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재생력 무한의 광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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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비우스
작품등록일 :
2020.05.1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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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5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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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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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대상단의 서자(3)

DUMMY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겠군.”


“...아, 네.”


에스페랑사가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더 반복하고 나서야 이월트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그 어느 때보다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식량과 깨끗한 물을 충분히 준비했지만 결국엔 모자랐죠. 민스 밸리까지는 이럭저럭 나고 자란 야생의 곡식과 열매로 벌충할 수 있었습니다만, 벤츄라 록부터는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민스 밸리, 그곳 아주 좋지. 그럼 사향딸기 열매도 맛보았겠구만?”


“아 그, 푸른점박뿔 사향노루가 산딸기 열매를 먹고 낳는다는 석류빛 지과(地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맛보지 못했나보군. 그거 아주 보기 드문 별미인데 말야.”


“아무렴, 우리 나리님의 채근이 여간 극성맞은 게 아니니까요!”


로비스가 대신 에스페랑사의 말을 받아 투덜거렸다.


“뭐 하루라도 선생님을 찾지 못하면 있던 길이 녹아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잠도 아껴가며 설쳐댔으니, 그런 진귀한 열매를 맛볼 틈이나 있었겠습니까요!”


“로비스,”


로비스의 실쭉한 말투에 민망해진 이월트가 나무라는 투로 쏘아보았다.

허나 죽다 살아나서인지 자중키는 커녕 더 신이 나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주로 이제까지의 혹독한 강행군에 대한 한탄들이었다.

에스페랑사는 그런 로비스의 거친 입담에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르신,”


이월트가 아무래도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뒤켠을 흘금거리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그 아이를 혼자 두고 와도 괜찮은 겁니까? 어르신도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엔 무려 다섯 마리의 케이브 오크가 있었습니다. 설사 날개와 발톱이 돋쳐난다 해도 그 나약한 꼬마 혼자서 무얼 어떻게 해볼만한 상황이...”


“충분하다네.”


그러나 에스페랑사의 표정은 한결같이 잠잠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만월이니까.”


그저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말만 되풀이 할 뿐.


사각, 사각, 산허리를 빙 둘러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에 얼어붙은 나뭇잎이 부서졌다.


겨울의 옷자락조차 닿지 못할 만큼 넉넉한 초가을 무렵이건만, 이곳의 일교차는 도무지 설명도 안 될 정도였다.


덕분에 로비스는 금세 얼어붙은 오줌 가랑이를 붙잡은 채 겅중걸음을 해야만 했다.


“혹시,”


문득 두 사람을 향해 뒤돌아 본 에스페랑사가 물었다.


“불과 번개를 능히 품는 세속성을 가진 적갈색 물질이라면 무엇이 있을지, 짐작 가는 게 있나?”


“네?”


에스페랑사의 질문에 이월트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로비스는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닐세. 그냥 흘려들은 셈 치시자고. 얼마 전 깊게 새겨 들어야 할 중요한 전언을 들어서 말야...”


산행길은 완만한 행로를 펼치다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숨이 차올랐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아욱- 아욱-’ 하는 부엉이 우는 소리, 그리고 지근거리에서 들려오는 무언가의 쇳숨소리로 인해 이월트의 청각이 예민해졌다.

아까도 그런 변을 당했으니 지금이라고 한들 무사하리란 보장따윈 없었다.

허나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자기의 키만한 활대를 비끄러 맨 채, 여전히 고른 숨으로 산보하는 노인의 등.

이를 길잡이 삼아 걸으니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신장(神將)의 비호를 받는 듯 든든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아직 멀었습니까요?”


로비스가 잠든 아기라도 곁에 둔 것처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속곳까지 꽝꽝 얼어붙어 연신 허벅지에 쓸리는 게, 가랑이에 악마라도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아 미쳐버릴 지경이랍니다!”


“그 고약한 악마를 더도 말고 백 걸음만 붙들어 놓고 계셔보게.”


“어어?”


그 말이 마치 마법이라도 된 듯, 사뭇 다른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사방 어지럽게 발에 채이던 크고 작은 쏘킹 록들이 어느새 잘 깎아 만든 정연한 계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수없이 늘어선 오르막 계단의 끝에, 아롱진 그림자를 웅장히 드리운 백색 요새가 들어서 있었다.


“백후박(白厚朴)나무입니까?”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군. 과연 천금을 거느린 뱀의 아들이라 불릴만 하이.”


에스페랑사가 이월트에게 상찬한 것처럼 그 백색 요새의 요체를 이루는 구할의 뼈대가 백후박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설핏 보면 허술하지만, 나름대로의 구색은 확실히 갖춰져 있어 우습게 볼 만한 구석은 없었다.

게다가 요새 정문엔 양 가외로 솟은 망루까지 있어, 대오만 제대로 갖춘다면 공성을 해도 든든할 만한 위엄까지 자못 느껴졌다.


망루의 천정에는 발화색소로 빛을 낸 신비한 초록색 등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때문에 이월트와 로비스는 자신이 발 들인 이곳이 흡사 유계(幽界)따위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지!”


그 기이한 분위기를 한층 돋구는, 하얀 나무가면을 쓴 자가 망루 위에서 외쳤다.


“너흰 오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들였다! 그 죄를 씻기 위해 머리와 가슴, 그리고 배에 세 발의 화살을 맞아라!”


“아..?”


한 마디로 죽으란 소리였다.


“그것이 백후박 수호자의 뜻이라면 기꺼이.”


푹, 푹, 푹!

에스페랑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머리와 가슴, 배에 세 발의 화살이 연달아 꽂혔다.


“으아악!”


놀란 이월트와 로비스는 기겁을 하며 주저앉았다.


“허허,”


허나 어찌된 일인지, 에스페랑사는 아무 일 없이 말짱한 모습이었다.


“아?”


이에 의아함을 느낀 로비스가 땅 어름을 살펴보니, 잘린 화살촉에 둥글게 만 천을 덧댄 화살대들이 떨어져 있었다.


푹, 푹, 푹!

그 모조 화살들은 곧이어 각각 이월트와 로비스의 세 군데를 노려 맞췄다.

보이기와 다를 바 없이 조금 얼얼하기만 할뿐, 아무런 해를 입힐 수도 없는 만만한 화살이었다.


“뭡니까, 이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해진 이월트가 에스페랑사에게 물었다.


“백후박 요새의 입관의식일세.”


노인이 잠시 나이를 잊게 만들 법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한번 써먹었으니 다른 걸로 바꿔야겠군.”


이런 식으로 열번만 더 바꾸었다간 심장마비로 졸도할 법 했다.


“와,”


문으로 들어선 요새는 밖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양 가외로 기다랗게 늘어선 역포물선의 줄 아래로 촘촘히 드리워진 초록색 불. 그 불을 한낮의 빛으로 삼아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검정 튜닉의 가슴팍엔 모두 흰색 무명실로 짜여진 백후박 나무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다른 얼굴로 변할 수 있을 것처럼, 백후박 나무로 만들어진 새하얀 가면을 패용하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러 가지 향내를 내뿜는 거대한 솥단지들이었다.

웬만한 성인남성의 허리께 높이의 거대한 솥단지 앞에서 장정 서너명이 매달려 무언가를 휘젓고 있었는데, 그 솥 안에 든 내용물의 색이나 향이 각기 달랐다.


“아무래도 기나수를 좀 더 넣어야겠어.”


“그래야 겠지? 포션만큼 강력한 효과를 원할 테니 말야.”


“어련히 그러셔야지. 염치도 없는 것들.”


킥킥킥! 그들은 저들끼리만 알아들을 만한 말로 살갑게 웃어대고 있었다.


솥단지의 레시피를 주관하는 자, 휘젓는 자, 그리고 그 안에 든 내용물을 균일하게 나뉘어진 병 안에 나눠 담는 자까지 하여 각 단지 하나당 최소 여덟 아홉 명은 매달려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각기 다른 색으로 채워진 병의 라벨 또한 달리 이름붙여져 있었다.

해열제, 강장제, 방부제, 국부마취제, 기생충 구충제, 기침약 등.


“일단은 이것이 우리의 자금줄일세.”


에스페랑사가 말했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는 약초와 나무들을 각기 다른 적절한 비율로 달여 만들면 다양한 효능을 가진 약으로 정제할 수 있지.”


“콰커리 닥터(quackery doctor; 돌팔이 의사)!”


이월트는 그제서야 각 약품의 라벨에 새겨진 의사 가운을 입은 원숭이 로고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요새 편력기사들이나 현상금 사냥꾼들이 그렇게 즐겨찾는다는 그 싸구려...!”


그는 무심결에 내뱉은 망발에 아차싶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로 말하려던 건...”


“괜찮네.”


허나 다행히도 에스페랑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메인 마켓에서 판매되는 포션에 비하면 품질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


달그락, 달그락, 수도 없이 채워지는 약병들이 켜켜이 쌓아올린 나무 상자 더미로 적재되고 있었다.


“허나 그래서 재미를 보는 것도 사실이고.”


“과연...!”


주머니에 돈이 넘쳐나는 귀족이나 정규군, 봉신기사, 순례자 따위가 아닌 이상 여행자들에게 있어 포션이란 것은 압도적인 사치품이었다.

허나 그들 역시 도사리는 위협을 변통할 수 있을 만한 약용재가 절실하다.

탐험과 여행을 하다보면 별 것도 아닌 일이 발목을 붙잡아 비명횡사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나무뿌리를 잘못 맛보았다가 중독이 되어 죽을 수도 있고, 아까와 같이 급작스러운 몬스터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런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탐험가들에게 이 콰커리 닥터의 로우 포션(low potion) 시리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대단해...”


이월트는 이 커다란 턱을 가진 수굿한 인상의 노인에게 천부적인 사업 감각이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난 몰락귀족일세. 사실상 우리 가문은 멸문했지.”


에스페랑사의 짧은 문장 한 마디에 희미한 애증이 엿보였다.


“하지만 다시 일으켜세울 것이네. 새로이 만든 백후박의 상징과 함께.”


그는 이월트와 로비스를 자연스레 어딘가로 이끌었다.

마침내 그들이 다다른 곳은 가운데 부분이 첨탑마냥 우뚝 솟은 거대한 천막이었다.


“들어가세. 무녀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


“으음...”


영미는 긴장으로 역력한 이월트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었다.


“코끝이 두툼한 것이 재복은 있는데 처진 눈꼬리는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미간까지 채워진 눈썹도 영 찝찝해... 아이고, 얘는 또 이마에 가로주름이 왜 이렇게 많아, 나이도 어린 게! 얼레? 그에 반해 와잠(臥蠶)은 제법이군. 황금빛 와잠은 흔치 않은데 말이지. 그래, 이건 그나마 다행이야...”


“저기, 죄송하지만,”


얌전히 노파의 말만을 듣고 있던 이월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는데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관상을 보는 걸세.”


“관상..이요?”


“그래, 관상.”


에스페랑사가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듯한 낯빛으로 대신 대답했다.


“무녀님은 조상 대대로 얼굴에 담긴 평생의 운을 헤아릴 수 있는 기재를 전수 받았거든. 그래서 지금... 말하자면 자네가 나와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인지 헤아려 보는 걸세.”


“그런 걸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단지 얼굴만 보고...? ”


이치에 맞지도 않은 괴상한 신변잡기 하나로 사람의 명운을 헤아린다니.

이건 차라리 시장서 과일때깔보고 정찬상에 올리느냐 마느냐를 논하는 게 더 과학적일 듯했다.


“아니면, 아니면 어쩔 작정이십니까?”


곁에서 퍼질러 앉아 있던 로비스가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우릴, 저 바깥의 오크 먹이로 내던져 버릴 건 아니죠?”


“조용히 해라, 이 진택궁(田宅宮) 박한 못생긴 것아!”


무녀가 빼액 소리 지르며 로비스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너는 눈이 휑하고 건조하고 메마르기까지 한 것이, 이놈 옆에 붙어 수발질을 않앴더라면 어디 가서 객사하기 딱 좋은 팔자였을 게다!”


“에엑!”


로비스는 영미의 말에 칼날이라도 달린 듯 외마디 비명과 함께 머리를 싸쥐었다.

백발 터럭을 산발하여 주름까지 자글자글한 것이, 이 할망구가 내뱉은 말 족족 그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아 여간 겁살스러운 게 아니었다.


“얘, 이만 치우거라, 뜯어 볼 건 다 뜯어 봤으니.”


영미의 말에 이월트가 가깝게 들이댔던 자신의 고개를 다시 편한 위치로 되돌렸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무녀님?”


“...”


에스페랑사의 물음에 고개 숙인 영미의 얼굴이 그늘졌다.

그를 지켜보는 이월트와 로비스는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뿌-웅!


“...아?”


“아이고, 미안하다, 얘.”


케헤헤! 영미가 이 빠진 미소를 훤히 드러내며 겸연쩍게 웃었다.


“이 지랄맞은 것이 자꾸 나올락 말락 개기는 거 있지? 열받게 시리...”


관자놀이를 아릿하게 만드는 지독한 냄새에 이월트는 도무지 무어라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되겠어. 같이 일할 만한 상이 아니야.”


그 역한 냄새와 함께 치고 들어오는 영미의 단호한 목소리.


“역시 이마에 수도 없이 난 가로주름이 문제다. 반드시 실패를 거듭할 뿐 아니라 수고롭고 번잡스러운 인생을 살 팔자라고. 이런 박한 팔자를 자네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어!”


영미의 차가운 가로고갯짓에 에스페랑사를 포함한 세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재고할 것도 없다. 둘은 서로의 의기와 재복만 갉아먹게 될 거야. 완벽한 마이너스 조합이라고.”


“아이고 이런 젠장,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가며 온 길이 결국 이렇게...!”


로비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쓰러질 것처럼 온 몸을 흐느적거렸다.


“구리,”


허나 이월트는 전혀 동요치 않은 채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께서 물으셨던 그것, 불과 번개를 능히 품는 세속성을 가진 적갈색 물질, 그건 분명히 구리일 것입니다.”


“...!”


이월트의 말에 에스페랑사의 두 눈이 벌어졌다.


“불과 번개를 능히 품는 적갈색 물질의 세속성을 눈여겨 보아라, 그것의 쓰임새가 가장 귀해질 때, 그때가 비로소 네가 세상에 바로 설 기점이 될 것이니...”


“구리의 가격 상승을 주시하면 되겠군요.”


에스페랑사의 혼잣말을 이월트가 넙죽 받았다.


‘...역시 이 청년의 말이 맞아.’


과연 이월트의 말처럼, 구리는 전성과 열성이 있고 열과 전기 전도성이 뛰어난 대표적인 금속임이 틀림없었다.

듣고 보니 그것 외에 달리 생각할 게 없을 정도로 완벽히 맞아 떨어지는 추리.


“케-헤헤!”


가만 앉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영미의 입이 별안간 헤벌어졌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판단을 잘못 한 것 같구만,”


무릎을 탁 치며 명쾌한 표정으로 반가운 말을 덧붙였다.


“결국은 그 뛰어난 황금빛 와잠이 제 역할을 해내겠어. 합격이다, 이 박한 것아!”


에스페랑사와 이월트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제가 어르신을 찾아뵙게 된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어느새 별채 안에 자리를 잡은 이월트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말했다.


“하나, 제가 반군의 수감 시설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어떤 용맹한 전사가 홀로 나서서 저를 비롯한 인질들 대부분을 구출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전사에게 말했습니다. 한슐래트 가문의 일원으로서 반드시 사례하겠다고. 그리고 그 전사는 일언지하의 사양과 함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휘어진 매부리코, 왼쪽 뺨에 불에 덴 화상 자국, 그리고 턱이 아주 큰 국사범(國事犯)을 찾으라고요. 그래서 그를 도우라고요.”


“이아노...”


에스페랑사의 눈이 뜻모를 감격으로 촉촉해졌다.


“솔직히 막상 자유의 몸이 되고 나니, 전사가 제게 남겨 주었던 당부를 까맣게 잊고 살았더랬습니다. 허나 어느샌가부터 이상한 소문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웬 자가 어린 아이 머리통만한 무지막지하게 큰 마정석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그 마정석을 잘게 쪼개가며, 엄청난 자금력을 기반으로 블랙 마켓에서 막강한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고요.”


“그 장본인이 다름 아닌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군.”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이월트가 담백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어르신을 찾은 주된 이유는 사실, 전자보단 후자에 가깝습니다.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이 대륙의 상권의 판도를 바꿀 만한 이상적인 혁신을 이뤄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솔직해서 좋군.”


그 말대로였다. 오히려 구구절절한 대의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운 공탁제안.

그야말로 상인다운 화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쩔 텐가? 저자거리와 다운타운을 떠들썩하게 한 그 위명이 그저 뜬소문에 불과하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또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나면 됩니다.”


형형한 초록불 아래 홉뜨인 이월트의 황금빛 두 눈이 금화보다 더 밝게 빛났다.


“한 갈래 가능성에 천 길의 가시밭도 마다치 않는 것이 서자의 삶이니까요.”


“가시밭이라..”


에스페랑사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역시 혼자 보단 여럿이 낫겠지.”


두 사람의 굳게 잡은 손.

몰락귀족과 대상단의 열네 번째 서자의 진정한 만남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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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시선들(2) 21.05.29 197 5 17쪽
77 시선들(1) +2 21.05.29 199 6 16쪽
76 요정왕국의 분노 +6 21.05.26 219 6 14쪽
75 대망(大望) +1 21.05.23 235 7 15쪽
74 간계(奸計) +3 21.05.20 224 6 14쪽
73 숨겨진 아이 +1 21.05.20 217 4 13쪽
72 격동하는 천하(6) +3 21.05.18 235 8 15쪽
71 격동하는 천하(5) 21.05.16 226 5 13쪽
70 격동하는 천하(4) +1 21.05.14 184 7 12쪽
69 격동하는 천하(3) +2 21.05.13 194 6 16쪽
68 격동하는 천하(2) +2 21.05.11 185 8 15쪽
67 격동하는 천하(1) +3 21.05.08 190 7 14쪽
66 홍염(紅焰)의 변경백(3) +3 21.05.06 222 8 13쪽
65 홍염(紅焰)의 변경백(2) +1 21.05.04 193 7 13쪽
64 홍염(紅焰)의 변경백(1) +1 21.05.03 200 7 14쪽
63 패운의 반지 +3 21.05.02 205 8 15쪽
62 아는 사람들 +1 21.05.02 193 7 14쪽
61 정령왕의 가호 +1 21.04.29 199 8 12쪽
60 정령을 보는 눈 21.04.28 191 7 14쪽
59 전쟁의 씨앗 +1 21.04.27 200 8 11쪽
58 전사의 피 21.04.26 210 7 13쪽
57 이그제미네이터(Examinator)(5) 21.04.25 206 7 14쪽
56 이그제미네이터(Examinator)(4) 21.04.25 236 7 13쪽
55 이그제미네이터(Examinator)(3) 21.04.25 202 7 13쪽
54 이그제미네이터(Examinator)(2) +1 21.04.24 201 7 13쪽
53 이그제미네이터(Examinator)(1) +1 21.04.23 211 7 12쪽
52 크고 아름다운 괴물 +1 21.04.23 210 7 15쪽
51 난전 돌입 21.04.22 229 7 13쪽
50 드워프 21.04.22 221 7 13쪽
49 공중 잠행 21.04.21 228 7 13쪽
48 악당의 청부 21.04.21 221 5 12쪽
47 예언의 전사는 죽어야 한다 +1 21.04.20 220 6 13쪽
46 금서, 그리고 숨겨진 진실 +1 21.04.20 236 7 11쪽
45 500년의 삶 +1 21.04.20 226 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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