리에선 물건을 어떻게 꺼내지? 혹시 검색도 돼?”

[리스트 검색은 가능합니다. 다만 비슷한 유형의 물품까지 관리하시려면 카테고리 설정 기능을 이용하시기를 권합니다. 최초 1회만 수동으로 등록하시면 됩니다.]

“좋아, 정확히 내가 원하던 대답이야.”


그루가 거실 중앙에 털썩 주저앉아서 팔을 걷었다.


워낙 피곤한 탓에 대충 한꺼번에 물건을 처넣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인내심 있게 물품들을 카테고리 별로 하나하나 분류했다.


자신의 공간을 확실히 파악해두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그루에게 데이터화 작업은 필수였다. 뭐가 있는지는 알아야 제때제때 찾아서 쓸 것 아닌가.


처음엔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로 거실을 가득 메웠던 물건들이 점점 제 위치를 찾아가며 부피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그루는 그대로 소파 위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잠들었다.





***





아침이 왔다.


비슬비슬 일어난 그루는 밥을 든든히 먹고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거실에 섰다.


등에는 두꺼운 판을 덧댄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튼튼해 보이는 골프우산을 들고 있었다.


드디어 마계로 떠날 날이 밝은 것이다.


“우산이 생각보다 좋은 무기인 거 알아?”

[네. 리치가 길고 모양이 변형되며 간단한 방어도 가능하다는 점이, 전투 경험이 없는 초심자에게 적합하지요.]


나름 다각도로 생각해본 후에 내린 결정이다.


인벤토리에 어렵게 구한 장검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루는 그것을 잘 다룰 수 있을지 영 회의적이었다.


현재 자신의 전투력은 한없이 제로나 마찬가지.


저질 체력의 현대인이 익숙하지도 않은 칼을 들고 설치다가 실수하느니, 이 편이 여러 가지 상황에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계에도 인간처럼 생긴 주민들이 있다고 들었다. 괜히 칼 들고 다니다가 혹시라도 시비에 걸릴 수도 있지 않은가.


칼이 필요해지면 그때 꺼내 쓰면 된다.


“좋아. 들어가기 전에 설정 최적화를 하고 가는 게 좋겠지?”

[네. 어떤 설정을 변경하시겠습니까?]

“일단 정보창부터. 이거 무음으로 꺼낼 순 없어? 말을 못 하는 상황에도 쓸 수 있게.”

[안 그래도 그걸 먼저 권해드리려고 했습니다. 보통 정보창 명령어로는 수신호를 많이 쓰시는 편이죠.]

“수신호는 안 할래. 재수 없으면 손이 묶이거나 잘릴 수도 있는 거잖아.”

[주인님은 상상력이 풍부하신 건지 준비성이 철저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왼쪽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켜지는 걸로 해줘.”

[네. 그대로 설정 완료했습니다.]


비슷한 식으로 다른 명령어들도 설정해 나갔다. 그리고 바뀐 명령어를 하나하나 실행하면서 창의 위치를 점검하기까지 했다. 그루의 꼼꼼함과 치밀함에 시스템 AI가 치를 떨 정도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걸 안 했네.”

[네? 명령어 설정은 다 하셨는데요?]


시스템 AI의 질문에 그루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네 이름 말야. 언제까지 ‘시스템’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


그루의 말에 시스템 AI는 벙 찐 듯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미처 생각도 못한 부분이군요.]

“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말고. 난 마리모를 키워도 이름부터 붙여주는 인간이니까.”

[그렇군요. 마리모보다는 제가 고등한 개체라고 자신합니다.]


그루는 이상한 부분에서 우쭐대는 시스템 AI의 모습이 조금 웃기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평범한 성격의 AI는 아닌 듯하다.


“흠, 뭐가 좋을까. 춘식이? 춘배?”

[’춘’자에 무척 집착하시는군요.]

“농담이야.”


그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소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하다 보니 작명에는 꽤 익숙한 편이었다.


최대한 기억하기 쉽고 짧은 이름을 찾다가, 문득 육성 게임의 시조새라고 불리는 유명한 고전게임 중 마계와 관련된 설정의 캐릭터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하도 오래된 작품이라 기억을 짜내는데 잠시 애를 먹었지만 말이다.


“아! 마왕의 집사니까 큐브···아니지, ‘큐빅’이라고 할까?”

[유래가 있는 이름인가요?]

“훌륭한 서포터라는 뜻이야. 아주 프로페셔널하고 전통 있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군요. 춘식이보다는 훨씬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든다는 게 빈말은 아닌지, 안 그래도 또랑또랑하던 큐빅의 목소리 데시벨이 살짝 올라갔다.


“좋아. 이걸로 정말 준비 끝이네.”


그루는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던전 속의 세계. 지금부터 그 미지의 장소로 간다.


자신도 모르게 우산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루는 자신의 죽음보다도,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리고 지구 멸망보다도, 마지막까지 서리를 구하지 못한 무력한 오빠가 되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러니 절망적인 상황에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을 되새기자 겨우 호흡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루가 눈을 떴다.


드디어 결심이 섰다.


그래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 든든했다. 적어도 큐빅이 옆에서 서포트해줄 테니까.


그루는 단단한 표정으로, 발음에 주의해서, 또박또박 외쳤다.


“큐빅. 마계로 귀환한다!”


이내 맑은 목소리가 화답했다.


[좌표 설정 완료.]


[차원 도약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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