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부서진 얼음 (6)
엘은 의민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봤다. 그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아끼는 두 남자 모두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의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것은 다만 제 머리가 내놓은 결론을 부정하기 위함일 뿐이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파란 눈이 그를 봤고, 입이 열렸다.
“아니에요.”
의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시선이 점점, 내려갔다.
“아니에요···”
그는 이를 악물었다. 건조한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구했어요. 그때 제가··· 제가 구했어요, 분명.”
의민은 그때의 장면을 떠올렸다.
겨우겨우 전장에 도착했을 때, 자신은 그를 발견했다.
그 뒤에서는 마물이 양손을 치켜들고 있었다. 자신은 생각할 새도 없이 총알을 날렸다.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 멀쩡한 얼굴로 새하얀 눈밭을 건너와 자신에게 노호성을 질렀다.
“제가···!”
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그는 발에 힘을 주었다. 안 가려 버텼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힘이 없는 그녀의 손길에 발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엘의 손은 단단히 얼어, 몹시도 차가웠다.
의민은 멀리서부터 보이는 증거에 벌벌 떨었다. 엘은 원하는 곳에 도착하고, 아무 말 없이 한 곳을 바라보았다.
새하얗고 깨끗한 눈밭에, 작은 봉우리가 올라와 있었다.
의민은 그것이, 단순한 눈더미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엘은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서 있다, 입을 열었다.
“웬 머저리가···”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볼에 있던 한줄기 눈물을 마치 없었다는 마냥 슥 훔쳐내었다.
“어떤 머저리가 바보 짓 해서. 그럴 필요 없었는데, 그 새끼 구하다가···”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 머저리를 원망하는 건, 이제 와 아무 소용 없었다.
자신이라면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친하게 지냈던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라면 구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의민이 무덤에 가까이 갔다.
이 차가운 땅을, 그녀는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팠나. 얼마나 높이 팔을 들어, 이 얼음을 내리쳤는가.
그 위에 쌓인 눈은 생명체의 온기를 모두 앗아갈 정도로, 차가웠다. 그는 떨리는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엘은 코를 훌쩍였다. 다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이 짜증 나는 듯 거칠게 얼굴을 비볐다.
안 이러기로 했는데. 뭔 일 있어도 서로 쿨하게 보내주기로 했는데. 약속했는데. 누가 남든 빨리 정신 차려서 저 멍청한 놈 챙겨주기로 했는데.
의민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주세요.”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하고 싶은 얘기, 있으시잖아요.”
엘은 망설였다. 이전의 약속과 어긋났다. 그가 여기 있다면, 작작하고 빨리 동굴로 돌아가라고, 성질을 부렸을 것이다.
그러나 엘은 기어코 말을 뱉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예상치 못하게 토해내고 말았다.
“캡이 이전에 나 구해줬어.”
잠시 정적 후 의민이 물었다.
“어디서요?”
“테러범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떨렸다.
“테러범이 나한테 폭탄을 달았고, 스위치는 자기가 들고 있었어. 나한테 바짝 붙어서서, 머리에 총을 들이댔지.”
“언제요?”
의민 역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열두 살 때.”
엘은 피식, 웃었다.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한번 토해낸 추도는 그 끝을 모르고 계속 쏟아져 나왔다.
“나는 거리에서 빌어먹는 고아였어. 고아원에서는 도망친 지 오래였고. 할렘가 뒷골목에서 고아들끼리 무리 지어 살았지. 그러다가 재수 없게 걸린 거야.”
“그래도 같이 빌어먹던 사이라 의리는 있는지. 내 친구들이 나 잡혀가고 나서, 캡한테 의뢰를 넣었어. 나 좀 구해달라고. 웃기지. 고아 새끼들이, 누구한테 도와달라고도 못해서 용병을 고용했거든. 그것도 제일 비싸고 잘나가는 용병을.”
“그래서 캡이 나를 구해줬어. 일은 확실하게 하는 인간이니까. 고용됐으니까, 구해야지.”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애들이 낸 돈은 고작 92달러였어.”
그녀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버티고 버티던 눈물도 결국 같이 흘렀다.
“뒷골목 꼬맹이들이 돈을 모아봤자 얼마나 모았겠어? 우습지··· 우스운 일이야.”
그녀는 웃었다. 웃으며 거칠게 얼굴을 훔쳤다.
“고귀한 사람이 죽었어. 죽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가. 전쟁은 늘 그렇지. 세계가 정한 용사는 너지만 나한테는 이 아저씨가 용사님이었어. 정의의 용사님.”
그녀는 숨이 모자란 듯 헐떡거렸다.
“아저씨는 나 이거 못하게 하고 싶어 했어. 첩자 일이든, 요원 일이든. 나는 신경도 안 썼지. 여태까지 내 인생에 다른 사람은 전부 알 바 아니었으니까. 도움 준 적도 없고 도움받은 적도 없으니까. 그래도, 그 아저씨 말은 좀 들어주고 싶어서, 대신 그 아저씨가 하나 약속해달라는 거는, 그거 하나는 들어줬어. 내 이름, 안 부르게 해달라는 거.”
의민은 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 대화가,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여기서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고. 늘 부르던 이름이 있으면 죽었을 때 허전할 거 아니냐.’
‘부르던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만 들어도 사무칠 거고···’
“아저씨. 끝까지 내 이름 안 부르더라.”
그녀는 코를 훌쩍였다. 다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이 짜증 나는 듯 거칠게 얼굴을 비볐다.
“나약해 빠졌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혹시라도 가슴 철렁할 일 생길까 봐, 자기 생각만 하면서 그랬던 거야.”
그녀는 괜히 이를 악물었다. 몸을 덮치는 슬픔을 어떻게든 분노로 바꾸려 애썼다. 그녀는 조용히 주저앉아 있는 의민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너 아저씨 죽었다고 다시 땅 파고 들어갈 생각 마. 그냥, 그냥 이거 빨리 끝내고, 나랑 다시 돌아가는 거. 그것만 생각해.”
의민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엘은 그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대답해! 약속해!”
“무사히 끝내겠다고! 빨리 끝내겠다고! 네가! 끝내겠다고!”
그녀는 흐느꼈다.
“너도 고귀한 사람이잖아. 더 이상은 죽지 마. 죽지 마. 약속해···”
의민은 멍하니, 마계에 만들어진 무덤을 보았다. 무덤의 주인은 죽은 자리에 묻히겠다는 결심을 지켰다.
이 눈밭, 차가운 얼음 속에 묻힌, 유일한 인간.
그는 머리 속을 더듬었다. 오히려 당황해하며, 천천히 머리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주저앉았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머리를 뜯어낼 듯 쥐어뜯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저 무덤에 묻힌 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입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넓은 눈밭, 커다란 얼음덩이 위에 의민은 홀로 서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긴 시간이었다. 27살,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꽤나 길었다. 사람들은 저를 밀어내기 바빴고, 저는 그대로 밀려났다. 나중 가서는 밀기도 전에 먼저 나와 있었다.
물론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불행에 진심으로 아파하고, 안타까워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세상 모두와 연결점이 없었다. 누군가의 불행은 그의 측은함을 불러왔지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파도라면, 물결이라면, 그는 홀로 그것이 닿지 않는 곳에 가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의민은 헛웃음을 들이켰다.
그래,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저 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부모님은 풍족하게 살고 계셨다. 동생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 없이 더 완벽해질 가족에, 슬며시 빠져나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이곳에서는 어떻게 버텨야 하지?
상관없는 게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가 피부로 느껴졌고, 그 관계의 무게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사람과 연결고리가 생겼을 때, 그들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자신에게 들어오는 긍정적인 감정과 그 따듯함에 취해 있느라, 세상에는 크나큰 불행들도 존재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저에게 먼저 다가올 정도로 사람은 그렇게 강하면서도,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정도로 약했다.
이건 옳지 않다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미 부정함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왜 나는 정의를 쫓도록 만들어졌나. 나를 이렇게 살게 할 거면, 아예 감정을 죽여버리지.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지 말지. 따듯함도 차가움도 못 느끼게 만들어버리지. 왜, 왜 나를 이렇게 고문하나.
그는 자신의 머리와 가슴과 영혼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깨져나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겪는 진정한 상실이란 그토록 잔인했다. 그는 두려웠다. 이미 생겨버린 친구가, 그 관계가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온몸이 외쳤다. 이제는돌이킬수없어너는빠져나갈수없어
누가 말했는지 모르는 목소리가 가슴 속에서 맴돌았다. 언제 들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말은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서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악에 받친 목소리로,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누군가가 자신에게 외쳤었다.
‘너는 그들을 사랑하게 될 거야···’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다.
눈이 내는 희미한 빛만 있던 어두운 하늘 끝에, 작은 빛이 일었다. 의민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얀 날개가 먼저 눈에 보였다. 그녀는 작은 인형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나래는 곧바로 의민에게 다가와, 그를 안아주었다. 그의 머리를 품에 두고 위로하듯 쓰다듬어주었다.
아, 이래 주려고 원래 모습으로 나타났구나. 의민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몸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막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의민아, 제발, 제발···”
무너지지 마···
그녀는 차마 그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목구멍 뒤로 넘겼다. 그녀는 자신의 애원이 소용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두려웠다.
의민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안 돼요. 이렇게는 안 돼요.”
목소리가 점점 떨려왔다. 퀭한 눈에 묻힌 눈동자가 그녀를 보았다.
“항상 알고 있었어요. 어렴풋이 느껴졌어요.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다는 거. 그래도 괜찮았어요. 적당히 살았어요. 어떻게든 살았어요. 근데 이 상태면 안 돼요. 저는 못 버텨요.”
그는 말을 쏟아냈다. 눈에 물기가 고였다.
“머리가 아파요. 숨쉬기도 힘들어요. 이름도 생각이 안 나요. 이대로는 안 돼요. 이렇게는 안 돼요.”
“의민아···”
“저는 인간인가요?”
그녀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의민은 제 머리를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말했다.
“뭔가 이상해도 적당히 섞여 살만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처럼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그는 흐느꼈다.
“차라리 데려가 주세요···”
의민이 헐떡이며 말했다.
“대답해주세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 얘기해 주세요. 사나래 님은 알고 계시잖아요. 처음부터 저를 알고 계셨잖아요.”
그는 마지막 질문을 부르짖었다.
“저는 뭐죠?”
사나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녀의 눈가 역시 붉었다.
“너는···”
그녀는 손을 떨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것처럼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너는···”
눈물 한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너는··· 용사야.”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이게 너한테 독이 될 걸 알면서도. 나는, 나는 이런 대답밖에 허락되지 않았어.”
뱉은 말이 너무나 잔인했다. 가슴을 치며 자신을 탓했다. 피부를 아리게 하는 차가운 바람보다 더한 추위가 제 마음을 얼렸다.
대가인가. 이게 대가인가. 무너지는 소중한 이를 붙잡아주지 못하고, 더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내는 게, 내 역할이 되어버린 건가.
의민은 가만히 있었다. 표정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멍하니 있던 의민은 천천히, 그녀를 잡았던 손을 떨구었다.
“그렇구나.”
의민은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나는 용사니까.”
오늘 묻힌, 그 이름 모를 남자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꺼지라 그래라. 네가 그럴 이유는 하나도 없어. 너는 인간이야. 인간은 원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놈들이다.’
‘그래요?’
‘그럼, 다 그러면서 사는 거다. 인간은 그래도 돼.’
‘누가 뭐라 하면, 그놈 잡아 와라. 죽여버릴 테니까.’
그게 아니었나봐요. 내가 잘못 알고 있었어. 아니, 사실 알고 있었는데, 부정하고 싶었어요. 한순간만이라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게 잘못이었던 거야. 세계는 단 한 명의 용사만 두었는데. 단 한 명의 용사만, 요구했는데.
미움받을 용사를.
의민은 생각했다. 아,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도, 그 이유 때문이구나.
나는 용사로 사용되야 하니까. 욕심도, 욕망도 없이 태어나, 유일하게 갈망했던 사람의 온기는 주어지지도 않은 채.
이 일 년만을 위해, 세상이 준비해 놨구나.
그러면 다시는 실수하지 말아야겠다.
얌전히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사라져야겠다.
아무도 추구하지 않는 것을 내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주위의 지탄과 미움을 받으며, 동행 없이 가야 할 길을 가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버틸 수가 없으니까. 옳은 길로 갈 수 없으니까.
더는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거다. 내 속의 모든 것을 죽여야지. 반항하지 말아야지.
그게 옳으니까.
나는 용사니까.
- 작가의말
회차 올린 직후 제외하고는 딱히 선작수가 올라간적이 없는데 오늘 올리기전에 보니까 갑자기 늘어났네요. 영문을 모르겠지만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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